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편력기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문화기행 지식여행자 8
요네하라 마리 지음, 조영렬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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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마리 여사야!"
그녀의 눈으로 보는 문화는 날카로움과 명랑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알면 알수록 빠져드는 그녀의 이론은 기분 좋게 이해된다. 다시, 요네하라 마리다. <미식견문록>, <미녀냐 추녀냐>, <마녀의 한 다스>, <문화편력기>까지. 아직 읽지 않은 <프라하의 소녀시대>와 <올가의 반어법>도 기대가 된다. 이런 여인이라면 모두가 친해지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까?

러시아에서의 생활, 그리고 러시아 통역사라는 경력. 그것은 그녀의 삶에 폭넓은 경험과 가르침을 준 것 같다. 관찰력이 뛰어나고, 생각이 깊은 마리 여사는 무엇하나 그냥 놓치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애정을 넘어서서 러시아에 대한 애정도 글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또한, 그녀의 문학적 수준도 느낄 수 있는데, 그 문학적 수준이라고 하는 것이 고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따분하다거나 어렵지 않다는 게 즐겁다. 

* '친척인가 친구인가 이웃인가'에서는 러시와의 문화와 그 이웃하는 나라의 문화, 혹은 비슷한 문화인 듯 보이지만 다른 시각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리 여사는 러시아 속담이나 문화와 일본의 문화, 혹은 러시아와 이웃하는 나라들의 문화를 비교해서 분석하길 좋아하는데 그녀의 지식을 따라가다 보면 알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된다. 또한, 러시아와 유럽 등의 국가들의 문화를 아시아인의 시각으로 봤을 때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다. 동양인의 눈으로 해석되는 문화편력기는 시각의 차이를 좁혀준달까? 이해하기 쉽게 해준달까? 생소한 문화에 맞장구칠 수 있게 하는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옛이야기의 교훈에서는 '신데렐라'와 '백설공주' 이야기를 늘어 놓으며 일하지 않고 응석받이로 자란 계모의 친딸들은 제멋대로이고 바보에 심술궂고 오만하지만, 일하면서 자란 신데렐라나 백설공주는 상냥하고 슬기로워 모두에게 사랑받고 사회적으로 성공한다며 현명한 어머니라면, 전통적으로 의붓자식을 괴롭히던 방법으로 아이를 키워야 잘 성장할 것이라고 태연하게 말한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가 워낙 천연덕스럽고 명랑하여 정말 그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유배형의 전통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에 나온 사형 이야기를 예로 들어 프랑스의 사형제도에 대문호들이 충격받았던 것을 알려준다. 당시 러시아는 사형은 없고 유배형에 그치고 있었는데 이 훌륭한 전통에 수해를 보았던 레닌과 스탈린은 살아남아 수백만 명을 처형했던 걸 상기시키며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의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은 쓸데없는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않고 간단하고 명료하며 위트 있게 진행한다는 것이다. 한 줄의 문장에 숨겨진 그녀의 생각을 발견하는 재미는 쏠쏠하다 못해 숨은그림 찾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요리와 먹이의 경계선'은 <미식견문록> II 라고 할까? 미식가인 그녀의 영원한 관심사, 음식과 문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폴레옹이 아낀 요리사에서는 닭고기에 얽힌 나폴레옹의 이야기를 민담처럼 재미있게 풀어낸다. 버섯으로 보는 인생관에서는 '맛없는 버섯은 무난한 인생과 같고 맛있는 버섯은 생명의 위험이라는 철학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맛없는 버섯을 먹는 것보다 독버섯을 먹게 될지도 모르지만 맛있는 버섯을 찾아 떠나겠다는 굳은 결의를 밝힌다. 기내식 생각에서는 기내식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당차게 밝히지만, 친구의 이야기에 깨갱 하는 마리 여사는 유쾌하다 못해 귀엽다.

