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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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붐비는 출근 시간에 생산 수단에 참여 하지 않는 연령대의 사람들, 그러니까 한눈에 딱 보기에도 에헴- 하고 뒷짐지고 타는 노인들을 보면, 그리고 그 노인들이 피곤하게 앉아 있는 학생이나 직장인들 앞에서 자리 내놓으라는 듯이 에헴, 에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속으로.. ‘저 노인은 진짜 지금 나와야 하는 것일까? 조금 늦게 나와도 되잖아? 꼭 이렇게 붐비는 아침에 나와서 저리도 피곤한 사람들 자리 뺏어야 속이 시원할까’ 이런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하게 된다.

초중고등학생들의 소풍도 꼭 붐비는 아침 출근 시간에 함께 이동해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싶다는 생각과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한 10시 이후에 움직이면 서로 덜 붐비고, 덜 복작대고, 덜 피곤하고 좋지 않아? 하는 생각.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내 머리 속에 이런 생각은 좀 위험한 생각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모든 근거의 기준이 그가 지금 ‘생산’적인 사람인가, ‘비생산’적인 사람인가 라는 것으로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을 하는 사람, 뭔가를 생산해내는 사람, 그러니까 그래서 피곤한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덜 피곤하게 덜 생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바쁜 시간은 좀 피해주지, 라는 매우 이기적인 생각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생각을 당연하단 듯이 하고 있는 나를 보며 퍼뜩, 놀라게 한 책이 한 권 있는데 바로 마르셀 에매의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Le passe-muraille)’였다. 마르셀 에매의 작품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아이들 ‘동화’스럽다는 평가도 있는 반면, 그렇기 때문에 좋다라거나 뛰어난 상상력을 통해 알고 보면 ‘어른’들이 꼭 한번은 생각해 볼 문제들을 감칠 맛나게 짚어준다는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나는 에메의 작품 중 이 소설보다 먼저 읽었던 ‘착한 고양이 알퐁소’에서 좀 많이 ‘동화스럽다’라는 느낌을 받았던 터라, 이 책도 그냥 크게 기대는 하지 않고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은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도 그렇지만 ‘생존 시간 카드’ 하나 만으로도 꼭 한 번은 읽어 볼 만하다. 한 도시에서 식량과 생필품 부족에 대처하고 노동계급의 수익 향상을 위해 비생산적인 소비자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제도를 시행하기로 하면서, 이 소설은 시작한다. 그게 바로 ‘생존 시간 카드’-

저 기준에 따라서 생존 시간을 얼마 부여 받지 못하는 사람들로 노인, 퇴직자, 실업자, 기혼여성(일을 하지 않는 집에서 기거하는 기혼여성도 포함된다), 게다가 예술가와 작가들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이 부분생존자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생존 시간 카드를 배급 받게 된다. 한 장의 카드가 24시간의 삶. 어떤 이는 10장, 어떤 이는 15장 어떤 이는 30장 이런 식으로. 15장을 받은 사람은 한 달을 기준으로 15일만 살게 되는 것이고, 나머지는 일시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매달 1일이 되면 그 일시적인 죽음의 상태에서 깨어나게 되고… 그래서, 이 생존 시간 카드 제도를 시행하게 된 저 사회가 어떻게 되었을까? 답은 하나. 당신이 상상해보거나, 직접 읽어보거나.

결국, 생산적이다, 비생산적이다, 라는 것을 과연 누가, 어떤 근거로 정의 내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하다못해 예술적인 작품을 생산해내는 예술가도 글을 쓰는 작가도 ‘무엇인가’ ‘생산’해내는데 그들의 기준대로라면 생존 시간 카드는 고작 몇 장에 지날 뿐이지 않는가. 집안에서 가사노동을 하는 기혼여성도 틀림없이 일을 하지만 ‘생산’하는 것이 없다고 또 몇 장의 생존 카드만 받게 되는 게 아니던가.

