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위험하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 오렌지디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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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나 엔리케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읽고 머리에 각인된 작가. 최근 번역 출간된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위험하다》를 반가운 마음에 냉큼 사서 읽었다. 여전히 음험하고 서늘하며 위험하다. 유령이 나타나고 말도 안 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전혀 생뚱맞게 여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과 너무나 닮아서 섬뜩한 공포로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일어서는 느낌이다.

마리아나 엔리케스는 이 책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돌아온 아이들>을 꼽았다. 나도 이 작품의 서늘한 공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작품의 주인공 ‘메치’는 실종 아동들 기록 보관서에서 일하고 있다. 기록 보관소는 누구나 이용 가능하지만 찾아오는 이들은 드물다.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면 경찰이나 검찰이 문서를 갖고 간 경우가 많고 이곳에 기록이 보관된 아이들은 실종된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단지 종이 더미에 불과하다. 나날이 보고서와 자료가 수북이 쌓여간다. 간혹 가족이나 친지들이 찾아와 잃어버린 아이들의 행방을 찾기도 한다. 놓친 실마리는 없는지 각종 문서와 자료를 훑어본다. 또 때로는 새로운 의혹이나 자료를 들고 오기도 한다. 이를 전문 용어로 ‘부모에 의한 납치 피해자들’이라고 한다. 아버지나 어머니 중 한 명이 아기를 데리고 잠적해 버린 경우가 가장 필사적인데, 아이와 함께 달아난 쪽은 대부분 어머니이다.

아이들은 왜, 어쩌다 사라졌을까? 메치는 기록 보관소 아이들의 서류를 훑어본다. 아이들은 종종 나이든 남자와 함께 어디론가 떠나거나, 갑자기 아이가 생겨 겁을 먹고 사라진다. ‘술주정 부리는 아버지, 새벽부터 자기를 강간하는 양아버지, 밤에 등 뒤에서 수음하는 남동생을 피해 달아난 아이들. 클럽에서 술에 취해 며칠 동안 정신없이 놀다가 막상 집에 들어가기가 무서워 밖을 떠도는 아이들’(224쪽)이 대부분이다. 유괴나 납치를 당한 여자아이들은 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매춘 조직으로 끌려간 뒤 다시는 나타나지 않은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죽은 채 발견되거나 납치범들을 살해한 뒤 경찰에 검거된 아이들도 있다. 이런 경우는 악의 소굴을 벗어났으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사라진 아이들의 사연을 문장(文章)으로 지켜보는 일도 그리 쉽지는 않다. 심적으로 힘들어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진다.

이렇게 사라진 아이들의 이야기는 다른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무대로 한 <슬픔에 젖은 람블라 거리>에서도 아이들을 향한 이 세계의 폭력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유럽 최대의 소아 성애 조직이 아이들에게 마수를 뻗치고, 매춘부의 아이들을 방에 가두어 놓고 사진을 찍는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가난에 찌든 여인들이 돈 몇 푼 받고 자신의 아이들을 소아성애자에게 팔아넘기고, 광장에서 소아성애자들에게 사냥당하는 아이들도 있다. ‘학교를 가는 대신 칼을 든 채 무리 지어 거리를 돌아다니거나 매춘’을 하는 아이들, ‘마약쟁이 엄마가 데려다 놓고 방심한 사이에 발코니에서 떨어진 아이들, 목에 열쇠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서너 살짜리 아이들, 택시 운전사를 죽이고 약물 과다복용으로 죽거나, 돈을 벌기 위해서 거리에서 매춘을 하는 아이들’(128~129쪽) 등등.

이런 끔찍한 풍경을 서술, 나열함으로써 뭔가 다른 효과를 노리는 건 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한다(《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읽을 때도 들었던 생각이다). 단지 독자의 관음증을, 호기심만을 자극하려는 술수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리아니 엔리케스는 영리하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독자의 관음증을 자극하면서도 그런 인간의 비뚤어진 본성이, 그 이기적인 본성이 바로 이 세계의 비참함을 불러왔음을 폭로한다. <돌아온 아이들>의 주인공 ‘메치’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녀는 기록 보관소에서 무료함을 달래고자 아이들의 문서를 읽어본다. 그러다가 그 아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 없는 소녀 ‘바나디스’의 기록을 읽게 되고, 서류를 덮고 나서도 이 매혹적인 아이의 이미지를 지우지 못한다. 이 아이는 어쩌다 사라졌을까, 이 예쁜 외모라면 틀림없이 납치되어서 좋지 않은 일을 겪고 있으리라. 살아있다면 좋겠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또 그 나름대로 어른들에게 착취당하며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으리라…….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단지 서류상에서 존재하는 바나디스를 향한 메치의 집착은 나날이 심해져간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다. 메치의 친구로 기자인 ‘페드로’는 메치의 기록 보관소를 충실히 이용해 사라진 아이들에 관한 기획기사를 쓰고 그로 말미암아 주위의 인정과 함께 명성을 얻는다. 바나디스의 기록을 보고 그 또한 관심을 갖는다. 아이는 이 평범한 두 어른들의 눈을 사로잡을 만큼, 그토록 매혹적이다. 페드로는 어느 날 동영상을 입수한다. 동영상 속 소녀는 화질이 좋지 않아 또렷하게 보이지 않지만 어쩐지 바나디스일 것 같다. 그 소녀가 틀림없는 것 같다. 메치는 냉큼 그 동영상을 확인하고 싶지만 참는다. 그러나 자꾸만 보고 싶다.


