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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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우아한 거짓말로 누군가가 고통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은 누군가를 외롭게 하는, 고립되게 하는 거짓말을 해본 적이 있나요?
당신은 우아한 방관을 정당하다고 합리화한 것은 아닌가요?

이야기는 천지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천지는 아침부터 MP3 타령이다. 엄마는 보증금을 올려줘야 할 처지라 애먼 소리 하지 말라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타박이다. 이상하다. 천지는 막무가내로 조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천지는 참았고, 착했고, 인내하는 아이인데 오늘따라 이상하다. 언니 만지도 엄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이상하다' 이상 생각하지 못한다. 그런데 천지가 털실에 목을 감고 죽어버렸다.
자살이다. 자살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게 정말 자살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물론 자살이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사건만 따지자면 분명 천지는 자살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자살이 아니다. 자살이라고 볼 수 없다. 중학교 1학년 아이가 자살을 택했다면, 그것은 이유가 있다. 수면 위로 드러난 진실이 모두 진실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것은 강요된 자살이다.

자, 이제 진실을 알아야할 시간이다. 진실을 알고 싶은 만지와 엄마. 그리고 진실이 밝혀질까 두려운 직접적 가해자 화연. 진실과는 동떨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간접적 가해자인 미라. 진실로 다가가려고 할수록 물러서는 이들, 하지만 기억해야할 것은 이 아이들도 어린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천지가 죽고, 엄마와 만지는 이사를 한다. 천지가 죽었는데도 엄마와 만지는 표면적으로 명랑하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다시 꾸려나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한 맺힌 엄마의 모습이라곤 찾을 수 없다. 자식을 가슴에 묻었다. 누구보다 고통스럽지만, 만지와 함께 살아야 한다. 그리고 엄마는 천지의 죽음, 그 내막에 둘러싸인 진실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다. 만지는 내일을 준비하는 아이였다. 그 아이가 왜 죽었을까?

화연, 그녀의 우아한 거짓말, 아니 잔혹한 거짓말은 천지를 좀먹기 시작한다. 천지의 정신이 감정이 화연에게 휘둘린다. 화연은 지능적으로 천지를 괴롭힌다. 한마디로 천지를 가지고 노는 것이다. 생일파티는 2시인데 일부러 천지에게만 3시에 오라고 한다. 그리고 천지만 뒤늦게 자장면 한 그릇을 먹게 한다. 천지의 아버지는 사고로 죽었는데도 화연은 천지의 아버지가 자살로 죽은 것처럼 떠든다. 마치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아이들은 '힘'에 의해 조종된다. 화연은 아이들에게 물질적으로 어필한다. 사실 그들도 그 말이 진실이 아닌 것을 알고, 화연이 하는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만 모두 침묵한다. 그것은 '남'의 일이고 말려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중학생이 되고 천지도 조금씩 달라진다. 자기한테 쩔쩔매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독자노선을 걷는 것이다. 아이들의 반응도 조금씩 바뀐다. 화연은 그 상황이 싫다. 천지는 겉으로는 태연해졌다고 하지만, 아픈 감정들을 이겨낸 것도 치유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천지가 국어 수행평가 발표를 한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잡한 말이 뭉쳐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혹시 예비 살인자는 아닙니까? 감사합니다."
명확한 글은 자살을 암시했고, 경고했다. 화연은 그 의미를 알 수 있었지만 태연하게 군다. 하지만 천지가 죽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모를 비밀이 있다. 천지와의 또 다른 약속.

만지와 엄마, 천지 그들은 화목한 가정이다. 하지만, 서로에 관해 잘 몰랐다. 천지의 속이 곪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 엄마이지만, 딸이 죽음까지 생각하는 줄은 몰랐다. 만지는 화연이와 천지가 단짝인 줄만 알았지 화연이가 천지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 몰랐다. 만지는 동생의 흔적을 밟아가며 단짝 친구 미란의 동생 미라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로 천지의 고통을 희미하게 알게 된다. 하지만, 미라도 어쩌면 간접적인 가해자라는 생각이 든다. 미라는 사회 전체의 사람들을 대변한다. 무관심 나와 상관없는 일에 간섭하고 싶어하지 않는 행동. 만지는 천지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남과 동시에 무관심한 사회와 사람에게 화가 난다. 결국, 지능적인 거짓말과 회피가 천지를 죽음으로 몰아가게 한 것이다.

