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딱히 좋아하지 않는데 나는 좋아하는 게 있다. 프랑스 문학과 프랑스 영화가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프랑스 문학과 영화는 난해함과 지루함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바로 그 난해함과 지루함(?)이 좋다. 그 지루함이 나에게는 지루함이 아니랄까. 프랑스어도 좋고(아름다운 언어라고 생각한다. 특히 사랑을 말할 때), 불어로 연인들이 티키타카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순간도 즐겁다. 좋아하는 프랑스 영화 중에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가 있는데(섹스신 빼고 -_-) 그 영화에서 내가 특히 좋아하는 부분은 아델하고 엠마가 책과 예술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 그리고 엠마를 만나기 전 아델이 학교 친구들하고 문학에 관해 토론하는 장면이다. 난 이런 장면들을 볼 때 머릿속이 찌릿찌릿해진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다시 대학을 간다면 불문학을 전공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뒤늦게 해보기도 했다(그런데 얼마 전 정희진쌤 글쓰기 강의에서 쌤이 당신의 편견 몇몇 개를 말씀하시다가 불문학 전공자에게 편견 있다고 해서 빵 터졌다. ㅋㅋㅋㅋㅋㅋㅋ 그 자리에 불문학 전공자가 있을지 모르니까 더 이야기하지는 않겠다고 말끝을 흐리셨지만 아무튼 무슨 지점 때문에 그럴지 알 것 같기도).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프랑스 문학이나 영화에서는 예술에 관해 아무렇지 않게 일상적으로 대화하는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어떤 이들의 눈에는 그게 허영이나 허세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처럼 먹고살고 돈벌이에만 다들 급급해서 돈과 관련한 이야기가 아니면 모든 게-특히 예술이- 지적 허영&허세로만 보이는 사회보다는 그런 것들이 일상인 것, 삶의 디폴트가 되어 있는 게 인간으로서는 더 나아 보인다. 나는 그래서 프랑스 영화나 문학을 볼 때 오히려 남들이 말하는 그 지루함과 난해함에서 숨통이 트이는 기분을 느낀다. 이렇게 말하면 또 누군가는 직접 가서 살아보면 그 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그조차도 환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부자가 되는 것에 다들 눈먼 사회보다는 예술 판타지로 가득한 그 세계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사랑도 이곳보다는 자유로워 보인다. 여기에서는 제도로 다들 묶인 채 한눈팔기가 디폴트가 되어 있다. 한눈팔기 안 하는 사람을 바보 취급하기도 하고 도리어 장려하기도 한다. 그럴 바에야 굳이 왜 제도 안에 묶이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어떤 커플의 나이 차이에도 다들 그렇게 민감한지. 연하남-연상녀 커플인 데다가 그 나이 차이가 열 살 이상 난다면 눈이 휘둥그레. 남들의 사랑에 고정관념은 왜 그렇게도 많은지. 참 답답한 사회다. 그런데 사강이 그리는 세계 속 사랑은 그렇지 않다. 자유로운 사랑을 그리는 데 사강만큼 빼어난 작가가 또 있을까. 사강을 딱히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번역되어 나온 사강 작품은 거의 다 읽은 것을 보면 나는 사강 빠인가 아니면 사강이 그리는 그 프랑스인들의 삶에서 큰 즐거움을 느끼는 것일까. 사강 빠라기보다는 그녀가 그리는 사랑 안의 섬세한 묘사나 관계의 고독감에 관한 빼어난 통찰을 사랑한다고 하자. 사실 사강의 작품을 읽는다고 해서 막 사랑이 하고 싶어지지는 않는다. 사랑의 관계에 놓인 그들 대부분이 하나같이 고독에 잠겨 있기 때문에 사랑도, 사람도 종국에는 다 허무하게 느껴진다고 하는 게 더 옳으리라.
