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일이다. 홍콩 무협 영화들을 아주 열심히, 즐겁게 보았던 때가 있었다. 주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Shaw Brothers에서 제작된 영화들이었다. Shaw Brothers, 우리말로 번역하면 邵氏형제 영화사. 영화를 재생하면 나오는 그 로고가 참으로 반갑고 좋았던 시절이었다. 


  어떻게 하다가 무협 영화를 챙겨보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영화들을 보던 시기는 내 인생에서 모든 것이 막막하고 앞이 잘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다니던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하나 고민하면서 휴학 중이었다. 낮에는 시립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무작정 책을 읽었고, 저녁에는 영화들을 찾아서 보았다. 어느날, 홍콩 무협 영화 추천 글을 읽었다. 그렇게 한편 두편 찾아서 보게 된 것이 계속 이어졌다. 


  강대위, 적룡, 정패패... 다시 떠올려 보니 그리운 이름들이다. 특히 장철 감독의 영화들은 아주 호쾌하면서도 선악이 분명한 구도가 좋았다. 배우 강대위는 무협 영화 배우로서는 다소 작은 체구의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연기하는 정의로운 협객의 모습에는 올곧은 품성과 따뜻한 강인감 같은 것이 있어서 좋았다. 주로 배우 적룡과 같이 나오는 영화가 많았는데, 영화 속 그들은 악인들에게 핍박받고, 선량한 사람들을 지키려다 다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한다. '복수(1970)', '신외팔이(1971)', '자마(1973)' 같은 영화들.


  특히 '자마(刾)'는 걸작이었다. 늘 짝을 이루어 나오던 강대위와 적룡은 이 영화에서 원수지간으로 나온다. 그 두 배우를 하나의 팀으로 생각하던 이들에게는 이 영화 속에서는 누구를 편들어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을 것이다. 배우 적룡이 비열한 악역의 모습을 잘 연기해내는 것이 신기했을 정도였다. 어쨌든 나는 강대위 편을 끝까지 들었던 기억이 난다.


  배우 정패패는 남자 배우들이 대부분이었던 무협 영화에서 유일하게 존재감을 내보였던 여협객이었다. 외유내강의 여협객으로서 그가 보여주는 무술 동작은 남자 배우들의 선굵고 거친 동작과는 차이가 있었다. 절도 있으면서도 부드러웠고, 휘어지면서도 꺾이지 않는 강인함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나중에 정패패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다가, 그가 어린시절에 발레를 배웠었다는 것을 알았다. '대취협(1966)', '금연자(1968)'의 정패패는 후에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2000)'의 푸른 여우 역을 맡아서 열연하기도 했다. 언젠가 읽은 인터뷰에서, 남성 위주의 영화계에서 여배우로서 자신의 경력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토로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여협객이라면 우리나라 영화에서도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있다. 1969년에 나온 임원식 감독의 '맹수(盲獸)'에는 배우 사미자가 눈이 먼 여협객으로 열연한다. 그 영화에서 사미자는 협객 역을 그냥 흉내낸 것이 아니라, 진짜 처절하게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무척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사미자 씨는 인터뷰에서 이 영화에 캐스팅되고 나서 자신이 무술 동작을 익히기 위해 여러가지로 배우고 애를 썼노라고 회고했다.


  Shaw Brothers 제작의 무협 영화들을 볼 때의 가장 큰 어려움은 자막이 없다는 점이었다. 잘 알려진 유명 영화들은 영어 자막이 있었지만, 대개의 영화들은 자막이 없었다. 외국 영화를 자막없이 보는 것은 참 괴로운 일이다. 그래도 무협 영화의 단순한 구성과 명확한 인물 설정은 무자막의 광둥어 대사를 충분히 인내할 수 있게 했고, 나중에는 나 스스로 대사를 만들어서(!) 읊조리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그 시절, 내가 무협 영화들을 그토록 좋아했던 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 가끔씩 생각해 보곤 한다. 악행을 저지른 악인은 처벌 받고, 온갖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착한 이들에게는 반드시 좋은 날이 온다는 그 자명한 진리가 참으로 마음에 와닿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은 결코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무협 영화의 결말들은 나에게 더 분명하게 각인시켜주는 것 같았다. 


  무협 영화를 보던 시절이 지나고,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아주 가끔은 그 시절에 보았던 영화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무협 영화를 본 적은 없다. 얼마전,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가 적룡이 나오는 무협 영화를 발견했다. 좋지 못한 화질 속의 배우들이 푸른 초목을 헤치고 뛰어다니면서 싸우고 있었다. 예전에 즐겨 보았던 무협 영화의 기억을 떠올리며 보려고 했으나 더 볼 수 없었다. 문득, 무협 영화를 보며 감동하기에는 이제는 내가 너무 늙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용히 TV를 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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