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자신을 교육부의 '노예(slave)'라고 소개한다. 그 말에 경찰관 크로포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다. 크로포드는 남자에게 거듭 맥주를 권한다. 호주의 내륙 오지(outback) Tiboonda, 학교 교사 존 그랜트는 흙먼지 풀풀 날리는 시골 학교를 이제 막 떠나왔다. 그에게는 6주 동안의 크리스마스 휴가가 주어졌다. 시드니로 날아갈 비행기를 타기 위해 그는 인근 소도시 Bundanyabba에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 술집에서 만난 이 경찰관은 친절한듯 보이지만 그 태도는 꽤나 위압적이다. 존은 내키지 않으면서도 이 낯선 도시에서의 하룻밤을 술집 말고 달리 보낼 데가 없다.

  그가 크로포드의 소개로 들어간 음식점 한 켠에서는 동전 도박장이 열렸다. 두 개의 동전을 던져서 둘 다 앞면이냐, 뒷면이냐에 따라 돈을 따는 단순한 도박. 남자들은 도박장의 열기에 취해있다. 존은 심심풀이로 도박에 참가한다. 행운의 여신이 연달아 미소를 짓는다. 단숨에 400달러를 따낸다. 좀 더 운이 따라준다면, 그를 교육부의 노예로 만든 1000달러의 보증금을 갚을 수 있다. 휴가비까지 탈탈 털어서 도박판에 건다. 그가 도박장을 나왔을 때, 그의 수중에는 담배 몇 개비와 약간의 동전이 전부였다. 존 그랜트는 말 그대로 분단야바에 발이 묶인다. 과연 그는 여자 친구가 있는 시드니에 갈 수 있을까...

  Ted Kotcheff 감독의 영화 'Wake in Fright(1971)'는 호주 출신의 작가 Kenneth Cook의 동명 소설(1961)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케네스 쿡은 자신이 머물렀던 Outback의 소도시 Broken Hill(영화에서 가상의 도시 분단야바로 형상화됨)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소설로 썼다. 그는 내륙 오지의 황량한 환경과 그곳 사람들의 무지와 야만성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소설은 그러한 케네스 쿡의 날것 그대로의 감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영화는 143쪽 가량의 중편 소설을 충실히 재현한다. 시나리오 작업은 자메이카 출신의 영국인 Evan Jones가, 감독은 캐나다 출신의 Ted Kotcheff가 맡았다. 참으로 기묘한 조합이었다. 두 사람은 호주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으나, 이 이방인들의 눈으로 바라본 호주 내륙과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전율을 느낄 정도로 사실적이다.

  동전 도박으로 파산한 존은 남은 돈을 그러모아 맥주 한 잔을 들이킨다. 그 술집에서 만난 중년의 남자 하인즈는 존에게 호의를 베풀며 자신의 집에 머물 것을 권유한다. 존은 하인즈의 집에서 거친 광부 조와 딕, 알콜 중독자 의사 닥을 만난다. 무지막지하게 술을 마시면서 그들은 곧 친구가 되고, 캥거루 사냥에 가기로 의기투합한다. 이 네 사람이 캥거루 사냥에서 보여준 잔혹함과 광기는 야만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장면은 실제로 캥거루 사냥꾼들을 섭외해서 찍었다. 캥거루들은 난사된 총알에 의해 피투성이가 되고, 칼에 의해 난도질 당한다.

  호주 뉴 웨이브 영화의 신호탄이 된 Nicolas Roeg'Walkabout(1971)'은 백인의 시각으로 호주 자연의 원시성을 이상화한다. 영화 'Wake in Fright'에서 자연은 경외와 찬미의 대상이 아니다. 황량하고 거친 오지 내륙의 풍광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내면을 변화시킨다. '우리'라는 테두리 바깥에 있는 외지인은 차별과 감시의 대상이 된다. 광대한 자연 속에서 통제되지 않은 인간 내면의 본성은 일탈 행위에 무감각해진다. 존 그랜트는 처음엔 야바의 모든 것에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술집을 꽉 채운 남자들의 폭음, 도박장의 미친듯한 열기, 광부 조와 딕의 역겨운 언행, 의사임에도 술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진 닥의 삶. 그런데 문학과 역사를 전공한 존의 지성은 그곳에서 순식간에 야만적 폭력으로 대체된다. 존은 그렇게 '야바'의 사람으로 변해간다.

