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인 대산세계문학총서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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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읽기 좋은 계절이 돌아왔다. 아직 낮은 좀 더운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꽤 서늘하다. 나쓰메 소세키를 꺼내 읽는다. <행인> 역시 염세적이다. 이 작품에는 그 어느 때보다 자아가 강한 인물이 등장한다. 책의 화자는 ‘지로’인데 주인공은 지로의 형 ‘이치로’가 아닐까 싶다.


‘이치로’는 세상과 거의 담쌓고 서재에 틀어박혀 책만 파고드는 학자다.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던 중 이치로는 자신의 아내와 동생 ‘지로’ 사이를 의심하게 되고 지로에게 아내를 유혹해보라는 제안을 하게 된다. 아내의 정조를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 물론 지로는 이런 가당찮은 형의 제안에 화를 내지만 결국 형의 제안대로 형수와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된다.

형수인 ‘나오’와 ‘지로’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내인 ‘나오’가 ‘지로’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은 애당초 형인 ‘이치로’의 망상에서 비롯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이 작품의 큰 줄기일 것 같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이치로의 비뚤어진 에고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라고나 할까.

‘이치로’를 보면서 짜증이 많이 치밀어 올랐다. ‘아, 이거 정말 미친놈이네.’ 이렇게 중얼거릴 정도였다. 그러다가도 참 이상한 게 이해가 가기도 하더라. 어떤 면에서는 슬쩍 내 모습이 지금 이렇지 않을까, 괜히 찔리기도 했다. 이치로는 세상 사람들이 다 우습다. 경멸스럽다. 아내도 가족도 하나같이 못 미덥고 못마땅하다. 가족을 포함한 거의 모든 인간을 ‘경멸’한다. 그저 계속 자기 안으로 책 안으로만 파고들어간다. 이치로의 에고는 점점 과대하게 부풀어 오른다.

인간이 못마땅하고 못났다고 혀를 차지만 결국 그도 그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자기가 더 길을 잃어버린 모습이다. 책을 읽고 있는 제삼자의 눈에는 오히려 이치로 그가 더 흔히 말하는 인간의 궤도를 일탈한 듯 보인다. 타인과 절대 섞일 수 없는 고독한 에고이스트는 그 고독한 상태를 즐기는 듯하면서도 ‘무리’안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 방법을 모른다. ‘지로, 어떤 기교는 삶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 같아.’ (185쪽)라고 털어놓지만 그는 그 기교를 절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가장 가까워야 할 아내와도 거리감만 커지고 가족과도 마찬가지다. 행인(行人)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스쳐지나 걸을 뿐이다. 사람 안에 들어가는 방법도 알지 못하고, 안다 한들 그 사람이 또 경멸스러워 보여 피하고 만다. 어느 한 곳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려 다니기 바쁘다. “이렇게 수염을 기르고, 양복을 입고, 시가를 문 모습이 겉에서 보기엔 그럴듯한 한 사람의 신사 같겠지만, 실제로 내 마음은 집 없는 거지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이리저리 헤맨다네. 하루 종일 불안에 쫓겨 다니고 있지. …” (329쪽)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자기의 상태도 못마땅하고 이리저리 가볍게 움직이는 듯한 사람들의 마음도 못마땅하다. 그러다 보니 ‘아내의 마음’도 자신에게서 동생인 ‘지로’에게 ‘옮겨갔다’는 생각이 들고 그런 경박한 마음이 너무나도 꼴보기 싫어진다. 게다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계속 ‘움직이며’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현대 문명도 못마땅하기 그지없다. 정신적으로 사색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 대상에 대해 알기도 전에 또 다른 새로운 대상이 쏟아져 나온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진정한 앎의 기회는 얻기 어렵고 피상적인 감상만 남을 뿐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든 것이 이치로에겐 불안할 뿐이다. 그리고 그 불안은 계속 그를 고독하게 만든다.

나쓰메 소세키의 결혼 생활은 딱히 행복했던 것 같지 않은데 <행인>은 그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무척 많이 반영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작품 곳곳에 드러나는 이치로나 지로 두 형제의 결혼 관념은 무척 염세적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두 사람을 함께 묶어주고 그 두 사람이 서로 가장 잘 알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소통’의 방법을 알지 못하면 전혀 다른 남남이 그저 ‘행인’처럼 서로의 곁을 스치며 더욱더 뼈저린 ‘고독’을 느끼게 되는 건 아닐지. 


