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뒤에서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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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나게 재미있다.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서 정말 단숨에 읽었다. 루이자 메이 올콧의 작품을 다시 읽는 날이 올 줄이야. 게다가 이렇게 완전히 반하게 될 줄이야. <작은 아씨들>의 루이자 메이 올콧- 어릴 때 읽은 <작은 아씨들>은 크게 인상 깊지는 않았다. 내가 워낙 ‘소녀’들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왕자와 거지>나 <보물섬> 또는 <15소년 표류기>같은 소년들의 모험담을 좋아했다. 내 또래 여자 아이들이라면 으레 좋아하는 <빨강 머리 앤>도 <소공녀>도 <작은 아씨들>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 세계가 집 안에 ‘갇힌’ 소녀들의 이야기가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작은 아씨들>에서 인상 깊은 인물은 있었다. 바로 둘째 조. 조는 <작은 아씨들>의 딸 넷 가운데 가장 소년스럽고 활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자매들에 비해 주체적이고 독립적이어서 나는 조를 좋아했다. 그런 조가 어른이 되어 작가가 되었을 때도 그 설정이 꽤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런 조에게 심하게 감정이입을 했었다. 나 또한 딸 넷 가운데 둘째이며, ‘조’에 어울리는 특성들을 내가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작가가 된 조의 모습도 왠지 뿌듯했다.

 <작은 아씨들>의 ‘조’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까닭은 루이자 메이 올콧이 바로 그 ‘조’의 모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올콧을 연구한 이들은 다분히 ‘조’가 그녀의 분신이며 그렇기에 <작은 아씨들>에서 ‘조’가 선정소설(Sensation Novel) 원고를 팔아 돈을 벌어들이는 장면에 주목했다. 심지어 ‘조’는 나중에 그 선정소설들을 불태우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소설을 써서 작가로서 크게 성공하기도 한다. 올콧 연구가들은 이 소설이 바로 올콧의 <작은 아씨들>에 해당하며 그렇다면 조가 썼다는 선정소설처럼 올콧도 실제로 그런 소설들을 여기저기에 투고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그녀의 ‘선정소설’들을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빙고! 알고 보니 올콧은 ‘A.M. 버나드’라는 가명 또는 익명으로 다수의 선정소설을 발표했던 것이다. 올콧 연구가들은 이 사실에 고무되어 그녀의 숨겨진 작품들을 발굴하는데 몰두하고 그렇게 해서 1970년대에 나온 선집이 <가면 뒤에서: 루이자 메이 올콧의 숨겨진 스릴러들>이었다.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여성주의 문학연구가들은 열광했다고 한다. 그 까닭은 <가면 뒤에서>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작품들을 보면 직접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문학동네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시리즈 가운데 하나이다. 처음에는 올콧의 작품이 이 시리즈에 있는 게 조금 의아했다. 이 시리즈 가운데 조르주 페렉이나 안토니오 타부키, 제발트 등의 책은 여러 권 갖고 있고 또 좋아하기도 한다. 그밖에 다른 작가들 책도 더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올콧의 작품은 관심 밖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시리즈에 그녀의 작품이 왜 있을까 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왜 그런지 고개를 끄덕끄덕 하게 된다.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시리즈라고 해서 재미가 없을 것이라고, 골치 아픈 이야기라고 짐작다면 큰 오산이다. <가면 뒤에서>는 정말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 재미와 흥미에서는 단연코 압도적이다. 나는 올해 여러 권의 재미난 책을 읽었지만 이토록 흥미진진한 책은 없었다. 스티븐 킹의 <그것>도 대프니 듀 모리에의 <나의 사촌 레이첼>도 이 책만큼 흥미롭고 쫄깃쫄깃하지는 않다. 일단 그 두 작품들은 꽤 긴 분량을 자랑하기에 어떤 부분에서는 좀 늘어진다는 느낌도 없잖아 있다. 그런데 올콧의 <가면 뒤에서>에 실린 이야기들은 중편 ‘가면 뒤에서, 또는 여자의 능력’을 비롯하여 나머지 단편 ‘어둠 속의 속삭임’, ‘수수께끼’, ‘위험한 놀이’ 4편 모두 짧고 굵직하다. 지루할 틈이 없다. 늘어지기는커녕 숨 막힐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책을 읽다가 심장이 두근거리기는 오랜만이다. 독서에 대한 흥미를 잃은 사람이 있다면 이 책으로 다시 불을 당겨보는 건 어떨까? 분명히, 다음 쪽이 궁금해서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올콧, 이 여자 정말 이야기꾼일세. 이런 생각들을 마음속에 숨겨두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건전한 작품들만을 쓰고 죽었다면 정말 억울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올콧의 이 책 제목이 <가면 뒤에서>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어쩌면 착한 딸의 가면을 쓰고(올콧의 아버지는 저명한 초월주의 사상가이자 사회 개혁자로서 올콧에게 인내와 절제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교육을 삼아왔다고 한다. 이런 아버지 아래서 얼마나 절제하고 스스로를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금욕적으로 자랐을지는 쉽사리 상상이 가능하다) <작은 아씨들>과 같은 작품을 썼겠지만 사실 그 내면에서는 불타오르는 열정과 투지(!)가 들끓었고, 그리하여 이런 작품들을 써낸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 또한 흥미로운데 올콧의 어머니는 대단한 여성주의자로 평생 숙원이 여성의 참정권 획득이었다고 한다. 올콧은 어머니의 이런 영향으로 각종 정치활동에 활발히 참여했고 여성운동과 노예해방 운동에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런저런 영향 속에서 <작은 아씨들>과 같은 교훈적인 작품과 <가면 뒤에서>와 같은 ‘펄프픽션’이지만 알고 보면 매우 급진적인 여성주의 관점의 작품들이 탄생한 것이다.