* '심장에 털이 나 있는 이유'는 <미녀냐 추녀냐> II 라고 할 수 있는데, 통역을 하면서 겪었던 문화와 일본 문화, 혹은 말에 대한 문화를 전한다. o/x 모드의 언어 중추에서는 프라하에서 일본으로 왔을 때 봤던 시험문제에 관해 이야기 한다. 논문, 구술시험으로 시험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프라하에서와 달리 일본으로 돌아오니 (  )형 문제나 o/x 문제를 풀어야 했다. 시험의 '부품'이 된 듯한 치욕을 느낀다. 마리 여사는 획일적인 교육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토해낸다.
애매한 상황에 놓였을 때 통역하는 방법, 단어와 말에 숨겨진 의미, 통역을 하면서 애로 사항 등 언어에 대한 그녀의 분석을 읽을 수 있다. 국제 정세와 전쟁의 안타까움을 간결하게 말한 말의 힘이나 신문에 대한 새로운 견해 낡은 틀, 새소식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녀의 새로운 시각은 신선하여 짧은 글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독서에도 TPO도 크게 공감했는데, 시간과 장소에 따라 읽히는 책은 모두 다르다는 생각은 나 역시 느끼고 있었던 생각이다.

* '욕망과 그것을 실현하기까지의 거리'는 현시대의 문화적 양상을 에피소드로 구성해 들려준다. 뭐라고 부르시나요? 에서는 언어 습관에 대해 설명하며 일본인 남편이 아내를 부르는 말, 진화와 퇴화는 세트로 에서는 원숭이의 영특한 식재료 능력을 설명하며 인간의 식재료 식별 능력의 무지함과 방관, 좀비 같은 젊은이들에서는 생기 없는 무표정한 젊은이들 앞에서 강의하는 괴로움, 모자람의 효용에서는 풍요와 넉넉함이 얼마나 많은 낭비를 가져오고, 사람을 좀먹는지를 이야기한다. 가장 좋은 교사에서는 아이를 망치는 법은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장난감을 몽땅 사주는 것이라는 루소의 말을 인용하며, 아낌없이 주는 교육을 하는 요즘 부모들에게 아쉬움을 토한다.
문화에 대한 생각, 너무 큰 욕망이 실현을 나약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그녀의 통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 '드래건 알렉산드라의 심문'은 오해와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가족이야기, 친구이야기, 선생님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그녀의 경험과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맞선남의 비밀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는 맞선남의 비밀과 그녀를 이해하게 된 후 친구가 된 이야기이다. 맞선남의 프로정신이 황당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하지만, 그를 이해하는 그녀의 넓은 마음에 또 한 번 웃을 수 있었다. 나의 실연 회복기에서 그녀의 실연과 하얀 화장지 그리고 친구의 오해가 어이없다 못해 콩트 같다. 결국, 눈물로 젖은 화장지 뭉치를 목련꽃으로 착각한 친구 덕에 마리 여사는 실연에서 회복된다. 드레건 알렉산드라의 심문에서 그녀가 러시아어로 책을 요점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낯선 언어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준 알렉산드라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이 느껴진다. 사프란이 남긴 수수께끼에서는 아버지 친구 지압사 M씨가 주었던 사프란을 회상하는 마리 여사를 만날 수 있다. 고가의 사프란을 선뜻 내주셨던 지압사 M씨는 아버지에게 도대체 어떤 신세를 졌던 것일까 궁금해하지만, 그 수수께끼에 담긴 애정과 사랑을 느끼는 마리 여사를 만날 수 있다.
아빠와 엄마, 부모에 대한 오해와 사랑을 담은 이야기도 만날 수 있다. 

내가 마리 여사를 좋아하는 것은, 그녀의 열린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일본인이라고 해서 일본만 편들지 않는다. 물론 자신의 나라의 문화를 사랑하고, 한껏 누릴 줄 아는 마음을 가졌지만, 비판하고 싶은 것은 신랄하게 비판한다. 고정된 시각으로 사람을 보지 않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그녀의 매력이다. 그렇다고 심각하지 않다. 그녀만의 위트로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녀는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읽다 보면 상식이 쌓여감을 느낄 수 있다. 시답지 않은 농담만 늘어놓는 칼럼이 아니기에, 그녀를 자꾸 찾게 되는 것 같다.
마리 여사의 명랑한 시선으로 바라본 <문화편력기>는 이번에도 기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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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교사
재니스 Y. K. 리 지음, 김안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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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한다. 두 개의 시간 속에서.

홍콩. 1941년부터 시작된 사랑이야기가 있고, 1952년부터 시작된 사랑이야기가 있다.
윌을 사랑한 여자 트루디와 윌을 사랑한 여자 클레어. 둘은 전혀 다른 성격, 전혀 다른 시간 속에서 살았다. 그 가운데는 윌이 놓여 있다. 그리고, 전쟁이 놓여 있다.

