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일이다. 홍콩 무협 영화들을 아주 열심히, 즐겁게 보았던 때가 있었다. 주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Shaw Brothers에서 제작된 영화들이었다. Shaw Brothers, 우리말로 번역하면 邵氏형제 영화사. 영화를 재생하면 나오는 그 로고가 참으로 반갑고 좋았던 시절이었다. 


  어떻게 하다가 무협 영화를 챙겨보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영화들을 보던 시기는 내 인생에서 모든 것이 막막하고 앞이 잘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다니던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하나 고민하면서 휴학 중이었다. 낮에는 시립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무작정 책을 읽었고, 저녁에는 영화들을 찾아서 보았다. 어느날, 홍콩 무협 영화 추천 글을 읽었다. 그렇게 한편 두편 찾아서 보게 된 것이 계속 이어졌다. 


  강대위, 적룡, 정패패... 다시 떠올려 보니 그리운 이름들이다. 특히 장철 감독의 영화들은 아주 호쾌하면서도 선악이 분명한 구도가 좋았다. 배우 강대위는 무협 영화 배우로서는 다소 작은 체구의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연기하는 정의로운 협객의 모습에는 올곧은 품성과 따뜻한 강인감 같은 것이 있어서 좋았다. 주로 배우 적룡과 같이 나오는 영화가 많았는데, 영화 속 그들은 악인들에게 핍박받고, 선량한 사람들을 지키려다 다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한다. '복수(1970)', '신외팔이(1971)', '자마(1973)' 같은 영화들.


  특히 '자마(刾)'는 걸작이었다. 늘 짝을 이루어 나오던 강대위와 적룡은 이 영화에서 원수지간으로 나온다. 그 두 배우를 하나의 팀으로 생각하던 이들에게는 이 영화 속에서는 누구를 편들어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을 것이다. 배우 적룡이 비열한 악역의 모습을 잘 연기해내는 것이 신기했을 정도였다. 어쨌든 나는 강대위 편을 끝까지 들었던 기억이 난다.


  배우 정패패는 남자 배우들이 대부분이었던 무협 영화에서 유일하게 존재감을 내보였던 여협객이었다. 외유내강의 여협객으로서 그가 보여주는 무술 동작은 남자 배우들의 선굵고 거친 동작과는 차이가 있었다. 절도 있으면서도 부드러웠고, 휘어지면서도 꺾이지 않는 강인함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나중에 정패패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다가, 그가 어린시절에 발레를 배웠었다는 것을 알았다. '대취협(1966)', '금연자(1968)'의 정패패는 후에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2000)'의 푸른 여우 역을 맡아서 열연하기도 했다. 언젠가 읽은 인터뷰에서, 남성 위주의 영화계에서 여배우로서 자신의 경력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토로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여협객이라면 우리나라 영화에서도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있다. 1969년에 나온 임원식 감독의 '맹수(盲獸)'에는 배우 사미자가 눈이 먼 여협객으로 열연한다. 그 영화에서 사미자는 협객 역을 그냥 흉내낸 것이 아니라, 진짜 처절하게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무척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사미자 씨는 인터뷰에서 이 영화에 캐스팅되고 나서 자신이 무술 동작을 익히기 위해 여러가지로 배우고 애를 썼노라고 회고했다.


  Shaw Brothers 제작의 무협 영화들을 볼 때의 가장 큰 어려움은 자막이 없다는 점이었다. 잘 알려진 유명 영화들은 영어 자막이 있었지만, 대개의 영화들은 자막이 없었다. 외국 영화를 자막없이 보는 것은 참 괴로운 일이다. 그래도 무협 영화의 단순한 구성과 명확한 인물 설정은 무자막의 광둥어 대사를 충분히 인내할 수 있게 했고, 나중에는 나 스스로 대사를 만들어서(!) 읊조리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그 시절, 내가 무협 영화들을 그토록 좋아했던 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 가끔씩 생각해 보곤 한다. 악행을 저지른 악인은 처벌 받고, 온갖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착한 이들에게는 반드시 좋은 날이 온다는 그 자명한 진리가 참으로 마음에 와닿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은 결코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무협 영화의 결말들은 나에게 더 분명하게 각인시켜주는 것 같았다. 