화연은 화연대로 죄책감을 느끼지만, 그것은 자신의 행동에 후회라기보다는 천지의 죽음에 대한 원망이다. 그것은 또 부모에 대한 분풀이로 표출된다. 변명을 만들고 핑계를 만드는 것이다. 결국, 친구의 죽음 앞에서도 솔직해지지 못한다. 자신이 해왔던 거짓말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도 화연의 탓은 아닐 것이다.

천지는 다섯 개의 실에 메시지를 남긴다. 실은 결국, 하나다. 엄마, 만지, 화연, 미라, 그리고 또 하나의 메시지. 천지는 살고 싶다는 흔적을 여기저기 여러 번 남겼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게 슬픈 현실이다. 죽기 전에 들어주는 이 없고, 죽고 나자 들어주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다. 이 모순의 끈, 언제쯤 끊어질 수 있을까? 

이 책은 아이들의 시기와 질투, 무관심이 어떻게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인가를 보여준다. 또한, 가족들에게 어려움을 털어놓을 수 없었던 한 아이의 고민과 근심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아이들에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진실은 자꾸 뒤로 물러나고 조작된 거짓말이 진실로 받아들여질 때 사람들은 자살을 한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많이 봐왔다. 학생, 가장, 경제인, 연예인, 심지어 대통령도 자살에 이르렀다. 상황, 소문, 말들이 퍼져 얼마나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지 봐왔다.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큰일이며 너무 깊은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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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의 꼼수 Essays On Design 4
사카이 나오키 지음, 가와구치 스미코 그림, 김향 외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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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디자인을 하고 있지도 않지만, 디자인과 밀접한 삶을 살기에 언제부터인가 디자인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는데 디자인은 알면 알수록 어렵다.
뚝딱 하고 태어나는 것인 줄 아는 모든 디자인에는 숨은 노력과 시간들이 숨어있다. 그리고 우리 삶의 전부가 디자인이라는 사실은 디자인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을 꾸려낸 '사카이 나오키'라는 사람은 디자인계에서 꽤 유명한 사람인가 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면 유명한 사람이든 아니든 방대한 지식과 통찰력에 질려버릴 만큼 디자인적인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이구나 라고 느끼게 된다. 디자인 전문가를 위한 책이 아니라고 하지만, 디자인에 대해 지식이 없는 사람이 읽다 보면 걸리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각각의 주제들은 일상적인 것들이 많아 질릴 때쯤 되면 주위를 환기해 준다. 

80가지 이야기가 쓰여 있다. 디자이너, 브랜드, 생활용품, 트랜드, 음식, 디자인 등 모든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디자인이라고 생각하기에, 모든 것을 디자이너적인, 디자인적인 관점으로 바라본다. 그게 재밌다. 한 가지 사물을 보더라도, 디자이너가 하고 있는 생각은 또 다르다는 게. 그리고 그 디자인에 숨겨진 꼼수를 지나치지 않게 파헤치며, 자기라면 이렇게도 해볼 텐데 하며 팁을 건네는 것도 재밌다.

디지털 카메라, 휴대전화, 초박형 TV, 로고 등에 관해 이야기하다가도 푸딩, 국기, 라이터, 불꽃놀이, 지팡이, 재떨이, 이쑤시개 등 의외의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는 지팡이를 의료 기구라는 선입관에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가 다리를 다치고 지팡이를 사용하게 되면서부터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떠올리는 지팡이는 지지대 역할을 수행하며, 걷기를 편하게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팡이를 쓰면서 지팡이의 디자인을 연구하며, 지팡이 마니아가 된다. 지팡이의 형태를 구분하고, 지팡이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인지도 따진다. 그리고 지팡이가 쓰는 사람에게 주어야 할 기능적인 면을 분석하고, 지팡이가 패션 아이템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주목한다. '실용' 때문에 손에 쥐게 됐던 것을 '취미' 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지팡이가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이야기한다. 그의 집요함이 눈에 띄는 칼럼이다.

