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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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때였다. 그날은 어쩐지 자연스럽게 ‘죽음’이 화두로 오갔다. 나는 언젠가는 스위스에 가서 죽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한 친구와 또 다른 친구가 자못 놀라며 자신들도 그런 생각을 하노라고 고백했다. 그때까지 툭 터놓고 이야기한 적은 없었지만 그날 우린 조금 놀랐다. 아, 너도 그렇구나, 아, 역시 내 친구인가 하는 그런 기분도 조금은 들었다. 우리에게 스위스에서의 죽음은 남달랐다. 스위스는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는 나라이다. 서른을 훌쩍 넘긴, 거의 비혼 여성들인 나와 내 친구들은 하나 같이 언젠가 혼자 맞을 죽음을 생각한다. 나이 들어서도 병들지 않고 건강할 수 있고 여전히 활력 넘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인생은 그럭저럭 괜찮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는 노화하고 병들고 누군가에게 언젠가는 짐이 될 수 있다. 꼭 타인에게 짐이 되는 것이 아니더라도, 내가 나 자신에게 스스로 짐이 될 수도 있다. 나도, 내 친구들도 그런 순간이 오기 전에, 나의 죽음을,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선택하고 싶다는 바람을 밝힌 것이다.

여섯 명이 모인 자리에서 세 사람이 존엄하게 내 죽음을 선택하고 싶다고 털어놓은 것이다. 그날 그 자리에는 나의 연인도 함께 있었는데 나와 친구들보다 조금 어린 내 연인은 그런 이야기들을 놀라운 눈으로 가만히 듣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조금 우울하고 조금 섭섭하고 또 조금은 황망한 얼굴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언젠가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렇게 염세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노라고 울적해하며 이야기했다. 자신과 함께 지내는 날들이 행복하지 않은 것이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그것과는 좀 다르다고, 지금 행복하고 만족할지라도 세상이, 인생이 그리 만만하지 않고 산다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 아니냐고, 그리고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 않고 나 스스로 정신이 또렷할 때 죽음을 선택하는 게 왜 나쁜 일인지, 누군가를 우울하게 만드는 일인지 모르겠노라고 말했다. 어쩌면 너도 얼마쯤 더 살아보면 이런 생각을 이해하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슈테판 츠바이크는 ‘자유의지와 맑은 정신으로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의무’를 다하겠노라 말하며 유서를 남겼다. 그때 그는 맑은 정신이었다. 한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이 세상을 등지기를 선택했다. 나치에 점령당한 조국을 떠나 브라질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 그곳을 사랑하게 되었음에도 그에게 세상은 더 이상 삶을 지탱할 만한 곳이 아니었고, 예순이 넘은 나이에 모든 일을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또 엄청난 힘이 필요한 일이었다. 고향 없이 떠돌며 여러 해를 보내느라 그의 힘은 바닥이 난 상태였다. 그러므로 그는 ‘개인의 자유를 지상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던 사람으로서 적절한 시기에 올바른 태도로 생을 마감’하기를 선택한다. 장 아메리는 이러한 죽음을 단지 자살이라 칭하지 않고 ‘자유죽음’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 자유죽음은 ‘지극히 자연적’이며 ‘그것도 드높은, 유일하게 우리 손으로 설정한 기준, 즉 존엄성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죽음’(97쪽)이라고 역설한다.

누군가는 장 아메리의 이런 주장을 극렬히 비난할 것이다. ‘자유죽음’? ‘자살’을 예찬하다니! 칭송하다니! 이런 불온한 자가 있는가! 격분하는 이도 있으리라. 그것은 신의 섭리에, 자연의 섭리에 반하는 행동이며 사회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주장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비난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아니 전 지구적으로 자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 장 아메리가 명명한 ‘자유죽음’을 선택한 이들은 죽어서도 비난받기 일쑤이다. 그들의 동료나 가족들도 덩달아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자살은 언제나 숨겨야 할 비극적 사건이 되고 만다. 그렇게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살아가야 한다고 훈수를 놓기도 한다.  

