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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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최근 10주년 특별판이 나왔더라. 이 책이 불온도서로 찍히는 웃기지도 않은 일이 10년 전에는 있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10주년 특별판이 아닌, 그때 그 시절- 불온도서라는 게 존재하던 그 시절에 읽었고, 이 리뷰 또한 그즈음에 썼던 글이다.


고등학교 때 무척이나 싫어했던 과목 중 하나가 ‘정치경제’이다. 흔히 ‘정경’이라고 부르던 과목. 요즘도 이런 과목을 배우는지 모르겠는데… ‘수능 사회과학탐구’ 영역에 정치/경제에 관한 몇 문제가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이 지겨운 과목을 일주일에 한 두 번은 꼭 들어야 했다. 기말고사나 중간고사에 나오는 ‘정치/경제’ 문제는 지금 생각해보면 참 놀랍기 그지없다. 주관식으로 나오는 문제라는 게 이런 식이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을 일컫는 말은?’ 정답은 GATT- 놀랍다고? 이건 정말 실제 상황이었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지에이티티’ 이런 식으로 줄줄이 교과서를 외우기 바빴다. 그러고 나서 학교를 졸업하면 GATT 따위가 우리 사는 생활에 무슨 소용이 있냐는 듯 금세 잊었고…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읽으면서 들던 가장 큰 생각은 ‘정치경제’와 같은 과목을 중고등학생에게 가르칠 때 저렇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적용될 때 어떤 식의 파급 효과를 미치는지, 그리고 대부분의 세상 일이 그렇듯이 동전의 앞뒤처럼 좋은 면, 나쁜 면에 대해 조목조목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면, ‘정치경제’라는 과목을 내가 그렇게까지 싫어하지는 않았으리라.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아마도 고등학교 ‘정치경제’ 시간에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단어들 ‘보호무역, 자유무역, 관세, IMF, 세계은행, WTO, 신자유주의’ 이런 것들이다. 재미있는 발견 중 하나는 내가 그때 배웠던 정치경제 교과서는 분명 내가 고등학생일 당시 나라를 이끌던 정부의 정책에 따라 철저히 그들 입맛에 맞게 쓰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그때 보호무역이 민족주의적 성향에 입각하여 우물 안 개구리들이 우물 속에서만 잘 먹고 잘 살다가 우물 안에서 결국은 그들끼리 빠져 죽고 말 정책인 것처럼 교육 받았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 국사책도 다를 바 없던 것 같다. 외국 문물과 교류 없이 폐쇄적인 정책을 실행하다 조선이 망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이런 식의- 그때는 ‘세계화’와 그에 따른 ‘자유무역’, ‘신자유주의’ 이런 것들이 최고의 기치로 여겨지기 시작했던 때이니까.
   
이 책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한다. 그러니 위와 같은 교육을 받았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얼마나 재미있고(동전의 양면처럼 사물이나 현상의 이면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통쾌한 책인지 모른다. 저자 장하준은 많은 역사 속의 사례를 들어 현재 최고의 부자 나라인 미국이나 영국 등 ‘선진국가’들이 경제 개발 초기에는 높은 관세와 보호자금 등 철저한 ‘자국 산업 보호’를 통해 성장했음을 지적한다. 오늘날과 같이 ‘잘 사는’ 나라로 진입하고 나서는 ‘신자유주의’ ‘자유무역’과 같은 이론을 거들먹거리면서 개발도상국 등 가난한 나라에게 일방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펼 것을 강요한고 말한다. 정확히는 IMF, 세계은행, WTO라는 사악한 삼총사와 지역별 FTA나 투자협정 등을 통해 개발도상국들이 '자국의 발전에 알맞은 정책을 추진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왜? 이미 잘사는 나라에 진입한 그들에게는 ‘신자유주의’가 그들에게 더욱 유리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반면 ‘신자유주의’는 개발도상국이나 가난한 나라에게 있어 단기적으로는 경제적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절대로 좋은 제도일 수가 없다. 저자는 역사 속의 각종 사례를 들어 조목조목 ‘신자유주의’ 예찬자들에게 일격을 가한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저자가 자신의 여섯 살 난 아들 ‘진규’의 예를 들어 설명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여섯 살 난 아들에게 부모에게 의존하지 말고 경쟁과 자율과 시장은 좋은 것이니 지금부터 나가서 일찍 돈을 벌어오라고 하는 것이다(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실제로 세계 각지에서 이 또래 아이들이 일하고 있다). 부모로부터 과잉보호를 받고 있으니 좀 더 생산적인 인간이 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라도 경쟁에 노출 시켜야 하고, 일찍부터 경쟁에 노출되다 보면 아이의 발전에 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여섯 살 먹은 아이를 지금 노동 시장에 내몰면 아이는 당장 돈을 벌 수 있다. 그러나 이 아이가 뇌수술 전문의나 핵물리학자가 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만일 아이가 이런 직업을 가지려면 적어도 10년 동안 아이를 보호하고 아이의 교육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 여섯 살 난 아이는 대부분의 가난한 나라, 개발도상국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진국과 어느 정도의 정당한 경쟁 상태에 오르기까지 개발도상국 및 가난한 나라들은 ‘보호’를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어야 하는데, 자율과 경쟁을 모토로 삼는 ‘신자유주의’는 그들에게서 그럴 기회조차 빼앗고 있다.  