인간의 삶 자체를 그 인간이 생산적인 일을 하는가, 마는가, 즉 쓸모 있고, 없음에 따라 죽음과 삶의 시간 자체를 그 누군가가 부여한다는 발상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할 수 있는지, 이 책은 그리 많지 않은 분량 안에서 귀신같이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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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내가 있었네
김영갑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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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이다. 제주도에 간다 하니 후배 녀석이 이 책을 선물했다. 제주도 가기 전에 읽고 이곳에 한 번 꼭 들러보라고. 내가 이 책을 선물 받았을 때에 비하면 김영갑과 그의 갤러리는 이제 너무도 유명해졌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제주도에 갈 때마다, 김영갑을, 두모악을 떠올린다. 내게 두모악은 시간이 나면 꼭 들르는 제주도 필수 코스가 되었다. 모든 게 다 이 책 한 권 때문이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는 제주도에 관한, 제주도에 미친 사진작가의 이야기다. 이 책 속에 담긴 사진과 글의 주인인 김영갑은 1982년부터 서울에서 제주도를 오가며 제주도의 자연 풍경을 담던 중 제주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1985년 아예 제주도로 내려간다.


멋진 카메라를 어깨에 멘 사진작가가 제주도에 내려가 제주도 사진만 찍는다는 말만 들으면 어쩐지 낭만적인 풍경이 떠오른다. 그러나 김영갑의 생활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매일 매일이 전투처럼 고달팠다. 사진 찍을 그 순간만 빼고는-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사진작가, 돈만 생기면 필름 사는 데 다 써버리니 사는 곳도 먹는 것도 변변치 않다. 남루한 옷차림에 이리저리 제주도 곳곳을 쏘다니며 어슬렁거리니 간첩으로 오해받아 경찰서도 자주 불려다녔다. 결혼도 안 하고 사진만 찍으며 허름한 곳에서 변변찮게 사니 가족은 물론 지인들 그리고 제주도의 이웃들까지 수군거리기 일쑤였다. 하릴없이 사진에 미쳐 장래는 생각도 안 하고 시간만 축내는 놈이라는.


1부에서는 제주도에 미친 그가 사진을 찍으며 제주도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자연 속의 소박한 삶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2부는 그러던 중 얻은 루게릭 병으로 병마와 싸우며 ‘김영갑 갤러리-두모악’을 만들게 된 과정이 그려진다. 세속적인 성공이나 안락함을 떠나와서 사는 사진작가의 외로움과 고독감이 절절하게 드러나는 장면도 있고, 좋은 카메라가 있어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진작가들에 대한 따끔한 비판도 가끔은 엿보인다. 무엇보다도 불치병에 걸린 중에도 ‘내가 죽으면 누가 내 사진을 나만큼 아껴줄까’하는 생각에 시골 폐교를 임대해 갤러리를 만들어 하나하나 손수 가꿔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끼니는 거를지언정, 필름 사는 돈은 아끼지 않았다는 김영갑- 투병 생활 6년 만인 2005년 그 갤러리에서 그는 끝내 숨졌고, 이제 두모악 갤러리는 해마다 많은 이들이 찾아와 제주도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돌아간다. 그리고 아울러 이 책 <그 섬에 내가 있었네>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부와 명예 등 세속적인 성공에서 벗어나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일에 미친 한 사람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책 속에 담긴 그의 사진들을 보면, 무척이나 아름답지만 한없이 외롭다.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 홀로 바다에 잠긴 듯한 섬…. 외롭고 쓸쓸하다. 그의 인생도 그렇게 느껴진다. 예술가로서 치열하게 아름답게 살았지만 한없이 외롭고 쓸쓸했던 삶-


배부르고 행복하면 좋은 예술 작품은 나오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말 그럴까. 끼니를 거르더라도 책을 살 것이냐? 모든 사람들과 단절하고 어딘가 처박혀 글만 쓸 것이냐, 누군가 내게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그런 삶은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럴 자신도 없고(배고프면 책도 안 읽혀;). 예술가와 평범한 사람의 삶은 그래서 다른가보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는 읽고 난 뒤 여러 사람에게 선물해 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그래서 결국 여러 권을 사두고 아끼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게 된다. 제주도에 가게 되면 두모악에서 김영갑의 작품이 인쇄된 엽서를 사서 선물하기도 한다. 아마 내게 이 책을 건넨 후배 또한 그러했으리라. 올해도 제주도에 가게 되면 또, 다시, 두모악에 들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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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6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6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위험한 생각들 - 당대 최고의 석학 110명에게 물었다
존 브록만 엮음, 이영기 옮김 / 갤리온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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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생각이란 어떤 생각일까? 아마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균적인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생각들일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가치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기에 ‘위험한 생각’이었으며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다고 믿었던 천동설을 반박했던 갈릴레이의 주장 역시 ‘위험한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당대 최고의 석학 110명에게 물었다는 ‘위험한 생각’에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처럼 ‘위험한 생각’들이 잔뜩 들어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사실 뭔가 엄청난 ‘위험한 생각’을 기대하고 책을 펼쳤던 이에게는 조금 실망스러운 책일 수도 있다. 특히 나처럼 ‘자연과학’적 지식이 그다지 많지 않은 사람에게는 생소한 용어도 많고 그다지 흥미로운 ‘위험한 생각’을 안겨주지는 않을 것 같다.