클레어는 얼떨결에 결혼한 남편을 따라 홍콩에 온다. 홍콩은 낯선 나라, 낯선 사람들이 가득하고 클레어는 상류층 아이의 피아노 교사가 된다. 클레어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된다. 이질적인 세상. 사람이 사람을 노예 부리듯 하는 세상, 돈이 많은 사람들은 바깥세상에 관심이 없어 보이고, 사교계에 참여할 수 있어야 자신의 삶이 격상될 것 같은 세상이다. 윌은 피아노 교사로 있던 집의 운전사. 불현듯, 다가온 그가 싫지 않다. 점점 끌리는 클레어. 감정을 누르지 못한다. 그에 대해 알고 싶다. 사람들은 클레어를 이용해 윌이 살았던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전한다.

자유분방한 여자 트루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고, 혼혈아이다. 그녀는 그 점을 이용해 많은 사람에게 환심을 얻는다. 그녀가 사랑한 윌. 윌에게만은 언제나 관대하며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전쟁이 터지고도 윌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영국으로 떠나지 않고 홍콩에 남는다. 윌이 수용소에 갇혔을 때는 물심양면으로 윌을 돕는다. 그녀는 끝까지 그에 대한 사랑을 지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윌은 조금씩 조금씩 거부하기 시작한다. 트루디는 그런 윌 때문에 슬프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그를 위한 것인데 그는 자꾸 뒤로 물러난다. 결국, 트루디는 이용을 당한 채 일본 장교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러한 상처를 안은 채 윌은 클레어를 만난다.

시간의 교차 지점에 윌이 있다. 두 여자의 사랑 중심에도 윌이 있으며, 사건들 사이에 윌이 있다.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와 경험은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다. 전쟁, 전쟁이 많은 것을 앗아갔다. 사람들은 생존과 사투하며, 인간의 바닥을 드러낸다. 살아남기 위한 욕망, 배신, 죽음. 전쟁의 아픔은 사랑마저도 흔들리게 한다. 윌은 살아남았기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상처를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인 듯 무심하게 살아가는 윌. 그가 봐온 것, 들은 것, 느낀 것들은 그의 정신을, 마음의 여유를 가로막고 있다.

클레어가 모든 것을 알았을 때, 그녀도 많은 상처를 입게 된다. 그리고 혼자 일어설 힘을 얻는다. 남편에게 기대지 않고, 윌에게 바쳤던 사랑을 거두고 그녀 자체로 살아가야지 생각한다. 윌은 윌대로 희미한 기억 속에 갇힌 트루디의 환영을 만난다.

사랑하고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그 순간이 그들에게는 안타깝다. 무엇이든 변명이 될 수 있을 테지만. 트루디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주길 끝까지 바랐다. 하지만, 윌은 전쟁이라는 상황과 책임감에 밀려 그게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윤리적, 도덕적이라는 말로 트루디를 죽음으로 내몰게 된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클레어의 맹목적인 사랑이 그의 눈을 뜨게 해 준 것일까?

전쟁과 전쟁 후, 단순히 10년 전, 10년 후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다. 전쟁 속에서 사라진 사람들과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에도 사연과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피아노 교사 클레어가 나타나면서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와 죽은 자의 이야기들이 낱낱이 밝혀진다. 그들이 묻어둔 이야기들은 그들에게도 큰 상처였던 것이다. 상류층에 숨겨진 뻔뻔한 뒷이야기들은 사랑이야기를 풀어내는 소재로 작용한다.