때문에 이 책에서는 올바르고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 우선적으로 경기가 이루어질 경기장부터 평평하게 만들 것을 주장한다. 약한 나라들이 자국의 생산자들에 대한 보호와 보조금 정책을 강력하게 실시하고, 외국인 투자자들에 대해 보다 엄격한 규제를 하도록 허용해야 하며, 이들 국가가 선진적인 나라들로부터 보다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차용할 수 있도록 지적소유권 보호를 완화하는 것도 허용해야 하며, 부자 나라들은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가난한 나라에게 기술 이전을 해줌으로써 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물론 부자 나라들이 과연 이런 일을 할까? 하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으나 저자는 이렇게 하는 것이 결국 모두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임을 주장한다. 가난한 나라들이 신자유주의를 도입했을 때보다 보호무역, 높은 관세 등으로 자국 시장을 보호했을 때 보다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어왔음을 지적하며 개발도상국들의 소득이 높아지면 그만큼 부자나라들이 상품을 팔 수 있는 시장이 넓어진다고 이야기 한다. 즉 개발도상국가를 비롯한 아직도 수많은 가난한 나라들이 잘 살기 위해서는 부자 나라만 더 살찌우는 획일적인 ‘신자유주의’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개별국가의 경제 정책과 국가 간의 경제적 상호 작용에 관한 규칙이 변해야 할 것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결국 이 책이 전반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경제를 '잘' 사용하면 여러 사람이 함께 잘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수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특정한 개인, 집단, 국가만이 계속 잘 살게 된다는 것이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돈'이 먼저가 아닌 '사람'이 먼저인 경제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이 책이 출간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그 안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은 여전히 유효하다. 양극화에, 날로 치솟는 자살률에, 저출산 문제까지- 신자유주의가 이 땅에 드리운 그림자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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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의 의식 대산세계문학총서 143
이탈로 스베보 지음, 한리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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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동안 인간은 얼마나 많은 결심을 할까? 그리고 그 결심을 끝까지 지켜내고야 마는 인간은 또 얼마나 될까?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봄직한, 가장 흔한 결심들을 떠올려 본다. 금연, 금주, 운동, 다이어트, 어학 공부, 저축 등등 수많은 결심들이 새해에는 이 지구 곳곳에서 무수히 꽃피었다가 며칠도 지나지 않아 시들어버리고 만다. 그러다가 또 새해가 되면 다시 그 결심이라는 꽃은 한겨울에도 마구 피어난다. 곧 시들어버리고 말 덧없는 결심의 꽃.

무언가를 계획하고 작정하는 것과는 조금 거리가 먼 나조차도 저 위에 언급한 결심의 꽃 가운데 몇몇 개는 시도해 보았다. 물론 물을 주지 않아서 그 꽃은 금방 시들어버리곤 했다. 하다못해 누군가에게는 무척 쉬어보이는 결심조차 지키지 못한다. 올해만 하더라도 산 책을 다 읽기 전에는 새 책을 구매하지 않겠다고, 굿즈 때문에 책을 사지 않겠다고 얼마나 결심을 했던가. 그 결심은 일주일도 채 가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은 100년 전에도 존재했는가 보다. 왜 아니겠는가, 그 이전에도 인간은 늘 지키지 못할 계획을 하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며칠, 아니면 몇 시간 동안 굳은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이 덧없음이여.

<제노의 의식>의 주인공 또한 그와 같은 인물이다. 19세기 끝 무렵부터 20세기 초를 살아갔던 이 남자를 평생 괴롭힌 결심은 바로 ‘금연’이다. 어릴 때부터 줄담배를 피워대던 제노는 거의 날마다 담배를 끊겠다고 마음먹지만 번번이 그 결심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의 삶 자체가 늘 ‘마지막 담배’라는 공허한 금연 결심으로 가득한 것이다. 그러나 그 담배는 언제나 마지막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제노라는 인물이 특이한 까닭은 보통 사람이라면 몇 번쯤 금연을 결심했다가 그 결심이 실패로 돌아가면 이내 결심 자체를 포기하고 마는데, 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제노는 정말 지독하게도 줄곧 금연을 결심하고 사흘도 지나지 않아서 담배를 입에 물고는 한다. 그러고는 괴로워한다.

여기서 그의 또 다른 질병(광적인 흡연을 제1의 질병이라고 본다면 말이다)이 비롯된다. 그것은 강박증이다. ‘금연’을 반드시 하고 말아야 한다는 강박증. 제노는 강박증을 심각한 질병이라 여기고 자기 병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의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의 주치의는 제노에게 내면에 떠오르는 기억들을 글로 써 보라고 제안한다. <제노의 의식>은 바로 그 기록이다. 사실, 지나친 흡연이나 강박증과 같은 증세는 어떤 시각에서 보면 그리 심각한 질병이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제노는 자신이 깊이 병들었다 생각하며 끊임없이 자신과 자기의 삶을 곱씹고 돌아본다.

바로 이런 설정에서 <제노의 의식>의 독특한 면모가 드러난다. 질병과 건강이라는 두 개의 대립을 통해 의식과 무의식, 외부와 내부, 겉과 속, 현재와 과거의 세계를 넘나들며 한 개인의 자아 및 삶을 성찰하고 이것은 더 나아가 인류 문명의 성찰로까지 확대된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문득,강유원의 <책과 세계> 속 한 구절,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 구절은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 투영해서 보자면 병든 사람만이 생각을 한다,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건강은 자기 자신을 분석하지 않으며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지도 않는 것이다. 오로지 우리 병자들만이 자신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 (211쪽)


제노는 그것이 가벼운 것이든 무거운 것이든, 병이 들었기 때문에 자기 삶을 끊임없이 돌아보게 된다. 그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다 보면 어릴 때 금연 결심부터 시작해서 아버지의 죽음, 첫사랑, 결혼, 불륜, 사업 등등 한 사람의 일생이 펼쳐진다. 물론 제노 그만의 일기이자 의식의 나열이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이야기들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정확하게 판가름할 수 없다. 다만 그가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온 인생이 그러했구나, 독자는 헤아릴 뿐이다. 그런데 한 사람의 인생은 모두 그렇게 기록되지 않는가?