“오사다 씨. 결혼 얘기로 낯을 붉힐 때가 여자의 꽃이야. 정작 해보면 결혼을 낯을 붉힐 만큼 기쁜 일도 아니요. 부끄러운 일도 아니지. 뿐만 아니라 결혼해서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면 혼자 있을 때보다 사람의 품위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 엄청난 일을 당하는 수도 있어. 그저 조심하는 게 상책이야.” (187쪽)

하지만 어딜 보나, 꿀처럼 달콤하진 못했던 것 같다. 이 씁쓸한 경험을 지닌 고참 부부가 자신들의 그리 행복하지 못했던 운명의 몫을 젊은 남녀의 머리 위에 나누어주어 또다시 불행한 부부를 만들 작정인가. (255쪽)

“시집가기 전의 오사다 씨와 시집 간 뒤의 오사다 씨는 전혀 다르다네. 지금의 오사다 씨는 이미 남편 때문에 스포일spoil되고 말았다네.” ... “어떤 사람한테 가든, 시집을 가면 여자는 남편 때문에 부정을 타게 되지. 이렇게 말하는 내가 이미 내 아내를 얼마나 못쓰게 만들었는지 모른다네. 내가 못쓰게 만든 아내로부터 행복을 구하는 건 너무 억지가 아닌가. 행복은 결혼으로 천진함을 잃어버린 여자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네.” (368~3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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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3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13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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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 친구 있어요?” “결혼은 언제 할 거죠? 결혼하면 회사는 어떻게 할 거죠?” 이 땅에 사는 젊은 여성들 가운데 이런 질문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없을 거라고 100% 확신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곳저곳 면접을 보러 다닐 때 언제나 듣던 말 중 하나가 ‘결혼’과 관련한 질문들이었다. 스물넷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렸고, 직장을 구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저런 질문의 부당함을 크게 느끼지는 못했다. 다들 그런 질문을 받는 것이려니 싶었다.

그 사이 내가 컸는지, 아니, 이 사회의 모순을 너무도 뼈저리게 보고 듣고 겪었는지, 저런 질문의 부당함에 화를 내고 분노하다가 이제는 그 분노조차 덧없이 느껴진다. 해탈의 경지랄까? 남자들 가운데 입사 면접 때 저런 질문을 받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남자들에게 결혼은 당연한 것일 테고, 결혼을 하더라도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것은 더 당연하리라. 아니 결혼하기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때문에 이 땅의 남자들 중 면접 현장에서 저런 질문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내가 아들을 안 낳은 게 참 다행이다 싶어.” 언젠가 엄마가 우리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딸만 넷인 우리 집에서 아들을 못 낳는다고 그토록 구박받고 어린 내 눈엔 거의 학대와도 같은 대접을 받았던 우리 엄마가, 다 큰 우리 앞에서 이런 고백을 털어놨을 때는 참 뜻밖이었다. “왜?” “아들을 낳았으면 나도 이상한 엄마가 됐을 거 같아. 아들, 아들 하면서 니들을 얼마나 차별했겠니? 안 그런다 해도 잘 안됐을 거야. 에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 집에는 아들이 없는 게 다행이야. 그 아들은 할머니 때문에 얼마나 개차반 왕자님이 됐을까? 상상만으로도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졌다.

“네가 아들이었어야 하는데.” 가끔 엄마는 또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내 동생들은 태어나지 못했겠지. 게다가 나는 또 얼마나 내게 주어진 것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처음부터 그것들은 모두 내게 주어졌어야만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하면서, 내 몫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까봐, 그걸 여자들이 빼앗아 갈까봐 얼마나 전전긍긍하면서 살았을까? 이 땅의 많은 남자들이 그렇듯이..... 사실, 빼앗는 것도 아니고 빼앗기는 것은 더더욱 아닌데도 말이다.

<82년생 김지영>에는 이런 모든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요즘 이 책이 그토록 널리 읽히는 이유는 뭘까 궁금해서 읽었다. 80년대에 태어나 이제 서른을 넘긴 여자들의 보편적인 삶이 담긴 이야기겠지 싶었다. ‘김지영’이라는 아주 흔한 그 이름처럼 새롭지도 않고 색다를 것도 없는, 그런 한국 여자로서의 삶. 사실 정말로 그랬다. 그런데 그 뻔한 삶을 바라보면서, 읽어나가면서 나도 모르게 분노하고 화내고 기가 막혔다. 너무나도 기가차서 혀를 끌끌 차기도 하고, 한숨을 푹푹 쉬기도 하고, 심지어 책을 읽다가 욕까지 나왔다.

누군가가 <82년생 김지영>의 줄거리가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리라.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이 여자라면, “그냥 당신의 삶이 이 책의 줄거리.” 라고.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이 남자라면 “당신 옆 여자들의 삶이 이 책의 줄거리.”라고. 그런데 이런 말을 덧붙일 것 같다. 아마 당신은 평생 가도 모를 거라고. 그런 삶을.

‘지영’씨는 태어나지 않는다, 다만 만들어질 뿐. 책을 다 읽었을 때, 긴 한숨과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었다. 보부아르가 말했던가. ‘여자는 태어나지 않는다. 다만 만들어질 뿐’이라고. 82년생 김지영은 태어나기는 했지만 태어난 게 아니라, 82년생 김지영, 그러니까 한국 여성 '김지영'으로 서서히 만들어진다. <82년생 김지영>은 그런 과정의 추적과도 같다. 그리고 그 생생한 과정의 기록이 오늘날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또다른 ‘지영’씨들의 전폭적인 공감을 얻은 게 아닐까.

