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두를 직접 사다가 집에서 커피를 볶아서 먹은 지는 어느덧 10년째다. 워낙 커피를 좋아하다 보니, 다양한 원두를 접하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시작한 것이 그리 되었다. 집에서 커피를 볶는 일은 생각보다 번잡스럽고 힘든 일이다. 무엇보다 커피 볶을 때 나는 엄청난 연기와 냄새, 볶는 과정에서 떨어지는 생두 껍질(chaff)은 가장 큰 골칫거리다. 게다가 로스팅 업체에서 볶는 열풍 방식이 원두에 골고루 열을 가하는 것이라면, 팬에다 열을 가해서 볶는 방식은 원두가 균일하게 볶아지지 않는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홈 로스팅을 놓지 않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직접 볶는다'는 자기 만족감이 아닐까 싶다.


  이제는 번거롭기도 하고, 아무리 커피를 좋아해도 로스팅하고 난 뒤에 이삼일씩 집안에서 빠지지 않는 커피 냄새가 싫기도 해서 일년에 서너번 정도나 볶는다. 아주 날씨가 쾌청하고, 바람이 무지 잘 불어야 하며, 습도도 그리 높지 않은 날. 계절로 치면 봄과 가을의 몇일 정도나 될까. 그래도 그렇게 커피를 볶고 난 다음에는 한동안 마실 커피를 장만했다는 마음에 뿌듯해진다.


  그동안 많은 커피를 마셔봤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커피는 미얀마 커피다. 아마도 7년 전인가 그랬을 것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미얀마 생두를 수입하는 업체가 드물었다. 생두 목록에 올라온 미얀마 생두는 굉장히 저렴했다. 미얀마에서도 커피를 재배한다니 신기하기도 했고, 그 커피 맛은 어떤지 궁금해졌다. 일단 2kg을 구매해 보았다. 


  받은 생두를 집에서 확인해 보니, 생두 상태가 정말로 실망스러웠다. 벌레가 먹거나 곰팡이가 핀 것들, 모양이 불량인 생두들을 골라내는 작업을 핸드픽(hand-pick)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상업용 생두(commercial)에서는 보통 kg당 50g 안팎으로 나온다. 인도네시아 만델링 생두의 경우는 건조 과정이 특수해서 더 많은 결점두가 생기기 때문에 100g이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 미얀마 생두에서는 결점두가 거의 300g을 넘었다. 정말 형편없는 커피를 샀구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로스팅을 하고 나서 마셔본 미얀마 커피의 맛은 놀라웠다. 생두의 상태는 그렇게 엉망진창이었을 망정, 커피에서는 꽃향기가 나고 그 맛은 풍부하고 깔끔했다. 나는 미얀마 커피가 그렇게 좋은 맛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미얀마 커피 산업에 대한 글을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그 글에는 미얀마 커피 농장을 직접 탐방한 내용이 있었다. 사진을 보니, 차도 들어가지 않는 오지 산골에서 쓰러질 듯한 오두막에 거주하고 있는 가난한 농부가 커피를 재배하고 있었다.


  커피도 농산물이라 비료도 주어야 하고, 농약도 쳐야 한다. 미얀마 오지 산골의 농부는 말 그대로 비료는 커녕 농약을 살 돈도 없었기 때문에 커피콩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에 오직 땅이 가진 그 독특한 형질과 기운, 농부의 진심으로 커피를 재배했고, 그것이 좋은 커피 맛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싶었다. 커피 재배에도 와인 애호가들이 그렇게도 말하는 떼루아(terroir)가 있다고 한다면, 미얀마 커피에도 그토록 좋은 토양이 있다고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KBS 2TV '세상의 모든 다큐'에 미얀마의 현재를 조망할 수 있는 2부작 다큐가 방영되었다. 명목상의 민주화를 이루어 내기는 했지만, 아직도 극심한 빈부 격차와 크고 작은 종족간의 갈등으로 인한 내전, 군부의 입김이 지배하는 미얀마의 현실을 보여주는 좋은 다큐였다. 문득 오래전 마셔보았던 미얀마 커피가 생각났다. 이제는 내가 예전에 읽었던 글 속의 그 산골 커피 농장에도 거대 산업 자본이 들어가서 커피 농부의 삶의 여건이 나아졌을지도 모르겠다. 미얀마는 급성장하고 있는 커피 생산국 가운데 하나다. 그러니 이전처럼 결점두가 많은 커피를 생산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 밖에 나가는 길에 주차장을 지나면서, 아주 인상적인 문구를 적어놓은 차를 보았다.


  #인생은

  #언제나

  #흐린 후 맑음


  얼굴도 알지 못하는 차주가 뒷면 유리창에 적어놓은 그 정감있는 글귀 덕분에 미소가 지어졌다. 내외적으로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는 미얀마라는 나라에 잔뜩 끼어있는 구름이 사라지고, 그 나라의 사람들이 맑은 하늘 아래 웃을 수 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런 바램을 가지게 만든 데에는 아마도 오래전에 마셨던 그 놀라운 미얀마 커피의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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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10-02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에서 커피를 볶다니... ㅎㅎ 전 한번 해보고 다시는 안합니다. 집에서 볶은 원두로 내린 커피는 맛은 기가 막혔지만 그 노동이 정말 장난 아니었기에말이죠. ㅎ 미얀마 커피는 한번도 먹어본적이 없는데 궁금하네요. 세계 어디든 커피를 재배하는 농가들이 그 정당한 대가를 받는 곳은 거의 없지싶어요. 그래서 달콤한 커피의 맛이 때때로 씁쓸하기도 한듯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