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여행 - 놀멍 쉬멍 걸으멍
서명숙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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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에라도 제주로 떠나고 싶다. 올레길을 걸으며, 사람을 만나고 자연을 만나고 제주를 만나고 싶다.

그런 마음이 한없이 들게 한다. 그곳으로 떠나고 싶은, 올레지기 서명숙이 말하는 올레 어딘가에 서서 바람을 한껏 맞으며 몇 시간쯤 있더라도 행복할 것 같다.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걷기 여행>을 읽으면, 걷는 것을 즐기지 않는 사람도 곧 걷기 예찬가로 변할 것이다. 걸으며 보는 하늘과 풀, 생명들, 사람이 난폭하던 누군가를 치유하고, 아이의 마음도 맑게 한다. 그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자연이라고 말하면, 식상하다고 해도 자연이 사람의 마음을 치유한다.

'당신의 까미노를 만들어라'

산티아고에서 만난 여인의 말에, 올레지기 서명숙은 고향 제주도에 올레길을 만들기 시작한다. 치열하게 살아왔던 시간에 휴식을 주기 위해 떠났던 산티아노 순례길. 800km를 걸으며 만났던 많은 사람과 시간 속에 담아왔던 이야기. 그녀는 길 위에서 제주도를 생각한다. 세계인이 찾는 길을 우리나라에도 만들리라. 올레길을 만들 결심, 잊고 있었던 고향이 그녀를 깨운다.

도시는, 현대는 속도전이다. 속도에서 밀리면, 도태된다.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한눈을 팔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 속도에 발맞춰 살던 그녀는 그 속도에 넌더리가 난다. '간세다리(게으름뱅이)'가 되고 싶다. 느릿느릿. 그녀는 산티아고에서도 느릿느릿 걷는다. 젊은이들은 속도전을 즐기지만, 속도의 세월을 통과한 그녀는 이제 느림의 시간을 즐긴다. 제주도는 그녀가 '간세다리'로 살기 위해 좋은 곳.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 곳이다. 그녀의 요람이고, 어머니 뱃속 같은 그곳이 그녀에게 느림의 길을 터준다.

그녀는 도전했고 얻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올레길은 14코스까지 생겼다. 그 코스를 열면서 그녀는 데면데면했던 동생과 화해를 할 수 있었고, 고향의 기억을 되살려 행복할 수 있었다. 사람들과 힘을 합쳐 올레길을 만들었고, 할망(할머니)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시간 위에서 행복을 주었다. 그녀는 올레길을 만들며 행복했다. 그 위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 때문에.
그녀의 행복이 느껴진다. 올레길을 만들고,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그 안에서 치유되는 사람들을 보며 그녀는 자신만의 길을 만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길은 또 다른 길을 만든다. 길의 연쇄 작용. 길 위에서 사람들은 인생의 길이 변하고, 감정의 길에 문을 열고, 닫힌 길을 튼다. 길은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 또 다시 오라고 손짓한다. 길을 벗어날 수 없다.

성산 일출봉, 주상 절리, 차귀도, 한라산 등 많은 곳들을 돌아다녔지만, 나는 차 안에 있었다. 길을 따라 달리며 제주를 봤다. 자동차 위에서 본 제주도는 성급하게 지나갔다. 시간은 없고, 제주를 봐야 하고 어디든 가서 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본 것이 제주도일까? 제주도의 모습은 내가 본 게 다였을까?
가방을 꾸리고, 제주도로 달려가고 싶다. 내가 보지 못한 제주도를 만나러. 그녀의 속삭임이 나를 자꾸 유혹한다. 제주도로 오라고. 올레길로 오라고. 보여줄 게 많다고.
그녀가 만든 평화로운 길 위에서, 바쁘 건너온 시간들을 천천히 돌아볼 시간을 갖고 싶다.
꼭 그렇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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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성기 옮김 / 이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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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은,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입으로 말한 마음은, 과연 진실한 마음일까? 거짓된 마음일까?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오로지 자신만이 느낄 뿐.

'선생님'은 어릴 적 부모님을 갑작스럽게 여의고 믿었던 숙부에게 부모님의 유산마저 빼앗긴다. 세상에 홀로 선 '선생님'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된다. 상처를 받기 싫어 에고이즘으로 똘똘 뭉친 인간으로 변한 '선생님'은 사랑을 쟁취하고 결혼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친구인 K에게 상처를 주고 자살로 내몰게 된다. 사랑하는 이와 결혼은 했지만, 그때의 충격으로 자신의 내면에 갇혀 살게 되는 '선생님'과 '내'가 만나게 된다. 언제나 알쏭달쏭한 말을 하는 선생님. 