두 개의 시간, 두 개의 사랑이야기는 전쟁의 아픔과 인간의 내면, 고민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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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경제학 - '슬로 라이프'의 제창자 쓰지 신이치가 들려주는
쓰지 신이치 지음, 장석진 옮김 / 서해문집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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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풍요 속의 행복 빈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단면, 어쩌면 이미 더 이전에 논의되어야 했을 이야기이다. 부강한 나라는 무엇일까? 끊임없는 의문이 들었다. 돈이 많은 나라가 강한 나라인 것일까?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가 과연 국민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뽑은 '경제 대통령'은 우리의 행복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우리는 '경제'를 살리는 대통령이 좋은 대통령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경제적으로 어느 선에 도달하고 나면,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떠난다. 도시의 생활을 버리고 전원생활을 찾아 떠나기도 하거나, 한적한 나라를 찾아 노후를 보내러 떠난다. 자꾸만 떠난다. 그렇다면, 자꾸만 떠나게 하는 사회는 무엇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나는 종종 "돈만 있으면, 우리나라는 천국이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라는 말을 듣곤 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돈이 최고다, 돈만 있으면 대접을 받는다, 돈만 있으면 못하는 게 없다 라고 말하는 게 공공연해졌다. 어린 아이들마저 돈을 벌기 위해 학습 된다. 인생에서 돈은 '절대적'이며, 편하고 즐겁고 떳떳하게 살기 위해 필요조건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돈의 많고 적음이 행복의 수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돈은 갖을수록 더 갖고 싶어지는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돈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면, 돈을 버는 것은 당연하겠지. 하지만 나라가 돈을 많이 벌수록 국민의 행복 지수가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행복의 경제학>에서는 시종일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 나라의 경제 성장은 개개인의 노력과 희생이다. 경제의 속도에 맞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시간 중 대부분을 경제에 내놓아야만 한다. 그런 시간의 희생이 뒤따라야 경제의 성장률을 올릴 수 있다. 그렇다고, 시간의 희생이 경제 성장률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 성장은 어떤 문제로 실패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희생된 개인의 시간은 돌려받을 수 없다. 

사실, 행복의 조건은 국가의 경제 성장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인다. 경제 성장은 이미 많은 이들의 행복을 빼앗아 가며 이루어진 것이다. 박정희 시대에 경제 성장을 빌미로 희생된 많은 사람을 기억하라. 우리는 경제 성장이라는 최면에 빠져, 희생된 사람들은 제대로 보지 않고 있다. 제대로 깨닫기도 전에 '경제 성장'의 망령은 다시 사람들을 부추긴다. 잠깐, 눈감고 잠깐,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한다면 우리 모두가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위험한 생각이다. '성장'이라는 '발전'이라는 단어 속에 감춰버린 많은 고통들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나무를 베어 장작으로 태우거나 건축 자재로 이용하여 집을 짓는다. 이것을 나무의 '발전'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숲을 벌채하여 길을 닦는 것을 숲의 '발전'이라고 하지 않으며, 호수를 메워 공업단지를 만드는 것을 호수의 '발전'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60년 사이에 이러한 일들이 '발전'이라는 이름하에 엄청난 기세로 행해졌다. 자연이 파괴되었을뿐더러 문화가 파괴되고 몇백 년 전부터 내려온 기술이나 음악, 언어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것도 대개의 경우 '발전'이라고 하는 한마디 말로 정당화되었다.
- 118p

'발전' 때문에 많은 것이 파괴된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 때문에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환경이 파괴되고 문화가 파괴되며, 삶의 터전이 파괴된다. 단적인 예로 보자면 우리나라에서 심각한 이슈로 떠오르는 '멧돼지의 공포'는 우리가 '발전'을 너무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되돌아온 문제이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여겼던 '발전' 때문에, 자연이 역습한다. 당장은 행복해 보였지만, 결국 심리적, 육체적, 경제적 공포가 농촌 경제에 불행과 개인의 불안으로 나타난다. 어쩌면 이것은 시작일 뿐일지도 모른다.

"빈곤을 낳는 것, 그것은 바로 자연을 자원으로, 또한 착취의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는 세계관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방패로 하여 자연을 언제나 충분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여긴다. 그리고 그 불완전한 부분을 보완하고 메우기 위한 수단으로 과학을 동원하여 온갖 기술을 낳는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러한 테크놀로지들은 환경과 생태계를 파괴하거나 사람들에게 한층 심각한 빈곤을 안겨주었다. 즉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보다는 거꾸로 결핍을 만들어 내고 늘려왔던 것이다."
- 인도의 사상가이자 환경운동가인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의 말 - 160p 

자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 강대국들은 약한 나라의 자원을 착취하고, 심지어 인간의 생명마저도 경시했다. 그들이 그렇게 이루어낸 경제 발전은 권력과 부를 가져다주었지만, 자국의 국민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끝도 없는 욕망은 결국, 만족과 행복을 방해한다. 무엇을 원하느냐가 분명하지 않은 우리의 현실이 거대한 덩어리로 합리화되기도 한다. 선진국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결국, 선진국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을지 모른다. 경제 성장과 발전의 끝이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GNH(Gross National Happiness) 국민행복지수
"경제적인 대차대조표 대신 국민들의 행복도를 기준으로 나라의 발전도를 측정하겠다."
-1973년 부탁의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 국왕 대관식

