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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정착하지 않으면 어떤가? 특별한 직업이 없으면 어떤가? 그래도 즐겁지 아니한가.
임꺽정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이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에 펼쳐진다. 현대적인 해석을 덧붙여서 말이다.
<연구공간 수유 + 너머>에서 지식인 공동체를 꾸려 공부하는 공동체를 만든 고미숙 선생님은 임꺽정 무리가 꾸민 공동체에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고미숙 선생님의 이상향과 맞아떨어지는 집단이니 말이다.
고미숙 선생님이 분석한 <임꺽정>은 의적이니 백성을 의롭게 했다는 메시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노는 남자들'이 가득한, 하지만 놀기 때문에 구박을 받거나, 생계가 유지 안 되거나 하지 않는 공동체.
일하지 않지만 '배우는' 남자들, 배움의 도를 넘어 '달인'이 되는 사람들. 공부를 위해 집을 떠나는 것도 서슴지 않고 배우기 위해 어떤 자존심도 버리는 사람들. 우정을 어떤 의리보다 중요시하고, 자존심은 최고로 여기며, 가지각색의 사랑과 연애를 보여주는 그야말로 삶과 인생, 이야기의 총체라 할 수 있다.
곽오주, 봉학이, 배돌석이, 꺽정이 등 개성 있는 캐릭터가 득실대는 청석골에 여자들의 캐릭터도 만만치않다. 운총이는 꺽정이에게 대드는 배포 큰 여인. 중년의 꺽정이가 여기저기 마누라를 만들어 놓고 청석골로 돌아오지 않으니 남편 머리를 끌고 내려온 여인이다. 복수의 화신으로 변하여 호랑이의 씨를 말리거나 한집안을 도륙하는 일도 벌어지니 말이다.
소설 <임꺽정>에는 경제, 공부, 우정, 사랑과 성, 여성, 사상, 조직.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 놀면서 공부하면서 먹고 잔치하고, 큰돈을 탐내지 않으며 어울려 산다. 서로의 힘을 빌리고, 재주와 기지를 빌려 위기에서 탈출하고, 못된 놈 혼내주고 목숨을 살린다.
뻔뻔한 배포와 어찌어찌 잘 굴러가는 청석골의 경제, 핏줄로 맺어진 기묘한 네트워크, 돈이 없으면 데릴사위도 좋다라는 뻔뻔한 뚝심.
작은 사회는 시끄럽고 복닥거리지만, 자기들끼리 즐거운 사회를 형성하며 먹고 자고 싸고 얻고 모든 걸 한다. 작가는 그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젠 청년들, 특히 대졸자들이 백수가 되어 길 위로 내몰리고 있다. 우리 시대 대학생들은 청년 백수의 다른 이름이다. 대학을 가기 위해 죽어라고 공부하고, 대학에 가선 학점에 목숨을 건다. 그러고 나선? 백수가 된다! 이게 우리 시대 청춘의 자화상이다. 참 서글프기 짝이없다. 그렇다고 이것이 청년의 통과의례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중년이 되어서도, 혹은 정규직에 무사히 골인한 뒤에도 누구나, 언제든지 백수가 될 수 있다. 하긴 정년 퇴직을 한 노년층 역시 결국은 '백수'가 아닌가. 오컨대 이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잠재적인' 백수로 살아가게 되었다. 백수-속어이자 비어였던 이 낱말이 바야흐로 당당하게(!) 정치경제학적 용어로 부상하는 순간이다.
가족, 집, 사랑과 행복, 자유와 열정, 당연한 감정도 당연한 감정으로 느낄 수 없는 삭막한 시대에 소설 <임꺽정>에는 이런 것들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심장 뛰는 것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전해주고 싶어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이너리그로 산다고 해도, 결코 불행하고나 모자라지 않다는 메시지를 소설 <임꺽정>을 통해서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주류, 비주류. 누가 나누어 놓은 것인가. 사회가 말하는 주류가 되어도 행복하지 않다면? 비주류로 사는 게 더 행복하다면? 그게 더 열정적이고 아름답다면? 나 자신을 버리지 않고도 달인이 되고 돈도 벌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다면?
소설 <임꺽정>에는 신분 차별이 없다. 데릴사위로 들어가 산다고 해도 꿀리지 않는다. 배짱은 두둑하고 자존심은 억수로 세다. 자유는 누릴 만큼 누린다. 규범은 자신들이 만든다. 백수로 살지만, 백수가 아니라면?
위로가 된다. 이 땅에서 타인으로 인해 마이너리그가 되어 버린 사람들에게 말이다.
소설 <임꺽정>을 현대에 맞춰 한 해석에, 깔깔거리다가 위로가 된다. 오합지졸 같지만, 스승에 대한 예의는 깍듯하며, 승리의 잔치를 벌여 사기를 올린다. 길 위에서 배워도 달인이 되는 사람들,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어떤가. 스승복, 공부복은 완전 꽝이고 돈을 벌기 위한 노동 또한 공부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면, 결국 '백수'라는 말에 공포만 느끼다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무너져내리는 것이다.
진짜 공부가 뭔지도 모르고 사그라지는 청년들에게 느끼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소설 <꺽정이>를 이야기하며, 툭툭 던지는 말 속에서 느껴진다. 작가는 안타까운 것이다. 미완된 이 이야기에도 이렇게 많은 재미와 즐거움이 있는데, 너희들은 도대체 어디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냐. 재미를 찾지도 못하고 헤매고만 있는 것이냐.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을 읽다 보니 <연구공간 수유 + 너머>에 대해서도 궁금해진다. 재미있는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즐거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원하는 공동체를 꾸리고, 생각한 것을 실천하고 사는 고미숙 선생의 유쾌한 이야기가 소설 <임꺽정>을 빌어 전해진다.
책 속에는, 이야기 속에는 정말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상상속의 공간, 청석골에서 마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