이 책은 과학자와 사상가들의 모임인 '엣지재단' 회장 존 브록만이 110명의 석학들에게 ‘현재 당신이 갖고 있는 가장 위험한 생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답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런데 110명의 명단에 올라간 사람들이 이름과 약력을 보면 대부분이 진화생물학, 컴퓨터 과학, 신경생리학, 심리학, 물리학 등의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그들이 내놓은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도 거의 그 분야의 ‘위험한 생각’들이므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적 접근은 좀 미흡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또한 <이기적 유전자>, <만들어진 신>의 리처드 도킨스, <이웃집 살인마>, <욕망의 진화>로 유명한 데이비드 버스 등 주로 진화생물학, 진화심리학자들의 의견이 많아 너무 그쪽으로만 치우친 느낌도 든다. 게다가 110명이 내놓는 위험한 생각이란 ‘난 이렇게 생각한다’ 자기 생각을 던져놓고 마는 경우가 많아서 솔직히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개인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공감 가는 ‘위험한 생각’들도 종종 있고 미처 몰랐던 놀라운 발견 등도 있는데 주로 다음과 같다. (특히 우울증 치료제의 부작용이란...!)


그런데 나는 왜 진화심리학을 위험한 것으로 보는가? 그것은 나 자신과 침팬지나 원숭이 같은 나의 동류 인간들을 유전자 조종줄 위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스스로가 더 나은 개인이 되고자 하고, 더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엄청난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설사 유전학이 운명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가 진화론적인 생각의 포위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도 아니다. 유전학은 정말로 우리의 변화하려는 능력을 억제할 수도 있는 걸까? 만일 그렇다면, 진화심리학의 몇몇 주장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은 행동에 대해 변명거리를 허락할 것이다. 이 변명거리는 편리하지만 위험하다. 예를 들어 여자를 희롱하는 남성이, 자신의 행동이 진화론적으로 이치에 맞는 것이라고 변명하기란 너무 쉽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진화론적 유산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리처드 도킨스 일파의 길을 따라 ‘이기적인 유전자의 횡포에 거역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면 어찌 되겠는가?

-제리 코인 ‘인간은 유전자의 꼭두각시다’


데이비드 버스의 <욕망의 진화>를 읽고 내가 딱 이야기 하고 싶던 부분이 바로 저 부분이다. 실제로 이 책에서도 데이비드 버스는 ‘악의 진화 – 우리는 살인으로 진화한다’라는 칼럼을 통해 인간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경쟁을 벌이는 무자비한 진화 과정에 적응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살인을 저질러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인간 본성에 이미 어두운 면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문화나 빈곤, 정신 병리, 미디어의 폭력에 노출되는 것 같은 현대적인 질병 탓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 것으로 원인을 돌린다고 인간의 어두운 본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데이비드 버스의 이런 주장이라면 인간은 오로지 번식과 생존을 위한 본능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존재인가? 하고 되묻고 싶어진다.


