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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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아워’라는 말이 있다. 해 뜰 무렵과 해 질 무렵의 시간대를 의미하는 말로 이때는 하늘이 완전히 어둡지도 않고 그렇다고 밝지도 않아 푸르스름한 빛을 띤다. 그때 저 멀리 보이는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순간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때문에 이때를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꿈도 아니고 현실도 아닌 그 어딘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할 수 없는 어렴풋한 시간. 배수아의 <뱀과 물>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블루 아워’를 떠올린다.


배수아의 작품은 오랜만에 읽는다. 오래 전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와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를 읽던 시절, 그 무렵 배수아의 작품에는 어른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어른’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의 인물 중 한 사람은 스무 살을 전후로 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 결국 언제까지나 ‘아이’로 머물게 된다. 또한 이 무렵 배수아의 작품에서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고 개인만 존재한다.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라고 할 수 있는 가정의 모습조차도 굴절되어 있거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오랜만에 읽은 <뱀과 물>에서도 이런 경향은 여전하다. 이 책에 실린 거의 모든 작품은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 대부분은 부모가 없다. 있더라도 부재중이라서 아이들은 부모를 찾아서 여행길에 오른다(「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 「노인 울라에서」, 「1979」). 간혹 아이 곁에 있더라도 미쳐서 부모의 역할을 할 수 없다(「얼이에 대해서」) 그러나 예전 배수아의 작품과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뱀과 물>이 그리는 세계는 ‘꿈’의 세계이다. 시공간도 불명확하며 이야기를 엮어가는 그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불분명하다. 어떤 작품에서는 아이의 성별도 뚜렷하지 않다(「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 「얼이에 대해서」, 「1979」, 「노인 울라에서」).


예전 작품이 현실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면 <뱀과 물>의 작품들은 꿈을 꾸는 듯, 아니면 혼곤한 잠에서 깨어난 듯 몽환적인 세계를 그린다. 그런데 그 세계는 무척 매력적이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아이가 소년인지 소녀인지, 아이인지 어른인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꿈속에 나타난 물체가 살이 찐 뱀인지 어린아이 몸인지,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흐릿하다. 그 모두는 ‘육체성을 상실했으며 모서리와 윤곽만’(「1979」) 보이는 희미한 세계이다. 그 안에서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1979」)과도 같다.


때때로 나는 기억해두고 싶은 꿈은 잠에서 깨어나 메모를 한다. 그 메모 속 단어들을 뒤늦게 살펴보면 퍼즐 조각처럼 단편적이다. 그런데 그 퍼즐들을 조각조각 맞춰나가다 보면 하나의 큰 그림이 보이기도 한다. 배수아의 <뱀과 물> 속 단편들은 그 퍼즐 조각 하나하나와도 같다. 그 조각들을 맞추다 보면 여전히 아리송한 빈틈이 있기는 하지만 하나의 큰 그림이 흐릿하게 눈앞에 그려진다. 그 그림은 다음과 같다. 눈이 내리는 사막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아이이기도 하면서 어른이기도 한, 때로는 엄마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할머니이기도 한 어떤 여성의 이미지.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에서 ‘눈 아이’는 일곱 살 생일을 전후로 성별이 달라진다. 아이의 엄마는 마술사이며 아버지는 서커스단의 눈표범 조련사이다. 아이는 아버지를 찾아 스키타이족의 무덤을 찾아가고 있다. 이 이야기의 후속작이 틀림없는 「노인 울라에서」퍼즐 조각은 좀 더 또렷해진다. 아이의 아버지는 거인이다. 아버지는 언덕 위에 선 느릅나무처럼, 멀리서도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마치 아버지가 읽어주는 그림책 속의 이야기처럼, 아버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사령관일까? 눈표범 조련사일까? 


아이는 그곳에서 붉은 리본을 묶은 눈먼 소녀를 만난다. 그 소녀 또한 아버지를 찾고 있다. 소녀의 어머니는 여행을 떠난 뒤로 영영 돌아올 줄을 모른다. 자신을 ‘눈 아이’라고 말하던 눈먼 소녀가 사라진 뒤 ‘나’는 자신이 ‘눈 아이’라고 말한다. 이 아이 또한 일곱 살 생일까지는 사내아이로 살지만, 일곱 살 생일이 지나면 여자아이가 된단다. 나쁜 여왕이 어린 여자아이들을 잡아가기 때문이다. 


「눈 속에서 불타기…」와 「노인 울라에서」가 꿈결 같은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의 현실 버전은 「얼이에 대해서」가 아닐까. 얼이의 어머니는 마술사 대신 ‘미친년’이다. 얼이의 아버지는 서커스단에서 일하는 마술사인데, ‘우리’는 그의 마술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얼이는 북쪽에 위치하는 ‘반두’에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곳이 얼이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이는 반두에 가지 못한 채 시체로 발견된다. 한편, 이 이야기의 화자는 줄곧 소년처럼 묘사되는데, 뜻밖에도 ‘나’의 누나는 ‘나’를 사내아이가 아니라고 말한다. ‘눈 아이’와 ‘눈먼 소녀’가 ‘얼이’와 ‘나’로 대체된 것이다.


