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음악 선생님이 여름방학 음악 숙제를 내주셨다. 라디오 방송의 클래식 음악 방송을 하나 정해서 듣고, 그 음악들의 곡명과 작곡가를 적어오는 숙제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숙제를 아주 지겹게 느꼈던 것 같다. 나중에 방학이 끝나고 아이들이 해온 음악 숙제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많은 아이들이 오전에 TV에서 막간을 이용해 잠깐 방송되는 5분 정도의 클래식 영상물을 시청해서 적어왔다. 그러니까 나처럼 매일 1시간씩 듣고 선곡표를 적어왔던 것이 아니라, 매일 한곡씩을 듣고 적어온 것이다. 그것도 서로 베껴서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숙제가 처음에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정말로 클래식 음악이 좋아졌다. 그래서 매일 듣는 1시간 방송 외에도 다른 방송을 더 듣는 때도 있었다. 물론 생소한 작곡가와 곡명을 적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지금처럼 클릭만 하면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선곡표가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1980년대에 방송에서 들었던 음악을 확인하는 방법은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서 해당방송 담당자와 통화를 하는 것 뿐이었다.


  나는 방송되는 곡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고 정확하게 받아적으려고 애를 썼다. 제일 싫은 것은 진행자가 노래를 틀기 전에 곡명을 한번만 알려주고, 끝날 때 말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제대로 듣지 못해서 확인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해버리면 짜증이 치밀기까지 했다. 아무튼 집에 있는 인명 백과 사전까지 열심히 뒤적여가며 음악 숙제를 해갔다. 지금도 생각나는 작곡가는 폰키엘리(Amilcare Ponchielli)인데, 그의 오페라 '라 조콘다' 가운데 '시간의 춤'이 자주 나왔었다. 이 작곡가 이름을 펑키엘리로 적을 것인지, 폰키엘리로 적을 것인지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백과 사전에 있으면 그대로 적었지만, 없으면 대충 적었다. 그럴 때마다 진행자들의 발음을 탓하곤 했다.


  어쨌든 그 방학 숙제 이후에 나는 클래식 음악만 듣게 되었다. 다른 아이들이 가요와 팝송을 듣는 동안, 내 취향은 클래식 음악으로 고정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취향의 발견'이었다. 아네스 자우이 감독의 영화 '타인의 취향(2000)'에는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미술 작품에 억지로 관심을 두게 된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나중에는 정말로 미술 애호가가 되어버려서, 자신이 좋아하는 미술품들을 사들이기까지 한다.


  지금은 음악 방송을 들을 때, 잘 알지 못하는 좋은 노래를 우연히 듣다가 진행자가 말해주는 노래 제목을 놓치게 되어도 괜찮다. 선곡표가 있는 세상. 그리고 가사 몇 마디, 노래 몇 소절만 알고 있으면,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이 노래를 찾아주는 시대이다. 내가 원하는 노래를 듣기 위해 편지와 엽서를 써서 라디오 방송에 보내고, 그것을 녹음하려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카세트 테이프의 REC 버튼을 누르려고 기다리던 아날로그의 시대는 지나가버린지 오래다.   


  선곡표가 없던 시대를 떠올리며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인터넷 댓글 사연이 있다. 노래에 얽힌 글타래에서 읽게 된 댓글이었다. 그 댓글을 쓴 이는 어느날 라디오에서 귀에 확 꽂히는 새롭고 놀라운 음악을 듣게 된다. 그런데 노래 제목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만나는 사람마다 그 노래의 소절을 들려주고 그 노래를 아는지 물어보았다.


  그의 노력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따따 따라, 따따따, 이런식으로 이어지는 그 노래의 음조를 자신이 다니는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서 노래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수소문하고 다녔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노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9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그는 우연히 듣게 된 음악 방송에서 그 노래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 노래의 제목을 알 수 있었다. 그 노래의 제목은 '보사 바로크(Bossa Baroque)', 데이브 그루신(Dave Grusin)이 1984년에 발표한 곡이었다. 노래 제목을 알아내기 위한 그의 지난한 대장정이 마침내 끝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댓글에서 자신을 매혹시킨 노래를 향한 한 사람의 집념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그 노래 제목을 알게 되었을 때 진심으로 기뻤을 것이다. 선곡표가 없었던 시대에 그가 겪어야했던 우여곡절이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그냥 웃음을 안겨주는 일화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지식 하나를 얻기 위해 참으로 쉽지 않은, 번거로운 과정이 일상이었던 그 시대에는 그렇게 얻게 된 지식과 정보가 소중했고, 또 그것들은 진정으로 자신의 것이 되었다. 이제는 손쉽게 얻고 알게 된 수많은 정보는 그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뿐이고, 필요할 때 다시 꺼내보는 개념이 되었다.


  아주 가끔은, 아날로그 시대의 불편함이 주었던 그 진정성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어제, 음악 방송에서 나오는 '보사 바로크'를 들었다.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곡의 제목을 찾아 자신만의 긴 여정을 힘겹게 마친 어떤 이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는 지금 시대의 그 누구보다도 선곡표를 좋아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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