그녀도 그 휴대 전화 영상을 보고 싶었다. 아니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병적인 호기심을 선행을 위한 것이라고 포장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위험하다》, 256쪽)


그러던 중 놀랍게도 어느 날 그 바나디스가 메치 앞에 실제로 나타난다. 메치는 아이의 사진을, 기록을 너무나 많이 봐왔기에 바다디스를 단번에 알아본다. 사라진 그 소녀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바나디스의 가족과 친지들은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아이를 다시 만나자 미친 듯이 기뻐하다 기절하기까지 한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메치는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바나디스가 실종된 지 1년이 다 되어가도록 전화 한 통화 하지 않던 인간들이 저 난리를 피우니 말이야. 더구나 그전에 저 아이가 소년원에 들어갔을 때 면회를 간 사람이 아무도 없었잖아. 열네 살 때 거리에서 매춘을 시작했을 때도 저들은 아이를 구하려고 애를 쓰기는커녕 관심조차 갖지 않았으면서…….’

언론도 모순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신기하게도 바나디스가 나타난 이후로 곳곳에서 사라진 아이들이 되돌아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돌아온 아이들의 상태가 기묘하다. 아이들은 실종된 지 몇 년이 지나 돌아왔음에도 사라졌을 당시 그 모습 그대로이다. 3년 전에 아버지와 험하게 말싸움을 하다 두드려 맞고 집을 나간 아이는 돌아왔을 때  눈두덩이가 부어올라 있었고, 아랫입술은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마치 24시간 전에 두들겨 맞은 듯한 몰골이다. 메치는 아버지가 그 아이를 구타했다는 사실을 기록 보관소 문서에서 본 적이 있다. 이런 정보라면 기자들도 다 알고 있으리라. 그런데도 아이가 돌아오자 기자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밝히지 않은 채, 오로지 감동적인 상봉 장면만 부각시키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기자인 페드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바나디스를 중심으로 한 기획 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인신매매범들과 뚜쟁이들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차곡차곡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바나디스를 비롯해 아이들이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나타나면서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고 한탄한다. 돌아온 아이들이 그동안 자신의 노력을 다 망쳐 버렸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취재고 뭐고 아무 쓸모도 없다고 화를 낸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이 입수한 ‘바나디스 영상’은 방송국에 큰돈을 받고 팔아버릴 생각이다. 그 돈을 받고 이 끔찍한 나라를 뜰 것이라면서 메치에게 함께 떠나자고 말한다. 그때 메치는 페드로에게 묻는다. “왜 여기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다른 데도 똑같을지 어떻게 알아?” “내 말은 다른 곳에서는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걸 어떻게 아느냐는 거야.”(280쪽)

그러니까, 아이, 소녀, 가장 여리고 나약한 존재를 착취하고 그들에게 온갖 폭력을 자행하는 어른들은 아르헨티나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 곳곳에 있다. 집안에서는 아이를 방치하거나 구타하고 성폭력을 자행하며, 그런 집을 견디다 못해 가출한 아이나, 납치되거나 유괴된 아이들이 또 다른 폭력의 희생양이 되는 일은 비단 아르헨티나의 어느 어두운, 가난한 뒷골목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아이를 탐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어른들, 아이들의 영상을 찍고 그것을 보고 싶어 하는 어른들, 그것으로 한탕 돈벌이를 하려는 어른들, 그것으로 기사를 써 부와 명성을 얻으려는 어른들은 이 세계 곳곳에 있다. ‘돌아온 아이들’은 사라졌을 당시의 그 모습 그대로 어른들 앞에 나타나 자신들을 폭력에 노출되게 한 어른들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가해진 폭력이 어떤 것인지, 자신들의 잘못을 쉽사리 깨닫지 못한다. 비단 이 작품만이 아니다. 이 책에서는 10대 청소년부터 젊은 여성, 혼자 사는 노인에 이르기까지 세대별, 계급별로 다양한 여성의 삶이 그려진다. 그들은 대부분 가족이나 주변의 가까운 이들로부터 폭력을 당하거나 억압 받고, 상처를 입어 그로 인해 고통스럽게 살아간다(<우물>, <땅에서 파낸 앙헬리타>,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위험하다>). 때로는 그 틈바구니에서 자신들의 욕망을 여과 없이 표출하기도 한다(<호숫가의 성모상>, <심장이여,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카르네>). 이들의 삶을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팔다리가 절단된 유령보다도 더 끔찍하게 무서운 것은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살아있는 인간들, 그리고 그들이 만든 이 세계가 아닐까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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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10-13 13:1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지금 제게 배달되고 있는 책입니다.
바로 읽으려고 합니다.