생각과 느낌은 뇌가 육체와 상호작용하고, 육체가 뇌에게 말하는 것을 뇌가 듣게 될 때 일어난다. 그리고 뇌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은 뇌가 육체를 통제하는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뇌가 실제로 행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만들고, 육체와 뇌를 구분해서 생각하는 전통적인 방식에 대해 의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뇌와 육체가 분리돼 있지 않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의사들도 마음의 상태와 육체의 건강이 서로 연관돼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보통의 의학에서는 이와 반대로 육체와 뇌가 분리돼 있다고 보고 있다. 우리는 또 사랑에 빠졌을 때의 감정 같은 것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사랑의 감정은 마음에만 있는 게 아니라, 육체에도 그만큼의 크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략) 사랑과 긴밀한 유대 같은, 인간의 가장 친밀한 감정에서도 육체와 마음은 상호작용을 한다. 그러한 상호작용은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라는 두 가지 호르몬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들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이 호르몬들은 연구원들이 표현하듯이 “교미 과정에서 촉각이 연장됨으로써 얻어지는 쾌락”의 결과로 방출되며, 뇌 속의 쾌락 센터를 거쳐서 성적 파트너가 서로에게 죽을 듯이 몰두하도록 만든다. 쥐에 비하면 인간은 확실히 더 지적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뇌 스캔 사진을 보면,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 수용체가 있는 곳에서 활동이 증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옥시토신은 오르가슴과 성적 흥분을 느끼는 동안에도 올라가는데, 손으로 만지고 마사지할 때도 그렇다. 자폐증이 있을 경우 옥시토신 수용체에도 결함이 감지되었다. 그리고 옥시토신 호르몬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신뢰감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앨렌 앤더슨 ‘뇌는 육체 없는 마음이 될 수 없다’


앨렌 앤더슨의 이 ‘위험한 생각’을 읽으면 인간에게 있어 뇌와 마음을 분리하는 생각, 예를 들어 정신적인 사랑(흔히 고결함의 표상처럼 일컫는 플라토닉 러브), 혹은 그와 반대로 육체적인 사랑 이런 분리가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프로작과 같은 세로토닌을 촉진하는 우울증 치료제는 낭만적인 사랑의 감정, 배우자나 파트너에 대한 애착의 감정, 생식력과 유전적 미래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 우선 SSRI(선택적인 세로토닌 재흡수 촉진제)는 세로토닌을 증가시킬 때 뇌 안의 도파민 경로도 억제한다. 낭만적 사랑은 도파민 경로의 증대된 활력과 관련되기 때문에, SSRI는 열렬한 낭만적 사랑의 감정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SSRI는 또한 낭만적 사랑의 핵심적인 특성인 강박적인 사고를 억제하고, 감정을 둔하게 한다. … 내 생각이 위험한 이유는 거대한 의약품산업이 이러한 약품의 판매에 투자를 많이 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 약들을 복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약들이 일반 명칭으로 판매될 때, 더욱 많은 사랑을 시작하고 사랑을 지속하는 능력을 억제당하면서 그 약들을 복용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인간의 사랑 패턴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면, 온갖 종류의 사회적, 정치적 잔학 행위가 늘어날 수 있다.

- 헬렌 피셔 ‘사랑과 섹스의 패턴이 뒤바뀐다’


놀라운 것은 헬렌 피셔만이 아니라 사무엘 바론데스 또한 ‘개성을 바꾸기 위한 약물 사용’이라는 칼럼을 통해 프로작과 같은 우울증 치료제의 부작용을 이야기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우울증을 그 어느 때보다 더 심하게, 자주 앓고 있으며 손쉽게 우울증 치료제를 복용한다. 그렇다면 우울증 치료제를 복용함으로써 사랑과 같은 자연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것은 억제당하고… 억제당하니까 다시 우울해지고… 악순환의 연속이 아닌가. 머지 않은 미래에는 감정을 스스로 통제하고, 자연스 감정을 잃어버린 인간들의 디스토피아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상상도 잠깐 해보았다.


어린이들이 학교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그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즉 누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누가 지기들에게 비열하게 구는지, 어떻게 해야 자신의 지위를 높이게 되는지, 어떻게 하면 교사에게 잘 보여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지 등등.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이런 생각만 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의 학교는 지난 수백 년과 아주 똑 같은 방식으로 조직화되어 있다. 물론 그 지난 수백 년 동안 철학자 등은 학교가 정말로 나쁜 곳이라는 점을 지적했다.‘우리는 10년이나 15년 동안 학교 교실이나 대학 강의실에서 감금되어 있다가, 마침내 많은 어휘들만을 익힌 채, 하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학교 문을 나서게 된다.'