  무협 영화를 보던 시절이 지나고,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아주 가끔은 그 시절에 보았던 영화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무협 영화를 본 적은 없다. 얼마전,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가 적룡이 나오는 무협 영화를 발견했다. 좋지 못한 화질 속의 배우들이 푸른 초목을 헤치고 뛰어다니면서 싸우고 있었다. 예전에 즐겨 보았던 무협 영화의 기억을 떠올리며 보려고 했으나 더 볼 수 없었다. 문득, 무협 영화를 보며 감동하기에는 이제는 내가 너무 늙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용히 TV를 꺼버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드라마 작가 임성한이 새로운 드라마로 다시 복귀한다는 뉴스를 얼마전에 읽었다. 5년 전, '압구정 백야'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을 때에도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드라마 제작자 입장에서 본다면, 그동안 보여주었던 임성한 드라마의 위력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놓는 작품마다 각종 논란을 양산해내던 그에게 '막장 드라마 작가'라는 꼬리표까지 붙었다. 그 논란의 가장 정점에 있었던 사건을 꼽으라면, '오로라 공주(2013)'의 주인공 설설희의 대사가 떠오른다.


  "암세포들은 어쨌든 생명이에요. 내가 죽이려고 하면 암세포들도 느낄 것 같아요."


  실제로 그 대사는 내게 꽤나 흥미롭게 들렸다. 뭐랄까, 임성한이라는 작가가 보여주는 독특한 세계관이라면 저렇게 쓸 수도 있겠구나 싶은 정도였다. 그러나 암투병을 하는 환자와 가족들 입장에서는 감정을 건드리는 대사였음이 분명하다. 그 때문에 드라마 제작진에게 항의가 빗발쳤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일일드라마 역사상 최고 시청률(57.3%)을 기록했다는 "보고 또 보고(1998)"는 정말 매일매일이 기다려지는 드라마였다. 그 당시에 나도 재미나게 보았었는데, 겹사돈이라는 좀 흔하지 않은 소재를 다루기는 했어도 이른바 '막장'의 기운은 그때까지 감지되지 않았다. 나중에 한류스타로 뜨게 되는 배우 박용하가 비중이 작은 배역이었음에도 후반부에 눈길을 끌었던 기억이 난다. 후속작이었던 '온달왕자들(2000)'에서부터 뭔가 남다르게 비틀린 기이한 세계가 펼쳐졌던 것 같다. 그 드라마에서 제기된 논란을 가볍게 제압해버린 것은 '인어아가씨(2002)'였다. 항상 조연에 머물렀던 배우 장서희가 이 드라마의 '아리영'을 열연해서 진정한 국민배우로 부상했다.


  '하늘이시여(2006)'는 어떤 면에서는 '임성한 월드'의 결정판을 보여주는 드라마였다. 이 작품이 양산해낸 각종 논란과 화제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말도 안되는 황당한 설정과 등장인물들의 어이없는 죽음은 혹평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기이한 팬덤도 낳았다. 어쨌든 재미가 있기 때문에 임성한이 쓴 드라마라면 꼭 챙겨본다, 는 시청자들이 꽤 많이 늘어났다.


  케이블 방송에서 임성한 드라마는 여러 드라마 채널에서 자주 재방송되고 있다. 오래전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그 드라마들을 '정주행'하며 챙겨본다는 감상평들도 심심찮게 올라온다.


  "요새 개연성 없고 재미도 없는 그런 드라마들 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아요."