"나도 외롭지만 자네도 외로운 사람인 것 같군. 나야 나이가 있으니 외로워도 흔들리지 않고 견딜 수 있지만, 아직 젊은 자네는 그러기 어렵겠지. 흔들릴 만큼 흔들리고 싶겠지. 그러다보니 뭔가에 부딪혀보고 싶을 걸세."
"저는 전혀 외롭지 않습니다."
"젊다는 것만큼 외로운 것도 없지. 그게 아니라면 왜 이렇게 자주 나를 찾아오는 건가?"
- p 27 중에서 - 

사랑하는 아내와 사는 '선생님'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삶이야말로 고립되고 고독의 극치로 몰아넣는 극한의 상황. 내면은 황폐해지고 허약하지만, 버티고 살아가는 '선생님'의 앞에 얼쩡대는 '나'는 가장 가까운 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자신의 비밀과 내면의 사악함을 털어놓고 싶은 대상이 된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특별히 취직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시골에서 세상물정 모르고 사시는 부모님에게는 자랑의 대상이다. '나'는 그저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를 하는 게 좋다. 부모님의 기대는 부담스러울 뿐이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서 한참을 있게 된 그는 '선생님'의 긴 편지를 받는다. 

자신의 내면이 얼마나 추악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인지, 그 때문에 얼마나 괴로웠는지. 담담하지만 생생하고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가족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우연히 들어가게 된 하숙집의 아가씨를 사랑하게 된 '선생님'. 고향 친구인 'K'를 자신의 방에 불러들여 살기 시작하면서 이상한 기운이 감돈다. 철저하게 자신을 고립시키며 살아온 'K'는 어느 날 '선생님'에게 '아가씨'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친구 'K'의 성격으로 봐서는 털어놓은 감정 자체가 큰 것이었을 것이다. 또한, 믿는 친구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용기를 보였던 것. 하지만 '선생님'은 그의 고백을 듣고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선생님' 또한, 오래전부터 '아가씨'를 좋아했던 것. 'K'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가씨의 어머니에게 미리 선수를 쳐 결혼 약속을 받아낸다. 'K' 혼자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친구에게 뒤통수를 맞은 셈.

'선생님'은 믿었던 숙부에게 배신을 당한 이후로 인간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자신은 피해자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자신이 가해자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것도 교묘하게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 사랑을 낚아채며 우정을 저버렸다.
'K'는 결국 자살을 해버린다. '선생님'도 예상 못 했던 사건. 친구의 자살에 자신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실마저 은폐하고 만다. 그렇게 '아가씨'와 결혼한다.

"유서의 내용은 간단했네. 그리고 약간 추상적이었지. 자기는 의지가 약해 어려움을 이겨낼 자신도 없고 앞날에 대한 희망도 없기 때문에 자살한다는 내용이었네. 그리고 지금껏 내게 신세 진 것에 대해 간략하게 고맙다는 말을 덧붙였네. 신세진 김에 사후 처리도 부탁한다고 적혀 있었네. 사모님에게 폐를 끼쳐서 죄송하니 대신 사과해 달라는 말도 있었지. 내게 고향에 연락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네. 필요한 말은 한마디씩 전부 씌어 있는데, 아가씨의 이름만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네. 유서를 다 읽고 나니, K가 일부러 아가씨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네. 하지만 가장 내 가슴을 울렸던 부분은, 먹물이 남아서 마지막에 한 줄 덧붙여 쓴 것 같은, 좀 더 일찍 죽었어야 하는데 왜 지금까지 살아 있었던 걸까, 하는 대목이었네." - 294p 중에서
 
좀 더 일찍 죽었어야 하는데 왜 지금까지 살아 있었던 걸까, 라는 대목은 '선생님'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다. '선생님'은 자신만의 행복을 얻으려 친구에게 불행을 주었다.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결국 죄책감과 자책감으로 '사랑'을 얻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마음속의 짐을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 괴로웠던 '마음'을 '나'에게 털어놓는다. 누구에게도 못했던 말을 차곡차곡 꺼내어놓고 그도 '자살'을 선택한다.

'마음'.

더 없이 괴로운 마음. 그 마음 때문에 상처를 받고, 그 마음 때문에 상처를 주었다. 그 고통은 아무리 노력해도 씻겨지지 않았고, 결국 그 마음을 이기지 못해 최후의 선택을 한다.