 -랠프 왈도 애머슨
             
      
학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기를 멈춰야 한다. 정부는 교육 비즈니스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부는 어린이들이 알아야만 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고 자신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숟가락으로 받아먹은 것을 제대로 토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어린이들을 테스트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
- 로저 생크 ‘아이들은 학교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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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07-28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품절이라니 더 읽어보고 싶은 심리.
데이비드 부스의 <욕망의 진화> 나 헬렌피셔의 <성의 인류학>은 제가 mating을 보는데 돌이킬 수 없게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이 책에서 이 두 학자를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읽고, 저 두권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잠자냥 2017-07-28 16:30   좋아요 0 | URL
하하. 그래도 절판이 아니라 일시품절이라고 하니(재출간/재입고 예정시기는 2017-09-29일이라네요!), 참 다행이네요.
 
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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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만이다. 몇 년 만인 걸까? 실은 몰랐다. 내가 김애란의 작품을 다시, 읽게 될 줄은. 순전히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 때문이었다. 바깥은 여름이라? 제목을 보는 순간 온갖 것들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안은? 밖은 여름인데 안은 여름이 아니라는 소리구나. 여름이 아니라면 겨울? 그도 아니면 여름으로 가는 봄?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여름이 지나간 가을?

여름이다. 여름은 덥다. 덥지만 활기가 넘친다. 초록도 무성하다. 물장구치는 아이들의 꺄르르한 웃음도 볼 수 있고, 아이스크림을 신나게 먹으면서 거니는 10대 소녀도 볼 수 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리는 고양이 울음소리조차 활기 넘친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다채롭다. 바다로 들로 산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많다. 여름은 들떠있다. 여름은, 찬란하고 뜨거운, 생의 열기로 가득한 기운이 느껴진다.

겨울은, 가을은, 봄은 그렇지 않다. 겨울은 말할 것도 없고 봄은 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황량하거나 쓸쓸하다. 여름에 비하면 그렇다.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은 여름보다도 여름이 아닌 계절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이 책의 뒤표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사실 나는 처음에 ‘시차’를 ‘사치’로 읽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사치’라고 읽어도 나름의 뜻이 통했다. 안에서는 하얀 눈이 흩날리는, 또는 황량한 바람이 부는데 바깥은 온통 여름이라니, 그야말로 안에서 그 황량함을 고스란히 껴안고 사는 이들에게 여름이란 ‘사치’아닌가.

김애란의 단편집 <바깥은 여름>에는 그렇게 겨울을, 또는 봄 혹은 가을을 견디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등장한다. 아이의 뜻하지 않은 죽음을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부부이거나(‘입동’), 소년의 몸으로 누구의 도움도 없이 기르던 개의 죽음을 준비하거나(‘노찬성과 에반’), 한쪽은 통과의례를 거쳐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는데 성공했지만 한쪽은 그 세계에 진입하기를 실패한, 기약 없는 청춘이거나(‘건너편’), 언어 때문에 언어와 자유마저 잃어버린, 오히려 침묵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이거나(‘침묵의 미래’), ‘더블폴트’의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거나(‘풍경의 쓸모’), ‘엄마는 한국인이라 몰라’ 퉁명스럽게 말하는 다문화가정의 소년이거나(‘가리는 손’), 남편의 죽음을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아내이다(‘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그들 모두에게 찬란한 여름은, 틀림없이 ‘사치’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여름’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당연히 온도 차이를 넘어선 ‘시차’를 느낄 것이다.

김애란의 작품은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이후 정말 오랜만에 읽었다. 사실 나는 김애란의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초창기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을 읽었을 때 뭐랄까, 치기어린 문장이나 묘사를 위한 묘사 같은 것들에 조금 질려버린 기억이 있다. 고시원이나 원룸, 노량진 학원가를 전전하는 청춘의 이야기에 크게 공감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에 끌려 그의 작품을 다시 접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김애란도, 김애란의 작품 속 주인공들도 나이가 들었구나. 늙어가는구나.