여자 ‘김지영’은 먼저 집안에서부터 만들어진다. 다섯 살 터울 남동생을 둔 지영은 아들, 아들 하는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자연스레 ‘여자’이자 ‘딸’로서의 위치를 부여받는다. 그런데도 그것이 워낙 뿌리 깊고 은밀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불합리하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한다. ‘동생이 특별대우를 받는다거나 그래서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원래 그랬으니까. 가끔 뭔가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지만 누나니까 양보하는 거고, 성별이 같은 언니와 물건을 공유하는 거라고 자발적으로 상황을 합리화하는 데에 익숙’하다. 더군다나 ‘누나들이 샘도 없고, 동생을 잘 봐준다고 항상 칭찬했는데, 자꾸 칭찬을 받으니까 정말 샘을 낼 수도 없어’진다.(25~26쪽) ‘원래 그랬으니까. 누나니까’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여자 ‘김지영’ 만들기는 학교에서 더 심화된다. 밥을 먹는 것도 남자 아이들이 먼저이고, 반장은 늘 남자가 해야만 한다. 더더군다나 김지영 씨는 못된 남자 짝꿍이 그토록 괴롭혀서 고통스러워 죽겠는데 선생님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 (41쪽) 하-아-아-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는 아직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어떤 남자들은 정말이지 여자를 괴롭히는 게 좋아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서는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 버릇을 못 고친다. 스토커짓도 모자라서 여자 친구 또는 아내를 폭력적으로 괴롭히다가 죽이기까지 한다. 이렇게 단지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온갖 불평등한 모순을 겪으면서 소녀들은, ‘아이들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남자에 대한 환멸과 두려움을 가슴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아’ 간다.(65쪽)

그렇게 자라서 대학을 가고 사회인이 되지만 ‘여자’만들기는 더욱 공고화될 뿐 좀처럼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대학 동아리에서도 여자들은 그저 '있어주기'만 하면 고마운 화분 같은 존재일 뿐이다. 그 화분은 결코 회장이나 우두머리는 될 수 없다. 더군다나 그 화분은 때로는 누군가가 씹다버린 ‘껌’이 되기도 한다. 똑똑해서도 안 되고 잘나서도 안 된다. 그러면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니까. 제아무리 똑똑하고 잘나도 좋은 자리는 언제나 남자들의 몫이다. 심지어 김지영 씨처럼 일 잘하는 여자들에게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를 맡긴 것도 그녀들을 믿어서가 아니다. ‘오래 남아 할 일이 많은 남자들에게 굳이 힘들고 진 빠지는 일을 시키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런 커리어마저도 출산과 육아와 함께 날아가 버리고, 그녀는 어느덧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이들의 눈에는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는 한가로운 맘충'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김지영 씨는 얼굴이 붉어져 황급히 그 자리를 뜬다. 

누가 이렇게 김지영 씨를 ‘인간’이 아닌 ‘여자’, 김지영 씨로 만들어 간 것일까? 단지 성별이 다른 남자들만의 잘못일까? 지영의 할머니도 엄마도 모두 여자다. 지영을 가르쳤던 선생님 중에도 틀림없이 여 선생님이 있었을 것이다. ‘여자’로서의 역할을 내면화하는 데는 남자뿐만이 아니라 스스로 이 사회의 모순을 뼈저리게 겪고 자랐을 또 다른 ‘지영 씨’들이 크게 한몫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82년생 김지영>은 읽을수록 답답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하필이면 김지영 씨는 딸을 낳는다. 그 딸은 김지영 씨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지영의 남편과 지영을 상담했던 의사를 보면 그리 희망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지영의 남편도, 지영의 담당 의사도 그녀를 보면서 이 땅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의 어려움을, 고통을 조금은 이해하는 듯하지만, 어쩐지 그 이해는 그저 멀찍이서 보는 방관자의 태도와도 같다. 그러니까 지영의 남편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는 아내에게 ‘그 일이 정말 네가 하고 싶은 일’이냐고 묻는 것이다.

김지영 씨의 담당 의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수학 영재였으며 뛰어난 의사였던 자신의 아내가 아이 때문에 집안에 눌러 앉아 그저 초등학교 수학문제를 푸는 데 재미를 붙인 모습을 보며 불만을 품는다. 아내는 지금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오직 수학문제 밖에 없는데도 그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자기 아내가 초등 수학문제 풀이 정도가 아닌,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 그게 꼭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을 하길 바란다. 지영 씨와 자기의 아내가 그런 일을 다시는 찾을 수 없다는 현실을 절대 모르는 것이다. 지영 씨와 자신의 아내가 진정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기를 바란다면서도, 출산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직원 대신 후임으로 미혼 여성을 뽑겠다는 그. 그런 그들이 이 사회에 계속 존재할 터인데, 과연 지영 씨와 그의 아내가 다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여자가 아닌, 엄마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자기 존재를 찾을 수 있을까?