그러나 이쯤에서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사회와 종교는 왜 한 개인에게 이 세상을 아무리 힘겹고 구차할지라도 인간이라면 태어났으니 끝까지 살아가야 한다고, 살아서 인간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렇게 인간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은 비난받아 마땅한 존재로 치부하는 것일까? 아메리가 지적하듯이 ‘개인이 사회의 소유물’인가? 인간은 과연 ‘누구에게 속하는 존재’일까? 이 사회는 한 사람을 판단할 때 그의 쓸모, 즉 ‘기능성’을 두고 판단한다. 그래서 ‘인재(人材)’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쓴다. 인재를 육성한다고, 사회의 재목(材木)이자, 재료(材料)가 되는 사람을 기른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훈육당한다. 때문에 사회에서 불필요한 인간, 즉 쓸모가 없는 사람들, 이를테면 우울증으로 종일 누워 지내며 생산에 종사하지 못하는 사람, 동성애자로서 이 사회를 유지하는 데 기본이 되는 생식 행위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더 이상 재료이길 거부하는 ‘자유죽음’ 선택자들은 모두 지탄받아 마땅한 대상이며, 사회는 언제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런 인간을 치료하고 갱생하려 든다. 그러나 나는, 과연 누구의 소유인가? 나는 누구에 속하는 존재인가?

장 아메리는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속하는 존재’라고, 그 자명한 사실을 다시금 일깨운다. 그러므로 ‘살아야만 한다는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존재’(181쪽)가 또 인간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은, 또는 그 이상으로 삶에서 도무지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애초부터 삶 그 자체가 그럴 수도 있다. ‘돌이킬 수 없이 실패하고 만’ 상태, 그것을 아메리는 ‘에셰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에셰크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이 자유죽음으로 인간은 인간성과 존엄성을 방패로 삼아 이 에셰크에 맞설 수 있다. 자유죽음은 에셰크에 대한 유일한 대답으로서 언제나 에셰크를 담고 있는 인생에 대한 저항이다. 막다른 골목에 서 있으면서도, 돌이킬 수 없는 실패 상태로 내내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가, 아니면 자기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자유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가? 장 아메리는 에셰크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 반자연적이기 때문에 자연적인 죽음,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자 자유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츠바이크에게는 자유 없이 나치에 지배당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그런 에셰크 상태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보다는, 자유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츠바이크처럼 이렇게 ‘스스로 손을 내려놓는 사람’은 생의 부자연스러움, 생의 압박, 생의 에셰크로부터 벗어나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자유를 선택’(159쪽)했기에 가장 극단적이면서도 최후에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서의 ‘자유’(225쪽)를 만끽하게 된다. 쓸모, 즉 사회에 필요한 ‘기능성의 대상’에서 에셰크 상태의 인생을 자각하는 인간, 하나의 존재로 자리했다가 자유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그는 진정한 자유로운 존재, 해방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것을 과연 비겁한 도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인간 개개인에게 벅차기 짝이 없는 인생을, 그저 달콤한 생이라고, 언젠가는 이 씁쓸한 생을 참고 견디며 살아가다보면 마침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무감각한 정신으로, 이른바 ‘정신승리’하면서 단지 사회에 쓸모 있는 ‘기능성의 대상’으로 하루하루를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도피가 아닐까?