  호주 내륙의 이 오지 도시는 어떤 의미에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술과 도박, 사냥과 같은 오락이 극대화되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호주 Outback 사람들의 초상은 결코 과장되거나 과거의 것이 아니다. Pete Gleeson의 다큐 'Hotel Coolgardie(2016)'는 내륙 오지 마을의 주점을 배경으로 그곳 주민들의 상스러운 민낯을 드러낸다. 폭음, 무자비한 살육, 성적 일탈(존과 닥의 동성애를 암시하는 장면이 있다)... 깔끔한 양복 차림의 존 그랜트는 거지 노숙자의 신세가 되어 거리를 헤맨다. 어떻게든 시드니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히치하이킹으로 트럭에 몸을 맡긴다. '시드니'라는 글자가 박힌 트레일러의 기사는 존에게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린다. 그런데 그곳은 시드니가 아니다. 마치 반복되는 악몽처럼 존은 다시, 야바의 역 앞에 서있다. 이 영화의 제목 'Wake in Fright'는 원작 소설을 여는 구절에서 따왔다.

  "May you dream of the Devil and wake in fright.
  (당신이 악몽을 꾸고, 공포 속에서 깨어나길!)"


  오래된 저주의 문구. 원작자 케네스 쿡에게 Broken Hill에서의 삶은 그 저주 같았을까? 호주인들이 쿡의 소설과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호주에서 이 영화는 빠르게 잊혀졌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2004년, 미국 피츠버그에서 폐기 직전의 원본 네거티브가 발견되면서 영화는 기사회생했다. 놀라운 귀환이었다.

  영화의 초반부, 존은 야바행 기차 객실에서 신나게 맥주를 마시며 노래를 부르는 백인 일행을 지나친다. 존이 앉은 자리 건너편에는 조용하게 창밖을 응시하는 원주민이 앉아있다. 그 기차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호주라는 국가를 나타낸다. 기차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는 백인들, 한쪽 구석으로 밀려난 원주민, 그리고 그들 바깥에는 결코 정복되지 않은 자연이 자리한다. 주인공 존 그랜트의 여정은 호주인의 어두운 내적 심연과 맞닿아 있다. 원작자 케네스 쿡은 문명화된 도시의 외관 속에 교양인으로 살아간다고 믿는 호주인들에게 조소를 보낸다. 영화는 호주인의 정체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호주 자연, 그 원시성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담아내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호주 뉴 웨이브 영화들 리뷰

1부 호주 뉴 웨이브의 신호탄, Walkabout(197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walkabout1971.html

2부 호주인의 정체성과 자연: Sunday Too Far Away(1975), The Last Wave(197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sunday-too-far-away1975-last-wave1977.html

3부 발굴된 호주 여성의 서사, My Brilliant Career(197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australian-new-wave-3.html

4부 호명된 국민, 재조명된 호주인 서사:
Breaker Morant(1980), Bruce Beresford
Gallipoli(1981), Peter Weir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breaker-morant1980-gallipoli1981.html


***다큐 'Hotel Coolgardie(201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5/hotel-coolgardie201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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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연합군 총사령부(GHQ)는 일본의 공창제(公娼制)를 폐지시켰다. 종래의 사창가는 특수음식점 거리로 부르며 경찰의 관할 구역으로 지정되었다. 그곳의 명칭이 이른바 적선지대(赤線地帯)이다. 청선지대(青線地帯)는 외형은 일반 주점과 음식점의 간판을 내걸었으나 암암리에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곳을 뜻했다. 적선과 청선으로 나뉘어 관리되던 일본의 성매매 산업은 1956년에 의회에서 통과된 성매매 방지법으로 전환기를 맞는다. 카와시마 유조 감독의 영화 '스자키 파라다이스(Suzaki Paradise: Red Light, 1956)'는 바로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이듬해에 제작된 그의 영화 '막말태양전(Sun in the Last Days of the Shogunate, 1957)'에도 그러한 시대 배경이 삽화적으로 제시된다.