"국가의 목표나 개인적 만족을 단순한 경제적 성장에서 찾을 수는 없다. GNP는 삼나무 숲의 파괴와 호수의 죽음, 네이팜 탄과 미사일과 핵무기의 생산으로 증가한다. GNP는 가족의 건강,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을 포함하지 않는다. 시의 아름다움이나 결혼의 가치, 우리의 유머나 용기, 지혜와 가르침, 자비나 헌신을 측정하지 않는다. GNP는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측정한다."
- 1968년 미국, 캔자즈 대학, 로버트 케네디

성장의 희생에 내몰리면서 개인은 시간을 반납하고, 개인의 행복을 반납한다. 그것이 과연 올바른 성장일까? 우리의 대통령은 경제 성장을 이루어 내겠다고 연일 떠드는데 왜 우리의 국민들은 행복해하지 않을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행복의 경제학>이 말해준다. 쓰지 신이치는 부드럽지만 충격적이게 말한다. 자신의 목소리에 힘을 얻기 위해 증거 자료와 다른 이들의 말을 빌려 '성장'이라는 늪에 빠진 사람들에게 행복의 정의와 왜 우리가 행복을 느끼기 어려운지에 대해 말한다.

'풍요' 의존증에 중독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소비하는 생활에 내몰려 있고, 소비를 하는 것만이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일임을 주입받는다. 경제 발전과 경제 성장은 '소비'에 의해 이루어진다. 결국 물리고 물리고 물리고 쳇바퀴 돌듯 멈출 수 없는 것이 '발전'이고 '성장'이며, '풍요'다. 여기서부터 끝. 이만하면 성장했다. 이만하면 발전했으니 그만하자. 라는 것은 없다. 지속적이고 끝이 없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끝없이 반복되는 파괴와 희생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점점 눈을 뜨고 있다. 이 지속가능한 발전과 지속 가능한 성장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행복은 극히 적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만의 행복을 창조하는 집단도 생겨나고 있다. CC(Cultural Creatives), 자신의 만족감에 무게를 두며 사회적 지위와 부보다는 내면적인 성장과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사람들. 시간을 돈보다 중시하며 환경에 관심을 갖고,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는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이미, 우리는 '성장'에 지쳐 있다. '성장'이라는 사슬이 개인의 행복을 좀먹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적극적으로 돌파하는 사람이 있다.
젊을 때는 앞만 보며, 돈만 좇아 살아오다 나이가 들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여유와 행복을 찾아 삶의 행로를 바꾸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러한 '성장'에 지쳐버린 몸부림이 아닐까? 무엇을 희생에서 얻는 것은 행복이 아닐 것이다. 곧, 내가 희생될 수도 있으니. 

행복이란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마이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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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내가 있었네 (양장) - 故 김영갑 선생 2주기 추모 특별 애장판
김영갑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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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온몸을 다해 한 가지에 몰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인연도 끊고, 관계도 끊고, 하나를 위해 살아가는 이는 얼마나 될까?

김영갑 그는, 제주도를 사랑하고 제주도의 사람을 사랑하고, 제주도의 바람과 비와 공기와 풀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진밖에 몰랐고, 사진에서 자신을 발견했고, 처절하게 자신을 고립한 채로 사진을 찍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친구도, 가족도, 돈도, 공간도, 아무것도 없는 채로 뭍에서 온 그는 섬사람이 되었다.

그의 사진은, 아름답다. 그 말 이외에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의 사진은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가 기다려온 시간, 그가 참아낸 시간, 그가 이겨낸 시간.
바람의 움직임, 구름의 움직임, 나무의 움직임. 제주도의 세월이 제주도의 흔적이 그의 사진에 담겨 있다. 제주도는 그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그를 존재하게 했고, 그를 살아가게 했다. 제주도가 있었기에 그는 고통을 참았고, 외로움을 참았다. 그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제주도의 순간을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기뻤다.

작가는 한 줄을 쓰기 위해서 몇 년을 고민하고, 화가는 선 하나를 긋기 위해서 또 몇 년을 고민한다. 사진가 또한 그런데, 왜 사진은 그렇게 생각해 주지 않느냐는 그의 말이 가슴에 박힌다.