비단 지팡이 이야기 뿐만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80가지 소재들은 짧은 글 속에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문장을 허투루 낭비하고 싶은 마음도 느껴지지만, 디자인 하나에 담긴 철학과 기능,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면밀히 분석하는 디자이너 장인다운 정신이 느껴진다. 그는 15번째 이야기에서 한국 디자인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한다. 그가 느꼈던 한국 디자인은 불완전 했었나 보다. "어디에도 없는 디자인을 하라."라는 디자인 책임자의 말이 무책임하게 들렸던 것이다. '누구도 본 적 없는 좋은 디자인의 물건'을 만들라는 주문이 비이상적이었으며, 현실적이지 않아 보였던 듯하다. 장사의 도구로서만 디자인을 생각하는 한국 디자인 정신에 아쉬움을 느끼고 있어 보인다.

각 주제마다 그려진 일러스트도 흥미로웠지만, 디자인 지식이 짧은 나로서는 실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더 많았다. 게다가, 일본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많았고, 디자이너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도 해서 일러스트로 이해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다. 각각의 것들을 일일이 찾아보고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들이 많아서였을 것이다. <디자인의 꼼수>라는 책을 보며 디자인 정신이란 무엇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디자인은 갑자기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시행착오와 조사, 논의, 생각 등을 거쳐 완성되는 것이다. 그가 쓴 이 책을 보면, 그가 대단한 디자이너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물이 가진 디자인 꼼수를 말하기 위해, 역사나 기원, 마케팅, 브랜드 부분까지 철저하고 세세하게 말하는 방식에서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전체를 어우르고 모든 것을 종합해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통찰력 있는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랄까?

사실, 좀 어려운 부분도 많았다. 일본 문화가 익숙하지 않기에, 일본에만 있는 것들에 대한 디자인 이야기를 할 때는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런 것들에서 일본의 대단함을 느끼기도 했다. 에키벤(일본 기차역에서 파는 도시락)이나, 리메이크 백, 쇼쿠간(과자 속에 덤으로 들어 있는 장난감), 미즈히키(선물 포장이나 봉투를 장식하기 위해 색실로 만든 매듭), 와가시(일본 과자의 총칭) 등.

디자인의 숨은 힘은 대단하다. 그걸 한 번에 다 받아들이고 소화시킬 수는 없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결국 알아내야 할 부분임을 느낀다. 만만한 분야는 아니지만, 곁에 두고 공부하면 재밌는 분야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모든 디자인에는 꼼수가 숨어 있다. 그 꼼수에 좀 더 진중해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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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여행 - 놀멍 쉬멍 걸으멍
서명숙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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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에라도 제주로 떠나고 싶다. 올레길을 걸으며, 사람을 만나고 자연을 만나고 제주를 만나고 싶다.

그런 마음이 한없이 들게 한다. 그곳으로 떠나고 싶은, 올레지기 서명숙이 말하는 올레 어딘가에 서서 바람을 한껏 맞으며 몇 시간쯤 있더라도 행복할 것 같다.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걷기 여행>을 읽으면, 걷는 것을 즐기지 않는 사람도 곧 걷기 예찬가로 변할 것이다. 걸으며 보는 하늘과 풀, 생명들, 사람이 난폭하던 누군가를 치유하고, 아이의 마음도 맑게 한다. 그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자연이라고 말하면, 식상하다고 해도 자연이 사람의 마음을 치유한다.

'당신의 까미노를 만들어라'

산티아고에서 만난 여인의 말에, 올레지기 서명숙은 고향 제주도에 올레길을 만들기 시작한다. 치열하게 살아왔던 시간에 휴식을 주기 위해 떠났던 산티아노 순례길. 800km를 걸으며 만났던 많은 사람과 시간 속에 담아왔던 이야기. 그녀는 길 위에서 제주도를 생각한다. 세계인이 찾는 길을 우리나라에도 만들리라. 올레길을 만들 결심, 잊고 있었던 고향이 그녀를 깨운다.

도시는, 현대는 속도전이다. 속도에서 밀리면, 도태된다.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한눈을 팔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 속도에 발맞춰 살던 그녀는 그 속도에 넌더리가 난다. '간세다리(게으름뱅이)'가 되고 싶다. 느릿느릿. 그녀는 산티아고에서도 느릿느릿 걷는다. 젊은이들은 속도전을 즐기지만, 속도의 세월을 통과한 그녀는 이제 느림의 시간을 즐긴다. 제주도는 그녀가 '간세다리'로 살기 위해 좋은 곳.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 곳이다. 그녀의 요람이고, 어머니 뱃속 같은 그곳이 그녀에게 느림의 길을 터준다.