그 무렵 나는 치료가 불가능한 사소한 병을 얻었다. 아주 사소한 병이었다.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이 두려움이 질투의 어떤 특별한 형태에서 생겨난 거라 믿었다. 나를 죽음에 가깝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나이 드는 게 두려웠다. (210쪽)

내가 건강을 향한 집요한 노력으로 시도했던 결혼이라는 극약 처방은 실패로 돌아갔다. 나는 너무나 지독하게 병들어 있었으며,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며 결혼한 남자로 남았다. (265쪽)


질병과 건강을 정의하는 제노의 의식은 조금 특별한데, 제노는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조차 병으로 인식한다. 그런 반면 결혼을 ‘건강을 향한 집요한 노력’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결혼을 실패로 규정짓는데, 그 까닭은 그가 결혼 뒤 불륜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불륜을 대하는 태도마저 금연을 결심하던 그의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 번번이 금연을 결심하고 실패했던 것처럼 매번 연인의 집을 찾아가지 않겠노라고 결심하면서도 어느 순간 연인을 껴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금연 때마다 느낀 죄의식을 불륜의 순간에서도 떨쳐내지 못한다. 죄의식이 줄곧 그를 따라다니는 것이다. 질병과 죄의식 그로 인한 자기반성 또는 성찰. 제노는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건강한 상태를 알고 있으며 아프기 때문에 병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는 인간이 되었다. 그러므로 병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인간이 된다.


내 삶을 병의 한 징후로 보는 의사를 용서한다. 위기와 포기를 거쳐 진행되고, 날마다 좋아졌다 나빠지는 일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삶은 어느 정도 병과 닮았다. 질병과 다른 점은, 삶은 언제나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삶은 치료를 견디지 못한다. 삶을 치료한다는 것은 우리 몸에 있는 구멍들을 상처라고 믿으면서 틀어막고 싶어 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치료되자마자 질식해서 죽을 것이다. 현실의 삶은 뿌리부터 타락해 있다. 인간은 나무와 짐승들의 자리를 차지했고, 공기를 오염시켰으며 자유로운 공간을 빼앗았다. (555~556쪽)


위 구절은 이 작품의 핵심을 담고 있다. ‘삶을 치료한다는 것은 우리 몸에 있는 구멍들을 상처라고 믿으면서 틀어막고 싶어 하는 것과 같’으며 그렇다면 우리는 ‘치료되자마자 질식해서 죽을 것’이다. ‘제노의 의식’에 따르면 병든 사람이야말로 진실을 보는 사람이고,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이 세계는 오히려 병으로 가득 차 있어 파멸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때문에 그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건강해지려는 강박에서 벗어나 병을 인정하는 진정한 의미의 ‘건강’을 되찾는다.

제노는 소심하고 심약하다. 단 한 번도 그의 결심을 제대로 이룬 적이 없다. 언제나 욕망과 그것에 대한 금지. 거기서 비롯되는 좌절로 인한 죄의식 사이에서 중심을 잃고 늘 갈등한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보지만 그 성찰과 반성은 때로 자기기만이기도 하다. 그러나 건강에 대한 자부심, 건강하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사색하거나 성찰하지 않고 다만 앞으로 나아가는 데 진력하는 대다수의 인간보다는 이 소심하고 괴팍하지만 자기를 돌아볼 줄 알았던 ‘병든 인간’ 제노가 어떤 면에서는 더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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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1-06-29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은 예나지금이나 세계문학을 누비고 있군요. <황금물고기>에 이 책이 등장해 궁금해 검색했더니 잠자냥님 글이 딱 걸림요. 찜했음다.^^ 라일라가 어떤 여정에 들어설지 계속 궁금해하며 읽고 있어요. 소설의 재미가 듬뿍!!!^^

잠자냥 2021-06-29 12:4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제가 세계문학을 좀 많이 좋아해서요. ㅎㅎ <황금 물고기>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네, 이 책도 꼭 한 번 읽어보세요. ^^
 
고양이는 예술이다 - 가장 우아한 반려동물, 인간의 화폭을 점령하다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은행나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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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나왔을 때 단연코 눈에 띈 것은 책 표지 때문이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무척 귀여운 표지에 눈이 꽂히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 고양이는 내가 키우는(?) 아니, 모시는 냥 님과 매우 닮으신 게 아닌가. 그럼에도, 고양이를 다룬 그렇고 그런 수많은 책 중의 하나이리라 생각하고는, 책 표지를 즐겁게 바라보며, 고 녀석 참 귀엽게 생겼네 하고  웃고 넘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책 저자를 보니, 어라? ‘데즈먼드 모리스’ 아닌가. 데즈먼드 모리스라면, <털 없는 원숭이>라는 매우 흥미진진한 책의 저자가 아니던가? 나는 저자를 믿고, 이 책을 읽어보기로 결정했다.

저자의 이름을 보니, 이 책은 아마도 고양이 관련 예술 작품을 해박하게 살펴보지 않을까 기대가 되었다. 실제로 이 책의 부제는 ‘가장 우아한 반려동물, 인간의 화폭을 점령하다’이다. 그렇다면 이 책 표지로 쓰인 저 귀여운 고양이 그림 또한 어떤 예술작품일 것이리라. 책을 받아들고는 전체적으로 넘겨보다가, 표지로 쓰인 그림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림과 관련한 정보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그림만 보면 유럽 어느 화가의 작품이려니 싶은데, 웬걸 일본 화가의 작품이다. ‘가와이 도쿠히로’의 ‘길든 고양이의 환상’이라는 작품으로 제작년도는 2006년이다.