밥벌이가 되지 않는 일에 매달려 영혼을 바치는 사람들, 주위의 냉대와 비웃음에도 우직하게 한 길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답답하다. 그런 일은 팔자 좋은 사람이나 정신 나간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게 세상이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느끼고 삶을 판단한다. 다른 생각으로, 다른 이상을 위해 살아가며, 다른 것을 꿈꾼다.
- 44p

그는 제주도를 찍는 일이 좋았을 뿐이다. 하지만, 주위의 시선과 가족의 걱정이 사진을 찍는 일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모두 단절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가 가족을 그리워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세상을 그리워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가 사진에 붙잡아두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들판의 빛과 바람, 구름, 비, 안개이다. 최고로 황홀한 순간은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삽시간의 황홀이다.
- 180p


제주도에 와서 사진을 찍겠다는 사람이, 제주도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원하는 장면만 보고 싶어한다. 그 모순에 그는 안타깝다. 바람의 기다림을, 파도의 기다림을 모르는 이가 과연 제주도를 찍었다고 할 수 있을까? 제주 살이를 십수 년 해 온 그는 사진도, 제주도도 사람들이 제대로 봐주길 바란다.

허기짐 속에서, 고통 속에서, 냉대 속에서 제주도를 찍었던 그는 루게릭병과 맞닥뜨린다. 신은 왜 이리 불공평한 것일까? 하나만 알아왔던 그에게 다른 세상을 보라고 그런 고통을 내린 것일까? 그의 병은 그에게 사진을 빼앗아 가지만, 사진을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폐교를 갤러리로 꾸민다. <두모악 갤러리>는 그렇게 탄생된다. 움직일 때마다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그때 그는 다시 새로운 일을 벌인다. 갤러리를 꾸미고 사진을 전시하고 그는 그렇게 병과 싸우고, 시간과 싸운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으면 누군가 다가와 길을 가르쳐 준다. 그러면 그가 일러준대로 가지만 한참을 걷다 보면 점점 늪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발견한다.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제자리로 돌아오면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 190p

버려야지 하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것이 미련인 줄 알면서도, 그는 병을 고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병에 대한 집착으로 더 고통스러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사그라지는 그의 몸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그의 고집스러움, 그의 신념이 안타깝다. 왜 화해하지 못했을까? 그렇게까지 애를 쓰지 않아도 될 텐데. 그는 마음으로 미안하고, 마음으로 감사해 하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표현하지 못한다. 죽는 순간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지, 미안함과 고마움이 차오르는 것을 두고 가는 게 힘들었을지 그가 써내려간 글에서, 그가 남겨놓은 사진에서 느껴진다.

사람은 없는 제주도 사진. 그의 외로움이 느껴진다.
사진 어디엔가 흩뿌려놓았을 감정들이 느껴진다.
그 섬에 그가 있었다. 그 시간에 그가 있었다. 그 바람 사이에 그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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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당신의 우아한 거짓말로 누군가가 고통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은 누군가를 외롭게 하는, 고립되게 하는 거짓말을 해본 적이 있나요?
당신은 우아한 방관을 정당하다고 합리화한 것은 아닌가요?

이야기는 천지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천지는 아침부터 MP3 타령이다. 엄마는 보증금을 올려줘야 할 처지라 애먼 소리 하지 말라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타박이다. 이상하다. 천지는 막무가내로 조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천지는 참았고, 착했고, 인내하는 아이인데 오늘따라 이상하다. 언니 만지도 엄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이상하다' 이상 생각하지 못한다. 그런데 천지가 털실에 목을 감고 죽어버렸다.
자살이다. 자살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게 정말 자살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물론 자살이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사건만 따지자면 분명 천지는 자살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자살이 아니다. 자살이라고 볼 수 없다. 중학교 1학년 아이가 자살을 택했다면, 그것은 이유가 있다. 수면 위로 드러난 진실이 모두 진실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것은 강요된 자살이다.