 줄거리를 소개하면 읽는 재미가 크게 반감될 터이기에 세세하게 소개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 책에 실린 작품 속 여성들은 19세기 당시로서는 드물게 매우 능동적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온갖 계략을 짜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 역경에 부딪히기도 하지만 그런 위기도 자기 힘으로 극복하고자 애쓴다(‘가면 뒤에서’). 마음에 드는 이성의 애정 또한 스스로 쟁취하려고 한다. 돈이나 재산으로 쉽게 그 상대를 얻을 수 있는데도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만들겠다’고 마음먹는다(‘어둠 속의 속삭임’). 더더군다나 놀라운 점은 ‘남자’보다 완벽한 ‘남장여자’가 등장해 자기 앞에 주어진 난관들을 스스로 극복하고자 한다(‘수수께끼’).

 ‘가면 뒤에서’의 ‘진 뮤어’를 악녀라고 하지만 정말 ‘그들’의 평가대로 악녀일까? 가정교사라는 낮은 신분의 여자를 가차 없이 경멸하는, 그런 경멸이 마땅한 대상이라고 여기는 그 잘나신 귀족 집안 자제들에게 자기로서는 최대한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킬 마지막 발악은 아니었을까? 진 뮤어가 세상의 잣대로는 ‘악녀’라고 할지언정 그녀가 펼치는 게임에서 부디, 제발 이기기를, 최후의 승자가 되기를 나도 모르게 응원하게 된다. 그녀의 복수는 19세기 견고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능동적으로 자기 삶을 이끌어가고자 하는 하나의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그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모습에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가면 뒤에서>를 통해 그저 <작은 아씨들>의 저자로만 알고 있던 루이자 메이 올콧을 다시 발견하게 되어 무척 즐겁다. 이 시리즈에서 나온 올콧 선집 2권도 얼른 읽어봐야겠다. 이미 알고 있던 작가의 새로운 면모, 어쩌면 착한 사회적 ‘가면’ 뒤에 숨겨졌던 진짜 ‘얼굴’을 알게 된 것이 가장 기쁘다. 작품 자체로도 무척 흥미진진했던 <가면 뒤에서>는 독서의 즐거움을 여러 가지로 느끼게 해준 ‘대단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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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tamani 2017-10-30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듣는 소식이군요

잠자냥 2017-10-30 14:09   좋아요 0 | URL
재미난 책이니 언제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ㅎㅎ

cyrus 2017-10-30 14: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콧의 작품들을 페미니즘 관점으로 읽어보면 재미있겠어요. ^^

잠자냥 2017-10-30 14:27   좋아요 0 | URL
네! 정말 흥미롭고 재밌습니다. 구구절절 분석해보고도 싶었지만.... 다른 독자들의 읽는 재미를 위해 여기까지만! ㅎㅎ

케이 2017-10-31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요즘 책읽는 재미가 없어서 통 안읽히는데,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잠자냥 2017-10-31 12:49   좋아요 1 | URL
ㅎㅎ 이 책은 집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가을 전어처럼 잃어버린 독서에 대한 흥미를 꼭 되찾게 해줄 거예요. ㅋㅋㅋ 아니, 다른 책은 몰라도 이 책 만큼은 정말 재미있습니다!!!
 
더 저널리스트 : 어니스트 헤밍웨이 더 저널리스트 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영진 엮고 옮김 / 한빛비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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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작품을 좋아해도 헤밍웨이 그를 좋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아니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작품만 알았을 때 더 좋은 작가에 속했다. 물론 이제 와서 인간 헤밍웨이를 안다고 말하기에는 어쩌면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본 것도 아니며 오랜 세월 그를 지켜본 것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을 곁에 두고 오래 보더라도 때로는 그 사람의 전혀 다른 면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하물며 글로 멀찍이서 만난 사람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더욱이 그는 동시대인도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나는 최근에 헤밍웨이를 조금은 다시 보게 되었다. 그를 인간적으로 전보다는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 이런 면이 있었으니까 그가 그런 소설들, 그러니까 <노인과 바다>라든지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같은 그런 작품을 쓸 수 있었을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순전히 <더 저널리스트: 어니스트 헤밍웨이> 이 책 한 권 때문이었다. 헤밍웨이는 잘 알다시피 기자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은 저널리스트로서 헤밍웨이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어찌나 기뻤던지, 나오자마자 주문했던 것 같다. 그만큼 나는 어떤 면에서는 헤밍웨이 글을 무척 좋아했다. 소설이 아닌 그가 언론인으로써 쓴 글들을 볼 수 있다는 데 어찌 서둘러 읽지 않았으랴. 그러고 보니 어쩌면 인간 헤밍웨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는 단지 그의 글을 좋아할 뿐이라고 말해왔으면서도 사실은 인간 헤밍웨이의 어떤 면은 좋아하고 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살짝 들기도 한다.


