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때였다. 그날은 어쩐지 자연스럽게 ‘죽음’이 화두로 오갔다. 나는 언젠가는 스위스에 가서 죽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한 친구와 또 다른 친구가 자못 놀라며 자신들도 그런 생각을 하노라고 고백했다. 그때까지 툭 터놓고 이야기한 적은 없었지만 그날 우린 조금 놀랐다. 아, 너도 그렇구나, 아, 역시 내 친구인가 하는 그런 기분도 조금은 들었다. 우리에게 스위스에서의 죽음은 남달랐다. 스위스는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는 나라이다. 서른을 훌쩍 넘긴, 거의 비혼 여성들인 나와 내 친구들은 하나 같이 언젠가 혼자 맞을 죽음을 생각한다. 나이 들어서도 병들지 않고 건강할 수 있고 여전히 활력 넘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인생은 그럭저럭 괜찮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는 노화하고 병들고 누군가에게 언젠가는 짐이 될 수 있다. 꼭 타인에게 짐이 되는 것이 아니더라도, 내가 나 자신에게 스스로 짐이 될 수도 있다. 나도, 내 친구들도 그런 순간이 오기 전에, 나의 죽음을,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선택하고 싶다는 바람을 밝힌 것이다.
여섯 명이 모인 자리에서 세 사람이 존엄하게 내 죽음을 선택하고 싶다고 털어놓은 것이다. 그날 그 자리에는 나의 연인도 함께 있었는데 나와 친구들보다 조금 어린 내 연인은 그런 이야기들을 놀라운 눈으로 가만히 듣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조금 우울하고 조금 섭섭하고 또 조금은 황망한 얼굴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언젠가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렇게 염세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노라고 울적해하며 이야기했다. 자신과 함께 지내는 날들이 행복하지 않은 것이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그것과는 좀 다르다고, 지금 행복하고 만족할지라도 세상이, 인생이 그리 만만하지 않고 산다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 아니냐고, 그리고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 않고 나 스스로 정신이 또렷할 때 죽음을 선택하는 게 왜 나쁜 일인지, 누군가를 우울하게 만드는 일인지 모르겠노라고 말했다. 어쩌면 너도 얼마쯤 더 살아보면 이런 생각을 이해하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슈테판 츠바이크는 ‘자유의지와 맑은 정신으로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의무’를 다하겠노라 말하며 유서를 남겼다. 그때 그는 맑은 정신이었다. 한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이 세상을 등지기를 선택했다. 나치에 점령당한 조국을 떠나 브라질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 그곳을 사랑하게 되었음에도 그에게 세상은 더 이상 삶을 지탱할 만한 곳이 아니었고, 예순이 넘은 나이에 모든 일을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또 엄청난 힘이 필요한 일이었다. 고향 없이 떠돌며 여러 해를 보내느라 그의 힘은 바닥이 난 상태였다. 그러므로 그는 ‘개인의 자유를 지상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던 사람으로서 적절한 시기에 올바른 태도로 생을 마감’하기를 선택한다. 장 아메리는 이러한 죽음을 단지 자살이라 칭하지 않고 ‘자유죽음’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 자유죽음은 ‘지극히 자연적’이며 ‘그것도 드높은, 유일하게 우리 손으로 설정한 기준, 즉 존엄성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죽음’(97쪽)이라고 역설한다.
누군가는 장 아메리의 이런 주장을 극렬히 비난할 것이다. ‘자유죽음’? ‘자살’을 예찬하다니! 칭송하다니! 이런 불온한 자가 있는가! 격분하는 이도 있으리라. 그것은 신의 섭리에, 자연의 섭리에 반하는 행동이며 사회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주장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비난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아니 전 지구적으로 자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 장 아메리가 명명한 ‘자유죽음’을 선택한 이들은 죽어서도 비난받기 일쑤이다. 그들의 동료나 가족들도 덩달아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자살은 언제나 숨겨야 할 비극적 사건이 되고 만다. 그렇게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살아가야 한다고 훈수를 놓기도 한다.
그러나 이쯤에서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사회와 종교는 왜 한 개인에게 이 세상을 아무리 힘겹고 구차할지라도 인간이라면 태어났으니 끝까지 살아가야 한다고, 살아서 인간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렇게 인간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은 비난받아 마땅한 존재로 치부하는 것일까? 아메리가 지적하듯이 ‘개인이 사회의 소유물’인가? 인간은 과연 ‘누구에게 속하는 존재’일까? 이 사회는 한 사람을 판단할 때 그의 쓸모, 즉 ‘기능성’을 두고 판단한다. 그래서 ‘인재(人材)’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쓴다. 인재를 육성한다고, 사회의 재목(材木)이자, 재료(材料)가 되는 사람을 기른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훈육당한다. 때문에 사회에서 불필요한 인간, 즉 쓸모가 없는 사람들, 이를테면 우울증으로 종일 누워 지내며 생산에 종사하지 못하는 사람, 동성애자로서 이 사회를 유지하는 데 기본이 되는 생식 행위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더 이상 재료이길 거부하는 ‘자유죽음’ 선택자들은 모두 지탄받아 마땅한 대상이며, 사회는 언제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런 인간을 치료하고 갱생하려 든다. 그러나 나는, 과연 누구의 소유인가? 나는 누구에 속하는 존재인가?