“언제까지 사내아이처럼 개구쟁이 짓만 하고 다닐래? 넌 여자애잖아. 너 때문에 창피해서 동네에서 고개를 못 들겠어.” (「얼이에 대해서」,72쪽)

“어린 여자아이를 잡아간다는 악령 이야기는 마술사가 꾸며낸 미신일 뿐이니까. 겁낼 필요 없어. 더 이상 사내아이 흉내를 낼 필요도 없어.”  (「얼이에 대해서」,76쪽)


반두로 간다면서 사라진 얼이는 어디로 갔을까? 정말 죽은 것일까? 「도둑 자매」에는 줄곧 살아있는 줄 알았지만 실은 죽은 아이가 등장한다. 아이는 자신이 죽은 것이냐고 묻는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다른 소녀가 답한다. ‘어머니가 도랑에 집어던진 너를 내가 건져 올렸지만, 그건 어쩌면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고(「도둑 자매」). 소녀를 죽인 사람은 소녀에게 달콤한 도넛을 건넨 돼지 장수였을까? 아니면 함지박을 이고 가는 식모아이나 책가방을 든 여학생들이 나타나면 흙먼지 자욱한 길가에 지프를 세우고 “태워줄까?”하고 묻던  멋쟁이 젊은 남자일까? 이 작품에서 소녀는 ‘어린 시절이라고 불리는 거무스름한 낡은 주물 거울에 영원한 작별을 고한다’ (「도둑 자매」).


그렇게 어린 시절과 작별한 아이는 교사가 되는데, 여교사이기도 하고(「뱀과 물」), 남교사이기도 하다(「1979」). 어쩌면 이 사실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그 둘은 하나이니까. 일곱 살 전에는 소년이었다가 일곱 살 이후로 소녀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교사는 키 큰 소녀를 자기도 모르게 욕망하기도 하고, 리우진이라는 학생의 성별을 오해하기도 한다. 그런데 리우진의 존재를 인식한 다음, 그 아이의 자리를 유심히 살피니, 마치 단 한 번도 사람이 앉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잊고 간 연필이나 지우개, 책상 위의 낙서, 칼로 그은 자국, 납작하게 말라붙은 껌 등 아이들 책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흔적이 전혀 없다. 심지어 냄새조차 없다. 아이는 존재했던 것일까? 아니, 어린 시절은 존재했던 것일까? 남교사에게 그의 동생이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 (「1979」, 94쪽)

「1979」에서 교사는 죽은 아기의 몸뚱이를 본다. 「뱀과 물」의 여교사 또한 그렇다. 아니, 정확히 그녀는 꿈에서 태아를 씹어 먹는다. 이 아이는 얼이가 아닐까? 아니면 「도둑 자매」 속 죽은 소녀일까. 그 둘 다일 수도 있다. 남교사가 뱀인지 아이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꿈을 꾼다면 여교사는 매일 밤 꿈속에서 뱀과 물을 본다. 그러다가 문득 눈을 뜨면 늙은 길라가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 어린 길라, 여교사 길라, 늙은 길라는 평생 동안 생명 있는 것들과 불화해왔다. 그중 최초는 자신의 아버지였고 가장 마지막은 여교사 자신이다.


‘모든 것이 시작과 동시에 늙었고, 살기도 전에 너무도 오래되었던’ 어느 날 떠돌기 시작한 길라. 그녀 또한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다. 그녀 앞에 문득 나타난 여승은 말한다. ‘꿈은 글과 마찬가지로 직관의 일종’이라고. ‘어쩌면 너는 아이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네 안에는 아주 늙은 네가 살고 있을지도 몰라. 늙은 그녀가 너무 이른 시기에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해라. 만약 그녀가 미친 닭처럼 순식간에 훨훨 날아가 버리면 너는 평생 그녀를 쫓아다녀야 하는 거야. 아니면 그녀가 너를 쫓아다니겠지.”(「뱀과 물」, 206쪽)


여교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막 덤벼들기 직전의 야수와 같았다’고 기억한다. ‘염세적인 사람은 일생에 걸친 일기를 쓴다. 그가 어린 시절에 대해서 쓰고 있는 동안은 어린 시절을 잊는다. 갖지 않는다. 사라진다.’ 말한다. 여교사의 이런 생각은 어린 시절은 망상과도 같으며,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라는 「1979」 속 동생의 말과도 통한다. 


이렇듯 배수아의 <뱀과 물>은 모서리와 윤곽만 보이는 희미한 세계에서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과도 같은 어린 시절을 그린다. 그런데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니라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이기도 하며 어쩌면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기도 하다. 소설의 공간이 모호하듯이 시간 또한 뒤섞여 흐른다. 순서대로 흐르지 않는다. 나는 아이였다가 어른이었다가 소년이었다가 소녀이기도 하며, 엄마였다가 할머니이기도 하다. 반두의 여왕이었을지도 모를 할머니(「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는 어쩌면 아버지를 찾아 나섰던 ‘눈 아이’가 아니었을까?「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의 ‘잭’의 말처럼 ‘우리의 경험이란, 사실 우리의 직관이 눈에 보이는 형체를 입고 나타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삶은 그냥 거울 속에서 태어났다가 죽는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 저절로 있다가, 언젠가 그레이하운드를 타러 가게 될 것’이라고(「도둑 자매」, 184쪽) 이 꿈결 같은 이야기는 매혹적으로 속삭인다. 당신 또한 이 흥미진진한 퍼즐을 직접 맞춰보고 싶지 않은가? 미로와도 같은 <뱀과 물>을 헤매다보면 틀림없이 당신은, 이 작품과 당신과의 ‘비밀스러운 결속’에 기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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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1 21: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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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1 2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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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2 0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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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2 09: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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