헤밍웨이의 글은 단문으로 깔끔하다. 그러면서도 할 말은 모두 한다. 그 군더더기 없는 문장은 그가 기자로 활동하면서 얻은 아주 좋은 글쓰기 습관임을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들은 모두 안다. 그러니 그가 쓴 기사들은 더더욱 깔끔하면서도 정확하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런 글들이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문학 작품을 읽을 때와는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현학적이지 않으면서도 위트 넘치고, 소박한 문장에 풍자와 해학이 담겨있다. 어떤 대상에는 한없이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 그 문장은 절대로 질척거리지 않는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니, 하, 대단하다.


모든 글이 그렇겠지만 겉보기에만 빼어나게 아름다운 글은 매력이 그리 크지 않다. 문장만 미문이라고 그 글이 정녕 아름다울까? 거기에 제대로 된 생각이 담겨 있을 때 글은 더욱 빛나기 마련이다. 기자 헤밍웨이가 쓴 글들이 바로 그랬다. 신변잡기나 당시 사회를 가볍게 다룬 기사 속에서도 사회의 부조리함을 꿰뚫어보는 그의 통찰력은 빛난다. 헤밍웨이가 신참 기자 시절에 쓴 ‘시장님은 왜 경기를 안 보고 유권자들만 챙기나’라는 글에서는 복싱 경기장에 굳이 찾아와서 유권자 관리에만 힘쓰고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시장을 풍자한다. 그런데 이 풍자는 저속하지 않다. 유쾌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글을 읽게 되는데, 그런 가운데 시장으로 대변되는 사람들(유력 정치가)의 판에 박힌, 진정성이 결여된 모습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이렇게 헤밍웨이는 가식적인 정치인을 비꼬는 글을 시작으로 사회 비판적인 글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불평등과 부조리함에 분노했으며 무엇보다 파시즘과 크고 작은 모든 전쟁에 경종을 울리는 글을 많이 썼다. 아마도 그가 20대에 해외 특파원 자격으로 유럽의 전쟁과 사회상을 보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 그리스-터키전 등등 전쟁의 현장에 직접 머문 적이 많아서 그랬는지 그는 전쟁을 그 무엇보다 혐오했다. 이 책에는 헤밍웨이가 직접 찍은 전쟁 사진과 함께 짧은 글이 실려 있는데, 그 글과 사진은 몹시 충격적이면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 아프다. 전쟁미치광이들이 부디 이런 글과 사진을 보고 뭐라도 좀 느꼈으면 좋으련만,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것 같다. 하긴 그런 사진이나 글을 보고 뭔가를 느낄 줄 아는 이들이라면 전쟁을 벌일 생각조차 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파시즘을 경고한 글들 가운데 인상 깊었던 것은 무솔리니에 대한 글이었다. 뒷날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무솔리니가 일개 신문사의 편집장이었을 때, 헤밍웨이는 기자로서 그를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헤밍웨이는 그 탁월한 통찰력으로 눈앞의 인물이 갈등을 끝낼 인물이 아니라 또 다른 전생을 불러올 수 있는 인물임을 경고했다. 그러면서 무솔리니가 얼마나 한심하고 허풍쟁이인지를 글로서 낱낱이 까발린다.


무솔리니는 유럽 최고의 허풍쟁이다. 무솔리니가 내일 아침에 당장 나를 끌어내 총살한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그를 허풍쟁이라고 부를 것이다. 총살하겠다는 것 자체가 허풍일 테니. (.....) 자신의 변변찮은 생각을 현학적인 단어로 치장하는 그의 천재적 재능을 연구해보자. 일대일 결투를 선호하는 그의 성향을 분석해보자. 진짜 용감한 남자라면 굳이 일대일 결투에 나설 이유가 없다. 겁쟁이들이나 끊임없이 일대일 결투를 벌이며 자신이 용감하다고 믿으려 드는 것뿐이다.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와 흰색 각반도 살펴보라. 아무리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위해서라고 해도 검은 셔츠에다 흰색 각반을 받쳐 입는 사람이 제정신일 리 없다. (‘유럽 최대의 허풍쟁이, 무솔리니’, 112~113쪽)


무솔리니의 아들들은 공중에서 전투를 한다. 거기엔 머리 위에서 총을 겨누는 적군이 없다. 하지만 가난한 이탈리아의 아들들은 땅에서 싸우는 보병이다. 전 세계 가난한 이들의 아들은 언제나 보병인 것처럼 말이다. 이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진짜 적이 누구인지, 왜 그러한지 깨닫게 되기를. (‘아프리카에는 독수리가 난다’, 207쪽)



헤밍웨이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관해 솔직하고도 사실적인 글을 쓰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글을 쓰려면 먼저 인간을 이해하고 이해한 것을 글로 풀어낼 줄 알아야 하는데 한평생을 바쳐도 둘 중 하나를 제대로 배울까 말까 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보자면 헤밍웨이는 인간을 이해하고 그것을 글로 풀어낸 드문 작가 중 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헤밍웨이의 기사에서 곧잘 등장하는 주제는 ‘무엇이 공정한가’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의식이 없는 이들은 글을 쓸 생각을 하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저널리스트로서 헤밍웨이는 적어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제대로 알고 있었고 그것을 글로 썼다. 그러므로 그가 쓴 글은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 읽는 이들이 여러 번 곱씹게 하는 힘을 지녔다.


