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날마다 축제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주순애 옮김 / 이숲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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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헤밍웨이의 에세이집으로 그가 젊은 시절 파리에서 머물던 몇 년 동안의 기록이 담겨있다. 헤밍웨이는 1921년부터 26년까지 파리에 거주하면서 글쓰기에 몰두했다. 당시 그는 젊지만 가난했고 미래는 어쨌든 불투명했다. 헤밍웨이는 자기 글에 대한 확신은 있었을지 몰라도 자신이 훗날 그렇게까지 유명한 작가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에는 헤밍웨이가 머물던 파리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과 제임스 조이스, 에즈라 파운드, 거트루드 스타인, 피츠제럴드 등 그가 그곳에서 만난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경마에 대한 그의 집착은 물론 그의 첫 번째 아내 해들리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존과의 일상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헤밍웨이의 어린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갖가지 사진도 실려 있는데 이런 사진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감동받은 것은 헤밍웨이가 글을 쓰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자기 자신을 다독였는지, 그리고 꾸준히 치열하게 글을 쓰며 하루를 보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헤밍웨이를 인간적으로 크게 좋아할 수는 없지만 그의 글에 대한 태도만큼은 존경스럽다. 마음에 드는 글을 쓴 후에는 자기 자신에게 맛있는 빵과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상으로 주는 모습에서는 슬며시 웃음도 난다.

헤밍웨이는 매일 카페에서 글을 쓰고 그 후에는 그 글에 대해 잊기 위해 열심히 다른 책들을 읽었다. 쓰고 읽고 걷고 보고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사랑하고…. 파리에서 그가 보낸 시절을 요약한다면 이런 단어들로 정리할 수 있으리라. 비록 항상 허기를 느낄 만큼 가난했지만 이 에세이 속에서 헤밍웨이와 그의 첫 아내 해들리는 무척 행복해 보인다. 사람이 살려면 이렇게 살아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비록 돈에 쪼들리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그런 삶.

이 책을 읽다 보면 헤밍웨이뿐만 아니라 당시 파리에서 머물던 예술가들의 삶을 엿보는 기회도 주어진다. 비록 헤밍웨이의 시점으로만 바라본 그들의 삶이라 ‘공정하고 객관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 나름대로 재미있다. 또한 헤밍웨이가 읽은 책과 그 책을 쓴 작가들에 대한 그의 생각도 엿볼 수 있는데, 캐서린 맨스필드에 대한 헤밍웨이의 평가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크게 웃고 말았다. 나는 맨스필드 단편의 읽으면서 좋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왜 그녀의 단편이 그토록 높게 평가받는지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는데, 그녀에 대한 헤밍웨이의 평을 읽으면서 묘하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우리가 파리로 오기 전 토론토에서 나는 캐서린 맨스필드가 대단히 훌륭한 단편소설 작가라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실력을 갖춘 노련한 외과의처럼 간결하고 명쾌하게 글을 쓰는 체호프와 비교하면 그녀는 억지로 머리를 짜내 이야기를 꾸며 내는 겉늙은 여류 작가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맨스필드는 알코올을 뺀 맥주와 같았기에 차라리 맹물을 마시는 편이 나았다. 반면에 체호프는 투명하다는 점만 빼면 물과는 전혀 달랐다. 그의 작품 중에는 언론 기사문 같은 글도 더러 있었지만, 놀랄 만큼 뛰어난 작품도 여럿 있었다. (128쪽)


피츠제럴드와 그의 아내 젤다에 관한 에피소드도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헤밍웨이가 기록한 피츠제럴드나 젤다에 관한 에피소드를 통해 보자면 이 부부는 상대하기 참 난감한 사람들 같다. 만약 내 주변에 피츠제럴드나 젤다 같은 사람이 있다면 난 그들을 친구로 곁에 두지는 않으리라. 그들은 항상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징징대고 칭얼대는 느낌이랄까. 피츠제럴드와 젤다가 함께 하면서 서로를 갉아먹은 이야기는 피츠제럴드의 소설 <밤은 부드러워>의 소재가 되기도 했는데 나는 이 작품도 읽는 내내 지루했다. 헤밍웨이가 유일하게 극찬한 피츠제럴드 작품이라는데 어쩐지 우정 때문에 마지못해 치켜세워줬던 건 아닐까 싶기도.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헤밍웨이는 작가적으로 자기보다는 일찌감치 인정받고 성공해있던 피츠제럴드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조금은 시기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한 사람(헤밍웨이)은 상당히 마초적인 남자이고 한 사람(피츠제럴드)은 여성적이고 유약한 사람이니 이 두 사람이 친구로 함께 지내기란 애당초 좀 힘들어 보이기도 한다.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의 이런 징징대는(?) 성격을 못 견뎌한 것 같고, 어떤 면에서는 그런 징징대는 모습을 비아냥대기도 했다. 헤밍웨이 자신은 절대 그런 의도로 쓴 게 아니라고 우길지도 모르겠으나 ‘젤다의 고민’이라는 에피소드는 결정적으로 그런 의혹을 더욱 크게 한다.



