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붐비는 출근 시간에 생산 수단에 참여 하지 않는 연령대의 사람들,
그러니까 한눈에 딱 보기에도 에헴- 하고 뒷짐지고 타는 노인들을 보면, 그리고 그 노인들이 피곤하게 앉아 있는 학생이나 직장인들
앞에서 자리 내놓으라는 듯이 에헴, 에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속으로.. ‘저 노인은 진짜 지금 나와야 하는 것일까?
조금 늦게 나와도 되잖아? 꼭 이렇게 붐비는 아침에 나와서 저리도 피곤한 사람들 자리 뺏어야 속이 시원할까’ 이런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하게 된다.
초중고등학생들의 소풍도 꼭 붐비는 아침 출근 시간에 함께
이동해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싶다는 생각과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한 10시 이후에 움직이면 서로 덜 붐비고, 덜
복작대고, 덜 피곤하고 좋지 않아? 하는 생각.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내 머리 속에 이런 생각은 좀 위험한 생각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모든 근거의 기준이 그가 지금 ‘생산’적인 사람인가, ‘비생산’적인 사람인가 라는 것으로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을 하는 사람, 뭔가를 생산해내는 사람, 그러니까 그래서 피곤한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덜 피곤하게 덜 생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바쁜 시간은 좀 피해주지, 라는 매우 이기적인 생각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생각을 당연하단 듯이 하고 있는 나를 보며 퍼뜩, 놀라게 한 책이 한 권 있는데 바로 마르셀 에매의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Le
passe-muraille)’였다. 마르셀 에매의 작품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아이들 ‘동화’스럽다는 평가도
있는 반면, 그렇기 때문에 좋다라거나 뛰어난 상상력을 통해 알고 보면 ‘어른’들이 꼭 한번은 생각해 볼 문제들을 감칠 맛나게
짚어준다는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나는 에메의 작품 중 이 소설보다 먼저 읽었던 ‘착한 고양이 알퐁소’에서 좀
많이 ‘동화스럽다’라는 느낌을 받았던 터라, 이 책도 그냥 크게 기대는 하지 않고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은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도 그렇지만 ‘생존 시간 카드’ 하나 만으로도 꼭 한 번은 읽어 볼 만하다. 한 도시에서 식량과 생필품
부족에 대처하고 노동계급의 수익 향상을 위해 비생산적인 소비자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제도를 시행하기로 하면서, 이 소설은
시작한다. 그게 바로 ‘생존 시간 카드’-
저 기준에 따라서 생존 시간을 얼마 부여 받지 못하는 사람들로 노인,
퇴직자, 실업자, 기혼여성(일을 하지 않는 집에서 기거하는 기혼여성도 포함된다), 게다가 예술가와 작가들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이 부분생존자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생존 시간 카드를 배급 받게 된다. 한 장의 카드가 24시간의 삶. 어떤 이는 10장,
어떤 이는 15장 어떤 이는 30장 이런 식으로. 15장을 받은 사람은 한 달을 기준으로 15일만 살게 되는 것이고, 나머지는
일시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매달 1일이 되면 그 일시적인 죽음의 상태에서 깨어나게 되고… 그래서, 이 생존 시간
카드 제도를 시행하게 된 저 사회가 어떻게 되었을까? 답은 하나. 당신이 상상해보거나, 직접 읽어보거나.
결국, 생산적이다, 비생산적이다, 라는 것을 과연 누가, 어떤 근거로 정의 내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하다못해 예술적인 작품을 생산해내는 예술가도 글을 쓰는 작가도 ‘무엇인가’ ‘생산’해내는데 그들의 기준대로라면 생존
시간 카드는 고작 몇 장에 지날 뿐이지 않는가. 집안에서 가사노동을 하는 기혼여성도 틀림없이 일을 하지만 ‘생산’하는 것이 없다고 또
몇 장의 생존 카드만 받게 되는 게 아니던가.
인간의 삶 자체를 그 인간이 생산적인 일을 하는가, 마는가, 즉
쓸모 있고, 없음에 따라 죽음과 삶의 시간 자체를 그 누군가가 부여한다는 발상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할 수 있는지, 이 책은
그리 많지 않은 분량 안에서 귀신같이 그려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