그 내면의 고백이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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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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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하지 않으면 어떤가? 특별한 직업이 없으면 어떤가? 그래도 즐겁지 아니한가.

임꺽정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이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에 펼쳐진다. 현대적인 해석을 덧붙여서 말이다. 

<연구공간 수유 + 너머>에서 지식인 공동체를 꾸려 공부하는 공동체를 만든 고미숙 선생님은 임꺽정 무리가 꾸민 공동체에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고미숙 선생님의 이상향과 맞아떨어지는 집단이니 말이다.

고미숙 선생님이 분석한 <임꺽정>은 의적이니 백성을 의롭게 했다는 메시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노는 남자들'이 가득한, 하지만 놀기 때문에 구박을 받거나, 생계가 유지 안 되거나 하지 않는 공동체.
일하지 않지만 '배우는' 남자들, 배움의 도를 넘어 '달인'이 되는 사람들. 공부를 위해 집을 떠나는 것도 서슴지 않고 배우기 위해 어떤 자존심도 버리는 사람들. 우정을 어떤 의리보다 중요시하고, 자존심은 최고로 여기며, 가지각색의 사랑과 연애를 보여주는 그야말로 삶과 인생, 이야기의 총체라 할 수 있다. 

곽오주, 봉학이, 배돌석이, 꺽정이 등 개성 있는 캐릭터가 득실대는 청석골에 여자들의 캐릭터도 만만치않다. 운총이는 꺽정이에게 대드는 배포 큰 여인. 중년의 꺽정이가 여기저기 마누라를 만들어 놓고 청석골로 돌아오지 않으니 남편 머리를 끌고 내려온 여인이다. 복수의 화신으로 변하여 호랑이의 씨를 말리거나 한집안을 도륙하는 일도 벌어지니 말이다.

소설 <임꺽정>에는 경제, 공부, 우정, 사랑과 성, 여성, 사상, 조직.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 놀면서 공부하면서 먹고 잔치하고, 큰돈을 탐내지 않으며 어울려 산다. 서로의 힘을 빌리고, 재주와 기지를 빌려 위기에서 탈출하고, 못된 놈 혼내주고 목숨을 살린다.

뻔뻔한 배포와 어찌어찌 잘 굴러가는 청석골의 경제, 핏줄로 맺어진 기묘한 네트워크, 돈이 없으면 데릴사위도 좋다라는 뻔뻔한 뚝심.
작은 사회는 시끄럽고 복닥거리지만, 자기들끼리 즐거운 사회를 형성하며 먹고 자고 싸고 얻고 모든 걸 한다. 작가는 그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젠 청년들, 특히 대졸자들이 백수가 되어 길 위로 내몰리고 있다. 우리 시대 대학생들은 청년 백수의 다른 이름이다. 대학을 가기 위해 죽어라고 공부하고, 대학에 가선 학점에 목숨을 건다. 그러고 나선? 백수가 된다! 이게 우리 시대 청춘의 자화상이다. 참 서글프기 짝이없다. 그렇다고 이것이 청년의 통과의례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중년이 되어서도, 혹은 정규직에 무사히 골인한 뒤에도 누구나, 언제든지 백수가 될 수 있다. 하긴 정년 퇴직을 한 노년층 역시 결국은 '백수'가 아닌가. 오컨대 이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잠재적인' 백수로 살아가게 되었다. 백수-속어이자 비어였던 이 낱말이 바야흐로 당당하게(!) 정치경제학적 용어로 부상하는 순간이다.

가족, 집, 사랑과 행복, 자유와 열정, 당연한 감정도 당연한 감정으로 느낄 수 없는 삭막한 시대에 소설 <임꺽정>에는 이런 것들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심장 뛰는 것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전해주고 싶어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이너리그로 산다고 해도, 결코 불행하고나 모자라지 않다는 메시지를 소설 <임꺽정>을 통해서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주류, 비주류. 누가 나누어 놓은 것인가. 사회가 말하는 주류가 되어도 행복하지 않다면? 비주류로 사는 게 더 행복하다면? 그게 더 열정적이고 아름답다면? 나 자신을 버리지 않고도 달인이 되고 돈도 벌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다면?

소설 <임꺽정>에는 신분 차별이 없다. 데릴사위로 들어가 산다고 해도 꿀리지 않는다. 배짱은 두둑하고 자존심은 억수로 세다. 자유는 누릴 만큼 누린다. 규범은 자신들이 만든다. 백수로 살지만, 백수가 아니라면?