첫번째 스토리부터 유령이 난무하
니, 기대만빵이네요.

잠자냥 2021-10-13 16:14   좋아요 4 | URL
흥미진진해서 냉큼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유부만두 2021-10-13 13:4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아 이 작가가 이번에 국제 작가 축제에서 강연 하는(한??) 작가군요. 무서운 이야기라고요? 찜. (아후, 이게 몇 권 째에요. 찜 찌다 늙겠어요)

잠자냥 2021-10-13 16:15   좋아요 4 | URL
네, 이번에 우리나라까지 왔더라고요. 공포/호러 장르이긴한데 무서운 거 잘 못 읽는 제가 소화가능한 정도이긴 합니다. ㅎㅎ

mini74 2021-10-13 16:42   좋아요 5 | URL
너무 찌면 만두는 터질수 있어요 유부만두님 ㅎㅎㅎ

책읽는나무 2021-10-13 13:4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잠자냥님의 리뷰되는 책들은 우선 보관함에 넣고 봅니다!!!
내가 읽어 보지 못한 책들이 너무 많아서 길잡이가 되는 느낌을 주는 분들 중 한 분이신데....보관함에 일단 담고 보니 내보관함이 언젠간 폭발하지 않을까?걱정 되는군요ㅜㅜ 빨리 읽어서 권 수를 줄여나가야 할텐데..일단 담고만 있으니ㅜㅜ

잠자냥 2021-10-13 16:16   좋아요 4 | URL
저 위에 보관함 달인 유부만두 님이 잘 아실텐데 알라딘 장바구니랑 보관함은 절대 터지지 않아요! ㅋㅋㅋㅋㅋ

mini74 2021-10-13 16: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니콜라스 케이지가 나왔던 8미리란 영화가 생각나네요. 거기서도 실종된 여자아이들을 찾는 ~~ 궁금하고 읽고 싶어집니다. 저도 찜 *^^*

잠자냥 2021-10-13 17:20   좋아요 4 | URL
오 그렇군요. 이 책도 언제 한 번 읽어보세요~

붕붕툐툐 2021-10-13 23: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진짜로 무서운 건 호시탐탐 나를 놀려 먹으려는 자냥이~😱
원래 담배는 침대에서 피우는게 제 맛(멋?) 아닙니까?ㅎㅎ

잠자냥 2021-10-14 00:09   좋아요 4 | URL
해헤헤헤 쌤 그러다 침대에 빵구난다요~

coolcat329 2021-10-15 16:5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책도 너무 읽고 싶네요.. 사실 제목만 봤을 땐 별로였거든요.
정말 내용이 심적으로 힘들거 같긴 한데 궁금하긴 합니다.

잠자냥 2021-11-05 20:33   좋아요 4 | URL
사실 표제작은 그렇게까지 인상 깊지 않은데 그 작품을 표제작으로 꼽았더라고요.

그레이스 2021-11-05 16: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불조심 표어!^^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독서괭 2021-11-05 16:5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자냥오별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새파랑 2021-11-05 18:54   좋아요 1 | URL
아 ㅋ 역시나 아이디도 책에서 얻으셨군요 ^^

새파랑 2021-11-05 18: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적립금은 다 잠자냥님께 ㅋ
생각해보니 <변신>에 ˝잠자˝를 보고 아이디 만드신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독서괭 2021-11-05 18:52   좋아요 5 | URL
그 잠자 맞다고 하신 것 같아요 ㅋㅋ

잠자냥 2021-11-05 20:34   좋아요 4 | URL
네 그레고리 잠자의 잠자 고양이의 ‘냥’을 합친 조합입니다. ㅎㅎ

초딩 2021-11-07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
짝짝짝~

thkang1001 2021-11-07 18: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을 많이 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