이 책을 다시 읽게 될 줄은 몰랐다. 국내에 <위대한 개츠비> 번역본은 무수히 많고,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작품도 이러저러한 출판사마다 내놓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피츠제럴드에 무심했다. 첫인상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을 때 이 작품에 대한 명성, 이 작품에 쏟아진 찬사에 좀처럼 동의할 수 없었다. 대체 왜? 개츠비라는 인물에도 별다른 매력을 느낄 수 없었고, 지루하기 짝이 없던 로맨스 소설 정도로 평가했다. 다시는 피츠제럴드 작품을 읽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다 소설가 김영하가 피츠제럴드를 번역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솔깃해졌다. 어쩌면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첫인상이 별로였던 이유는 번역이 이상해서는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이 줄곧 들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읽었던 <위대한 개츠비>는 결국 버렸기 때문에 어떤 출판사에서 나왔던 책인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아무래도 ‘번역이 이상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듯하다. 왜냐하면 김영하 번역본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며 피츠제럴드 작품의 매력을 뒤늦게 발견했고 그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서점에서 김영하는 고딩들의 대화를 듣다가 이 작품을 번역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고딩들이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위대한 개츠비>를 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 졸라 재미없다’ 등등 그때 김영하는 <위대한 개츠비>의 변호를 맡기로 마음먹었단다. 그때까지 나온 대부분의 <위대한 개츠비> 번역본에서 닉과 개츠비, 개츠비와 데이지가 서로 존대를 하는 등 한국말의 위계질서 때문에 그 젊은이들의 심정에 독자가 감정이입하기 무척 어려웠다는 생각이 들었다나.
실제로 내가 읽은 문학동네 세계문학의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닉과 개츠비, 개츠비와 데이지는 서로 반말을 한다. 20대의 그들답다. 닉, 개츠비, 데이지, 데이지의 남편인 톰 등 각 캐릭터의 개성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다 보니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닉과 개츠비, 데이지 인물들을 저마다 이해하기도 훨씬 쉬웠다. 예전에는 이 인물들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해야만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았는데 이번에 읽은 김영하 번역본으로는 아, 이럴 때 그 또는 그녀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싶어진다. 외면했던 피츠제럴드에 대한 관심을 살려준 옮긴이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서점에서 개츠비를 욕했던 그런 고딩 중 하나였을 내가 다시 피츠제럴드를 읽고 싶어졌으니 김영하의 ‘변호’는 조금은 성공했다고도 볼 수 있으리라.
<위대한 개츠비>는 무척 낭만적이다. 조금은 쓸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그 슬픔과 쓸쓸함은 이 작품이 한때 전부였으나 어느덧 잃어버린 세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츠비 자신은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 이미 조각나 버린 꿈이라는 것을 이 작품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알고 있기 때문에 <위대한 개츠비>를 읽다 보면 낭만적인 분위기 속에서 왠지 모를 아련한 슬픔 같은 것이 전해져 온다.
개츠비가 자신의 전부를 걸었던 그 세계, ‘데이지’로 상징되는 그 세계는 정말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던 것일까? 이 책의 제목처럼 ‘위대한’ 개츠비 보다는 이런 바보 같은 녀석, ‘바보 같은 개츠비’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이것 보라고, 자네가 그렇게 평생을 건 그 여자는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니까!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된다.
그러나 남들이 보기에 도무지 아닌 사람도 어떤 사람에게는 절대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그런 존재다. 선망하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뜨겁게 사랑한 첫사랑이었고, 가진 것이 없어서 놓아줄 수밖에 없던 사람이었기에 그 아쉬움은 더 컸으리라. 그렇기에 성공하면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녀이지만 데이지에게 개츠비는 개츠비에게 있어 데이지의 존재 같지는 않았다. 때문에 이 관계는 비극적이다. 평생 데이지만을 사랑했던 자신처럼 데이지 또한 그러리라 믿고 싶었겠지만 데이지는 ‘개츠비도 사랑했고, 그렇다고 톰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 그녀의 말에도 공감할 수밖에 없다.
개츠비는 평생 무모할 정도로 자신의 첫사랑을 간직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무언가 한 가지를 그토록 오랜 세월 간직하고 지켜 나가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니까. 그러나 그 세계 때문에 허상 같은 삶을 살다간 그이기에 ‘바보 같은 놈’이라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자신의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도 장례식에 오지도 않는 그런 여자를 끝까지 사랑하다 간 아주 바보 같은 놈. 그래서 <위대한 개츠비>는 안쓰럽고 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