이렇게 헤밍웨이는 사회의 온갖 부조리에 맞서 진실을 고발하고자 했으며, 전쟁의 참상을  전함으로써 인간이 또다시 전쟁과 파시즘이라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글을 썼다. 또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편에서 그들의 삶이 조금은 나아지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가 소설 속에서 (또는 실제 삶에서) 매우 마초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찌질한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할지라도 그가 이러한 인간성을 지닌 사람임을 알게 되었을 때는 도저히 싫어할 수만은 없어진다.


마지막 장 ‘작가가 되고 싶다고 찾아온 청년에게’를 통해 헤밍웨이가 청년에게 해준 말들을 읽다 보면 인간적으로 따뜻하고 푸근한 선생님 같은 면모도 엿볼 수 있다. 어쩐지 늘그막의 수염이 덥수룩한 곰 같은 그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슬며시 웃음을 짓게 되기도 한다. 그가 그 청년에게 하는 말은 거의가 ‘진실’할 것이었다. ‘진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글을 쓸 것’ 헤밍웨이는 아마도 그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가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문학 작품은 물론 그의 이 짧은 저널들도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게 아닐까.


헤밍웨이 : 좋은 글이란 진실을 쓰는 거지. (......) 하지만 작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계속 글을 쓰다 보면 결국 가짜 글을 지어낼 수밖에 없어. 가짜로 지어낸 글을 몇 번 쓰다 보면 더 이상 양심적으로 글을 쓸 수 없게 되지. (.....) 양심을 제외하고 작가가 갖춰야 할 덕목을 딱 하나만 더 꼽으라면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지. 경험으로 배우는 게 많아질수록 더 진실에 가깝게 상상할 수 있는 거야. (‘작가가 되고 싶다고 찾아온 청년에게’, 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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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날마다 축제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주순애 옮김 / 이숲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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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헤밍웨이의 에세이집으로 그가 젊은 시절 파리에서 머물던 몇 년 동안의 기록이 담겨있다. 헤밍웨이는 1921년부터 26년까지 파리에 거주하면서 글쓰기에 몰두했다. 당시 그는 젊지만 가난했고 미래는 어쨌든 불투명했다. 헤밍웨이는 자기 글에 대한 확신은 있었을지 몰라도 자신이 훗날 그렇게까지 유명한 작가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에는 헤밍웨이가 머물던 파리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과 제임스 조이스, 에즈라 파운드, 거트루드 스타인, 피츠제럴드 등 그가 그곳에서 만난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경마에 대한 그의 집착은 물론 그의 첫 번째 아내 해들리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존과의 일상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헤밍웨이의 어린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갖가지 사진도 실려 있는데 이런 사진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감동받은 것은 헤밍웨이가 글을 쓰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자기 자신을 다독였는지, 그리고 꾸준히 치열하게 글을 쓰며 하루를 보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헤밍웨이를 인간적으로 크게 좋아할 수는 없지만 그의 글에 대한 태도만큼은 존경스럽다. 마음에 드는 글을 쓴 후에는 자기 자신에게 맛있는 빵과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상으로 주는 모습에서는 슬며시 웃음도 난다.

헤밍웨이는 매일 카페에서 글을 쓰고 그 후에는 그 글에 대해 잊기 위해 열심히 다른 책들을 읽었다. 쓰고 읽고 걷고 보고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사랑하고…. 파리에서 그가 보낸 시절을 요약한다면 이런 단어들로 정리할 수 있으리라. 비록 항상 허기를 느낄 만큼 가난했지만 이 에세이 속에서 헤밍웨이와 그의 첫 아내 해들리는 무척 행복해 보인다. 사람이 살려면 이렇게 살아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비록 돈에 쪼들리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그런 삶.

이 책을 읽다 보면 헤밍웨이뿐만 아니라 당시 파리에서 머물던 예술가들의 삶을 엿보는 기회도 주어진다. 비록 헤밍웨이의 시점으로만 바라본 그들의 삶이라 ‘공정하고 객관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 나름대로 재미있다. 또한 헤밍웨이가 읽은 책과 그 책을 쓴 작가들에 대한 그의 생각도 엿볼 수 있는데, 캐서린 맨스필드에 대한 헤밍웨이의 평가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크게 웃고 말았다. 나는 맨스필드 단편의 읽으면서 좋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왜 그녀의 단편이 그토록 높게 평가받는지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는데, 그녀에 대한 헤밍웨이의 평을 읽으면서 묘하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우리가 파리로 오기 전 토론토에서 나는 캐서린 맨스필드가 대단히 훌륭한 단편소설 작가라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실력을 갖춘 노련한 외과의처럼 간결하고 명쾌하게 글을 쓰는 체호프와 비교하면 그녀는 억지로 머리를 짜내 이야기를 꾸며 내는 겉늙은 여류 작가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맨스필드는 알코올을 뺀 맥주와 같았기에 차라리 맹물을 마시는 편이 나았다. 반면에 체호프는 투명하다는 점만 빼면 물과는 전혀 달랐다. 그의 작품 중에는 언론 기사문 같은 글도 더러 있었지만, 놀랄 만큼 뛰어난 작품도 여럿 있었다. (128쪽)