자넨 내가 젤다 외에 다른 어떤 여자와도 성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잖나.”
“아니, 난 몰랐는걸.”
“내가 전에 얘기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닐세, 자넨 내게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네.”
“내가 자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바로 그 문제야.”
“좋아, 뭔지는 모르지만 말해봐.”
“젤다는 내가 신체 구조상 어떤 여자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면서 그게 바로 그녀가 근본적으로 내게 불만을 느끼는 이유라고 하더군. 그녀는 그게 크기의 문제라고 하더라고. 그 말을 들은 뒤로는 결코 예전처럼 느낄 수가 없어서 난 진실을 꼭 알아야겠어.” (207쪽)


그렇다! ‘젤다의 고민’이란 바로 피츠제럴드의 성기가 작다는 것이다! 피츠제럴드는 이 때문에 고민이라며 헤밍웨이에게 상담을 해오고 헤밍웨이는 화장실까지 따라가서 피츠제럴드의 ‘그것’을 직접 보고는 결코 작지 않다고 다독여준다. 그래도 불안해하는 피츠제럴드를 위해 루브르 박물관의 조각상들 크기는 다 그렇다며 안심시켜 주지만 피츠제럴드는 여전히 못미더워하고 그런 그를 결국 루브르 박물관까지 끌고 간다. 그렇게 해서 계속 피츠제럴드를 안심시켜 주지만…. 결국 이 에피소드를 통해 헤밍웨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피츠제럴드의 그것은 작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라는 게 아닐까?

헤밍웨이가 평생 자신의 남성성을 입증해보이려고 안간힘을 쓴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저 이 이야기도 한 번 웃고 넘어갔을 테지만, 글쎄….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의 남성스럽지 못한 면모(여자처럼 늘 징징대더니 알고 보니 ‘그것’도 작은 인간!)를 들춰냄으로써 교묘하게 깎아내리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어쩐지 헤밍웨이도 참 치졸하게 느껴지고, 이런 이야기를 이토록 여과 없이 만천하에 공개해도 되는 걸까 싶기도 하다. 자기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온전히 자신만의 이야기는 아니지 않은가?

이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해들리와 파리에서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나날을 보냈어도 결국 다른 여자에게 빠져버리는 헤밍웨이의 모습도 만날 수 있다. 헤밍웨이는 담담하고 고통스럽지만 무척이나 낭만적이게 그때의 일을 회고한다. 그러나 글쎄, 결국 아내를 곁에 두고 아내 모르게 다른 여자와 놀아난 이야기일 뿐이다(문제의 이 여자는 헤밍웨이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 이 에피소드를 읽으면 글 잘 쓰는 사람은 자기변명도 참 멋지게 하는구나 싶어서 씁쓸해지기도 한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읽은 소감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파리는 아름답고 인간들은 찌질하달까? 그러나 결국 그 ‘파리’를 멋들어지고 생동감 있게 하는 요소 중에 이런 찌질한 인간들을 빼놓을 수 없으니 인생은 참 오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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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0-16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도 그렇고 예술가들도 모여서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면 찌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카페에 모인 인상파 화가들이 그랬습니다. ^^

잠자냥 2017-10-16 14:05   좋아요 0 | URL
ㅎㅎ 어디 작가와 예술가만 그렇겠습니까. ㅎㅎ 인간이 모두 그렇지요. ㅎㅎㅎ

케이 2017-10-17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밍웨이가 남성성에 집착하고 여러번 언급한 것이야말로 그가 여자들에게 시원찮다는 증거라는 글을 어디선가 봤는데,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헤밍웨이는 인간적으론 정말 정안가는 인물이예요..; 10년 전에 읽은거라 잘 기억은 안나지만, 밀란쿤데라가 소설 ‘불멸‘에서 헤밍웨이를 대놓고 비꼬는데, 그 부분 읽고 굉장히 통쾌했던 기억이 납니다. ㅋㅋ

잠자냥 2017-10-17 11:56   좋아요 1 | URL
ㅎㅎ 사냥이나 복싱 같은 스포츠에 집착한 것도 그렇고.... 심리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재미난 사람일 거 같아요. 그의 마초성 때문에 저도 헤밍웨이는 그닥 좋아할 수 없는 인간이었는데, 최근에 읽은 어떤 책에서 의외로 괜찮은 면을 발견했답니다. 그 이야기는 곧 다른 리뷰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