그녀는 도전했고 얻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올레길은 14코스까지 생겼다. 그 코스를 열면서 그녀는 데면데면했던 동생과 화해를 할 수 있었고, 고향의 기억을 되살려 행복할 수 있었다. 사람들과 힘을 합쳐 올레길을 만들었고, 할망(할머니)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시간 위에서 행복을 주었다. 그녀는 올레길을 만들며 행복했다. 그 위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 때문에.
그녀의 행복이 느껴진다. 올레길을 만들고,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그 안에서 치유되는 사람들을 보며 그녀는 자신만의 길을 만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길은 또 다른 길을 만든다. 길의 연쇄 작용. 길 위에서 사람들은 인생의 길이 변하고, 감정의 길에 문을 열고, 닫힌 길을 튼다. 길은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 또 다시 오라고 손짓한다. 길을 벗어날 수 없다.

성산 일출봉, 주상 절리, 차귀도, 한라산 등 많은 곳들을 돌아다녔지만, 나는 차 안에 있었다. 길을 따라 달리며 제주를 봤다. 자동차 위에서 본 제주도는 성급하게 지나갔다. 시간은 없고, 제주를 봐야 하고 어디든 가서 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본 것이 제주도일까? 제주도의 모습은 내가 본 게 다였을까?
가방을 꾸리고, 제주도로 달려가고 싶다. 내가 보지 못한 제주도를 만나러. 그녀의 속삭임이 나를 자꾸 유혹한다. 제주도로 오라고. 올레길로 오라고. 보여줄 게 많다고.
그녀가 만든 평화로운 길 위에서, 바쁘 건너온 시간들을 천천히 돌아볼 시간을 갖고 싶다.
꼭 그렇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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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성기 옮김 / 이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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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은,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입으로 말한 마음은, 과연 진실한 마음일까? 거짓된 마음일까?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오로지 자신만이 느낄 뿐.

'선생님'은 어릴 적 부모님을 갑작스럽게 여의고 믿었던 숙부에게 부모님의 유산마저 빼앗긴다. 세상에 홀로 선 '선생님'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된다. 상처를 받기 싫어 에고이즘으로 똘똘 뭉친 인간으로 변한 '선생님'은 사랑을 쟁취하고 결혼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친구인 K에게 상처를 주고 자살로 내몰게 된다. 사랑하는 이와 결혼은 했지만, 그때의 충격으로 자신의 내면에 갇혀 살게 되는 '선생님'과 '내'가 만나게 된다. 언제나 알쏭달쏭한 말을 하는 선생님. 

"나도 외롭지만 자네도 외로운 사람인 것 같군. 나야 나이가 있으니 외로워도 흔들리지 않고 견딜 수 있지만, 아직 젊은 자네는 그러기 어렵겠지. 흔들릴 만큼 흔들리고 싶겠지. 그러다보니 뭔가에 부딪혀보고 싶을 걸세."
"저는 전혀 외롭지 않습니다."
"젊다는 것만큼 외로운 것도 없지. 그게 아니라면 왜 이렇게 자주 나를 찾아오는 건가?"
- p 27 중에서 - 

사랑하는 아내와 사는 '선생님'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삶이야말로 고립되고 고독의 극치로 몰아넣는 극한의 상황. 내면은 황폐해지고 허약하지만, 버티고 살아가는 '선생님'의 앞에 얼쩡대는 '나'는 가장 가까운 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자신의 비밀과 내면의 사악함을 털어놓고 싶은 대상이 된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특별히 취직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시골에서 세상물정 모르고 사시는 부모님에게는 자랑의 대상이다. '나'는 그저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를 하는 게 좋다. 부모님의 기대는 부담스러울 뿐이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서 한참을 있게 된 그는 '선생님'의 긴 편지를 받는다. 