피츠제럴드와 그의 아내 젤다에 관한 에피소드도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헤밍웨이가 기록한 피츠제럴드나 젤다에 관한 에피소드를 통해 보자면 이 부부는 상대하기 참 난감한 사람들 같다. 만약 내 주변에 피츠제럴드나 젤다 같은 사람이 있다면 난 그들을 친구로 곁에 두지는 않으리라. 그들은 항상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징징대고 칭얼대는 느낌이랄까. 피츠제럴드와 젤다가 함께 하면서 서로를 갉아먹은 이야기는 피츠제럴드의 소설 <밤은 부드러워>의 소재가 되기도 했는데 나는 이 작품도 읽는 내내 지루했다. 헤밍웨이가 유일하게 극찬한 피츠제럴드 작품이라는데 어쩐지 우정 때문에 마지못해 치켜세워줬던 건 아닐까 싶기도.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헤밍웨이는 작가적으로 자기보다는 일찌감치 인정받고 성공해있던 피츠제럴드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조금은 시기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한 사람(헤밍웨이)은 상당히 마초적인 남자이고 한 사람(피츠제럴드)은 여성적이고 유약한 사람이니 이 두 사람이 친구로 함께 지내기란 애당초 좀 힘들어 보이기도 한다.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의 이런 징징대는(?) 성격을 못 견뎌한 것 같고, 어떤 면에서는 그런 징징대는 모습을 비아냥대기도 했다. 헤밍웨이 자신은 절대 그런 의도로 쓴 게 아니라고 우길지도 모르겠으나 ‘젤다의 고민’이라는 에피소드는 결정적으로 그런 의혹을 더욱 크게 한다.



자넨 내가 젤다 외에 다른 어떤 여자와도 성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잖나.”
“아니, 난 몰랐는걸.”
“내가 전에 얘기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닐세, 자넨 내게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네.”
“내가 자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바로 그 문제야.”
“좋아, 뭔지는 모르지만 말해봐.”
“젤다는 내가 신체 구조상 어떤 여자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면서 그게 바로 그녀가 근본적으로 내게 불만을 느끼는 이유라고 하더군. 그녀는 그게 크기의 문제라고 하더라고. 그 말을 들은 뒤로는 결코 예전처럼 느낄 수가 없어서 난 진실을 꼭 알아야겠어.” (207쪽)


그렇다! ‘젤다의 고민’이란 바로 피츠제럴드의 성기가 작다는 것이다! 피츠제럴드는 이 때문에 고민이라며 헤밍웨이에게 상담을 해오고 헤밍웨이는 화장실까지 따라가서 피츠제럴드의 ‘그것’을 직접 보고는 결코 작지 않다고 다독여준다. 그래도 불안해하는 피츠제럴드를 위해 루브르 박물관의 조각상들 크기는 다 그렇다며 안심시켜 주지만 피츠제럴드는 여전히 못미더워하고 그런 그를 결국 루브르 박물관까지 끌고 간다. 그렇게 해서 계속 피츠제럴드를 안심시켜 주지만…. 결국 이 에피소드를 통해 헤밍웨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피츠제럴드의 그것은 작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라는 게 아닐까?

헤밍웨이가 평생 자신의 남성성을 입증해보이려고 안간힘을 쓴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저 이 이야기도 한 번 웃고 넘어갔을 테지만, 글쎄….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의 남성스럽지 못한 면모(여자처럼 늘 징징대더니 알고 보니 ‘그것’도 작은 인간!)를 들춰냄으로써 교묘하게 깎아내리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어쩐지 헤밍웨이도 참 치졸하게 느껴지고, 이런 이야기를 이토록 여과 없이 만천하에 공개해도 되는 걸까 싶기도 하다. 자기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온전히 자신만의 이야기는 아니지 않은가?

이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해들리와 파리에서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나날을 보냈어도 결국 다른 여자에게 빠져버리는 헤밍웨이의 모습도 만날 수 있다. 헤밍웨이는 담담하고 고통스럽지만 무척이나 낭만적이게 그때의 일을 회고한다. 그러나 글쎄, 결국 아내를 곁에 두고 아내 모르게 다른 여자와 놀아난 이야기일 뿐이다(문제의 이 여자는 헤밍웨이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 이 에피소드를 읽으면 글 잘 쓰는 사람은 자기변명도 참 멋지게 하는구나 싶어서 씁쓸해지기도 한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읽은 소감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파리는 아름답고 인간들은 찌질하달까? 그러나 결국 그 ‘파리’를 멋들어지고 생동감 있게 하는 요소 중에 이런 찌질한 인간들을 빼놓을 수 없으니 인생은 참 오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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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0-16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도 그렇고 예술가들도 모여서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면 찌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카페에 모인 인상파 화가들이 그랬습니다. ^^

잠자냥 2017-10-16 14:05   좋아요 0 | URL
ㅎㅎ 어디 작가와 예술가만 그렇겠습니까. ㅎㅎ 인간이 모두 그렇지요. ㅎㅎㅎ

케이 2017-10-17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밍웨이가 남성성에 집착하고 여러번 언급한 것이야말로 그가 여자들에게 시원찮다는 증거라는 글을 어디선가 봤는데,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헤밍웨이는 인간적으론 정말 정안가는 인물이예요..; 10년 전에 읽은거라 잘 기억은 안나지만, 밀란쿤데라가 소설 ‘불멸‘에서 헤밍웨이를 대놓고 비꼬는데, 그 부분 읽고 굉장히 통쾌했던 기억이 납니다. ㅋㅋ