사람들은 문학을, 소설을 왜 읽을까? 문학을 읽음으로써 공감과 위로를 받기도 하고 잘 몰랐던 사실이나 진실을 깨닫기도 한다. 사회 모순을 담고 그런 사회를 고발하는 이야기들을 읽음으로써 어떤 변화의 바람과 작은 희망을 기대하기도 한다. <82년생 김지영>은 문학이 줄 수 있는 이런 여러 가지 것들 가운데 ‘공감’ 부분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리라. 그런데 그 공감은 어쩐지 쓸쓸하다. 그런 공감을 도무지 느낄 수 없는 사회라면 어떨까? 마치 김지영 씨의 이야기가 화석처럼 되어 아주 먼 옛날이야기가 되어, 와, 어쩜! 이런 시절도 있었나봐! 완전 드라마 같은 이야기 아니야? 이게 말이 돼? 말도 안 돼. 비현실적이야.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회- 그런 사회에서는 모든 여자들이 82년생 김지영 씨의 이야기가 자기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부디, 언젠가는 그런 사회가 오기를 바란다. 62년생 김지영 씨도 72년생 김지영 씨도 82년생 김지영 씨도 92년생 김지영 씨도 02년생 김지영 씨도 12년생 김지영 씨도 그 모두가 이건 내 이야기야! 하고 공감하지 않을, 그런 사회- <82년생 김지영> 이 책이 전하는 뼈아픈 진실, 그 불평부당한 모순을 더 많은 이들이 읽고 느끼고 깨닫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책을 출발점으로 삼아,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길 바라본다. 82년생 김지영 씨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사회가 오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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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RTZ 2017-09-06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편이 벌어다준 돈으로 한가롭게 커피마시는 사람 = 맘충?

잠자냥 2017-09-06 09:32   좋아요 1 | URL
<82년생 김지영> 이 작품 속에서 그렇게 나옵니다. 제 표현이 아니고요. ^^ (충격적이죠? 정확히 말하자면 김지영 씨가 아이를 데리고 나가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직장인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저런 이야기를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QUARTZ 2017-09-06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제가 오해했네요 죄송합니다. 리뷰를 재밌게 잘 읽고 있었는 데 불편한 표현이 있어서 댓글 달았습니다. 저 표현 때문에 읽고싶었던 마음이 사라졌었거든요.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ㅎ 감사합니다

잠자냥 2017-09-06 13:02   좋아요 0 | URL
네, 아닙니다. 제가 인용을 확실히 구분하지 않고 오해되게 쓴 부분도 있네요. 하마터면 제 글 때문에 이 책을 못 읽어보실 뻔했군요!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오해될 것 같은 부분은 좀 수정해야겠네요- (수정했습니다. ^^;;;;)

조현우 2019-08-12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로써 책을 무척 재밌게 읽었었습니다. 시간가는줄 모르고 봐었고 저희 어머니의 삶이 오버랩되어 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잘 정리해주셨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책 속의 답답한 에필로그보다도요. 다만 소설, 문학으로 볼때와 현실을 너무 깊이 연관시키시는것 같아 안타깝네요. 이미 사회가 깊게 연관시켜놓기도 하였지만..
다만 본문의 쓰신 말 중 남자들은 평생가도 모른다는 말이 조금 속상하게 느껴져 댓글을 달아봅니다. 물론 잘모르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모르겠지만, 알아가고자 노력하는 한국의 남자 중 한명입니다. 잠자냥님의 말씀대로라면 남자들의 삶 역시 아마 여성들은 평생가도 모를 수 있을거라고도 생각이 됩니다.. 그만큼 삶의 모습과 환경이 다르기도 했다는 것일테지요.
단정짓기보단 서로를 공감해주고 배려할 수 있는 사회가 오길 기대해봅니다..^^ 좋은 내용 잘 읽고 가요..^^

잠자냥 2019-08-12 15:42   좋아요 1 | URL
소설이나 문학은 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82년생 김지영>은 그런 점이 극명하기 때문에 현재 동시대 여성들의 공감을 많이 얻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처럼 가부장제가 극명한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공감을 얻고 있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남자들의 삶 역시 여자들이 다 알기란 한계가 있겠지요. 바로 그래서 저는 문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상상력을 통해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세계의 공백을 메꿀 수 있으니까요. 암튼 조현우 님 같은 분들이 더 많아지기를 빌어봅니다~
 