자, 이제 진실을 알아야할 시간이다. 진실을 알고 싶은 만지와 엄마. 그리고 진실이 밝혀질까 두려운 직접적 가해자 화연. 진실과는 동떨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간접적 가해자인 미라. 진실로 다가가려고 할수록 물러서는 이들, 하지만 기억해야할 것은 이 아이들도 어린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천지가 죽고, 엄마와 만지는 이사를 한다. 천지가 죽었는데도 엄마와 만지는 표면적으로 명랑하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다시 꾸려나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한 맺힌 엄마의 모습이라곤 찾을 수 없다. 자식을 가슴에 묻었다. 누구보다 고통스럽지만, 만지와 함께 살아야 한다. 그리고 엄마는 천지의 죽음, 그 내막에 둘러싸인 진실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다. 만지는 내일을 준비하는 아이였다. 그 아이가 왜 죽었을까?

화연, 그녀의 우아한 거짓말, 아니 잔혹한 거짓말은 천지를 좀먹기 시작한다. 천지의 정신이 감정이 화연에게 휘둘린다. 화연은 지능적으로 천지를 괴롭힌다. 한마디로 천지를 가지고 노는 것이다. 생일파티는 2시인데 일부러 천지에게만 3시에 오라고 한다. 그리고 천지만 뒤늦게 자장면 한 그릇을 먹게 한다. 천지의 아버지는 사고로 죽었는데도 화연은 천지의 아버지가 자살로 죽은 것처럼 떠든다. 마치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아이들은 '힘'에 의해 조종된다. 화연은 아이들에게 물질적으로 어필한다. 사실 그들도 그 말이 진실이 아닌 것을 알고, 화연이 하는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만 모두 침묵한다. 그것은 '남'의 일이고 말려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중학생이 되고 천지도 조금씩 달라진다. 자기한테 쩔쩔매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독자노선을 걷는 것이다. 아이들의 반응도 조금씩 바뀐다. 화연은 그 상황이 싫다. 천지는 겉으로는 태연해졌다고 하지만, 아픈 감정들을 이겨낸 것도 치유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천지가 국어 수행평가 발표를 한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잡한 말이 뭉쳐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혹시 예비 살인자는 아닙니까? 감사합니다."
명확한 글은 자살을 암시했고, 경고했다. 화연은 그 의미를 알 수 있었지만 태연하게 군다. 하지만 천지가 죽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모를 비밀이 있다. 천지와의 또 다른 약속.

만지와 엄마, 천지 그들은 화목한 가정이다. 하지만, 서로에 관해 잘 몰랐다. 천지의 속이 곪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 엄마이지만, 딸이 죽음까지 생각하는 줄은 몰랐다. 만지는 화연이와 천지가 단짝인 줄만 알았지 화연이가 천지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 몰랐다. 만지는 동생의 흔적을 밟아가며 단짝 친구 미란의 동생 미라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로 천지의 고통을 희미하게 알게 된다. 하지만, 미라도 어쩌면 간접적인 가해자라는 생각이 든다. 미라는 사회 전체의 사람들을 대변한다. 무관심 나와 상관없는 일에 간섭하고 싶어하지 않는 행동. 만지는 천지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남과 동시에 무관심한 사회와 사람에게 화가 난다. 결국, 지능적인 거짓말과 회피가 천지를 죽음으로 몰아가게 한 것이다.

화연은 화연대로 죄책감을 느끼지만, 그것은 자신의 행동에 후회라기보다는 천지의 죽음에 대한 원망이다. 그것은 또 부모에 대한 분풀이로 표출된다. 변명을 만들고 핑계를 만드는 것이다. 결국, 친구의 죽음 앞에서도 솔직해지지 못한다. 자신이 해왔던 거짓말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도 화연의 탓은 아닐 것이다.

천지는 다섯 개의 실에 메시지를 남긴다. 실은 결국, 하나다. 엄마, 만지, 화연, 미라, 그리고 또 하나의 메시지. 천지는 살고 싶다는 흔적을 여기저기 여러 번 남겼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게 슬픈 현실이다. 죽기 전에 들어주는 이 없고, 죽고 나자 들어주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다. 이 모순의 끈, 언제쯤 끊어질 수 있을까? 

이 책은 아이들의 시기와 질투, 무관심이 어떻게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인가를 보여준다. 또한, 가족들에게 어려움을 털어놓을 수 없었던 한 아이의 고민과 근심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아이들에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진실은 자꾸 뒤로 물러나고 조작된 거짓말이 진실로 받아들여질 때 사람들은 자살을 한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많이 봐왔다. 학생, 가장, 경제인, 연예인, 심지어 대통령도 자살에 이르렀다. 상황, 소문, 말들이 퍼져 얼마나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지 봐왔다.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큰일이며 너무 깊은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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