잠자냥 2017-10-17 11:56   좋아요 1 | URL
ㅎㅎ 사냥이나 복싱 같은 스포츠에 집착한 것도 그렇고.... 심리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재미난 사람일 거 같아요. 그의 마초성 때문에 저도 헤밍웨이는 그닥 좋아할 수 없는 인간이었는데, 최근에 읽은 어떤 책에서 의외로 괜찮은 면을 발견했답니다. 그 이야기는 곧 다른 리뷰에서... ^^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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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추석 연휴에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는데, 또 다른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노벨문학상을 가즈오 이시구로가 받았다는 메세지였다. 소식을 듣고 조금 뜻밖이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소식을 전한 친구나 나나, 실은 마음속으로는 마거릿 애트우드가 받기를 바랐고, 하루키는 절대 받지를 않길 바랐다. 그리고 둘 다 가즈오 이시구로 작품은 예전부터 좋아했던 터였다. 그래서 우리 둘 모두 나쁘지 않은 소식이라고 생각했다.


그 소식을 듣고 또 하나 떠오른 것은 민음사가 이번에 입 좀 찢어지겠네 하는 생각이었다. 민음사는 모던클래식 시리즈로 일찍부터 가즈오 이시구로 작품을 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리즈를 통해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중 가장 처음으로 <나를 보내지 마>를 읽었고 그 다음에는 <녹턴>을 읽었다. 두 작품 모두 괜찮았기에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남아 있는 나날>을 세 번째로 읽은 기억이 난다. '기억이 난다'라고 말하는 까닭은 사실 이 작품들을 읽은 지 꽤 되었기 때문이다. 다 읽고 난 뒤, 나는 이 작품을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 일에 반기를 들고 싶어졌다. 그 뒤로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었는데 가즈오 이시구로 작품은 편차가 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작품은 꽤 좋지만(<나를 보내지 마>), 어떤 작품은 썩 좋지 않고(<위로 받지 못한 사람들>, <우리가 고아였을 때>), 또 어떤 작품은 과대평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과대평가 된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이 <남아 있는 나날>이다.  


<남아 있는 나날>은 이런 종류의 소설을 영화화하는데 탁월한 재주를 가진 제임스 아이보리의 동명 영화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나는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그 영화에서 주인공 ‘스티븐스’ 역을 맡은 안소니 홉킨스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스티븐스’는 집사다. 영국에서는 누구나 알아주는 귀족집안 달링턴가의 충실한 심복이자 집사이며 그는 그러한 자신의 위치에 크나큰 자부심을 지녔다. 그러나 그 달링턴가도 어느덧 쇠망하고 미국인 갑부인 페러데이에게 달링턴 홀과 스티븐스는 넘겨졌다. 페러데이는 한 번도 달링턴 홀을 떠난 적이 없는 스티븐스에게 잠깐 동안의 여행을 권유한다. 고심 끝에 스티븐스는 일주일간의 여행을 떠나고 그 여행길에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그 회고 속에 1920~30년대의 유럽 사회와 달링턴 홀, 그리고 스티븐스의 과거가 잔잔하게 교차하며 이야기는 흐른다.
 
언젠가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벤타 하인학교>를 읽으며 ‘하인’을 양성하는 학교라는 소재도 그렇지만 스스로 ‘하인’이 되겠다고 학교를 찾은 주인공 보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남아 있는 나날>의 집사 ‘스티븐스’를 보고 있노라면 어떤 면에서는 <벤야멘타 하인학교> 속의 인물을 만났을 때의 당혹감이 느껴진다. 오히려 당혹감은 더 크다고 할까? 어쩔 수 없이 ‘계급적’ 위치 때문에 ‘집사’라는 직업을 가질 수는 있을지언정, 과연 인간이 그런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낄 수가 있을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물론 스티븐스는 자신의 의무를 그 어떤 순간에도 놓지 않았던 ‘프로페셔널’한 집사로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큰 듯하지만…. 글쎄 스티븐스의 삶을 지켜보는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어쩐지 그의 자부심은 오히려 끊임없는 ‘자기변명’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토록 ‘위대한 집사’로 살아가고자 아버지의 임종도 외면할 수밖에 없었고 사랑하는 사람도 놓칠 수밖에 없던 사람이라니! 얼마나 답답하고 한심한가! 그러면서도 ‘나는 집사로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고 그것은 최선이었다.’며 계속 되뇌는 모습은 끝끝내 비겁해 보일 뿐이다. 게다가 그토록 위대하게 우러러본 그의 주인 ‘달링턴 경’은 또 어떤 사람인가. 달링턴 경이 지시한 일이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묵묵히’ 행동하는 스티븐스는 도저히 인간적으로 좋아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는 어떤 한 사람이고 등장인물에게 몰입이 돼야 하는데 스티븐스는 이런 점에서 공감하기 어려운 주인공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런 답답한 인물을 통해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가치’를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겠지만…. 그의 서정적인 문체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딱히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내가 주인공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다.
 