히로시마 내 사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9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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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난 뒤 이 책을 다시, 제대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운 좋게도 이 책이 나오고 얼마 뒤 알랭 레네 감독의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도 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이 영화를 몇 회 상영해주었기 때문이다.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놓친 영화들 가운데 꼭 스크린으로 만나보고 싶은, 아니 그래야만 하는 영화들이 있다. 그런 영화들은 몇 년이고 기다린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그 영화는 스크린에서 못 만날 수도 있다. 그렇다 한들 어쩔 수 없다. 그게 그 영화와 나의 운명일 테니까.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도 그런 영화 중 하나였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 작품. 영화 좀 본다 하는 사람이라면 익히 보고도 남았을 만한 고전 영화 중 하나. 그런데 나는 이 영화를 이제까지 아끼고 아꼈다. 스크린에서 보게 될 날이 있을 거야! 그때까지 기다릴 거야! 하면서. 그리고 그 기다림은 마침내 찾아왔고, 그토록 오랜 세월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원작 시나리오와 함께 영화가 동시에 2017년 여름에 내게 찾아왔다. 영화는 사실 8월 15일을 즈음해서 그럴 만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기에 특별전을 상영했을 것이다. ‘히로시마’니까.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먼저 읽었다. 아주 오래 전 뒤라스의 거의 자전적인 이야기 <연인>을 읽었을 때처럼 또 한 번 놀랐다. 뒤라스의 글쓰기 재능은 어디까지인가? 이 여자의 대범함, 이 여자의 솔직함, 이 여자의 상처를, 고통을, 그저 상처가 아닌 작품으로 승화하는 능력. 이 여자의 통찰력, 그리고 이 여자의 상상력. 여러 의미에서 놀랐다.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의 놀라움은 <연인>을 읽었을 때와는 또 조금 달랐다. 시나리오를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히로시마, 전쟁, 원자폭탄 이야기를 이렇게도 전할 수 있구나. 아름다운데도 그 참혹함은 생생하게 전해진다. 그 힘은 대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글로만 먼저 읽었을 때도 이 짧고 건조한 시나리오에서 통렬한 아픔을 느꼈다. <히로시마 내 사랑> 속의 ‘그녀’- 그녀의 이야기가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충격으로 전율하고 마음이 몹시 아파왔다. 그런 ‘그녀’가 이 세상에 어디 한두 명일까? 그러다가 ‘그녀’의 비밀, 베일이 완전히 벗겨지는 순간 너무나도 가슴이 아파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뒤라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은 건조한 문체와 뚝뚝 끊어지는 대화, 절대로 친절하지 않은 이야기 전개 속에서도 읽는 이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히로시마의 그 유명한 버섯구름이 피어오르고 남자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당신은 히로시마에서 아무것도 보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그러자 그녀는 말한다. ‘난 전부 다 봤어요. 전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남자와 전부 다 봤다고 말하는 여자. 그런데 남자는 일본인이고 여자는 서양, 정확히는 프랑스 여인이다. 그녀는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지던 날, 히로시마는커녕, 일본에 있지 않았다. 남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일본인임에도 그 또한 히로시마를 직접 겪지는 않았다. 그때 그는 다른 곳, 그러니까 ‘전쟁터’에 나가 있던 터였다.

그런데 그들은 이제 수년이 흐른 뒤에 히로시마에서 이렇게 만났다. 그리고 그들의 육체- 건조한 육체는 서로 뒤엉켜있다. 뒤라스의 시나리오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한창 사랑을 나누는 중이거나 죽음에 가까운 고통에 사로잡혀 있는 몸, 처음에는 재 가루, 이슬, 원자폭탄으로 인한 죽음의 너울로 뒤덮였다가 그 다음에는 정사 후 땀으로 뒤덮인 몸이 보인다.’  뒤라스의 말대로 ‘지리적으로, 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인종적으로 등등 최대한 거리가 먼 두 사람에게 히로시마는 에로티시즘, 사랑, 불행의 보편적인 소재들이 가차 없는 조명 아래 모습을 드러내는 공통의 장소’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윽고 여자의 입에서 히로시마 말고도 또 다른 도시의 이름이 등장한다. ‘느베르’- 프랑스 루아르 강 근처의 한 작은 마을. 그녀는 그곳 출신이다. 히로시마와 느베르. 일본 남자와 프랑스 여자. 그 둘이 만났다. 그래서?

원자폭탄이 떨어진 뒤 한참 세월이 흐른 히로시마. 그녀는 평화를 기리는 영화를 찍기 위해 히로시마에 온 프랑스 여배우다. 그녀는 왜, 히로시마에, 히로시마라 부르는 그 남자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그것은 모두 그녀가 온 곳 ‘느베르’와 관련이 있다. 느베르와 히로시마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녀에게서 ‘느베르’를 읽지 못한다면, 읽어내지 못한다면 히로시마도, 그녀도, 그리고 느베르도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녀는 ‘느베르’에서의 기억 때문에 자신이 히로시마를 보지 못했어도 전/부 다 봤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그 남자를 히로시마라 부르며 짧은 순간이지만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뒤라스의 이 매혹적인 원작을 읽은 뒤 마침내 레네의 영화를 만났다. 뒤라스가 너무나 친절할 정도로 모든 장면과 인물 묘사까지 세세하게 그렸기에 레네의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은 텍스트를 스크린에 매우 충실하게, 그러나 그 나름의 또 다른 독창성을 담아내어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원자폭탄과 전쟁의 폐허, 인간의 광기를 다루는 것 같으면서도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하는 듯하고, 짧지만 강렬한 어느 남녀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전쟁의 참혹함을 이야기하는 듯한, 이 강렬하고도 묘한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이 빼어나게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그러나 또 다른 의미로는 그래서 아프고 고통스러운 <히로시마 내 사랑>은 뒤라스의 시나리오도 레네의 영화도 무엇이 더 좋고 덜 좋고를 논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하나의 작품을 이룬다.