  '보고 또 보고'의 짧은 감상평을 올린 그 시청자는 케이블 방송의 감질나는 매일 편성을 견디지 못하고 인터넷으로 남은 회차를 몰아서 다 보았다고 했다. 내 어머니는 '하늘이시여'를 아마도 3번 이상은 다시 보셨던 것 같다. 물론 나름의 재미가 있기는 했지만, 어머니도 그 드라마의 작품성을 높게 인정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자기가 써본 물건이나 제품들, 음식들 좋은 점 언급하면서 시간 끄는 장면은 지금 보면 참 많이 우습기도 하고 그래." 


  이른바 제품의 간접광고(PPL, Product Placement)를 임성한 식으로 직접광고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런 장면들이 그의 드라마들 속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마치 방문 판매업체의 담당자 설명에 예능적 요소가 곁들여진 느낌 같다.


  드라마가 불러일으키는 논란과 화제성을 독점하는 임성한을 모델로 새로운 후계자가 부상했다. '아내의 유혹(2008)'의 김순옥은 그 대표적인 작가이다. 아직도 기억나는 일이 있다. 당시에 저녁마다 학교 운동장으로 운동을 하러 나갔는데, 트랙을 돌면서 걷기 운동을 하던 사람들 대부분이 이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정도였다. 도대체 무슨 드라마인가 해서 봤더니, 얼굴에 점 하나 찍고서 '난 이전의 당신 아내가 아니야'라고 주장하는 그 황당한 설정의 드라마였다. 그 드라마의 성공 이후로 김순옥은 '왔다! 장보리(2014)', '내딸, 금사월(2015)'로 승승장구했다.  


  그런 후배 작가들의 잘 나가는 현실을 그저 바라보고 있기가 괴로웠던 것일까? 곧 다시 임성한은 자신의 드라마로 시청자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드라마 작가로서 세간의 화제를 독점했던 화려했던 시절을 재현시킬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범작의 평가를 받을 것인지 궁금증이 생긴다. 중요한 것은 드라마를 쓰지 않았던 지난 5년 동안에 임성한이 무엇을 보고 느꼈느냐일 것이다. 예전과는 다르게 대중의 취향이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고, 그것을 예측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임성한이 대중의 관심사를 얼마나 현시대의 드라마로 그려낼 수 있는지가 작품의 성패를 가늠할 것이다.


  요새 국민방송(KTV)에서 재방영되는 김수현의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1995)'를 틈틈이 보고 있다. '사랑과 진실(1984)'부터 김수현의 작품들은 빠지지 않고 거의 다 본 것 같다. 김수현은 19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면서 드라마계의 여제로 군림했다. 작가로서 나름대로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대중의 심리를 읽어내려 노력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사회적 흐름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고, 작가 자신만의 가치관을 계몽적으로 전파하는 가족 드라마들을 만들어내면서 그는 화제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목욕탕집 남자들'은 3대가 모여살면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상을 담아내는데, 김수현은 가부장제에 대한 확고한 지지, 나이든 세대의 가치관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미, 젊은 세대들의 부박함에 대한 질타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래, 그런거야(2016)'는 그런 김수현의 드라마와 이 시대가 결별하는 작품이었다. 저조한 시청률과 별다른 화제도 되지 못했던 그 드라마 이후로 김수현은 다음 작품을 내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요인은 작가가 젊은 세대의 의식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대개 유명 드라마 작가들은 보조 취재작가를 두는데, 젊은 취재작가가 젊은 세대의 이야기 소재를 취재해도 결국 최종적으로 쓰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그것을 제대로 그려낼 수 없다는 사실이 노작가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제는 방송사에서도 김수현의 복귀작 편성에 난색을 표시하기 때문에 번번히 무산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임성한이 다시 복귀작으로 귀환할 수 있는 것은 아직까지 그의 작품에 대한 대중과 관련업계의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드라마의 성패가 드라마 작가로서 임성한의 남은 경력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때 그의 드라마를 흥미있게 보았던 한명의 시청자로서 임성한의 복귀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음악 선생님이 여름방학 음악 숙제를 내주셨다. 라디오 방송의 클래식 음악 방송을 하나 정해서 듣고, 그 음악들의 곡명과 작곡가를 적어오는 숙제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숙제를 아주 지겹게 느꼈던 것 같다. 나중에 방학이 끝나고 아이들이 해온 음악 숙제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많은 아이들이 오전에 TV에서 막간을 이용해 잠깐 방송되는 5분 정도의 클래식 영상물을 시청해서 적어왔다. 그러니까 나처럼 매일 1시간씩 듣고 선곡표를 적어왔던 것이 아니라, 매일 한곡씩을 듣고 적어온 것이다. 그것도 서로 베껴서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숙제가 처음에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정말로 클래식 음악이 좋아졌다. 그래서 매일 듣는 1시간 방송 외에도 다른 방송을 더 듣는 때도 있었다. 물론 생소한 작곡가와 곡명을 적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지금처럼 클릭만 하면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선곡표가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1980년대에 방송에서 들었던 음악을 확인하는 방법은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서 해당방송 담당자와 통화를 하는 것 뿐이었다.