위로가 된다. 이 땅에서 타인으로 인해 마이너리그가 되어 버린 사람들에게 말이다.
소설 <임꺽정>을 현대에 맞춰 한 해석에, 깔깔거리다가 위로가 된다. 오합지졸 같지만, 스승에 대한 예의는 깍듯하며, 승리의 잔치를 벌여 사기를 올린다. 길 위에서 배워도 달인이 되는 사람들,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어떤가. 스승복, 공부복은 완전 꽝이고 돈을 벌기 위한 노동 또한 공부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면, 결국 '백수'라는 말에 공포만 느끼다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무너져내리는 것이다.

진짜 공부가 뭔지도 모르고 사그라지는 청년들에게 느끼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소설 <꺽정이>를 이야기하며, 툭툭 던지는 말 속에서 느껴진다. 작가는 안타까운 것이다. 미완된 이 이야기에도 이렇게 많은 재미와 즐거움이 있는데, 너희들은 도대체 어디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냐. 재미를 찾지도 못하고 헤매고만 있는 것이냐.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을 읽다 보니 <연구공간 수유 + 너머>에 대해서도 궁금해진다. 재미있는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즐거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원하는 공동체를 꾸리고, 생각한 것을 실천하고 사는 고미숙 선생의 유쾌한 이야기가 소설 <임꺽정>을 빌어 전해진다.

책 속에는, 이야기 속에는 정말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상상속의 공간, 청석골에서 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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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고흐의 구두를 신는다 - 그림과 나누는 스물한 편의 인생 이야기
이명옥 지음 / 21세기북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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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읽는 CEO 이후 이명옥 작가의 최근작, <나는 오늘 고흐의 구두를 신는다>.
그림에 대한 많은 책이 나오지만, 알기 쉽고 와 닿게 설명해주는 책은 그리 많지 않다.
이명옥 작가의 그림 칼럼들은 주제별로 잘 분류하고, 작가의 생각을 설명해주는 것이 특징이다. 

희망, 재생, 가난, 떠남, 인생, 행복, 추억, 눈물, 아름다움, 고독, 사랑, 폭력, 모델, 죽음, 용서, 침묵, 명상, 전쟁, 관음, 불안, 늙음. 21가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명화를 설명하는 것도 인상깊지만, 주제에 따라 한국 화가들의 작품과 작품 설명도 인상 깊다. 화가들의 작품과 인생을 설명하며 교훈적인 메시지를 남기는 것도.

가난한 사람들을 그렸던 밀레, 그의 시대에는 그의 그림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정부의 숨기고 싶은 치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회의 불안을 조장하는 불온한 그림이라는 보수파의 비난과 반대로 진보진영은 찬사를 보낸다. 그림이 사회에 미치는 파급 효과, 그것은 화가들이 가진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도 아름답게 미화하는 그림만 좋아했던 당시의 모순을 깨는 용기있는 시도였다.

개인적으로 르누아르 풍의 그림은 좋아하진 않지만, 행복이란 주제에 담은 르누아르의 생각과 그림은 공감할 만 하다. 내가 그림을 그리며 즐겁고 행복하지 않다면,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다는 르누아르. 스승이 오직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냉담한 말에 르누아르는 자신 있게 말한다.
"선생님도 그림을 그리는 것이 즐겁지 않다면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다는 점을 잘 알고 계시잖아요."라고. 그래서 그는 아름답고 착한 그림만 그렸나 보다. 자신의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서. 그렇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 그의 그림을 보고 행복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신이 행복하다면 그게 최고의 행복이 아닐까? 그래서였는지 그는 노년에 병이 들어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아름답고 고운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 같다.

폭력적인 김성룡의 그림 <목단꽃>은 보기만 해도 섬뜩했다.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그림. 화가들은 원초적인 감정의 메시지를 아주 간결하고 충격적이며 인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생각한 것을 표현하고, 보는 이에게 그 감정을 선명하게 전달한다면 우리는 깨닫게 된다. 잊고 있었던 본성을. '폭력'이란 주제로 그림을 설명한 작가는 사회적 현상과 철학자들의 이론을 빗대는 것도 잊지 않는다.

데즈먼드 모리스는 인간의 폭력적인 성향을 동물행동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흥미로운 가설을 발표했다. 그는 도시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비인간적이며, 반사회적인 행동이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의 행동과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예를 들면 야생에서의 동물은 생존을 위해 본능과 감각을 최대한 활용한다. 어디에 가면 먹이를 찾을 수 있는지, 몸에 병이 나면 어떤 식물을 먹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기에 스스로 구하고 치유한다. 그러나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은 먹이를 구하고, 병을 치유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자연 상태와는 다른 밀집된 공간에서 그들의 본능은 억압되고, 그 결과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그래서 놀랍게도 야생의 돌물이 하지 않는 자해행위를 하기도 한다.