무엇보다도 놀라웠던 점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둘만의 방을 찾아 헤매던 그 옛날의 주인공들이 이제 <바깥은 여름>에서는 버젓이 자기 집을 가진 이들이 된 것이다. 물론 크게 화려한 집도 아니지만 <침이 고인다>에서 방을 찾아 헤매던 청춘들이 어느덧 ‘자기 집’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고 있었다. <침이 고인다>는 '방'을 얻기 위한 20대의 남루한 투쟁기였다. 물론 그들은 어떻든 자신만의 ‘방’을 갖고 있었지만 ‘나만의 공간’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크게 부족했다. 그 ‘방’은 비가 오면 물이 콸콸 들어오는 반지하 방이기도 하고, 느닷없이  찾아온 후배에게 침범당한 작은 원룸이기도 하고, 신림동의 고시원이기도 하고, 옥탑방이기도 하고, 다 큰 남매가 한 공간에서 함께 먹고 자고 해야 하는 원룸이기도 하고, 노량진 학원가의 학사촌이기도 했다.

그랬던 주인공들이 낡고 보잘것없기는 하지만 자기만의 ‘집’을 소유하고는 20대의 삶이 아닌 30대의 삶을 살고 있었다. 아이도 낳고, 그 아이로 인해 생의 기쁨을 느끼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아이로 인해 삶의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도 한다(‘입동’, ‘가리는 손’). 그래서 작가도, 작가가 그리는 인물들도 그때보다는 어른이 되었구나, 자라고 있구나, 그럼으로써 삶이 던져주는 무게를 조금 더 묵직하게 느끼는구나 싶어졌다. 그런 변화가 조금은 반가웠다.

어떤 작품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도 했다. 죽음을 그린 작품에서 그랬을 듯하지만, 사실 눈물은 매우 뜻밖의 작품, 뜻밖의 구절에서 흘러내렸다. 그 작품은 어른의 생활로 접어든 한 사람과 아직도 그 세계에 진입하지 못한 채 서성이면서 주변부 맴돌고 있는 또 다른 한 사람- ‘도화’와 ‘이수’ 연인의 이야기를 다룬 ‘건너편’을 읽을 때였다. 이 작품은 예전 김애란 단편에서 곧잘 볼 수 있었던 노량진 학원가를 전전하는 청춘의 삶이 조금은 남아있었다. 도화와 이수- 둘 다 그곳에서 공부하다가 한쪽은 사회 진입에 성공하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못한, 미묘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작은 파문을 그렸는데,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안에서 여러 번의 봄과 겨울을 난, 한 번도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간 연인의 젊은 얼굴이 떠올랐다. (‘건너편’, 117쪽)' 이 구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사실 나는 김애란의 단편에서 곧잘 볼 수 있는 삶- 그러니까 노량진 학원가를 전전한 적도 없고, 고시원이나 신림동 일대의 삶을 살아본 적도 없다. 김애란 작품에 자주 그려지는 학원 강사의 삶도, 지상의 방 한 칸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을 살아본 적도 없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청춘의 삶에 비하면 운이 좋은 편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럼에도 ‘여러 번의 봄과 겨울을 난, 한 번도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간 젊은 얼굴’이라는 구절을 읽노라니 울컥 눈물이 치솟았다.

그것은 어쩌면 그렇게 ‘여름’다운 여름을 살아보지도 못한 채, 언젠가는 찬란한 여름 같은 삶이 오리라 여전히 꿈꾸고 있을 이들, 또는 그런 여름을 살아보지도 못한 채 어느덧 가을과 겨울로 접어들고만 이들의 삶을 내가 고스란히 이해할 수 있는, 아니 어쩌면 형태는 다를지언정 그런 삶을 나 스스로도 지나쳤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한 번도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간 젊은 얼굴’들의 삶이, 그 쓸쓸하고 황폐한 인생이 어떠할지 이제는 너무나도 잘 아는 나이에 이르렀기 때문이리라.

<바깥은 여름>에서는 섣불리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찬란한 여름이 오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단편집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한번쯤은 인생의 여름이 찾아올까? 글쎄, 영원히 여름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얀 눈이 흩날리는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그 상처를 끌어안고 인생을 헤쳐 나가는 이들의 진솔한 삶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들은 계속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므로. 그런 이들의 삶을 바라보고 헤아릴 줄 아는 작가의 시선에서 나는 ‘여름의 찬란함’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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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7-20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김애란 작가의 책은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어느 모임에서 마주할 기회가 있었는데 읽어본 적
이 없어서 그냥 멀뚱멀뚱하게 쳐다만 본 기억이
나네요.

이번 책은 한 번 읽어 보고 싶네요 상찬이 많아서요.