<히로시마 내 사랑>은 전쟁의 고통과 참혹함을 이야기한다고 상투적으로 말하지는 않겠다. 그토록 닳고 닳은 표현으로 이 작품을 말하기에는 뒤라스의 시나리오가, 그리고 레네의 영화가 너무나도 아름답고 훌륭하기 때문이다. 그저 히로시마와 느베르, 그와 그녀, 또는 나와 당신의 일상이 전쟁으로 어떻게 일그러지고 또 그것이 제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이 지구의 수많은 그 또는 그녀들의 삶이 어떤 형태로든 이어져 하나의 버섯구름이 어떻게 개개의 인간에서 비구름이 되어 내리는지 조용히 전해줄 뿐이라고. 느베르가 히로시마를 불렀듯이 느베르가 히로시마를 기억하여 고통스러워하듯이, 그러나 망각 속으로 히로시마가 서서히 사라지듯이 인간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담담히 전해줄 뿐이라고.




그녀는 '느베르' 그는 '히로시마'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 장면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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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의 금기를 찾아서 살림지식총서 136
강성민 지음 / 살림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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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는 참 이상한 공간이다. 가장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학문의 공간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선후배, 교수 학생이라는 서열 중심의 권력관계를 통해 대부분의 생활들이 통제된다. 후배는 선배에게 복종해야 하며, 학생은 교수에게 복종해야 하며.... 그러다보니 정작 선배나 교수에게 할말이 있어도 그냥 참아버리기 일쑤이며 혹시라도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는 왕따가 되고 만다.

이런 고질적인 서열문화의 병폐는 ‘학문’과 결탁하면 더 심각해진다. 절대로 후배는 선배의 학문적 업적을 비판해서도 안 되고, 제자는 스승의 학문적 업적을 비판해서도 안 된다. 이것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더 심각해진다. 석사 논문을 따기 위해서 일단 지도교수를 선택하는 순간부터 그렇다. 그 지도교수가 지정해주는 몇 개의 주제들을 벗어나서도 안 되고, 논조부터 참고할 서적들까지 교수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형편에 청출어람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석사, 박사 과정을 밟는 이들이 대학에서 시간 강사 자리라도 찾을 심산이면 이런 눈치 보기는 더 심해 질 수밖에 없다. 학문의 고질적 병폐. 그중에서 가장 심한 장유유서와 인맥주의 문화로 인한 스승에 대한 제자의 비판 불가침-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이 책은 시작한다. '우리 학계의 금기를 찾아서'

'스승 비판 / 전공불가침의 법칙 / 논문 형식의 실험 / 이성의 세계에서 추방된 주제들 / 생존 인물에 대한 탐구 / 진보 없는 보수, 보수 없는 진보 / 김우창 혹은 학제성 / 참을 수 없는 생태의 비생태성 / 문화비평에 ‘문화’와 ‘비평’이 없다 / 대중적 글쓰기의 허구성 / 근대성 콤플렉스'의 주제들로 나눠져 비교적 신랄하게(?) 비판을 가한다. 물론 그래서 어떻게 해야하나? 라는 물음에는 여전히 답을 주지 못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전공불가침의 법칙은 예를 들면 이렇다. 국문학을 전공한자가 사회학적인 주제에 관해 신문이나 칼럼 기고를 했다 치자, 그것이 또 나름대로의 비판적인 글이라면 보통 사회학 관련 분야의 학자들에게서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또는 “국문학 전공자가!”라며 일축해버리는 경향을 말한다. 비단 같은 전공 내에서도 그렇다. 동양철학 전공자가 서양철학 전공자의 학문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 혹은 그 반대 등등의 현상에 거의 모든 학계의 반응은 “전공자도 아니면서, 전문가도 아니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입만 나불댄다”라는 식. 이런 현상으로 학문 간의 자유로운 경계 넘기를 통한 풍부한 질적 논의는 이루어질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논문 형식도 그렇다. 석사 논문을 보자. 대부분 지도 교수들이 즐겨 쓰는 논문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속된말로 ‘내용이 부실하면 형식이라도 제대로 갖춰라, 그러면 통과된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다. 에세이 수준의 논문 형식은 논문이 아니라며 신변잡기식 칼럼 란으로 실려 버리는 현상들. 형식주의와 체면중심 겉치레 중심의 문화가 '논문 형식' 지키기에서도 꾸준히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자간, 장평, 글자 포인트 하나하나까지 맞추느라 진땀 뺀 기억을 돌이켜 보면 나 또한 정말 구역질이 나올 정도다.

생존 인물에 대한 연구가 금기처럼 되어 있는 현실도 그렇다. 일찌감치 강준만이 <인물과 사상>에서 인물 비평을 시작한 것에 대해 학계에서 인물 비판이라고 들고 일어선 것이 단적인 예다. 물론 한 인물의 학문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인격적 비판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살아있는 인물 건드리는 행위가 반역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에서 과연 살아있는 학문적 업적이 나올 수 있을까?

문화비평에 관한 부분이나 대중적 글쓰기의 장에 와서는 더욱 공감하게 된다. 인터넷의 발달로 ‘문화’에 대한 말빨만을 세우는 논객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졌는데, 진정 ‘문화’에 대한 ‘비평’은 사라졌다. 보통 개성적인 혹은 특이한 말투나 문체들을 앞세워 영화나 대중 문화에 대한 '똥침 놓기' 정도의 수준으로 그치고 만다. 문화 비평이 진정한 비평이 되기 위해서는 실천적인 행동이 따라야 하는데, 지금의 우리 ‘문화 비평’은 논객들의 말빨 세우기에 그치고 있다는 점.