스티븐스는 여행에서의 회상을 통해 자기 인생의 어떤 부분은 많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겠지만 그가 ‘남아 있는 나날’에서 얼마나 크게 다른 삶을 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가 여전히 달링턴 홀에서 새로운 주인 ‘페러데이’를 위해 또 다른 봉사를 열심히 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잘못된 부분을 깨달았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까? 그것만으로도 스티븐스의 인생이 헛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기엔 그의 인생이 너무 많이 지나갔고 상대적으로 남아 있는 나날은 참 짧아 보인다.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은 적어도 한두 번쯤은 후회를 하기 마련이다. 그때 그랬다면 어땠을까? 내가 이렇게 살지 않고 그렇게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쓸데없는 가정, 혹은 후회. 무언가 일이 좀 잘 안 풀릴 때 인간은 특히 그렇다. 요즘의 내가 딱 그렇다. ‘잘 못 살아온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불쑥불쑥 자주 찾아온다. 스티븐스와는 정반대의 고민이다. 스티븐스처럼 오히려 ‘일’에 ‘프로페셔널’한 사람으로 살아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그런 후회. 정답은 잘 모르겠지만 스티븐스와 비교하면 적어도 나는 그처럼 ‘허망한 일’, ‘허상’ 때문에 진짜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살지는 않았다는 위안은 든다. 순간순간 행복하고 즐거웠기 때문에 그 ‘순간’을 놓쳤다는 이유로 후회스럽지는 않다. 그런데도 왜 ‘잘 못 살아온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은 계속 드는 걸까. 내 ‘지나온 날’은 그런데 내 ‘남아 있는 나날’은 어떻게 살아야할까. 조금 더 일찍 깨달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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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10-13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가지 오류를 집어내자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은 스티븐슨이 아니라 스티븐스
랍니다.

제임스 아이보리의 영화는 잘 만든 것 같습니다.

소설이 (조금) 과대평가된 것 같다는 부분에 공감합니다.
아무래도 맨부커상 수상의 광휘 때문이 아닐까요.

잠자냥 2017-10-13 11:50   좋아요 0 | URL
하하하. 감사합니다. 줄기차게도 스티븐*슨*이라고 해놨네요. ㅎㅎ 수정해야겠습니다.
영화가 원작보더 더 유명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마 영화덕을 톡톡히 본 원작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고요. ㅎㅎ

공쟝쟝 2021-07-04 2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얽ㅋㅋㅋㅋ 저만 별 세갠줄 알았는데 여기 별 세개 또 있는데 잠자냥님ㅋㅋㅋ 그쵸? 스티븐스 할ㅈㅐ여… 앞으로의 나날은 일이 전부인 삶이 아니기를..

잠자냥 2021-07-04 23:50   좋아요 1 | URL
으윽 저 이 작품 별로 안 좋아해요. 스티븐스 노예 근성 어쩔….;
 
시키와 소세키 왕복 서간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수필비평선집
나쓰메 소세키.마사오카 시키 지음, 박지영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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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는 가을밤이라 그랬을까, 오랜만에 빗소리가 들리는 밤이라 그랬을까. 그 밤, <시키와 소세키 왕복 서간집> 마지막 부분을 읽다가 울컥 무언가 치밀어 오르더니 끝내 눈물이 흘렀다. 죽음을 앞둔 시키의 마지막 편지와 그 편지를 받기 전에 시키에게 보낸 소세키의 편지. 모든 것을 알게 된 뒤, 그러니까 시키의 부고를 들은 다음 그 소식을 전해준 이에게 보낸 담담한 소세키의 답신을 읽을 때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다. 책을 덮고 나서도 베개가 젖을 만큼 울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그 편지들을 떠올리니 또 눈물이 나려고 한다. 이 모두가 시키와 소세키의 편지를 가을밤에 읽은 탓일까. 스물두 살 때부터 서른다섯. 13년 가까이 그 누구보다 가까웠을, 그 어떤 이보다 자신을 가장 잘 이해했을 친구. 그런 이의 죽음을, 그 소식을 마주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도저히 내가 헤아릴 수 없는 세계이지만 그 먹먹함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눈물이 흐른다. 소세키가 너무나도 담담하게 친구의 죽음을 받아들였기에 슬픔은 더욱 크다. 나쓰메 소세키는 영국으로 유학 떠날 때부터 ‘살아서 다시 만난다는 것은 도저히 이룰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니 시키의 죽음을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그 담담한, 모든 것을 체념하고 달관한 듯한 문장에서 눈물은 솟구친다. 시키와 소세키- 이 두 사람의 우정은 이렇게 나를 울린다.

나는 인간관계에 큰 뜻이 없다. 어릴 때부터 혼자서도 잘 놀았고 내가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친구들이 먼저 다가왔기에 친구라는 존재에 목마른 적은 없다. 그래서 그런 걸까?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조금만 보여도 참 쉽사리 친구를 끊었다. 그러고 나서 후회한 적도 딱히 없다. 이제 내 주위에 남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열손가락? 아니 그보다도 한참 적다. 그럼에도 나는 내 삶에, 그 관계에 충분히 만족한다. 지금의 우정이 오래 이어진다면 바랄 게 없지만 혹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러면 또 그러려니 하고 살아갈 것이다. 이렇게 덤덤한데도 그 친구들이 죽는다고 생각하니 조금 슬프다. 언젠가 그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그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날이 오리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이게 다 가을 탓이다......