그렇다면 모두가 세상에, 이 세계의 에셰크에 저항해 죽어버리란 말인가? 자유죽음을 선택하라는 소리인가?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장 아메리는 인간이 자유롭게 자기 죽음을 선택할 권리, 즉 실존의 한 존재로서 자유죽음을 선택할 그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역설할 뿐이다. 내가 나의 죽음조차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면, 그조차도 사회의, 종교의 눈치를 봐야 한다면 그것은 과연 인간인가? ‘인간이 자신에게 목숨을 던져버리겠어’ 하고 말하는 순간, 그는 한없이 자유로워질 수 있고 그 체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강렬하다. 마치 품안에 사직서를 갖고 다니면서,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노동자가 그렇지 못한 노동자보다 자유로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이런 자유죽음은 ‘인생과 관련한 모든 거짓말을 회수하게 만든다’(258쪽). 자유죽음을 선택하거나 그러기를 생각하는 사람은, 인생이 달콤하다는, 지금은 씁쓸해도 언젠가는 그에 대한 보상을 반드시 받을 것이라는 사탕발림에 속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인생의 불손함, 사탕발림에 맞서는 당당함을 품고 살아갈 수 있다. 또 그래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자유에 이르는 길은 결코 찾을 수 없다. ‘이런 당당함이 없다면 철조망 가까이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수용소의 포로와 마찬가지’(264쪽)이다. 생은 ‘인간다운 존엄과 자유가 없는 인생’으로부터 빠져나오라고 인간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자유죽음은 이런 인생의 모순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때문에 죽음은 곧 삶이 되며, 언제든 내가 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자신감, 자부심, 당당함, 죽기로 각오하고 인생의 모순인 에셰크에 맞서는 당당함은 결국 ‘삶의 길을 열어준다. 그래서 부정이 돌연 긍정’이(264쪽) 되는 것이다. 자살할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살아가라, 가 아니라 언제든 나는 내 죽음을 한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임을 자각하고, 그 당당함으로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이 전하는 뜨거운 역설이다. 스위스에서의 죽음을 이야기하던 그날, 우리는 우울하지도 슬프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돈 모아서 같이 떠나자! 의기투합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 여행이 너무 좋아서 죽기는커녕 도리어 행복하게 돌아오는 거 아니야? 하고 웃기도 했다. 그렇게 마음속에 언젠가는 스위스에서의 죽음, 나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그날을 품고 살아가기에 우리는 이 생에서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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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8-22 12:1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읽다가 ‘슈니츨러‘의 <구스틀 소위>가 너무 읽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런데 검색해보니 구스틀 소위란 제목으로는 책이 눈에 띄지 않았어요. <카사노바>가 실린 책을 제가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렇지만 구스틀 소위, 구스틀 소위를 읽고 싶습니다. 소위의 내적 갈등을 읽는 것은 같이 생각하며 한껏 철학적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저는 아직 나의 죽음을 내가 선택하겠다, 자유죽음을 맞이하겠다, 라고 결심하지 못하겠어요. 그런데 장 아메리의 이 책을 읽은 건 너무 좋았어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달래주는 방법을 또 하나 알게된 것 같아서요.

혹시 잠자냥 님, 구스틀 소위 읽으셨나요? (구스틀 소위에 대한 집착..)

잠자냥 2022-08-22 12:30   좋아요 2 | URL
다부장님, 전 <구스톨 소위> 읽었지롱요~ ㅋㅋㅋㅋㅋ 부럽죠? 알려줄까 말까...ㅋㅋㅋㅋㅋㅋㅋ

을유에서 나온 <라이겐>에 구스톨 소위가 있습니다요.

다락방 2022-08-22 12:31   좋아요 2 | URL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 잠자냥 님은 구스틀 소위 읽었을 줄 알았어.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아무튼 검색하러 갑니다. 슝 =3=3=3=3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잠자냥 2022-08-22 12:35   좋아요 1 | URL
저도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구스톨 소위!

독서괭 2022-08-22 12:59   좋아요 2 | URL
이렇게 다락방님은 또 한번의 책박스를 받게 되고.. 몇주뒤 뜯은 택배를 보며 라이겐?? 이걸 내가 왜 샀지? 고민하게 되는데…

다락방 2022-08-22 13:47   좋아요 5 | URL
그러면 저는 아마 알라딘에 페이퍼를 쓰겠죠. 박스에서 튀어나온 이 책을 대체 내가 왜 산것인지 모르겠다, 하고요. 잠자냥 님과 독서괭 님 둘 중 한 분은 제 페이퍼에 답을 달아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사는 걸로........(응?)