과연, 단지 쉽게 쓰는 것만이 능사인가 하는 문제도 제기된다. 대중적인 글쓰기를 통해 결코 예전 같으면 건드리지 못했을 학문적 영역도 쉽게 대중에게 읽히고, 팔려나갈 책으로 둔갑해서 이런 책들이 서점가를 우후죽순으로 뒤덮고 있다. 하지만 쉽게 대중적인 글쓰기 = 학문의 얕은 탐구에 대한 면죄부처럼 남발되고 있는 경향에 대한 비꼼은 이런 종류의 책 양산에 한몫하고 있는 몇몇 학자들이 꼭 읽어보아야 할 듯 하다.

금기를 깬 자 그 자신이 금기가 된다는 이 책의 구절처럼 스승비판 불가침의 금기를 깨려다 학계의 왕따가 되고만 이명원의 예를 보면, 한국 땅에서는 진짜 올곧게 학문*만*하기란 참 힘든가 싶기도 하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이 참에 싹 접어야 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아닌 것을 아닌 것이라고 말 못하고 내용보다는 논문 형식에 절절 매면서 골머리 썩을 생각을 하고, 그러면서 또 강사자리 하나 남을까 하여 되지도 않는 인맥을 눈치 보며 만들 생각을 하면. 그저 이렇게 읽고 싶은 책 읽으면서 사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자기 위안을 해보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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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8-23 13: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배웠다는 넘들, 학계가 저런데 인터넷 블로그계, SNS계는 어떻겠나요? 허접한 비논리/무논리, 뜬구름 잡기식의 공허한 글에 대해 지적하고 열폭질에 대해 비판하면, 세상 참 피곤하게 산다고 비아냥대기나 합니다. 그들의 반박이란 게 고작 내가 내 맘대로 쓰는데 뭔 오지랖질이냐, 걍 내비둬, 니나 잘햐, 이딴 식입니다. ㅎㅎㅎ 우리 한국 찌질이들은 다 똑같다고 봅니다. 아래나 위나 찌질이인 건 마찬가지란 것이죠. 아직 민주주의 역사가 72년쯤밖에 안 됐으니까 당연하다고 봅니다. 우리는 우리를 과소평가하는 경우도 많지만 과대평가하는 경우도 정말 많습니다. 그 수준에서 놀아야죠 뭐~ ㅎ

갈 길이 멉니다. (← 이 문장은 댓글을 입력하려는 순간, 메이저 리그 야구 텍사스 레인저스 대 LA 에인절스 경기 중계 캐스터가 “갈 길이 멉니다” 하더라고요. 왠지 딱 맞아떨어지는 ‘멘트’인 것 같아서 적어넣었어요. ㅋ)

잠자냥 2017-08-23 13:2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qualia 님 글을 RSS 리더기로 잘 구독하고 있는데, 이렇게 댓글 남겨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암튼 qualia 님 서재에서 하시는 말씀 구구절절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 댓글도 그렇고요. ㅎㅎ

2017-08-23 14: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 크툴루의 부름 외 1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7
H. P. 러브크래프트 지음, 김지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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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둔지는 꽤 됐는데 이제야 읽었다. 몇 년 전, 도서정가제 시행을 앞두고 온라인 서점에서 폭탄 세일하던 그때. 현대문학세계단편선을 싸게 구입할 수 있던 그 시기에 1권부터 10권까지 세트로 사두었다. 그 시리즈 안에는 러브크래프트의 단편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나는 이른바 장르소설을 크게 좋아하지는 않아서 러브크래프트의 유명세는 익히 들었어도 여태까지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다. 요즘 날이 몹시 무더워서 그런가, 뭔가 흥미진진하면서도 오싹한 공포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책이 필요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러브크래프트 단편선에 자연스레 손이 간 것이다. 두둥!

이 책을 읽기 시작했던 그날, 공교롭게도 집에는 고양이들과 나만 있었다. 고양이들은 이미 쿨쿨 잠든 시간이었고, 나는 방마다 불은 다 끄고 에어컨 때문에 방문은 닫지 않은 채, 이 책을 읽고 있었다. 물론 책을 읽던 방은 불을 켰지만 불이 켜진 곳에서 방문 밖을 바라보면 어둠에 잠긴 집안 풍경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아니, 왜 이 글을 쓰면서도 책상에서 갑자기 뒤를 돌아보는 것인지?! 하하하하 - 아! 생각만으로도 무서워. 앞쪽에 실린 두 작품 ‘랜돌프 카터의 진술’과 ‘에리히 잔의 연주’만 읽었는데 난 자꾸 방문 밖을 힐끗힐끗 쳐다보게 되었다. 왠지 문 밖에 뭔가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양이 녀석들이 모두 다른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어쩐지 내가 있는 방으로 데려오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침이 바짝 말라왔다. 세 번째 작품 ‘시체를 되살리는 허버트 웨스트’를 읽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가 스윽 내게 다가왔다. 진심으로 깜짝 놀라 앗! 소리를 질렀더니 나보다 더 놀란 고양이가 꺄옹 거린다. 아! 녀석, 언제 이렇게 소리도 없이 다가와서는 날 깜짝 놀라게 하는 거야! 그날 밤 나는 고양이 세 마리를 모두 방 안으로 불러와서 몽땅 끌어안고 잤다. 그런 밤, 새벽녘에 문득 고양이가 일어나 저 방문 너머를 바라보면서 아무것도 없는데! 하염없이 냐옹 거린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공포였으리라.