잠자냥 2017-07-20 10:57   좋아요 0 | URL
김애란의 초기 작품은 그 명성이나 인기에 비해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제가 한국 현대 문학을 썩 좋아하지 않는 까닭도 있습니다만. 하하...) 이번 단편집은 작가가 내공이 좀 쌓였구나 싶더군요. ㅎㅎ

cyrus 2017-07-20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이 짠해지는 느낌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한국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감정은 정말 오랜만에 느꼈습니다. ^^

잠자냥 2017-07-20 13:5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여러번 울컥했습니다. ㅎㅎ

2017-07-21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1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8-04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대회 3등 되신 거 축하드립니다. ^^

잠자냥 2017-08-04 21:58   좋아요 0 | URL
아... 모르고 있었는데 이런 좋은 소식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르세니예프의 인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3
이반 부닌 지음, 이항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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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읽어봤어?” 단편을 좋아하는 나에게 언젠가 J가 어떤 책을 건넸다. 러시아 단편 소설을 묶은 <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라는 책이었다. 제목부터 아름다웠다. 책을 훑어보니 몇몇 작품은 이미 읽어본 작품들이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J는 콕 집어서 ‘추운 가을’이라는 작품을 읽어 보았느냐고 한 번 더 물었다. 이반 부닌. 처음 들어보는 작가였다. ‘아니’라고 말하니, ‘꼭 읽어봐’ 한다.

그때는 바로 읽지 않았던 것 같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 그 작품이 문득 떠올라 책장을 넘겼다. 그 단편을 다 읽었을 무렵, 가슴에서 무언가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헤어지게 된 연인의 이야기로 매우 짧은 단편이었지만 완벽했다. 체호프를 좋아하던 내게 이반 부닌이라는 이름은 그 작품 하나로 각인되었다. 체호프보다 서정적이잖아? 그랬다. 체호프와 비슷하면서도 체호프에게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었던 낭만과 아름다움이 부닌의 작품에는 있었다. 그 뒤 기회가 닿는 대로 이반 부닌의 작품을 모았다. 하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 그의 작품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출간된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은 그런 목마름을 채워주고도 남는 작품이다. 물론 이반 부닌은 단편만으로도 문학이 줄 수 있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아니 어쩌면 단편이기에 더 아름답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아르세니예프의 인생> 또한 그러할까? 반신반의 하면서 책장을 넘겼다. 몇 쪽 읽지도 않았지만 이미 내 마음에서는 ‘아름답다’는 단어가 몇 번이나 맴돌았다. 부닌의 문장은 시(詩)와 같다. 그의 문장에는 어릴 시절의 향수가 담겼고 잃어버린 유년 시절의 그윽한 추억이 담겨있다. 볕에 잘 말린 포근한 이불 속에서 뒹굴 거리던 다락방이 떠오르기도 하고, 또 때로는 비오는 날 촉촉이 젖은 나뭇가지들을 창밖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아름다운 문장들로 부닌은 한 청년의 이야기를 그려간다. 그의 이름은 아르세니예프- 몰락한 귀족 집안에서 나고 자라 문학을 사랑하고 글을 쓰며 살고 싶어 하는 ‘문학청년’이다. 그의 일생이 어린 시절부터 유년 시절, 십대를 거쳐 청년에 이르기까지 조용하고 담담하게 펼쳐진다. 특별하게 큰 사건이나 어떤 극적 전개가 그려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 러시아 몰락한 귀족 집안의, 문학을 꿈꾸는 한 청년의 삶이 왜 이토록 멀리 떨어진 시대를 살고 있는 나에게도 큰 울림을 주는 것일까.

아마도 아르세니예프 그의 삶이, 그가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우리 모두가 삶을 바라보는 태도이자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이러저러한 보편적인 느낌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하지만 가족의 사랑이 평범하게(그리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존재하는 집안에서 자연을 벗삼아 자유롭게 자라나고, 조금은 괴롭고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학교생활을 어쩔 수 없이 시작하고, 서서히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언인지 깨달아 그것에 몸담게 되는 삶. 물론 그런 가운데 가족이나 주위의 비난이 있기도 하고, 또 때로는 조용한 지지가 따라오기도 한다.