  나는 방송되는 곡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고 정확하게 받아적으려고 애를 썼다. 제일 싫은 것은 진행자가 노래를 틀기 전에 곡명을 한번만 알려주고, 끝날 때 말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제대로 듣지 못해서 확인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해버리면 짜증이 치밀기까지 했다. 아무튼 집에 있는 인명 백과 사전까지 열심히 뒤적여가며 음악 숙제를 해갔다. 지금도 생각나는 작곡가는 폰키엘리(Amilcare Ponchielli)인데, 그의 오페라 '라 조콘다' 가운데 '시간의 춤'이 자주 나왔었다. 이 작곡가 이름을 펑키엘리로 적을 것인지, 폰키엘리로 적을 것인지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백과 사전에 있으면 그대로 적었지만, 없으면 대충 적었다. 그럴 때마다 진행자들의 발음을 탓하곤 했다.


  어쨌든 그 방학 숙제 이후에 나는 클래식 음악만 듣게 되었다. 다른 아이들이 가요와 팝송을 듣는 동안, 내 취향은 클래식 음악으로 고정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취향의 발견'이었다. 아네스 자우이 감독의 영화 '타인의 취향(2000)'에는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미술 작품에 억지로 관심을 두게 된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나중에는 정말로 미술 애호가가 되어버려서, 자신이 좋아하는 미술품들을 사들이기까지 한다.


  지금은 음악 방송을 들을 때, 잘 알지 못하는 좋은 노래를 우연히 듣다가 진행자가 말해주는 노래 제목을 놓치게 되어도 괜찮다. 선곡표가 있는 세상. 그리고 가사 몇 마디, 노래 몇 소절만 알고 있으면,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이 노래를 찾아주는 시대이다. 내가 원하는 노래를 듣기 위해 편지와 엽서를 써서 라디오 방송에 보내고, 그것을 녹음하려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카세트 테이프의 REC 버튼을 누르려고 기다리던 아날로그의 시대는 지나가버린지 오래다.   


  선곡표가 없던 시대를 떠올리며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인터넷 댓글 사연이 있다. 노래에 얽힌 글타래에서 읽게 된 댓글이었다. 그 댓글을 쓴 이는 어느날 라디오에서 귀에 확 꽂히는 새롭고 놀라운 음악을 듣게 된다. 그런데 노래 제목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만나는 사람마다 그 노래의 소절을 들려주고 그 노래를 아는지 물어보았다.