가와이 도쿠히로, '길든 고양이의 환상', 2006



데즈먼드 모리스는 이 작품에서 동양의 미술 전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며 매우 특이한 작품이라고 말한다. ‘길든 고양이의 환상’은 고양이 품종부터 일본 전통에서 어긋난다. 가운데를 차지한 녀석은 스코티시폴드 종으로 그 자체가 유럽적이다. 화가는 이 그림을 “세상의 왕이 되고 싶은 고양이의 영원한 만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단다. 저자는 이 그림이 고양이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만한, 고양이의 품성을 잘 나타낸다고 말한다. 개는 주인에게 복종하지만, 고양이는 복종을 거부한다. ‘사람은 개를 소유하지만 그 사람은 고양이가 소유한다’(244쪽)는 말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고양이의 거만하고 독립적인 정신을 동화 형태로 보여주는 독특한 그림이라고 평가한다. 고양이 주인으로서, 아니 집사로서 매우 공감 가는 설명이다.

이 책은 이렇듯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구석기시대 벽화부터 시작해서 중세, 18~19세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고양이가 담긴 여러 나라의 예술 작품을 바탕으로 고양이와 인류의 관계를 살펴본다. 전통 회화만이 아니라, 중세의 동물우화, 거리 미술인 그라피티에서 현대의 만화, 남아메리카 부족의 문화와 아시아의 수묵화, 일본의 우키요에까지 장르와 지역, 시대를 가리지 않는다. 냥덕후들에게는 그야말로 읽는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을, 흥미진진한 책이다.

그러는 한편, 고양이는 어쩌다 박해 받는 존재가 되었으며, 검은 고양이는 왜 유독 불길한 이미지로 그려지는지, 그런 어두운 이미지에서 또 다시 어떻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는지,  인류에게 고양이가 어떤 의미였는지도 세밀하게 살펴본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에서 고양이는 설치류를 잡는 기특한 녀석으로 사랑 받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인기를 잃어버리는데, 그리스 신화에서 고양이는 어둠과 마녀들의 여신인 헤카테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박해받는 기나긴 역사의 초창기부터 이렇듯 불운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마녀들과 친숙한 존재이자 악의 화신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로마군 병사들은 고양이를 행운의 동물로 여겨서 데리고 다녔다. 들끓는 쥐와 생쥐를 잡아먹으면서 번성하던 야생 고양이들 말고 애완용으로 길러지는 고양이도 많았다고 한다. 수녀원과 수도원에서 특히 그랬는데, 6세기에는 교황도 고양이를 길렀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고양이를 매우 아꼈는데, 그의 전기를 쓴 부제 요한네스 히모니데스에 따르면 ‘고양이를 쓰다듬는 일을 가장 좋아하셨다.’할 정도이다. 예언자 무함마드도 고양이를 무척 사랑해서 옷소매를 깔고 자던 고양이를 깨우지 않으려고 기도하러 갈 때면 소매를 잘라냈다고 한다. 이런 까닭으로 코란에 고양이는 순결한 동물로 그려지며, 무슬림 세계가 초기에 고양이에게 애착을 보인 것이 나중에 수 세기 동안 기독교 교회가 고양이를 증오하게 된 숨은 요인 중 하나가 되었으리라고 저자는 추측한다.

중세가 저물 무렵 고양이에게 본격적으로 악마 숭배자들의 사악한 친구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는데, 이 견해는 널리 퍼지면서 수 세기 동안 굳어졌다. 그즈음 예술 작품에서는 흔히 마녀의 친구로서 고양이가 등장한다. 데즈먼드 모리스는 고양이를 악마와 관련지은 것을 몇 가지로 정리한다. 고양이는 고대 이집트에서 신성시된 존재였다. 때문에 고양이를 기독교에 반하는 이교도에게 중요한 존재라고 여기게 되었다. 또한 고양이는 집에서 키울 때조차도 고집스럽게 독립심을 간직했는데, 그래서 고양이는 동물계에서도 이단적인 존재가 되었다. 더욱이 고양이는 보통 새까맸고,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고양이를 죽음과 연관 지었다. 또 이교에서는 검은 고양이가 행운을 가져온다고 여겼는데, 이는 당연히 기독교인에게는 나쁘게 보였다. 게다가 야행성인 고양이가 어두운 밤에 돌아다니면서 울부짖는 소리는 당시 사람들에게 악마가 깃들어서 내는 섬뜩한 소음으로 들렸다. 이런 모든 요인들이 불합리하게 작용함으로써 고양이는 악마와 한 통속이 틀림없다고 여겨지게 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18세기에 접어들면서 고양이는 더 이상 박해받지 않았다. 마네, 모네, 르누아르, 고갱, 마티스, 파울 클레, 피카소, 호안 미로 등 여러 거장들이 고양이를 직접 기르면서 고양이의 매력을 담뿍 담아낸 그림들을 선보였고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된다. 이 책에서 처음 접한 그림 가운데 파울 클레의 ‘신성한 고양이의 산(Der Berg der heiligen Katze, 1923)’과 호안 미로의 ‘머리 하얀 고양이(Tete Le Chat Blanc, 1927)’나 ‘작은 고양이(Le Petit Chat, 1951)’와 같은 그림은 소장하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마음에 쏙 들었다. 루이스 웨인(Louis Wain)의 고양이 그림 또한 그렇다. 앤디 워홀이 자신의 고양이 그림들을 엮은 <샘이라는 이름의 고양이 스물다섯 마리와 파란 야옹이 한 마리>라는 작은 책자는 자비로 190부만 한정판으로 찍어서 가까운 친구들에게 선물하는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988년에야 새로 찍어서 서점에서 판매했다는데, 이 책을 구하고 싶어서 찾아보니 절판이구나. 허허허.



