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세니예프의 인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3
이반 부닌 지음, 이항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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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읽어봤어?” 단편을 좋아하는 나에게 언젠가 J가 어떤 책을 건넸다. 러시아 단편 소설을 묶은 <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라는 책이었다. 제목부터 아름다웠다. 책을 훑어보니 몇몇 작품은 이미 읽어본 작품들이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J는 콕 집어서 ‘추운 가을’이라는 작품을 읽어 보았느냐고 한 번 더 물었다. 이반 부닌. 처음 들어보는 작가였다. ‘아니’라고 말하니, ‘꼭 읽어봐’ 한다.

그때는 바로 읽지 않았던 것 같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 그 작품이 문득 떠올라 책장을 넘겼다. 그 단편을 다 읽었을 무렵, 가슴에서 무언가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헤어지게 된 연인의 이야기로 매우 짧은 단편이었지만 완벽했다. 체호프를 좋아하던 내게 이반 부닌이라는 이름은 그 작품 하나로 각인되었다. 체호프보다 서정적이잖아? 그랬다. 체호프와 비슷하면서도 체호프에게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었던 낭만과 아름다움이 부닌의 작품에는 있었다. 그 뒤 기회가 닿는 대로 이반 부닌의 작품을 모았다. 하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 그의 작품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출간된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은 그런 목마름을 채워주고도 남는 작품이다. 물론 이반 부닌은 단편만으로도 문학이 줄 수 있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아니 어쩌면 단편이기에 더 아름답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아르세니예프의 인생> 또한 그러할까? 반신반의 하면서 책장을 넘겼다. 몇 쪽 읽지도 않았지만 이미 내 마음에서는 ‘아름답다’는 단어가 몇 번이나 맴돌았다. 부닌의 문장은 시(詩)와 같다. 그의 문장에는 어릴 시절의 향수가 담겼고 잃어버린 유년 시절의 그윽한 추억이 담겨있다. 볕에 잘 말린 포근한 이불 속에서 뒹굴 거리던 다락방이 떠오르기도 하고, 또 때로는 비오는 날 촉촉이 젖은 나뭇가지들을 창밖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아름다운 문장들로 부닌은 한 청년의 이야기를 그려간다. 그의 이름은 아르세니예프- 몰락한 귀족 집안에서 나고 자라 문학을 사랑하고 글을 쓰며 살고 싶어 하는 ‘문학청년’이다. 그의 일생이 어린 시절부터 유년 시절, 십대를 거쳐 청년에 이르기까지 조용하고 담담하게 펼쳐진다. 특별하게 큰 사건이나 어떤 극적 전개가 그려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 러시아 몰락한 귀족 집안의, 문학을 꿈꾸는 한 청년의 삶이 왜 이토록 멀리 떨어진 시대를 살고 있는 나에게도 큰 울림을 주는 것일까.

아마도 아르세니예프 그의 삶이, 그가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우리 모두가 삶을 바라보는 태도이자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이러저러한 보편적인 느낌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하지만 가족의 사랑이 평범하게(그리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존재하는 집안에서 자연을 벗삼아 자유롭게 자라나고, 조금은 괴롭고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학교생활을 어쩔 수 없이 시작하고, 서서히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언인지 깨달아 그것에 몸담게 되는 삶. 물론 그런 가운데 가족이나 주위의 비난이 있기도 하고, 또 때로는 조용한 지지가 따라오기도 한다.

물에 젖은 잡초를 헤치며 채소밭으로 달려가 무를 뽑아서 짙푸른 진흙이 묻어 있는 무 꼬랑지를 탐욕스럽게 깨물던 순간, 그런 순간은 내 인생에서 드물었다..... (27쪽)

“넌 나이가 들면 어딘가에 취직해서 일을 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갖게 되겠지. 또 조금씩 저축해서 집을 살 거야.” 갑자기 나는 미래의 온갖 공포와 비속함을 너무나 생생하게 느끼고 울음을 터뜨렸다..... (63쪽)

그렇게 그는 자라고 성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인생의 비밀- ‘나는 나의 삶이나 다른 이들의 삶이 낮과 밤, 일과 휴식, 만남과 대화, 이따금 사건이라 불리는 기쁨과 불쾌함의 교차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삶이란 인상, 장면과 형상들의 무질서한 축적이고, 이 가운데 가장 하찮은 것들만이 우리 마음속에 남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235쪽)’을 깨달아 간다.