장 아메리는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속하는 존재’라고, 그 자명한 사실을 다시금 일깨운다. 그러므로 ‘살아야만 한다는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존재’(181쪽)가 또 인간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은, 또는 그 이상으로 삶에서 도무지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애초부터 삶 그 자체가 그럴 수도 있다. ‘돌이킬 수 없이 실패하고 만’ 상태, 그것을 아메리는 ‘에셰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에셰크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이 자유죽음으로 인간은 인간성과 존엄성을 방패로 삼아 이 에셰크에 맞설 수 있다. 자유죽음은 에셰크에 대한 유일한 대답으로서 언제나 에셰크를 담고 있는 인생에 대한 저항이다. 막다른 골목에 서 있으면서도, 돌이킬 수 없는 실패 상태로 내내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가, 아니면 자기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자유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가? 장 아메리는 에셰크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 반자연적이기 때문에 자연적인 죽음,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자 자유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츠바이크에게는 자유 없이 나치에 지배당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그런 에셰크 상태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보다는, 자유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츠바이크처럼 이렇게 ‘스스로 손을 내려놓는 사람’은 생의 부자연스러움, 생의 압박, 생의 에셰크로부터 벗어나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자유를 선택’(159쪽)했기에 가장 극단적이면서도 최후에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서의 ‘자유’(225쪽)를 만끽하게 된다. 쓸모, 즉 사회에 필요한 ‘기능성의 대상’에서 에셰크 상태의 인생을 자각하는 인간, 하나의 존재로 자리했다가 자유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그는 진정한 자유로운 존재, 해방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것을 과연 비겁한 도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인간 개개인에게 벅차기 짝이 없는 인생을, 그저 달콤한 생이라고, 언젠가는 이 씁쓸한 생을 참고 견디며 살아가다보면 마침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무감각한 정신으로, 이른바 ‘정신승리’하면서 단지 사회에 쓸모 있는 ‘기능성의 대상’으로 하루하루를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도피가 아닐까?
그렇다면 모두가 세상에, 이 세계의 에셰크에 저항해 죽어버리란 말인가? 자유죽음을 선택하라는 소리인가?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장 아메리는 인간이 자유롭게 자기 죽음을 선택할 권리, 즉 실존의 한 존재로서 자유죽음을 선택할 그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역설할 뿐이다. 내가 나의 죽음조차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면, 그조차도 사회의, 종교의 눈치를 봐야 한다면 그것은 과연 인간인가? ‘인간이 자신에게 목숨을 던져버리겠어’ 하고 말하는 순간, 그는 한없이 자유로워질 수 있고 그 체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강렬하다. 마치 품안에 사직서를 갖고 다니면서,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노동자가 그렇지 못한 노동자보다 자유로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이런 자유죽음은 ‘인생과 관련한 모든 거짓말을 회수하게 만든다’(258쪽). 자유죽음을 선택하거나 그러기를 생각하는 사람은, 인생이 달콤하다는, 지금은 씁쓸해도 언젠가는 그에 대한 보상을 반드시 받을 것이라는 사탕발림에 속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인생의 불손함, 사탕발림에 맞서는 당당함을 품고 살아갈 수 있다. 또 그래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자유에 이르는 길은 결코 찾을 수 없다. ‘이런 당당함이 없다면 철조망 가까이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수용소의 포로와 마찬가지’(264쪽)이다. 생은 ‘인간다운 존엄과 자유가 없는 인생’으로부터 빠져나오라고 인간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자유죽음은 이런 인생의 모순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때문에 죽음은 곧 삶이 되며, 언제든 내가 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자신감, 자부심, 당당함, 죽기로 각오하고 인생의 모순인 에셰크에 맞서는 당당함은 결국 ‘삶의 길을 열어준다. 그래서 부정이 돌연 긍정’이(264쪽) 되는 것이다. 자살할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살아가라, 가 아니라 언제든 나는 내 죽음을 한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임을 자각하고, 그 당당함으로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이 전하는 뜨거운 역설이다. 스위스에서의 죽음을 이야기하던 그날, 우리는 우울하지도 슬프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돈 모아서 같이 떠나자! 의기투합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 여행이 너무 좋아서 죽기는커녕 도리어 행복하게 돌아오는 거 아니야? 하고 웃기도 했다. 그렇게 마음속에 언젠가는 스위스에서의 죽음, 나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그날을 품고 살아가기에 우리는 이 생에서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