Paul Klee, 'Der Berg der heiligen Katze', 1923



Joan Miro, 'Tete Le Chat Blanc', 1927



Joan Miro, 'Le Petit Chat', 1951



Louis Wain, 'Electric Cat'


 Andy Warhol, '25 Cats Name Sam and One Blue Pussy', 1954



이렇듯 이 책은 나처럼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 번 더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샘솟게 해주며, 꼭 그렇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고양이를 그린 예술 작품을 통해 인류와 고양이의 관계를 흥미진진하게 읽어나갈 수 있다. 무엇보다 <고양이는 예술이다>를 읽노라면, 고양이는 그저 고양이일 뿐인데, 고양이에게 때로는 좋은 의미를, 또 때로는 나쁜 의미를 덧붙인 것은 결국 인간. 인간의 필요에 따라 고양이의 목숨이 좌지우지된 역사가 너무나도 많았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한 고양이의 지위가 인간의 이기에 따라 또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는 없지만, 그저 고양이가 또 다시 박해받는 존재가 되어 학대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잔혹한 역사만은 되풀이 되지 않기를 조용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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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병 환자 창비세계문학 59
몰리에르 지음, 정연복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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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에르의 희곡을 읽다 보면, 한바탕 마당놀이를 감상한 기분이 든다. 웃음 속에 풍자와 조롱 해학이 넘친다. 몰리에르가 창조한 인물들은 우리나라 전통 마당놀이의 인물들을 꽤 닮았다. 신분이나 지위는 높지만 어떤 한 가지를 욕망하느라 주변은 돌볼 틈도 없이, 그 하나에만 몰두해서 어리석음의 늪에 빠지고 마는 인물들(부르주아 귀족의 ‘주르댕’, 상상병 환자」의 ‘아르강’ 등)과 그런 인물을 통해 자기 잇속을 차리는 또 다른 인물들, 그리고 그 와중에도 그 어리석은 인물을 교화하고자 애쓰는 인물들이 나와 한바탕 난장을 이룬다. 그런데 조금만 더 읽다 보면, 그 어리석은 인물이 주된 풍자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인물을 이용해서 더 큰 이득을 챙기는 당대의 높으신 분들을 풍자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상상병 환자』에는부르주아 귀족」, 스까뺑의 간계」, 상상병 환자」 세 작품이 실려 있다. 부르주아 귀족」의 ‘주르댕’은 돈만 많은 부르주아로 진짜 귀족이 되기를 열망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넘치는 돈으로 ‘귀족’ 신분에 다가가고자 애쓴다. 귀족 같은 옷차림은 물론, 온갖 예술과 문화 수업을 받는다. 음악은 물론, 검술, 무용에 철학까지. 그의 하루는 귀족 따라잡기에 정신없이 바쁘다. 하다못해 하나뿐인 딸을 귀족과 결혼시키고자 안간힘을 쓴다. 일차적으로 이 작품은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형국인 ‘주르댕’이라는 인물을 풍자한다.



음악 선생: 주르댕 씨는 예술에 문외한이고 매사에 생각 없이 함부로 말하는데다가 아무 때나 박수 치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갑은 잘 열어요. 그분은 돈으로 칭찬합니다. 아시겠지만 우리를 소개한 그 알량한 귀족보다 무식한 부르주아가 우리에게는 백배 낫지요. (부르주아 귀족」, 11쪽)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어리석지만 결코 해롭지는 않은(주르댕은 그의 욕망에 충실할 뿐 주변에 해악을 끼치지는 않는다), 주인공에 비해 그 곁을 맴도는, 선함을 가장한 인물들은 오히려 해롭기 짝이 없다. 주르댕 곁에서 잇속을 챙기기 바쁜 철학 선생 및 음악, 무용, 검술 선생들을 보라. 그들은 겉으로는 예술과 철학에 밝은, 지식인과 교양을 갖춘 척하는 인물들이지만 사실 주르댕의 주머니만을 노릴 뿐이며, 그들끼리 있을 때는 서로의 직업이 우수하다고 언쟁을 벌이는 촌극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부르주아 귀족」에서 가장 사악한, 그리하여 가장 강도 높게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 되는 인물은 백작 ‘도랑뜨’이다. 그는 주르댕의 하나뿐인 귀족 친구라는 지위를 십분 활용하여, 주르댕으로부터 계속 돈을 빌려간다. 물론 그 돈을 갚을 리는 전무하다. 주르댕 부인의 말처럼 ‘친절을 베풀고 다정하게 대하고는 돈을 빌리’는 것이다. 이렇듯부르주아 귀족」은 주르댕이라는 한 어리석은 인물을 풍자하는 듯 보이지만 그 속내에는 그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비열한 귀족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이 책에 실린 세 작품의 공통점은 등장하는 모든 아버지들이 신분이나, 돈, 종교, 의학에 사로잡혀 가족(특히 자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자식의 강제적인 결혼을 통해 이루고자 한다. 억압적인 가부장이 항상 등장하는 것이다. 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스까뺑의 간계」이다. 이 작품에는 자식들이 이미 사랑하고 있는 상대가 있음에도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일방적으로 다른 상대와 결혼을 시키려는 아버지들, ‘아르강뜨’와 ‘제롱뜨’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과 얽힌 결혼소동이 한바탕 일어나는데, 이 소동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인물은 다름 아닌 ‘제롱뜨’ 아들의 하인인 ‘스까뺑’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바로 그 스까뺑이라는 개성 넘치는 인물의 활약을 지켜보는 재미가 가장 크다. 스까뺑은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개성으로 똘똘 뭉친 인물 ‘폴스타프’에 견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스까뺑: 사실 제가 손을 대면 뭐든지 됩니다. 제가 봐도 저는 천부적인 자질이 있는 것 같아요. 엉뚱하지만 어떨 때는 남이 상상도 못 하는 아이디어를 내서 다 해결하지요. 사람들은 제 재능을 보고 사기의 일종이라고 하지만, 사기가 아니라 기발한 지혜지요. 제 실력을 따라갈 만한 사람은 못 봤습니다. 이 바닥 최고의 권위자라고 남들도 그러네요. 그런데 무식한 놈들이 저를 잘 몰라요. 그래서 별 일거리는 없습니다. (
스까뺑의 간계」, 124쪽)