인간은 도시인들이 휴일이면 야외로 나가고 싶어하는 것과 자연 풍경에 위안을 얻고, 여행을 떠나는 것은 인간 동물원에서 벗어나 야생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원초적인 갈망이라고 말한다. 그림은 사회적 현상도 적나라하게 반영한다. 김성룡의 다른 그림인 폭력적인 소녀를 나타내는 그림과 <소년>이라는 그림도 현대에 비인간적인 문화에 갇힌 청소년들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씁쓸하다.

이명옥 작가는 본적이 있고, 다른 책에서 설명했을 법한 그림도 자신만의 해석으로 풀어낸다. 생각하게 하는 설명.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과 행동을 분류해 풀어낸 그림 설명법. 쉬우면서도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작은 부분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카미유 피사로


작가가 글쓰기 방법에 모토로 삼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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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란
현기영 지음 / 창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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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같은 시대에 '민주주의'라는 오아시스를 찾기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 그들이 있기에, 지금의 시대가 있고, 그들이 있었기에 많은 것을 얻어냈다. 하지만, 시대는 그들을 쓰다듬거나 위로하지 않는다. 알아주지도 않는다. 그저, 가끔 기억할 뿐이다.

'허무성' 강성인 운동권 학생이었지만, 사람을 동물보다 못한 짐승으로 만드는 모진 고문에 항복하고 말았다. 같이 활동하던 동지들의 이름을 줄줄이 뱉어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외면당한 채 가해자에 의해 조종당한다.
'김일강' 그는 자신을 고문한 가해자이지만, 이미 배신의 굴레에서 돌아올 수 없는 허무성에게는 벗어나지 못하는 거대한 괴물이다. 

유학을 다녀오고, 교수가 되었다. 김일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저항하지 못한다. 무섭다. 과거의 세상이 무섭고, 자신이 싸워서 이루려했던 세상이 무너져 가는 게 무섭다. 결국, 이루려했던 것들은 변절되고 기득권은 가해자가 되었던 사람들이 쥐었다. 세상에 돌아와 보니, 젊은이들도 과거의 고통과 역사의 아픔에 대해 알려 하지도 않고,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 

해결되지 않은 고통은, 정신적인 피폐함만 가중시킨다. 시대의 피해자들은, 과거의 아픔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뒷세대가 감싸 안고 도와줘야 할 몫임에도, 아무도 관심두지 않는다. 시대의 아픔을 개인들이 짊어졌건만 국가도, 사회도, 국민도 관심이 없다. 뱀처럼 악독하기만 한, 싸워 없애려고 했던 그들만, 배가 부르고 떵떵거리고 권력을 쥐고 있다. 이제는, 운동권이었던 동지들마저도 권력을 잡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감옥에 갔던 게 경력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

허무성은 혼란스럽다. 다시 만난 사랑도 자기만의 세계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 마음 둘 곳도 마음 가는 곳도 없다. 그나마 '오유미'라는 빛을 만났을 때, 누군가에 의해 그의 순수성이 철저히 짓밟힌다. 오늘의 동료가 내일의 적이 되어버리는 시대에 그는 염증이 난다. 그가 싸웠던 대상 '박정희'를 강의해야 살아남는 시대에 봉착한 것이다.

그는, 결국 세상과의 단절을 선택하고, 그늘에 자신을 숨긴다. 중첩된 시대에 사는 그는, 마음을 치유하지 못한 채 변해버린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아무도 그의 상처에는 관심이 없고, 젊은이들은 신자유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그는 희망을 위해 싸웠는데, 그가 쟁취하려 했던 희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게 아프다. 하지만, 아프다고 말해도 아무도 관심이 없다.

386세대의 외로움과 적막함. 빼앗겨 버린 열정과 정열. 잊혀 가는 시대가 되어버리는 존재들.
허무성은 그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지금 우리가 이 시대에 얻으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 돈? 일자리? 안정된 생활?
그것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뉴스는 연일 경제, 흑자, 적자를 떠든다. 그게 삶의 전부인 것처럼. 소비의 시대에 살고 있으니, 돈은 인생 최고의 목표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많다. 돈을 얻지 못하면 무능력해지는 것이니.

우리 선배들이 싸워서 얻으려 했던 것이 이런 것들이었을까? 자유를 갖고도 자유를 버리는 사람들.
나도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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