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작가 임성한이 새로운 드라마로 다시 복귀한다는 뉴스를 얼마전에 읽었다. 5년 전, '압구정 백야'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을 때에도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드라마 제작자 입장에서 본다면, 그동안 보여주었던 임성한 드라마의 위력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놓는 작품마다 각종 논란을 양산해내던 그에게 '막장 드라마 작가'라는 꼬리표까지 붙었다. 그 논란의 가장 정점에 있었던 사건을 꼽으라면, '오로라 공주(2013)'의 주인공 설설희의 대사가 떠오른다.


  "암세포들은 어쨌든 생명이에요. 내가 죽이려고 하면 암세포들도 느낄 것 같아요."


  실제로 그 대사는 내게 꽤나 흥미롭게 들렸다. 뭐랄까, 임성한이라는 작가가 보여주는 독특한 세계관이라면 저렇게 쓸 수도 있겠구나 싶은 정도였다. 그러나 암투병을 하는 환자와 가족들 입장에서는 감정을 건드리는 대사였음이 분명하다. 그 때문에 드라마 제작진에게 항의가 빗발쳤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일일드라마 역사상 최고 시청률(57.3%)을 기록했다는 "보고 또 보고(1998)"는 정말 매일매일이 기다려지는 드라마였다. 그 당시에 나도 재미나게 보았었는데, 겹사돈이라는 좀 흔하지 않은 소재를 다루기는 했어도 이른바 '막장'의 기운은 그때까지 감지되지 않았다. 나중에 한류스타로 뜨게 되는 배우 박용하가 비중이 작은 배역이었음에도 후반부에 눈길을 끌었던 기억이 난다. 후속작이었던 '온달왕자들(2000)'에서부터 뭔가 남다르게 비틀린 기이한 세계가 펼쳐졌던 것 같다. 그 드라마에서 제기된 논란을 가볍게 제압해버린 것은 '인어아가씨(2002)'였다. 항상 조연에 머물렀던 배우 장서희가 이 드라마의 '아리영'을 열연해서 진정한 국민배우로 부상했다.


  '하늘이시여(2006)'는 어떤 면에서는 '임성한 월드'의 결정판을 보여주는 드라마였다. 이 작품이 양산해낸 각종 논란과 화제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말도 안되는 황당한 설정과 등장인물들의 어이없는 죽음은 혹평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기이한 팬덤도 낳았다. 어쨌든 재미가 있기 때문에 임성한이 쓴 드라마라면 꼭 챙겨본다, 는 시청자들이 꽤 많이 늘어났다.


  케이블 방송에서 임성한 드라마는 여러 드라마 채널에서 자주 재방송되고 있다. 오래전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그 드라마들을 '정주행'하며 챙겨본다는 감상평들도 심심찮게 올라온다.


  "요새 개연성 없고 재미도 없는 그런 드라마들 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아요."


  '보고 또 보고'의 짧은 감상평을 올린 그 시청자는 케이블 방송의 감질나는 매일 편성을 견디지 못하고 인터넷으로 남은 회차를 몰아서 다 보았다고 했다. 내 어머니는 '하늘이시여'를 아마도 3번 이상은 다시 보셨던 것 같다. 물론 나름의 재미가 있기는 했지만, 어머니도 그 드라마의 작품성을 높게 인정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자기가 써본 물건이나 제품들, 음식들 좋은 점 언급하면서 시간 끄는 장면은 지금 보면 참 많이 우습기도 하고 그래." 


  이른바 제품의 간접광고(PPL, Product Placement)를 임성한 식으로 직접광고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런 장면들이 그의 드라마들 속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마치 방문 판매업체의 담당자 설명에 예능적 요소가 곁들여진 느낌 같다.


  드라마가 불러일으키는 논란과 화제성을 독점하는 임성한을 모델로 새로운 후계자가 부상했다. '아내의 유혹(2008)'의 김순옥은 그 대표적인 작가이다. 아직도 기억나는 일이 있다. 당시에 저녁마다 학교 운동장으로 운동을 하러 나갔는데, 트랙을 돌면서 걷기 운동을 하던 사람들 대부분이 이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정도였다. 도대체 무슨 드라마인가 해서 봤더니, 얼굴에 점 하나 찍고서 '난 이전의 당신 아내가 아니야'라고 주장하는 그 황당한 설정의 드라마였다. 그 드라마의 성공 이후로 김순옥은 '왔다! 장보리(2014)', '내딸, 금사월(2015)'로 승승장구했다.  


  그런 후배 작가들의 잘 나가는 현실을 그저 바라보고 있기가 괴로웠던 것일까? 곧 다시 임성한은 자신의 드라마로 시청자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드라마 작가로서 세간의 화제를 독점했던 화려했던 시절을 재현시킬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범작의 평가를 받을 것인지 궁금증이 생긴다. 중요한 것은 드라마를 쓰지 않았던 지난 5년 동안에 임성한이 무엇을 보고 느꼈느냐일 것이다. 예전과는 다르게 대중의 취향이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고, 그것을 예측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임성한이 대중의 관심사를 얼마나 현시대의 드라마로 그려낼 수 있는지가 작품의 성패를 가늠할 것이다.


  요새 국민방송(KTV)에서 재방영되는 김수현의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1995)'를 틈틈이 보고 있다. '사랑과 진실(1984)'부터 김수현의 작품들은 빠지지 않고 거의 다 본 것 같다. 김수현은 19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면서 드라마계의 여제로 군림했다. 작가로서 나름대로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대중의 심리를 읽어내려 노력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사회적 흐름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고, 작가 자신만의 가치관을 계몽적으로 전파하는 가족 드라마들을 만들어내면서 그는 화제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목욕탕집 남자들'은 3대가 모여살면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상을 담아내는데, 김수현은 가부장제에 대한 확고한 지지, 나이든 세대의 가치관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미, 젊은 세대들의 부박함에 대한 질타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래, 그런거야(2016)'는 그런 김수현의 드라마와 이 시대가 결별하는 작품이었다. 저조한 시청률과 별다른 화제도 되지 못했던 그 드라마 이후로 김수현은 다음 작품을 내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요인은 작가가 젊은 세대의 의식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대개 유명 드라마 작가들은 보조 취재작가를 두는데, 젊은 취재작가가 젊은 세대의 이야기 소재를 취재해도 결국 최종적으로 쓰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그것을 제대로 그려낼 수 없다는 사실이 노작가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제는 방송사에서도 김수현의 복귀작 편성에 난색을 표시하기 때문에 번번히 무산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임성한이 다시 복귀작으로 귀환할 수 있는 것은 아직까지 그의 작품에 대한 대중과 관련업계의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드라마의 성패가 드라마 작가로서 임성한의 남은 경력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때 그의 드라마를 흥미있게 보았던 한명의 시청자로서 임성한의 복귀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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