사강조차도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정말 좋은 책을 쓰고 싶다’, <리틀 블랙 드레스>, 프랑수아즈 사강, 열화당)
사강의 작품 속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사랑을 하고 있기는 한데, 그 사랑이 서로 통하는 순간보다 어긋나는 순간이 많다. 통하다가도 금방 시들어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다시 꽂히기도 하고 그 사랑도 그렇지만 곧 소멸하고…. 부부처럼 제도로 묶인 사람들은 더 고독하고 외롭다. 그리고 대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실을 자기 배우자나 파트너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그렇지만 그 시들어버린 사랑 속의 그들에게도 초창기에는 서로 빠져들면서 눈부시게 꽃이 피던 순간들이 있다. 사강은 그런 순간들도 매우 잘 포착해서 그려나간다.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라 기억이 선명한 <패배의 신호>에서 루실과 앙투안이 서로가 같은 부류임을 알아보고 별것 아닌 이야기로도 즐거워서 밤을 지새우며 웃고 키득거리다가 결국 사랑에 빠져버리는 것- 그런 순간을 사강처럼 섬세하게 표현하는 작가도 드물다. 물론 이 둘의 사랑도 결국에는 사랑에 빠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헤어지게 될 것임을 이 책을 읽는 이들은 다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사강은-그리고 그녀가 빚어낸 인물들은 서로 한때 애정을 열렬히 나누던 사이임에도 이 사랑 역시 영원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그 생각을 문득문득 떠올린다. 인생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영원한 것은 없다고. 사랑조차..... 그런데 그렇지 않은가?
“일 년 후 혹은 두 달 후,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조제는 사랑의 짧음에 대해 말했다. “언젠가 당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될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겠죠. 그리고 우리는 다시 고독해지겠죠. 그리고 한 해가 또 지나가겠죠.” “나도 알아요.” 조제가 말했다. <한 달 후, 일 년 후>
갑자기 사강에 대해서 글을 끼적여보는 까닭은 최근 읽은 사강의 <황금의 고삐> 100자평에 은오가 “잠자냥 님 패배의 신호 말고 또 좋았던 사강 작품 있으신가요?! 브람스도 3별이던데......”라고 물었고, 생각해본다고 답을 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서 찾아보니 대개 나는 사강 작품에 별 셋을 준 적이 많더라. 오래전에 읽은 책들이 많고 100자평도, 리뷰도 남기지 않은 것들이 더 많아서 세세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데 별점 위주로 찾아보니 지금까지는 이렇다.
엎드리는 개 5별 -2024, 7월 19일 추가
패배의 신호 5별
어떤 미소 4별
마음의 심연(미완성작) 4별
마음의 파수꾼 4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3별
슬픔이여 안녕 3별
한 달 후, 일 년 후 3별
신기한 구름 3별
황금의 고삐 3별
리틀 블랙 드레스 4별 (에세이)
<패배의 신호>를 읽기 전까지는 <어떤 미소>를 가장 좋아했다. 4별 무리보다 조금 위로 올려놓은 까닭은 4.5별이랄까? 여대생이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유부남과 사랑에 빠지면서 겪는 심리 묘사가 탁월하게 그려지는데 두 사람이 어느 호텔에 일주일 가까이 붙어 지내면서 나누던 사랑의 시간들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별 후의 그 고독감도. <마음의 파수꾼>과 <마음의 심연>도 좋았다. <마음의 파수꾼>은 두 남자와 한 여자, 세 사람의 기묘한 동거와 약간 미스터리 같은 구조가 흥미로웠다. <마음의 심연>은 미완성작이라 과연 좋을까 싶었는데 좋아서 놀랐던 기억. 으음 아마도 이건 비교적 최근에 읽은 터라 더 기억이 생생한지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슬픔이여 안녕> <한 달 후, 일 년 후>가 모두 3별인데 내게 3별은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고, 나는 좋았기는 한데 딱히 당신한테도 좋을지는 알 수 없어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는 싶지 않은 그런 책이다. <슬픔이여 안녕>과 <브람스>는 사강의 대표작으로 꼽히기도 하고 그녀를 스타로 만들어준 책이기도 한데 그 명성에 비해 좀 싱거웠던 느낌이라서 별을 후하게 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같은 3별이라도 조금 뒤로 처지는 3별이 <신기한 구름>과 <황금의 고삐>인데, <신기한 구름>은 집착 쩌는 남녀가 등장해서 좀 질려버렸달까. <황금의 고삐>는 서로 질린 두 부부(만 등장해서!) 시종 나를 질리게 만들었다. -_-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겠지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제목은 사강이 물음표 대신 일부러 말줄임표 세 개를 꼭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은 딱히 브람스를 좋아하지 않아서 브람스 공연에 초청하기 전에는 꼭 이 질문을 해야 한다고. 그 제목을 나도 따와서 한번 비틀어 본다. <사강을 좋아하세요...> 사강을 좋아하든 말든 아니, 프랑스 문학을 좋아하든 말든 한번 더 읽어보지 않겠느냐고. 최근에 사강의 에세이 <해독일기>, <엎드리는 개>가 새로 나와서 반가웠는데! 글보다 그림이 많아서 이 책은 사지 않을 것 같다. 글만 좀 읽어보고 싶기는 한데.......