부르주아 귀족」의 주르댕이 그렇듯이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눈이 먼 두 아버지 ‘아르강뜨’와 ‘제롱뜨’처럼 뭔가 하나의 욕망에 집착하느라 주변은 모두 잊은 그들을 이용해 스까뺑은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도 하는데, 그 꼴이 왠지 밉살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간계가 성공하기를 바라게 된다고나 할까.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데는 기막히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 꾀돌이 하인 스까뺑의 입속에서 때로는 통찰력 빛나는 말이 쏟아지기도 한다.



스까뺑: 아가씨, 원, 그런 말씀을. 아무 문제없는 사랑은 지루한 고요함입니다. 남녀 간에 아무리 완벽하게 행복하다 해도 지겨울 거예요. 삶에는 기복이 있어야 해요. 원하는 대로 일이 잘 안 풀리면 더 열정이 생기고 즐거움이 배가되지요. (
스까뺑의 간계」, 169쪽)


스까뺑은 결국 자기 뜻을 이루지 못하고 머리가 깨져서 다 죽어가는(이마저도 연극인 것 같지만) 상황에서도 ‘저는요, 식탁 끄트머리에 데려다주세요. 거기서 제 인생의 최후를 맛보겠습니다.’라며 끝까지 웃음을 주는 강렬한 캐릭터이다. 한동안은 스까뺑의 이런 모습을 잊기 힘들 것 같다.

상상병 환자」는 몰리에르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래서 그런지부르주아 귀족」이나「스까뺑의 간계」에서 다룬 내용이 모두 집약되어 있다. 어딘가 자신이 항상 아프다고 여기는 ‘상상병 환자’ ‘아르강’은 귀족이 되고픈 주르댕처럼 ‘건강한 삶’을 늘 바라지만 그는 결국 언제나 아픈 존재이다(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는 건강을 돌봐줄 의사를 항상 곁에 두기 위해 딸을 의사와 결혼시키려고 한다. 자신이 욕망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모습은스까뺑의 간계」의 두 아버지들과 똑같다.

그런데 이런 아르강을 풍자하는 인물로는 하녀인 뚜아네뜨가 있다. 그녀는 하인 신분인 스까뺑 주인과 그 아들을 조롱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역할을 맡는다. 몰리에르의 희곡에서는 신분이 낮은 인물들이 오히려 더 약삭빠르게 자신들의 주인을 풍자하고 조롱하면서 비틀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뚜아네뜨: 혈색이 좋다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나리는 늘 혈색이 안 좋으세요. 그러니 나리 건강이 좋아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무례한 사람들이지요. 지금처럼 건강이 좋지 않았던 적은 없었어요.
아르강: 얘 말이 맞소.
뚜아네뜨: 나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걸으시고, 주무시고, 드시고 하시지만, 그래도 아주 위중한 상태이시지요.  (상상병 환자」, 255쪽)


이 작품 또한 상상병 환자인 아르강을 풍자하는 것 같지만 그런 어리석은 인물을 이용해 또다시 자기 잇속을 차리는 인물-이 작품에서는 ‘의사’-을 더욱 강하게 풍자하고 비판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의사들은 하나 같이 똑같은 처방만을 반복할 뿐이다. 어떤 병에도 ‘관장-하제-사혈’만을 반복하는 것이다. 뚜아네뜨는 자기 주인인 아르강뿐만 아니라 의사들을 향해서도 날선 비판을 숨기지 않는다.



뚜아네뜨: 웃기지도 않네요. 당신들 의사들이 병을 치유해주길 바라다니. 참 엉뚱한 사람들이군요. 의사들이야 치료해주려고 그들 곁에 있는 게 아니지요. 단지 연금을 받고 약을 처방해주기 위해서 있는 거잖아요. 치료가 되고 안 되고는 자기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상상병 환자」, 264쪽)