시키와 소세키의 우정이 딱히 부럽지는 않았다. 나에게도 어언 10년 넘도록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으며 시키와 소세키가 그랬듯 나와 내 친구들도 취미가 비슷해서 가까워졌다. 만나면 어디서도 잘 하지 않는, 아니 할 수 없는 문학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이 책 저 책 묻는다. 물론 시키와 소세키가 주고받은 편지처럼 품격 넘치는 대화는 아니지만..... 마사오카 시키, 나쓰메 소세키- 한 사람은 시인이자 수필가로 또 한 사람은 소설가로 일본 문학계에 큰 획을 그은 인물들이니, 그 빼어난 문장으로 주고받은 편지들은 더없이 아름답다. 그리고 그 관계 또한 문장만큼이나 아름답다.

1889년 스물두 살 동갑내기로 처음 만난 그들은 관심 있는 공연이나 문학(주로 하이쿠) 이야기로 가까워진다. 서로 주고받은 편지 속에서 그 대화들은 해가 갈수록 한결 풍요롭고 해박하며 윤택해진다. 친구 사이이니 때로는 짓궂은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그 조차도 품위를 잃지 않고 서로를 향한 깊은 애정이 늘 그 바탕에 흐른다. 때로는 날카로운 설전이 오가기도 한다. 서로 문학적 가치관 차이에서는 뜨끔할 정도로 훈계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비판과 질타 설전이 매섭다. 하지만 절대로 상대를 ‘비난’하거나 그로 말미암아 관계가 변질되지는 않는다. 가벼운 인간관계에 익숙한 오늘날엔 참 생소한 풍경이리라.

두 사람의 편지를 읽다 보면 소세키가 시키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사오카 시키는 소세키에게 하이쿠 첨삭지도를 해준 스승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의미에서는 소세키가 문단에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고마운 사람이기도 했다. 아니 이런 시키의 혜택을 설명하는 게 무슨 의미이랴, 어린 시절부터 딱히 의지할 곳 없던 고독한 나쓰메 소세키에게 정신적 뿌리가 되어준 것만으로도 시키는 그에게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둘은 함께 있기보다 떨어져 있던 때가 더 많았다. 아주 가끔 은근하게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전한다. ‘달은 동쪽에/ 자네는 지금쯤엔/ 자고 있을까’ 소세키는 잠못 드는 밤에 시키를 그리워하며 시키는 시키대로 ‘언제나 대형이 도쿄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런 마음도 지나치지 않아서 향기롭다. 편지를 보면 마사오카 시키는 소세키에 비해 좀 더 발랄하고 짓궂은 것 같다. 그러면서도 섬세하고 예민한 성정은 소세키 못지않다. 소세키는 또 소세키대로 얼마나 덤덤한지. 자기 결혼 소식조차도 참 무덤덤하게 전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이 여자로 태어났다면 기생집에서 일을 해서라도 시키의 학비를 대주고 싶다고 한다. 친구를 생각하는 그 마음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다가도 ‘이 면상 때문에 안 되겠다’는 부분에서는 크게 웃고 만다. 아니, 나쓰메 소세키, 친구에게는 이런 농담도 할 줄 아네?!

사람이 만든 지위란 본디 허영이고 대학을 졸업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다는 사정도 아니니, 목숨을 소중히 여겨 여유롭게 공부하는 것이 옳다고 보네. 학자금상의 곤란에 대해서도 그러리라 짐작만 하고 있었을 뿐, 특별히 말씀드릴 묘안이 없구먼, 아무리 내가 기계로 된 거북 새끼를 발명하는 재능이 있어도, 열린 입에 팥떡을 던져 넣는 법을 알고 있다 해도, 그것만은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네. 내가 여자로 태어났다면 잠깐 청루(靑樓)에 몸을 담아 그대의 학비를 돕는다는 식의 별스러운 일도 가능할 테지만...., 그것도 이 면상으로는 어렵겠지. (104쪽 - 1891년 24살 소세키가 시키에게 보내는 편지)

편지를 하나씩 읽어갈 때마다 세월이 흐르고 그들도 조금씩 나이 들어간다. 정신적으로도 성장하고 우정도 더욱 깊어간다. 문학적으로도 서로 조금씩은 진일보한다. 소세키가 결혼도 하고 영국 유학도 떠나는 사이 안타깝게도 시키의 병세는 점점 더 나빠져만 간다. 서양에서 지내는 생활이 궁금한 시키를 위해 소세키가 영국 유학 시절을 상세하게 기록한 편지에서도 자못 친구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느껴져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시키가 병으로 몹시 고통 받을 때도 소세키는 건강을 걱정하는 염려를 담은 편지보다도 그저 묵묵히 시키를 위해 유학 생활을 꼼꼼히 기록해서 보낸다. 값싼 위로의 말보다도 친구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말없이 행하는 이토록 진중한 우정이라니.....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살던 문학청년들이 주고받은 편지. 그 참된 우정의 기록은 그들이 주고받은 하이쿠처럼 은은하게 오래도록 여운이 남을 것 같다.



수세미꽃 피고

객담에 목이 막힌
부처로구나

객담이 한 말
수세미물도
이제 소용없어라

엊그저께의
수세미물도
이젠 그만 받았네.

-죽음을 앞둔 시키가 마지막으로 남긴 하이쿠




쓰쓰소데로
따라가지도 못한
가을날 운구

피워서 올릴
향불도 하나 없이
저무는 가을

연무 자욱한
도시에 떠도는가
그림자처럼

귀뚜리 소리
옛일을 그리면서
돌아가야지

부르지 않은
억새밭에 혼자서
돌아온 사람

-시키의 부고를 들은 뒤 지은 소세키의 하이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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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6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6 16: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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