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에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는데, 또 다른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노벨문학상을 가즈오 이시구로가 받았다는 메세지였다. 소식을 듣고 조금 뜻밖이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소식을 전한 친구나 나나, 실은 마음속으로는 마거릿 애트우드가 받기를 바랐고, 하루키는 절대 받지를 않길 바랐다. 그리고 둘 다 가즈오 이시구로 작품은 예전부터 좋아했던 터였다. 그래서 우리 둘 모두 나쁘지 않은 소식이라고 생각했다.
그 소식을 듣고 또 하나 떠오른 것은 민음사가 이번에 입 좀 찢어지겠네 하는 생각이었다. 민음사는 모던클래식 시리즈로 일찍부터 가즈오 이시구로 작품을 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리즈를 통해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중 가장 처음으로 <나를 보내지 마>를 읽었고 그 다음에는 <녹턴>을 읽었다. 두 작품 모두 괜찮았기에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남아 있는 나날>을 세 번째로 읽은 기억이 난다. '기억이 난다'라고 말하는 까닭은 사실 이 작품들을 읽은 지 꽤 되었기 때문이다. 다 읽고 난 뒤, 나는 이 작품을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 일에 반기를 들고 싶어졌다. 그 뒤로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었는데 가즈오 이시구로 작품은 편차가 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작품은 꽤 좋지만(<나를 보내지 마>), 어떤 작품은 썩 좋지 않고(<위로 받지 못한 사람들>, <우리가 고아였을 때>), 또 어떤 작품은 과대평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과대평가 된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이 <남아 있는 나날>이다.
<남아 있는 나날>은 이런 종류의 소설을 영화화하는데 탁월한 재주를 가진 제임스 아이보리의 동명 영화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나는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그 영화에서 주인공 ‘스티븐스’ 역을 맡은 안소니 홉킨스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스티븐스’는 집사다. 영국에서는 누구나 알아주는 귀족집안 달링턴가의 충실한 심복이자 집사이며
그는 그러한 자신의 위치에 크나큰 자부심을 지녔다. 그러나 그 달링턴가도 어느덧 쇠망하고 미국인 갑부인 페러데이에게 달링턴 홀과
스티븐스는 넘겨졌다. 페러데이는 한 번도 달링턴 홀을 떠난 적이 없는 스티븐스에게 잠깐 동안의 여행을 권유한다. 고심 끝에
스티븐스는 일주일간의 여행을 떠나고 그 여행길에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그 회고 속에 1920~30년대의 유럽
사회와 달링턴 홀, 그리고 스티븐스의 과거가 잔잔하게 교차하며 이야기는 흐른다.
언젠가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벤타 하인학교>를 읽으며 ‘하인’을 양성하는 학교라는 소재도 그렇지만 스스로 ‘하인’이 되겠다고 학교를 찾은
주인공 보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남아 있는 나날>의 집사 ‘스티븐스’를 보고 있노라면 어떤 면에서는
<벤야멘타 하인학교> 속의 인물을 만났을 때의 당혹감이 느껴진다. 오히려 당혹감은 더 크다고 할까? 어쩔 수 없이
‘계급적’ 위치 때문에 ‘집사’라는 직업을 가질 수는 있을지언정, 과연 인간이 그런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낄 수가 있을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물론 스티븐스는 자신의 의무를 그 어떤 순간에도 놓지 않았던 ‘프로페셔널’한 집사로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큰 듯하지만…. 글쎄 스티븐스의 삶을 지켜보는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어쩐지 그의 자부심은 오히려 끊임없는
‘자기변명’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토록 ‘위대한 집사’로 살아가고자 아버지의 임종도 외면할 수밖에 없었고
사랑하는 사람도 놓칠 수밖에 없던 사람이라니! 얼마나 답답하고 한심한가! 그러면서도 ‘나는 집사로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고
그것은 최선이었다.’며 계속 되뇌는 모습은 끝끝내 비겁해 보일 뿐이다. 게다가 그토록 위대하게 우러러본 그의 주인 ‘달링턴 경’은
또 어떤 사람인가. 달링턴 경이 지시한 일이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묵묵히’ 행동하는 스티븐스는 도저히
인간적으로 좋아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는 어떤 한 사람이고 등장인물에게 몰입이 돼야 하는데 스티븐스는
이런 점에서 공감하기 어려운 주인공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런 답답한 인물을 통해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가치’를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겠지만…. 그의 서정적인 문체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딱히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내가
주인공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다.
스티븐스는 여행에서의 회상을 통해 자기 인생의 어떤 부분은 많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겠지만 그가 ‘남아 있는 나날’에서 얼마나 크게 다른 삶을 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가
여전히 달링턴 홀에서 새로운 주인 ‘페러데이’를 위해 또 다른 봉사를 열심히 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잘못된 부분을 깨달았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까? 그것만으로도 스티븐스의 인생이 헛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기엔
그의 인생이 너무 많이 지나갔고 상대적으로 남아 있는 나날은 참 짧아 보인다.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은 적어도 한두 번쯤은 후회를 하기 마련이다. 그때 그랬다면 어땠을까? 내가 이렇게 살지 않고 그렇게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쓸데없는 가정, 혹은 후회. 무언가 일이 좀 잘 안 풀릴 때 인간은 특히 그렇다. 요즘의 내가 딱 그렇다. ‘잘 못
살아온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불쑥불쑥 자주 찾아온다. 스티븐스와는 정반대의 고민이다. 스티븐스처럼 오히려 ‘일’에
‘프로페셔널’한 사람으로 살아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그런 후회. 정답은 잘 모르겠지만 스티븐스와 비교하면 적어도 나는 그처럼
‘허망한 일’, ‘허상’ 때문에 진짜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살지는 않았다는 위안은 든다. 순간순간 행복하고 즐거웠기 때문에 그
‘순간’을 놓쳤다는 이유로 후회스럽지는 않다. 그런데도 왜 ‘잘 못 살아온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은 계속 드는 걸까. 내
‘지나온 날’은 그런데 내 ‘남아 있는 나날’은 어떻게 살아야할까. 조금 더 일찍 깨달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