사람들은 비극에서 진한 감동을 얻고는 한다. 셰익스피어 작품도 비극이 더 유명하다. 그런데 정말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희극보다 더한 것일까? 몰리에르 또한 처음에는 비극 배우로 출발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의 재능은 비극보다는 희극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라신의 비극이 귀족 문화의 표현이었다면 몰리에르의 희극은 부르주아 계급을 대표했다. 그는 그렇게 민중의 친구가 되면서 서서히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상상병 환자」의 베랄드는 이렇게 말한다. “형님은 어떤 연극을 원하시는 거예요? 연극은 별의별 직업을 다 보여주고 있잖아요. 의사든 왕이든 왕자든, 어떤 명망가라도 늘 무대에 등장하지요” 이 말은 몰리에르 그 자신의 생각이 아닐까? 몰리에르는 이렇게 희극, 웃음이라는 장치를 통해 비극에서는 쉽사리 꿈꿀 수 없었던 것, 귀족이나 성직자처럼 신분 높은 이들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거기에서 독자는 비극과는 또 다른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몰리에르는 1673년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상상병 환자」에서 주인공 아르강 역할을 연기하다가 무대 위에서 쓰러졌고, 집으로 옮겨진 후 사망했다. 민중에게 웃음을 주고자 했던 그의 최후조차 뭔가 희극적이고 연극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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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여자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지음, 서상국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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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도블라토프의 <외국 여자>가 출간된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했다. 얼마 뒤 도서관에서는 이메일로 답신이 왔는데, 그 내용인즉 이러했다. ‘귀하께서 신청하신 도블라토프의 <외국 여자>는 2012년에 출간된 책으로 출판연도가 오래되어(5년 이상) 희망도서 신청대상에서 어긋납니다. 그러나 문학적 가치가 뛰어나다고 판단하여 비치하도록 결정했습니다.’ 나는 메일을 한참 들여다봤다. 내가 바란 대로 이 책을 구입한다고 하니 기뻤는데, ‘문학적 가치가 뛰어나다’는 부분에서 이 메일을 쓰거나 또는 그렇게 결정하기로 한 사서의 생각이 궁금해진 것이다. 어떤 기준에서 그렇게 판단했을까? 이야기라도 나눠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나는 그 판단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2010년인가 도블라토프의 <여행 가방>을 읽고 나서 그 뒤로 그의 책이 계속 번역되어 나오길 바랐다. 신간알림 신청을 해 둘 생각은 하지 못하고, 가끔 도블라토프 이름으로 검색해보곤 했는데, 딱히 신간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럴 것 같은 기미도 안 보였고. 그래서 더 이상 검색해 보기를 그만뒀던 것 같다. 그렇게 내 관심이 시들해졌을 즈음인 2012년에 <외국 여자>가 조용히 출간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지만지’ 시리즈로 나왔던 터라 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아무튼 그리하여 나는 드디어 이 책을 이 땅에 출간된 지 6년 만에 읽게 된 셈이다.

도블라토프의 유머를 좋아한다. 과장 없이 심드렁하게, 무미건조하게 힘을 쫙 뺀 그 유머러스함. <외국 여자>에서도 특유의 그 유머는 첫 장부터 시작된다. 이 작품의 첫 장인 ‘108번가’에는 미국으로 이민 온 러시아 이민자들 여럿이 소개된다. 물론 그 가운데는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마루샤 타타로비치’도 있지만, 첫 장에서는 108번가의 이민자들을 스케치 하듯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런데 그 면면은 어딘가 우스꽝스러워서 낄낄 웃음이 터진다. 그러나 그 이민자들의 삶은 하나 같이 ‘추락’이다. 그들 대부분이 소련에서는 잘 나가던 학자이거나 화가, 사회평론가, 인권 운동가, 예술가 등이었지만 이제 그들이 미국에서 하는 일은 자기의 예전 직업과는 상관없는, 허드렛일이 전부이다. 그 가운데 사회주의국가에서 평생 살아온 이들이 자본주의 최정점의 사회인 미국에서 느끼는 당혹감 또는 이질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책의 판매는 시들했다. 조국 소련에서는 자유가 없었으나 대신 독자들이 있었다. 이곳 미국에서는 자유가 충분했으나 독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13쪽)

미국은 카라바예프를 실망시켰다. 이곳에서는 소련의 정권도 없고 마르크스주의도 없고 그를 처벌할 징벌 기관도 없었다. 카라바예프는 투쟁할 그 어떤 대상도 없었다. (19쪽)


108번가에 사는 사람들이 짧게 소개된 뒤에는 본격적으로 이 작품의 주인공인 ‘마리야 타타로비치(마루샤)’가 소개된다. 마루샤는 소련에서 남부럽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계 생산 콤비나트의 총지배인이며 어머니는 시내에서 가장 큰 드레스 제조 공장을 경영한다. 마루샤의 부모는 출세지향 주의자들이 아니었음에도 운이 따라서 줄곧 승승장구한다. 러시아인이며, 당원이고, 어느 정도 능력이 있어야 하며, 술에 취해 있지 않아야만 ‘노멘클라투라 상위층’에 오를 수 있는데, 마루샤의 부모는 이 네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덕분에 실제로 노멘클라투라의 상위층에 오르게 된다. 그 부와 지위의 수혜자는 물론 딸 마루샤이다. 마루샤는 이렇게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가정의 한 일원으로 부족함 없이 자란다. 그러나 계속해서 마루샤가 행복하고 평온하게 살아간다면 이야깃거리라곤 없을 것이다.



누구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그 대가가 무엇인가에 대해 좀 더 자주 생각할 필요가 있는 법이다. 더 자주 자기에게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내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까? (37쪽)


마루샤는 바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선택 때문이었다. 바로 사랑. 마루샤는 자신의 신분이나 계급에 어울리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유태인 ‘체흐노비체르’가 그 대상이다. 그렇다면 그와 열렬한 사랑을 하게 되어 도피 행각을 벌이다가 이민을 가게 되는 것이냐, 하면 그것도 딱히 아니다. 아무튼 이 사랑을 시작으로 해서 마루샤의 기구한 인생은 시작된다. 서른 살이 되기까지 마루샤의 인생은 만족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나머지 모두는 불쾌함이었다. 그녀에게 만족이라는 것은 꽃이요, 레스토랑이요, 사랑이요, 수입할 물건이었으며, 음악이었다. 불쾌한 것은 돈이 없는 것, 비난하는 소리, 질병 그리고 죄책감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불쾌한 삶이 시작된 것이다. 첫 번째 결혼이 실패로 끝나고 두 번째 결혼에서도 실패의 조짐이 보이자, 마루샤는 인기 가수인 바람둥이 남편 라주달로프에게 자살하겠다고 협박한다. 그 심각한 때 도블라토프의 유머는 또 한 번 터진다. 자살하겠다고 협박하는 아내를 주제삼아 라주달로프는 이런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것이다.