독서괭 2022-08-22 13: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의 리뷰가 넘 설득력이 있는데요?? 저도 안락사 선택이 가능하면 좋겠습니다. 죽는 날을 정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돌연사보다 훨씬 낫지요.. ㅜㅜ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살아가야 한다는 훈수는 참 주제넘은 것 같아요. 자살자를 비난할 수 있는 자격은 미성년자녀에게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삶을 사랑하는 것과 반대는 아니라고도 생각하고요! 근데, 자냥님 짝꿍님 반응이 귀여우세요 ㅎㅎㅎ

잠자냥 2022-08-22 14:09   좋아요 3 | URL
책이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었겠지요?! ㅎㅎㅎ
그 사람 그때 시무룩한 얼굴이 잊히지 않네요. 근데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던 제 말에도 시무룩 하던 그 사람.... 지금은 자기도 다시 태어나고 싶지는 않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늙어가는 것이죠. ㅋㅋㅋ

초란공 2022-08-22 13: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장 바라는 죽음은 일본 영화 <인생 후르츠>에 나오는 할아버지처럼 오전에 밭일하고 오후에 낮잠 자다가 죽는거에요. ‘자유죽음‘까지는 아직 용기가 안나고요. ^^;; 삶을 정리하고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 있디면 하고 바랍니다.

잠자냥 2022-08-22 14:10   좋아요 1 | URL
<인생 후르츠> 그 영화도 삶과 죽음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참 울림 깊은 영화였습니다. ㅎㅎ
저 또한 제 삶을 정리하고 또렷한 정신으로 사라질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페넬로페 2022-08-22 1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위스에서의 안락사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돈도 많이 들고 죽음을 선택할 이유가 아주 뚜렷하고 명백해야하고요.
저도 잠자냥님의 연인처럼 혼자 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옆에서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주고 싶은데~~
더 늙어서 제 몸을 주체 못하면 그때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어요^^
자유죽음에 대한 용기가 아직 없어요~~

잠자냥 2022-08-22 15:07   좋아요 2 | URL
쉽지 않겠지요, 쉽지 않아아 한다고 생각하고요-ㅎㅎ
그러다 보면 죽음을 선택할 권리도 결국 부(富)에 의해 좌우되는가 해서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안락사에 대해서 너무나 쉬운 사회라면 그것도 또 나름의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목련 2022-08-22 15: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든 책은 잠자냥으로 통한다. 알라딘에서 책에 대한 질문은 잠자냥 님께로~~
저도 구스톨 소위가 궁금했거든요.

잠자냥 2022-08-22 15:43   좋아요 1 | URL
하하, 아닙니다! 저도 모르는 책이 수두룩한데요!
오늘은 저도 집에 가서 구스톨 소위 다시 읽어야겠어요~

유부만두 2022-08-22 1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도 파도 끝이 없는 화수분 잠자냥님

잠자냥 2022-08-22 16:10   좋아요 1 | URL
돈이 좀 그랬으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2-08-22 17:19   좋아요 1 | URL
책 질문에 모두 답해주시잖아요. 이제 질문당 돈 받으;;;;;

바람돌이 2022-08-22 16: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에고 저는 죽으려고 스위스까지 가기는 너무 귀찮고, 그냥 저 죽을때쯤이면 우리나라도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뭐 그렇습니다. ㅎㅎ

잠자냥 2022-08-22 17:00   좋아요 3 | URL
ㅋ 저도 그렇기는 한데, 우리나라 종교 집단들 행태를 보면 그런 일에 극렬 반대하고 나서서 좀처럼 어려울 거 같습니다... ㅎㅎㅎ

2022-08-22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2 2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2 2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2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2-08-22 18: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쉬......... 여기서 나와 잠자냥은 통한다!! 저는 비록 이번에 네덜란드가느라 스위스 존엄사 비용을 탕진했지만, 다시 또 부지런히 모을 예정입니다ㅋㅋㅋ .... 이 책 많이 읽으면 좋겠네요. (나나 읽자) 읽지 않아도, 요 책 리뷰만 읽어도 전 이미 자유 죽음론자 일거 같긴 한데 ㅋㅋㅋ 근데 좀 부럽습니다. 제가 이런 말 하면 내 주위 사람들은 넌 참 요상한 생각을 하는 애다.... 으으, 이러는 데... 토론을 했는데 과반수 이상이 존엄사를 선택 하다니-ㅋㅋㅋ (그 술자리 참 좋은 술자리다ㅋㅋㅋ)