자신의 내면이 얼마나 추악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인지, 그 때문에 얼마나 괴로웠는지. 담담하지만 생생하고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가족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우연히 들어가게 된 하숙집의 아가씨를 사랑하게 된 '선생님'. 고향 친구인 'K'를 자신의 방에 불러들여 살기 시작하면서 이상한 기운이 감돈다. 철저하게 자신을 고립시키며 살아온 'K'는 어느 날 '선생님'에게 '아가씨'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친구 'K'의 성격으로 봐서는 털어놓은 감정 자체가 큰 것이었을 것이다. 또한, 믿는 친구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용기를 보였던 것. 하지만 '선생님'은 그의 고백을 듣고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선생님' 또한, 오래전부터 '아가씨'를 좋아했던 것. 'K'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가씨의 어머니에게 미리 선수를 쳐 결혼 약속을 받아낸다. 'K' 혼자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친구에게 뒤통수를 맞은 셈.

'선생님'은 믿었던 숙부에게 배신을 당한 이후로 인간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자신은 피해자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자신이 가해자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것도 교묘하게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 사랑을 낚아채며 우정을 저버렸다.
'K'는 결국 자살을 해버린다. '선생님'도 예상 못 했던 사건. 친구의 자살에 자신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실마저 은폐하고 만다. 그렇게 '아가씨'와 결혼한다.

"유서의 내용은 간단했네. 그리고 약간 추상적이었지. 자기는 의지가 약해 어려움을 이겨낼 자신도 없고 앞날에 대한 희망도 없기 때문에 자살한다는 내용이었네. 그리고 지금껏 내게 신세 진 것에 대해 간략하게 고맙다는 말을 덧붙였네. 신세진 김에 사후 처리도 부탁한다고 적혀 있었네. 사모님에게 폐를 끼쳐서 죄송하니 대신 사과해 달라는 말도 있었지. 내게 고향에 연락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네. 필요한 말은 한마디씩 전부 씌어 있는데, 아가씨의 이름만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네. 유서를 다 읽고 나니, K가 일부러 아가씨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네. 하지만 가장 내 가슴을 울렸던 부분은, 먹물이 남아서 마지막에 한 줄 덧붙여 쓴 것 같은, 좀 더 일찍 죽었어야 하는데 왜 지금까지 살아 있었던 걸까, 하는 대목이었네." - 294p 중에서
 
좀 더 일찍 죽었어야 하는데 왜 지금까지 살아 있었던 걸까, 라는 대목은 '선생님'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다. '선생님'은 자신만의 행복을 얻으려 친구에게 불행을 주었다.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결국 죄책감과 자책감으로 '사랑'을 얻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마음속의 짐을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 괴로웠던 '마음'을 '나'에게 털어놓는다. 누구에게도 못했던 말을 차곡차곡 꺼내어놓고 그도 '자살'을 선택한다.

'마음'.

더 없이 괴로운 마음. 그 마음 때문에 상처를 받고, 그 마음 때문에 상처를 주었다. 그 고통은 아무리 노력해도 씻겨지지 않았고, 결국 그 마음을 이기지 못해 최후의 선택을 한다.

그 내면의 고백이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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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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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하지 않으면 어떤가? 특별한 직업이 없으면 어떤가? 그래도 즐겁지 아니한가.

임꺽정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이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에 펼쳐진다. 현대적인 해석을 덧붙여서 말이다. 

<연구공간 수유 + 너머>에서 지식인 공동체를 꾸려 공부하는 공동체를 만든 고미숙 선생님은 임꺽정 무리가 꾸민 공동체에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고미숙 선생님의 이상향과 맞아떨어지는 집단이니 말이다.

고미숙 선생님이 분석한 <임꺽정>은 의적이니 백성을 의롭게 했다는 메시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노는 남자들'이 가득한, 하지만 놀기 때문에 구박을 받거나, 생계가 유지 안 되거나 하지 않는 공동체.
일하지 않지만 '배우는' 남자들, 배움의 도를 넘어 '달인'이 되는 사람들. 공부를 위해 집을 떠나는 것도 서슴지 않고 배우기 위해 어떤 자존심도 버리는 사람들. 우정을 어떤 의리보다 중요시하고, 자존심은 최고로 여기며, 가지각색의 사랑과 연애를 보여주는 그야말로 삶과 인생, 이야기의 총체라 할 수 있다. 

곽오주, 봉학이, 배돌석이, 꺽정이 등 개성 있는 캐릭터가 득실대는 청석골에 여자들의 캐릭터도 만만치않다. 운총이는 꺽정이에게 대드는 배포 큰 여인. 중년의 꺽정이가 여기저기 마누라를 만들어 놓고 청석골로 돌아오지 않으니 남편 머리를 끌고 내려온 여인이다. 복수의 화신으로 변하여 호랑이의 씨를 말리거나 한집안을 도륙하는 일도 벌어지니 말이다.