그대가 만일 강으로
빠져 죽으러 갈 것이면,
내게 안녕을 고하러 와 주오.
내가 그대와 함께 강으로 가서
가장 깊은 곳을 가르쳐 주리다.  (56쪽)


몇 번의 결혼 실패 끝에 소련에서의 삶이 지난해진 마루샤는 결국 다른 곳, 다른 삶을 꿈꾸며 그즈음 소련 사회에 유행처럼 번져나가던 ‘이민’이라는 것을 단행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오스트리아를 거쳐 자본주의 최정점 세계인 미국에 안착하게 된다. 그런데 그 미국은 낯설기 짝이 없다. 때로는 넘치는 자유가 공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미국적 삶에 적응해보려 애쓰지만 그럴수록 그녀가 바라는 진짜 인생은 더 멀어지기만 한다. 마루샤는 마치 ‘친척의 별장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이르건 늦건 간에 집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녀는 잘 먹었고 건강했다. 옷도 충분했다. 그런데 ‘이것은 진짜 삶이 아니라 당원들을 위한 휴양지에서의 삶’과 같았다. 이런 삶 같지 않은 삶을 위해 그렇게 멀리 왔어야만 했는지 그녀에게는 회의감이 밀려온다.



“스스로 주위를 둘러봐. 나는 우리 이민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야. 그들 모두는 비즈니스 출장 온 사람들 같아. 모두의 손에 2루블 40코페이카가 들려 있지.” (121쪽)

“미국은 위대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이방인이에요. 우리의 신념이 무엇이든 간에 이방인이란 말입니다.” (161쪽)


아무리 손에 많은 돈을 쥐고 있어도 마치 2루블 40코페이카만 갖고 비즈니스 출장을 온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이민자들. 자유가 넘치는 미국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바로 그렇게 때문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한 채 언제나 ‘이방인’으로 머무르고 마는 이민자들. 그들의 삶이 마루샤라는 한 여인을 통해 더없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마루샤는 어쩐지 부모님이 있는 소련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그런데 그 또한 쉽지 않다. 미국에서 그녀는 영원히 ‘이방인’이지만, 소련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자 소련 정부 관련자들은 그녀를 마찬가지로 ‘외국 여자’ 취급하면서 배신자 운운한다. 어떤 사람은 마루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당신은 전형적으로 서구화되어 버린 이민 여성이에요. 자기 자신밖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마루샤는 생각에 잠겼다.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볼셰비키에게 강간을 당한 러시아 그 자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서구화 되어 버린 이민 여성이라고 말한다. 사실 나는 누구일까? (95쪽)


마루샤의 삶은 어떻게 될까? 그녀는 소련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온갖 남자들의 구애를 받고 한바탕 소동을 치르는 마루샤. 어떤 의미로든 이 책의 마지막 장은 ‘해피엔드’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실제로 그리 암울한 결말은 아니다. 게다가 이 책 서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미국에 사는 외로운 러시아 여인들에게- 사랑, 슬픔 그리고 희망을 담아 바칩니다.’라고. 때문에 이 작품의 말미는 ‘희망’에 방점을 두고 있다. 도블라토프의 <여행 가방>이 그러했듯이 이 작품 또한 이민자들의 영원히 이방인 같은 삶을 그리지만 그 끝이 결코 암울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이 든다. 마루샤를 비롯해 108번가에 사는 이민자들 모두가 앞으로도 얼마나 힘겹게 살아갈까 하는….

마루샤가 보석 디자인 수업을 받으려고 간 곳에서 그곳을 운영하는 ‘힉비’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10년 넘게 화가가 되려고 공부했어요. 그런데 불행한 보석 디자이너가 되었어요. 이것을 인생이라고 할 수 있나요?”(74쪽). 마루샤의 삶도, 다른 모든 이민자들의 삶도 생각해보면 모두 그러하다. 소련에서는 자기만의 직업과 꿈이 있었다. 그리고 인생이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어떤 사태를 만나거나 또는 상황의 여의치 않아 미국으로 쫓기듯 달아나 이민자, 영원한 이방인이 되어 버리고만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것을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외국 여자>를 읽다 보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그 어떤 체제에서도 영원히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들의 서글픈 삶이 그려진 듯해 웃다가도 슬퍼진다. 도블라토프 문학의 장점은 이렇게 소시민들의 삶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애잔하게 담아내지만 결코 암담하지 않다는 데 있다. 낄낄 웃다가도 어쩐지 쓸쓸해지는 그런 작품. 도블라토프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꼭 한 번은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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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6-18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사서가 대단한 결정을 하셨네요. 아마도 그 사서는 편견 없이 책의 문학적 가치가 무엇인지 꼼꼼하게 살펴봤을 것입니다. ^^

잠자냥 2018-06-18 17:46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그래서 그 사서와 이야기라도 나눠보고 싶더라고요. 하하하하.

Falstaff 2018-06-19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의 글을 읽으니 갑자기 호기심이 팍팍, 페널티킥을 앞에 둔 골키퍼처럼 아드레날린이 마구 뿜어져나오네요. ㅋㅋㅋ
메모해놓았습니다. 세르게이 도브라토프!!

잠자냥 2018-06-19 17:32   좋아요 1 | URL
네! <여행 가방>도 함께 추천합니다. ㅎㅎ

케이 2018-06-19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잠자냥님! 잘 계시지요? 여전히 올려주시는 리뷰 잘 보고 있는 케이입니다. 이 책 리뷰 보니 너무 재밌을 거 같아요. 지금 읽는거 다읽으면 꼭 읽어봐야겠어요.

잠자냥 2018-06-19 17:36   좋아요 0 | URL
네 케이 님도 잘 지내시지요? ㅎㅎ 이 책 읽어 보신 뒤에 마음에 드신다면... <여행 가방>도 추천해 드릴게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