잠자냥 2022-08-22 22:04   좋아요 1 | URL
ㅋ 역시 쟝쟝은 그럴 줄 알았어요. 돈은 또 모으면 되는 거고! 가슴 속 사표처럼 스위스는 맘속에 품고 살면 되는 겁니다. 내 친구들 술자리가 좀 말이 통합니다. ㅎㅎ

coolcat329 2022-08-22 19: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늘 우리나라도 안락사를 허용하면 좋겠다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인데요...사실 연명 치료 중단도 굉장히 오랜 세월 논의 끝에 시행되었잖아요. 그래서 쉽지 않을 거 같지만 이 책은 꼭 읽어 보고 싶네요.
구구절절 제 생각과 맞아서 너무 반가웠어요. ㅠ

잠자냥 2022-08-22 22:06   좋아요 1 | URL
네, 오래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쿨캣 님도 꼭 한번 읽어보세요. 더 구구절절 공감하며 읽으실 거예요.

케이 2022-08-24 14: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결혼 전에는 우리 엄마 돌아가시면 좀 더 살다 늙으면 혼자 죽어야지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엄마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고 나니 늙으면 스스로 죽겠다는 말이 단 한 번도 죽음을 목전에 둔 적 없는 자로서 자만 혹은 교만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편안한 죽음이 아닌 개죽음을 맞더라도 난 우아하게 죽을 수 있는가? 자문해보니 그건 또 아니더라고요.
가끔 불행한 타인의 삶을 보면서 쉽게 저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는 말도 하는데, 죽도록 불행한 그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만약 안락사가 허용된다면, 살고 싶어도 가족들 등쌀에 마지못해 죽을 결심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예전에 신문에서 ‘인욕‘ 이란 한국 고유의 정서가 있다는 글을 봤어요. 욕됨을 인내한다는 뜻으로 한마디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단 말인데, 겸허히 죽음을 수용 혹은 선택하는 것만큼이나 삶을 유지하는 것도 숭고한 것이란 생각이 드는 오후입니다.
그런데 우리 엄마 같은 경우, 그러니까 의료진이 무슨 짓을 해도 6개월 이상 사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 남은 절차라곤 사지의 모든 기관이 마비되어 가는 것뿐일 경우에는 제발 편히 죽게 해줬으면 좋겠더라고요. 너무 잔인하잖아요..
처서 지나니 날씨가 확 변했어요. 언제나 건강하시고 또 좋은 글 부탁드려요!

잠자냥 2022-08-24 15:31   좋아요 1 | URL
맞아요. 늙으면 스스로 죽겠다는 말도 어쩌면 교만일지도 몰라요. 저 또한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하거든요.
죽음도 삶도 수용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어떤가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케이 님 어머니처럼 육체의 고통이 너무 클 때는 연명이 어떤 의미일까 더 고민하게 될 거 같아요.
아무튼, 날이 정말 선선해져서 깜짝 놀란 아침입니다. 케이 님도 쌍둥이들하고 건강 잘 챙겨요~

모과차 2022-10-22 0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금 전에 인스타에서 이 책에 대한 소개를 읽는데, 익숙한 이름이 있더군요. 잠자냥님의 리뷰가!ㅎㅎ 그동안 알라딘을 이용하면서 잠자냥님의 리뷰를 정말 많이 접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큰 도움이 됐어요. 이렇게 댓글을 남기는건 처음이지만요. 저는 잠자냥 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1도 없지만, 글이 참 따뜻하다는 생각은 자주 했습니다. 믿고 읽는 리뷰, 항상 감사드려요. 앞으로도 이렇게 남몰래, 조용히, 그렇게 읽겠습니다!ㅋㅋ

잠자냥 2022-10-22 01:2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모과차처럼 향기롭고 따뜻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