끝으로 어제 사강의 에세이 몇 개를 뒤적이면서 다시 읽어보다가 사강은 이런 글을 참 잘 쓴다고 생각했다. 아래 에세이는 사강이 십대 시절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기숙사를 몰래 빠져나온 오후 어느 노숙인과 나눈 짧은 우정을 다룬 글이다. 마지막 두 단락, 참 아름답지 않은가.
그날 이후로 이상한 일주일이 시작했다. 나는 별문제 없이 기숙사를 빠져나와 센강까지 달려 친구를 만나러 갔다. 나는 그의 이름을 몰랐고, 그도 내 이름을 알지 못했다. 센강이 우리 앞에서 회색에서 하얀색으로 빛깔을 바꾸는 동안, 우리는 난간에 앉아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나눴다. 태양이 사라지면 나는 내게 십 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음을 알아챘다. 나는 그를 향해 몸을 돌려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도 미소를 지으며 약간 가엽다는 듯이 마지막 남은 담배를 건넸다. 시간을 걱정하는 나에게 그가 보인 연민과 동정이 짜증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는 결국 그에게 기숙사에 늦게 돌아가면 쫓겨난다고 말해버리고 말았다. 그는 전혀 놀란 기색이 아니었지만, 진지한 얼굴로 나를 불쌍히 여겼다.
순간적으로 나는 그에게 그와 같은 사람이 돼서 강변을 산책하며 사는 편이 더 낫겠다고 말했다. 그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워요. 자질이 있어야 한다니까요!”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내게 “사는 법을 아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내게 산다는 것은 친구와 돈을 갖고 춤추고 웃고 읽는 것이었는데, 그는 그 모든 것 중에 어느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저녁 내내 생각하다가 다음 날 그에게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어보리라 결심했다.
이튿날 비가 조금 내렸다. 그래도 반 친구들은 우비를 입고 외출했고, 나는 나대로 덧옷을 입고 빗속으로 나갔다. 그가 가고 없을까봐 걱정이 되어 계속 달렸다.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비에 젖은 채 도착했고, 그는 다리 밑에서 늘 그렇듯 담배를 물고 있었다. (..........)
어쩌면 나의 유일한 친구일지도 모르는 그가 떠나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에게 물었고, 그는 내게 영영 다시 볼 수 없겠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센 강변에서 보낸 그 여름의 일주일은 친구를 사귀고, 친구를 잃기에 좋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는 내게 미소를 건네며 떠났다. 나는 햇빛 속으로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지켜봤다.
나는 기숙사까지 달렸다. 이제 하얀 햇살이 쏟아지던 거리를 지나 강까지 달아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것 하나, 행복한 피로 같은 것 그리고 그날 이후 친숙한 짐승처럼 내게 매달려 있던 시간의 냄새만이 남았다. (<가만히 걷는다>, pp.62~64 발췌)



(파리 리뷰, <작가란 무엇인가3>, 프랑수아즈 사강 편에서)

알라딘 프랑스문학 마니아의 현황... 술파랑이 러시아문학 마니아에 이어 2위군요.

그나저나 오늘 웃긴 거 발견... 은오, 너 왜 여기서도 나 쫓아다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