  그의 노력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따따 따라, 따따따, 이런식으로 이어지는 그 노래의 음조를 자신이 다니는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서 노래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수소문하고 다녔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노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9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그는 우연히 듣게 된 음악 방송에서 그 노래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 노래의 제목을 알 수 있었다. 그 노래의 제목은 '보사 바로크(Bossa Baroque)', 데이브 그루신(Dave Grusin)이 1984년에 발표한 곡이었다. 노래 제목을 알아내기 위한 그의 지난한 대장정이 마침내 끝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댓글에서 자신을 매혹시킨 노래를 향한 한 사람의 집념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그 노래 제목을 알게 되었을 때 진심으로 기뻤을 것이다. 선곡표가 없었던 시대에 그가 겪어야했던 우여곡절이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그냥 웃음을 안겨주는 일화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지식 하나를 얻기 위해 참으로 쉽지 않은, 번거로운 과정이 일상이었던 그 시대에는 그렇게 얻게 된 지식과 정보가 소중했고, 또 그것들은 진정으로 자신의 것이 되었다. 이제는 손쉽게 얻고 알게 된 수많은 정보는 그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뿐이고, 필요할 때 다시 꺼내보는 개념이 되었다.


  아주 가끔은, 아날로그 시대의 불편함이 주었던 그 진정성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어제, 음악 방송에서 나오는 '보사 바로크'를 들었다.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곡의 제목을 찾아 자신만의 긴 여정을 힘겹게 마친 어떤 이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는 지금 시대의 그 누구보다도 선곡표를 좋아할 것만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생두를 직접 사다가 집에서 커피를 볶아서 먹은 지는 어느덧 10년째다. 워낙 커피를 좋아하다 보니, 다양한 원두를 접하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시작한 것이 그리 되었다. 집에서 커피를 볶는 일은 생각보다 번잡스럽고 힘든 일이다. 무엇보다 커피 볶을 때 나는 엄청난 연기와 냄새, 볶는 과정에서 떨어지는 생두 껍질(chaff)은 가장 큰 골칫거리다. 게다가 로스팅 업체에서 볶는 열풍 방식이 원두에 골고루 열을 가하는 것이라면, 팬에다 열을 가해서 볶는 방식은 원두가 균일하게 볶아지지 않는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홈 로스팅을 놓지 않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직접 볶는다'는 자기 만족감이 아닐까 싶다.


  이제는 번거롭기도 하고, 아무리 커피를 좋아해도 로스팅하고 난 뒤에 이삼일씩 집안에서 빠지지 않는 커피 냄새가 싫기도 해서 일년에 서너번 정도나 볶는다. 아주 날씨가 쾌청하고, 바람이 무지 잘 불어야 하며, 습도도 그리 높지 않은 날. 계절로 치면 봄과 가을의 몇일 정도나 될까. 그래도 그렇게 커피를 볶고 난 다음에는 한동안 마실 커피를 장만했다는 마음에 뿌듯해진다.


  그동안 많은 커피를 마셔봤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커피는 미얀마 커피다. 아마도 7년 전인가 그랬을 것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미얀마 생두를 수입하는 업체가 드물었다. 생두 목록에 올라온 미얀마 생두는 굉장히 저렴했다. 미얀마에서도 커피를 재배한다니 신기하기도 했고, 그 커피 맛은 어떤지 궁금해졌다. 일단 2kg을 구매해 보았다. 


  받은 생두를 집에서 확인해 보니, 생두 상태가 정말로 실망스러웠다. 벌레가 먹거나 곰팡이가 핀 것들, 모양이 불량인 생두들을 골라내는 작업을 핸드픽(hand-pick)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상업용 생두(commercial)에서는 보통 kg당 50g 안팎으로 나온다. 인도네시아 만델링 생두의 경우는 건조 과정이 특수해서 더 많은 결점두가 생기기 때문에 100g이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 미얀마 생두에서는 결점두가 거의 300g을 넘었다. 정말 형편없는 커피를 샀구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로스팅을 하고 나서 마셔본 미얀마 커피의 맛은 놀라웠다. 생두의 상태는 그렇게 엉망진창이었을 망정, 커피에서는 꽃향기가 나고 그 맛은 풍부하고 깔끔했다. 나는 미얀마 커피가 그렇게 좋은 맛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미얀마 커피 산업에 대한 글을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그 글에는 미얀마 커피 농장을 직접 탐방한 내용이 있었다. 사진을 보니, 차도 들어가지 않는 오지 산골에서 쓰러질 듯한 오두막에 거주하고 있는 가난한 농부가 커피를 재배하고 있었다.


