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부터 나던 흰머리가 올해 들어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꽤 많이 나고 있다. 나이들수록 그렇게 나는 것을 어떻게 막을 방법도 없고, 볼 때마다 뽑을 수 있는 정도도 이젠 넘어섰다. 자주 가는 사이트 게시판에도 '흰머리 어떻게 하세요?'라는 질문은 잊을 만하면 올라오는 글들 가운데 하나다. 언젠가 이런 댓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십대에 접어든 그는 자신의 초등생 딸에게 가끔씩 흰머리를 뽑게 하는데, 어느 날 딸이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빠, 이제 더이상 흰머리를 뽑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 같아. 너무 많아."


  그렇다. 어느 때가 되면 흰머리를 뽑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임계점 같은 순간이 꼭 온다. 흰머리 뽑다가 모근이 손상되면, 나중에는 머리숱이 적어져 머리가 휑해질 수도 있다. 그러니 흰머리카락 하나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가짐으로 내버려 둔다.


  흰머리가 나는 시기는 일반적으로 후천적인 영향 보다는 유전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모의 흰머리 나는 시기를 대략적으로 따라간다고 보는 것이다. 내 어머니는 일찍부터 머리가 세셨다. 열살 무렵, 어머니의 흰머리를 열심히 뽑아드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어머니 나이를 이제는 훌쩍 넘겼으니 어쩌면 내 흰머리가 이리 극성인 것도 나름 납득이 간다. 얼마전, 요새 들어 흰머리가 너무 많이 나고 있다고 어머니와 전화 통화 끝에 말이 나왔다. 


  "염색을 하려므나."


  수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간단하고 명료한 해결책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는,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염색할 마음이 그다지 들지 않는다. 아마도 그런 결심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내가 대학시절에 보았던 어떤 영화 한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980년대가 대학교 동아리에서 사회과학 분야의 전성기 였다면, 1990년대는 영화와 관련된 동아리의 전성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게 커지던 시기였다. 다니던 대학교에는 몇 개의 영화 동아리가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동아리가 일주일에 한편씩,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든 작가주의 예술 영화들을 선정해서 틀어주었다. 대개는 복제본 비디오 테이프를 프로젝터로 재생하는 수준이라서 화질은 기대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DVD가 보급되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더 있어야 하는 시절이었다. 아무튼, 그 영화 동아리에서는 정기 시사회에 열심이었다. 상영 장소도 구하기 힘든지 도서관, 소강당, 대강의실을 오가며 자신들의 영화 열정을 전파했었다.


  나는 심심하면 읽던 영화 잡지에서 언급되는 유명 고전 영화들을 가끔씩 그 동아리 시사회를 통해 보곤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이었다. 도서관 영상자료실에서 보았었는데, 그날따라 사람이 꽤 많았던 기억이 난다. 영상자료실이 새롭게 개관한지 얼마 안되어서 시설은 좋았다. 문제는 화질이었다. 정말로 지지직 거리는, 등장 인물의 얼굴이 가끔씩 뭉개져서 보였으며, 영화 내내 비가 오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 영화가 가진 엄청난 흡인력은 그런 것조차 무시하게 만들었다. 미소년 타지오 역의 배우가 내뿜었던 빛나는 아름다움이 스크린 전체를 휘감았다.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듯한 외모였다. 그런 그에게 매혹당한 작곡가 아센바흐의 늙음과 절망이 영화 내내 절규하듯 울려퍼졌다. 


  그 마지막 장면. 사랑의 열정에 미친 아센바흐는 젊게 보이려고 염색을 하고, 잔뜩 성장한 채 타지오가 있는 해변으로 나간다. 검은 염색약이 오물처럼 얼굴을 흘러내리고 눈물과 비탄 속에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그를 배경으로 말러의 교향곡 5번의 4악장이 흐른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서 늙음이란 비정한 추함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끔찍할 정도로 슬펐다. 그때 본 염색약의 엄청난 영화적 효과 때문이라고 해야할지, 아무튼 나는 염색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늙음이란 이런저런 말로 좋게 포장하려해도 결국은 이 악물고 견뎌야하는 괴로운 통과의례일 뿐이다. 노안이 온 지도 꽤 되어서 모니터 화면의 글씨를 크게 해놓고 보아야 편하다. 활자가 작은 책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그렇게 어느날 변해버린 현실에 조금씩 적응하며 사는 것이다.


  "포기하면 편해."


  흰머리 뽑는 것을 멈추고,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해 본다. 흰머리가 서리내리듯이 머리를 뒤덮는다고 해도 나는 염색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칠순이 넘으신 어머니도 당신의 흰머리를 견디질 못하신다. 어쩌면 늙음의 과정이란 견디기 힘든 것을 견디어 내는 의지력의 시험을 매일매일 치루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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