어릴 적에 나는 무서운 걸 잘 보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은 생겨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빼꼼 고개를 내밀고 공포 영화나 귀신 나오는 드라마를 보곤 했다. 납량특집 같은 것들. 그런 밤에는 한여름에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잤다. 발가락 하나라도 이불 밖으로 나가면 그 발가락을 귀신이 스윽 만질 것만 같았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이불을 절대 벗어 던지지 못했다. 말 그대로 ‘이불 밖은 위험해’였던 것이다.

러브크래프트의 단편들은 그 어린 시절의 이불 밖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그때 내 머릿속에 이불 바깥은 온통 공포로 가득한 세계였다. 무언가 형태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습으로, 어떤 무시무시하고 엄청난 공포의 실체가 존재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존재는 내가 이불 밖으로 발가락이나 손가락 하나만이라도 내놓는 순간 낚아챌 것만 같았다. 러브크래프트의 단편을 읽노라면 정말로 어디선가 그런 존재가 나를 줄곧 지켜보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으스스하다. 한밤중에 읽는다면 꿈자리가 뒤숭숭할 수도 있다.

삶의 가장자리 너머에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는 공포가 도사리고 있으며, 가끔 사악한 인간이 그 공포를 우리의 삶 안으로 불러들이기도 한다. -<현관 앞에 있는 것>, 277쪽

공포가 반드시 어둠, 정적, 고독에서 비롯된다는 통념은 오해에 불과하다. 나는 백주 대낮에, 시끌벅적한 도심 한복판에서, 그것도 흔하디흔한 어느 허름한 하숙집 안에서 평범한 주인아주머니와 일꾼 남자 두 명과 함께 있는 도중에 공포를 경험했다. -<냉기>, 209쪽


러브크래프트는 일찍이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감정은 공포다. 그리고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공포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다.’ 이렇게 정의 내렸다. 이처럼 공포에 대해 탁월한 통찰력을 지녔기 때문인지, 그의 작품은 기분 나쁠 만큼 자극적인 묘사가 없는데도 분위기 하나만으로도 섬뜩한 두려움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 공포의 대상은 주로 우리가 딱히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것, 그게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미지의 것’인 경우가 많다. 도무지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이성적으로 과학적으로도 설명할 수 없기에 두렵고 무서운 것들이다.

분광기로 분석할 수 없는 기묘한 색깔일 수도 있으며(‘우주에서 온 색채’), 기하학으로 측정이 불가능한 어떤 공간이기도 하다(‘크툴루의 부름’), 또 때로는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기묘한 소리(‘에리히 잔의 연주’)이기도 하고,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리(‘그 남자’)이기도 하다. 알 수 없기에 두렵고, 그 존재를 마주하거나 인식하게 되더라도 인간의 이성이나 과학으로는 도저히 설명불가능한 현상이거나 존재이기에 그 존재를 알게 되더라도, 여전히 두려운 대상으로 남고 만다.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 즉 영원한 앎의 미해결 상태인 것이다.

러브크래프트는 사람의 심리를 옥죄이는데도 빼어나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게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하지만, 차츰 뭔가 이상한 전조가 보이고, 그런 전조에 따라서 조금씩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인간의 호기심은 늘 그 기이한 일을 무시하지 못해서 다가가서는 안 될 그 대상에 점점 접근한다. 등장인물이 그렇게 행동할수록 독자의 심장 박동 수는 점차 빨라진다. 또한 마을이나 집처럼 어떤 장소를 설명할 때 눈앞에 그려지듯 생생한 묘사와 함께 신화와 과학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기에 러브크래프트의 이야기는 한결 더 설득력을 지닌다. 그렇기에 오늘날까지 문학을 넘어서서 온갖 대중문화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게 아닐까.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은 단순한 읽는 재미를 넘어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알지 못하는 것, 미지의 것을 인간이 두려워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미지의 것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끔찍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공포를 불러일으킬 만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 두려움의 근본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묵직한 질문.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니 세상 저 너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공포란 영원히 더불어 살아야 할 감정이리라. 러브크래프트는 인간의 그 근원적 감정을 집요하게 두드린다. 지금, 당신의 현관 밖에 무엇인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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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8-08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대문학이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 선집‘을 출간했으면 좋겠어요. 황금가지에서 나온 책이 있는데, 그 책에는 제가 정말 읽고 싶은 스미스의 소설이 없습니다. ^^;;

잠자냥 2017-08-08 14:10   좋아요 1 | URL
이 글을 쓸 때 안 그래도 러브크래프트 마니이신 cyrus 님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ㅎㅎ 현대문학이 계속 꾸준히 국내에 잘 소개되지 않은 작가들의 단편선을 소개하고 있으니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