  커피도 농산물이라 비료도 주어야 하고, 농약도 쳐야 한다. 미얀마 오지 산골의 농부는 말 그대로 비료는 커녕 농약을 살 돈도 없었기 때문에 커피콩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에 오직 땅이 가진 그 독특한 형질과 기운, 농부의 진심으로 커피를 재배했고, 그것이 좋은 커피 맛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싶었다. 커피 재배에도 와인 애호가들이 그렇게도 말하는 떼루아(terroir)가 있다고 한다면, 미얀마 커피에도 그토록 좋은 토양이 있다고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KBS 2TV '세상의 모든 다큐'에 미얀마의 현재를 조망할 수 있는 2부작 다큐가 방영되었다. 명목상의 민주화를 이루어 내기는 했지만, 아직도 극심한 빈부 격차와 크고 작은 종족간의 갈등으로 인한 내전, 군부의 입김이 지배하는 미얀마의 현실을 보여주는 좋은 다큐였다. 문득 오래전 마셔보았던 미얀마 커피가 생각났다. 이제는 내가 예전에 읽었던 글 속의 그 산골 커피 농장에도 거대 산업 자본이 들어가서 커피 농부의 삶의 여건이 나아졌을지도 모르겠다. 미얀마는 급성장하고 있는 커피 생산국 가운데 하나다. 그러니 이전처럼 결점두가 많은 커피를 생산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 밖에 나가는 길에 주차장을 지나면서, 아주 인상적인 문구를 적어놓은 차를 보았다.


  #인생은

  #언제나

  #흐린 후 맑음


  얼굴도 알지 못하는 차주가 뒷면 유리창에 적어놓은 그 정감있는 글귀 덕분에 미소가 지어졌다. 내외적으로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는 미얀마라는 나라에 잔뜩 끼어있는 구름이 사라지고, 그 나라의 사람들이 맑은 하늘 아래 웃을 수 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런 바램을 가지게 만든 데에는 아마도 오래전에 마셨던 그 놀라운 미얀마 커피의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람돌이 2020-10-02 18:26   좋아요 0 | URL
집에서 커피를 볶다니... ㅎㅎ 전 한번 해보고 다시는 안합니다. 집에서 볶은 원두로 내린 커피는 맛은 기가 막혔지만 그 노동이 정말 장난 아니었기에말이죠. ㅎ 미얀마 커피는 한번도 먹어본적이 없는데 궁금하네요. 세계 어디든 커피를 재배하는 농가들이 그 정당한 대가를 받는 곳은 거의 없지싶어요. 그래서 달콤한 커피의 맛이 때때로 씁쓸하기도 한듯요
 

 

  몇해 전부터 나던 흰머리가 올해 들어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꽤 많이 나고 있다. 나이들수록 그렇게 나는 것을 어떻게 막을 방법도 없고, 볼 때마다 뽑을 수 있는 정도도 이젠 넘어섰다. 자주 가는 사이트 게시판에도 '흰머리 어떻게 하세요?'라는 질문은 잊을 만하면 올라오는 글들 가운데 하나다. 언젠가 이런 댓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십대에 접어든 그는 자신의 초등생 딸에게 가끔씩 흰머리를 뽑게 하는데, 어느 날 딸이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빠, 이제 더이상 흰머리를 뽑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 같아. 너무 많아."


  그렇다. 어느 때가 되면 흰머리를 뽑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임계점 같은 순간이 꼭 온다. 흰머리 뽑다가 모근이 손상되면, 나중에는 머리숱이 적어져 머리가 휑해질 수도 있다. 그러니 흰머리카락 하나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가짐으로 내버려 둔다.