물에 젖은 잡초를 헤치며 채소밭으로 달려가 무를 뽑아서 짙푸른 진흙이 묻어 있는 무 꼬랑지를 탐욕스럽게 깨물던 순간, 그런 순간은 내 인생에서 드물었다..... (27쪽)

“넌 나이가 들면 어딘가에 취직해서 일을 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갖게 되겠지. 또 조금씩 저축해서 집을 살 거야.” 갑자기 나는 미래의 온갖 공포와 비속함을 너무나 생생하게 느끼고 울음을 터뜨렸다..... (63쪽)

그렇게 그는 자라고 성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인생의 비밀- ‘나는 나의 삶이나 다른 이들의 삶이 낮과 밤, 일과 휴식, 만남과 대화, 이따금 사건이라 불리는 기쁨과 불쾌함의 교차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삶이란 인상, 장면과 형상들의 무질서한 축적이고, 이 가운데 가장 하찮은 것들만이 우리 마음속에 남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235쪽)’을 깨달아 간다.

그 또한 사랑이라고 부르기는 애매한 열정에 휩싸이기도 하고, 순간적인 정열에 매혹당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운명처럼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리카.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의 제5권 제목을 ‘리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을 만큼 ‘리카’는 이 작품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왜냐하면 아르세니예프는, 리카를 사랑함으로써 인생의 뼈아픈 진실을 더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 모든 사람은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봐 늘 두려워한다! (21쪽)’는 그러한 진실....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을 읽노라면 인생의 아름다운 한때, 찬란했던 한때가 언젠가는 사라지고, 그 순간이 소멸해서 기억 속으로 차츰 퇴색해 갈 것을 모두가 알기에, 그 찬란한 한때를 마주하고 있는 순간에도 어쩐지 슬픔이 밀려온다. '진흙 묻은 무 꼬랑지를 탐욕스럽게 먹던 시절'은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다시없을 아름다운 한때임을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알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떨리는 첫 만남도, 또 오해로 인한 고통스러운 다툼도 그 순간은 그저 삶을 이루는 한 부분이겠거니 생각하겠지만, 지나고 나면 영원히 다시 올 수 없는, 그렇기에 더없이 아름다운 한때임을 이 책을 읽는 우리는 안다. 그래서 왠지 부닌이 그려내는 이 사소한, 보잘것없어 보이는 한 청년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가슴으로 절절히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아, 내 인생도, 내 삶도 그러하지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봐, 사랑하는 그 모든 것들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하면서 사는 삶이지만, 그렇기에 그 순간을 충실히 보내야 한다고. ‘세상과 인생에 대한 사랑,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아름다움에 대한 달콤한 사랑이 안겨준 지극한 부드러움과 고통을 느끼면서(176쪽)’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우리 삶에 ‘리카’로 부를 수 있는 그 모든 순간은 오직 그때만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은 이반 부닌 그 자신으로 볼 수 있는 ‘아르세니예프’ 한 문학청년의 삶을 그리고 있기에 어떤 면에서는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스토너의 삶은 줄곧 황량한 고독으로 이어지다 마침내 문학 속으로 침잠했다고 한다면 아르세니예프의 삶은 그와는 조금 다르다. 그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만 같은 그런 평범한 순간들을 살며 문학을, 글을 쓰는 자신을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은 평범했지만 촘촘히 아름다운 한때로 이어져 있다. 또한 다시 오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슬프도록 아름답다. 아마도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이반 부닌의 서정성 짙은 문체가 큰 몫을 했으리라. 부닌은 그의 작품이 주는 울림과 깊은 감동에 비해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조금 알려졌다. 더 많은 이들이 그의 아름다운 작품을 만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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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8 10: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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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8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18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18 16: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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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7-11-30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안녕하세요. 이상하게 회사가 갑자기 너무 바빠지는 바람에 알라딘 블로그도 버려두고 이러고 있네요. 처음 시작할 때는 밀리지 말고 쓰리라 결심했는데... ㅜㅜ
잠자냥님이 이 책에 대해 쓰신 걸 보고 예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드디어 어제 다 읽었어요. 정말 아름답고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소설이었어요. 좋은 소설 소개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잠자냥 2017-11-30 13:06   좋아요 0 | URL
네~ 요즘 글이 안 보여서 바쁘신가 했어요. ㅎㅎ 이 책 정말 아름답죠! 두고두고 읽어도 좋을 그런 책이었어요. 쌀쌀한 날씨 감기 조심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