소설 <임꺽정>에는 경제, 공부, 우정, 사랑과 성, 여성, 사상, 조직.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 놀면서 공부하면서 먹고 잔치하고, 큰돈을 탐내지 않으며 어울려 산다. 서로의 힘을 빌리고, 재주와 기지를 빌려 위기에서 탈출하고, 못된 놈 혼내주고 목숨을 살린다.

뻔뻔한 배포와 어찌어찌 잘 굴러가는 청석골의 경제, 핏줄로 맺어진 기묘한 네트워크, 돈이 없으면 데릴사위도 좋다라는 뻔뻔한 뚝심.
작은 사회는 시끄럽고 복닥거리지만, 자기들끼리 즐거운 사회를 형성하며 먹고 자고 싸고 얻고 모든 걸 한다. 작가는 그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젠 청년들, 특히 대졸자들이 백수가 되어 길 위로 내몰리고 있다. 우리 시대 대학생들은 청년 백수의 다른 이름이다. 대학을 가기 위해 죽어라고 공부하고, 대학에 가선 학점에 목숨을 건다. 그러고 나선? 백수가 된다! 이게 우리 시대 청춘의 자화상이다. 참 서글프기 짝이없다. 그렇다고 이것이 청년의 통과의례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중년이 되어서도, 혹은 정규직에 무사히 골인한 뒤에도 누구나, 언제든지 백수가 될 수 있다. 하긴 정년 퇴직을 한 노년층 역시 결국은 '백수'가 아닌가. 오컨대 이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잠재적인' 백수로 살아가게 되었다. 백수-속어이자 비어였던 이 낱말이 바야흐로 당당하게(!) 정치경제학적 용어로 부상하는 순간이다.

가족, 집, 사랑과 행복, 자유와 열정, 당연한 감정도 당연한 감정으로 느낄 수 없는 삭막한 시대에 소설 <임꺽정>에는 이런 것들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심장 뛰는 것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전해주고 싶어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이너리그로 산다고 해도, 결코 불행하고나 모자라지 않다는 메시지를 소설 <임꺽정>을 통해서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주류, 비주류. 누가 나누어 놓은 것인가. 사회가 말하는 주류가 되어도 행복하지 않다면? 비주류로 사는 게 더 행복하다면? 그게 더 열정적이고 아름답다면? 나 자신을 버리지 않고도 달인이 되고 돈도 벌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다면?

소설 <임꺽정>에는 신분 차별이 없다. 데릴사위로 들어가 산다고 해도 꿀리지 않는다. 배짱은 두둑하고 자존심은 억수로 세다. 자유는 누릴 만큼 누린다. 규범은 자신들이 만든다. 백수로 살지만, 백수가 아니라면?

위로가 된다. 이 땅에서 타인으로 인해 마이너리그가 되어 버린 사람들에게 말이다.
소설 <임꺽정>을 현대에 맞춰 한 해석에, 깔깔거리다가 위로가 된다. 오합지졸 같지만, 스승에 대한 예의는 깍듯하며, 승리의 잔치를 벌여 사기를 올린다. 길 위에서 배워도 달인이 되는 사람들,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어떤가. 스승복, 공부복은 완전 꽝이고 돈을 벌기 위한 노동 또한 공부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면, 결국 '백수'라는 말에 공포만 느끼다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무너져내리는 것이다.

진짜 공부가 뭔지도 모르고 사그라지는 청년들에게 느끼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소설 <꺽정이>를 이야기하며, 툭툭 던지는 말 속에서 느껴진다. 작가는 안타까운 것이다. 미완된 이 이야기에도 이렇게 많은 재미와 즐거움이 있는데, 너희들은 도대체 어디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냐. 재미를 찾지도 못하고 헤매고만 있는 것이냐.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을 읽다 보니 <연구공간 수유 + 너머>에 대해서도 궁금해진다. 재미있는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즐거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원하는 공동체를 꾸리고, 생각한 것을 실천하고 사는 고미숙 선생의 유쾌한 이야기가 소설 <임꺽정>을 빌어 전해진다.

책 속에는, 이야기 속에는 정말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상상속의 공간, 청석골에서 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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