  흰머리가 나는 시기는 일반적으로 후천적인 영향 보다는 유전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모의 흰머리 나는 시기를 대략적으로 따라간다고 보는 것이다. 내 어머니는 일찍부터 머리가 세셨다. 열살 무렵, 어머니의 흰머리를 열심히 뽑아드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어머니 나이를 이제는 훌쩍 넘겼으니 어쩌면 내 흰머리가 이리 극성인 것도 나름 납득이 간다. 얼마전, 요새 들어 흰머리가 너무 많이 나고 있다고 어머니와 전화 통화 끝에 말이 나왔다. 


  "염색을 하려므나."


  수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간단하고 명료한 해결책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는,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염색할 마음이 그다지 들지 않는다. 아마도 그런 결심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내가 대학시절에 보았던 어떤 영화 한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980년대가 대학교 동아리에서 사회과학 분야의 전성기 였다면, 1990년대는 영화와 관련된 동아리의 전성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게 커지던 시기였다. 다니던 대학교에는 몇 개의 영화 동아리가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동아리가 일주일에 한편씩,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든 작가주의 예술 영화들을 선정해서 틀어주었다. 대개는 복제본 비디오 테이프를 프로젝터로 재생하는 수준이라서 화질은 기대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DVD가 보급되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더 있어야 하는 시절이었다. 아무튼, 그 영화 동아리에서는 정기 시사회에 열심이었다. 상영 장소도 구하기 힘든지 도서관, 소강당, 대강의실을 오가며 자신들의 영화 열정을 전파했었다.


  나는 심심하면 읽던 영화 잡지에서 언급되는 유명 고전 영화들을 가끔씩 그 동아리 시사회를 통해 보곤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이었다. 도서관 영상자료실에서 보았었는데, 그날따라 사람이 꽤 많았던 기억이 난다. 영상자료실이 새롭게 개관한지 얼마 안되어서 시설은 좋았다. 문제는 화질이었다. 정말로 지지직 거리는, 등장 인물의 얼굴이 가끔씩 뭉개져서 보였으며, 영화 내내 비가 오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 영화가 가진 엄청난 흡인력은 그런 것조차 무시하게 만들었다. 미소년 타지오 역의 배우가 내뿜었던 빛나는 아름다움이 스크린 전체를 휘감았다.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듯한 외모였다. 그런 그에게 매혹당한 작곡가 아센바흐의 늙음과 절망이 영화 내내 절규하듯 울려퍼졌다. 


  그 마지막 장면. 사랑의 열정에 미친 아센바흐는 젊게 보이려고 염색을 하고, 잔뜩 성장한 채 타지오가 있는 해변으로 나간다. 검은 염색약이 오물처럼 얼굴을 흘러내리고 눈물과 비탄 속에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그를 배경으로 말러의 교향곡 5번의 4악장이 흐른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서 늙음이란 비정한 추함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끔찍할 정도로 슬펐다. 그때 본 염색약의 엄청난 영화적 효과 때문이라고 해야할지, 아무튼 나는 염색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늙음이란 이런저런 말로 좋게 포장하려해도 결국은 이 악물고 견뎌야하는 괴로운 통과의례일 뿐이다. 노안이 온 지도 꽤 되어서 모니터 화면의 글씨를 크게 해놓고 보아야 편하다. 활자가 작은 책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그렇게 어느날 변해버린 현실에 조금씩 적응하며 사는 것이다.


  "포기하면 편해."


  흰머리 뽑는 것을 멈추고,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해 본다. 흰머리가 서리내리듯이 머리를 뒤덮는다고 해도 나는 염색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칠순이 넘으신 어머니도 당신의 흰머리를 견디질 못하신다. 어쩌면 늙음의 과정이란 견디기 힘든 것을 견디어 내는 의지력의 시험을 매일매일 치루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