그 또한 사랑이라고 부르기는 애매한 열정에 휩싸이기도 하고, 순간적인 정열에 매혹당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운명처럼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리카.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의 제5권 제목을 ‘리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을 만큼 ‘리카’는 이 작품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왜냐하면 아르세니예프는, 리카를 사랑함으로써 인생의 뼈아픈 진실을 더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 모든 사람은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봐 늘 두려워한다! (21쪽)’는 그러한 진실....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을 읽노라면 인생의 아름다운 한때, 찬란했던 한때가 언젠가는 사라지고, 그 순간이 소멸해서 기억 속으로 차츰 퇴색해 갈 것을 모두가 알기에, 그 찬란한 한때를 마주하고 있는 순간에도 어쩐지 슬픔이 밀려온다. '진흙 묻은 무 꼬랑지를 탐욕스럽게 먹던 시절'은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다시없을 아름다운 한때임을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알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떨리는 첫 만남도, 또 오해로 인한 고통스러운 다툼도 그 순간은 그저 삶을 이루는 한 부분이겠거니 생각하겠지만, 지나고 나면 영원히 다시 올 수 없는, 그렇기에 더없이 아름다운 한때임을 이 책을 읽는 우리는 안다. 그래서 왠지 부닌이 그려내는 이 사소한, 보잘것없어 보이는 한 청년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가슴으로 절절히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아, 내 인생도, 내 삶도 그러하지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봐, 사랑하는 그 모든 것들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하면서 사는 삶이지만, 그렇기에 그 순간을 충실히 보내야 한다고. ‘세상과 인생에 대한 사랑,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아름다움에 대한 달콤한 사랑이 안겨준 지극한 부드러움과 고통을 느끼면서(176쪽)’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우리 삶에 ‘리카’로 부를 수 있는 그 모든 순간은 오직 그때만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은 이반 부닌 그 자신으로 볼 수 있는 ‘아르세니예프’ 한 문학청년의 삶을 그리고 있기에 어떤 면에서는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스토너의 삶은 줄곧 황량한 고독으로 이어지다 마침내 문학 속으로 침잠했다고 한다면 아르세니예프의 삶은 그와는 조금 다르다. 그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만 같은 그런 평범한 순간들을 살며 문학을, 글을 쓰는 자신을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은 평범했지만 촘촘히 아름다운 한때로 이어져 있다. 또한 다시 오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슬프도록 아름답다. 아마도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이반 부닌의 서정성 짙은 문체가 큰 몫을 했으리라. 부닌은 그의 작품이 주는 울림과 깊은 감동에 비해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조금 알려졌다. 더 많은 이들이 그의 아름다운 작품을 만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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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8 1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18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18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18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케이 2017-11-30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안녕하세요. 이상하게 회사가 갑자기 너무 바빠지는 바람에 알라딘 블로그도 버려두고 이러고 있네요. 처음 시작할 때는 밀리지 말고 쓰리라 결심했는데... ㅜㅜ
잠자냥님이 이 책에 대해 쓰신 걸 보고 예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드디어 어제 다 읽었어요. 정말 아름답고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소설이었어요. 좋은 소설 소개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잠자냥 2017-11-30 13:06   좋아요 0 | URL
네~ 요즘 글이 안 보여서 바쁘신가 했어요. ㅎㅎ 이 책 정말 아름답죠! 두고두고 읽어도 좋을 그런 책이었어요. 쌀쌀한 날씨 감기 조심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