  전후 일본 영화사에서 나루세 미키오가 성취한 '여성의 삶'에 대한 정밀한 초상은 독보적이다. 그에 비한다면 카와시마 유조(川島雄三) 감독이 그려낸 전후 일본 사회와 여성에 대한 영화적 탐구는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그의 영화 '풍선(風船, The Balloon, 1956)'은 이 감독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전쟁 미망인으로 술집 여종업원이 된 여성은 부자 애인에게 버림받자 죽음을 택한다. 남자는 여자의 죽음에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그와 그의 어머니는 윤리적 과오조차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풍선'에서 카와시마 유조는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풍경과 하층민의 삶을 분명하게 대비시킨다. 이 영화는 전후의 경제적 풍요가 가져다준 탐욕과 내면의 타락을 직시하게 만든다.

  '풍선'과 같은 해에 만들어진 '스자키 파라다이스'에서 카와시마 유조의 시선은 사회의 맨 밑바닥으로 향한다. 영화의 주인공 츠타에와 요시지는 당장 수중에 밥 사먹을 돈도 없는 가난한 연인들이다. 남자와 여자의 행색에서는 궁핍함이 줄줄 흘러내린다. 그들은 딱히 갈 곳도 없다. 여자가 무작정 버스에 올라타자 남자가 뒤를 따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인들이 내린 곳은 적선 지대, '스자키 파라다이스'라는 출입문의 큰 글씨가 보이는 곳이다. 조만간 시행될 매춘 방지법 때문에 이 거리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 츠타에와 요시지는 적선 지대 외곽에 자리한 작은 주점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오토쿠라는 중년의 여성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츠타에는 사람 좋은 오토쿠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설명하고 일자리를 부탁한다. 그렇게 두 사람의 '파라다이스'에서의 삶이 시작된다.

  츠타에가 오토쿠의 주점에서 보여주는 행동은 이 여자의 과거를 짐작케 한다. 손님들을 유혹하는 츠타에 때문에 요시지는 속을 끓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그는 소바 가게에서 배달원으로 일을 시작한다. 돈푼깨나 있는 라디오 상점 주인 오치아이의 등장은 가난한 연인들을 불화로 이끈다. 오치아이의 돈에 끌린 츠타에는 스자키 파라다이스 거리에서 사라져 버린다. 요시지는 상심한다. 아마도 그에게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닐듯 하다. 소바 가게의 착한 여종업원 타마코는 그런 요시지를 따뜻하게 대한다.

  '스자키 파라다이스'에서 카와시마 유조는 하층민의 삶을 연민과 애정을 가지고 그려낸다. 빗물이 떨어지는 오토쿠의 집 안방, 당장 내다버려도 아깝지 않을 요시지의 낡은 구두, 여름에도 낡은 겨울 기모노를 입고 있는 츠타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삶. 비록 삶은 구차스럽고 너절해도, 마음 속 정념의 불길까지 꺼진 것은 아니다. 돈을 따라간 츠타에는 요시지를 잊지 못하며, 요시지는 타마코에게 좀처럼 마음을 주지 않는다. 오토쿠는 젊은 여자와 바람나서 집을 나간 남편을 4년째 일편단심 기다린다.

  이 영화에서 카와시마 유조가 보여주는 일련의 '다리' 쇼트들은 흥미롭다. 영화의 초반부, 오타쿠의 가게 다락방에서 함께 누워있는 츠타에와 요시지의 다리가 덩굴처럼 얽힌다. 요시지가 츠타에를 찾으러 한여름 거리를 헤매는 장면에서는 힘없이 질질 끌리는 요시지의 다리가 보인다. 마침내 그들이 재회해서 새로운 곳으로 떠나려고 할 때, 츠타에의 게타와 요시지의 낡은 구두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맴돈다. 그런가 하면, 오토쿠는 가게 밖을 서성이는 남자의 다리를 보고 남편이 돌아왔음을 알아챈다. 카와시마 유조는 신체의 일부분인 '다리'에 삶과 정념의 의미를 부여한다.

  영화의 마지막, 오토쿠의 아들은 아빠가 사준 장난감 칼을 잃어버렸다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 칼은 스자키 파라다이스를 가로지르는 강물에 유유히 떠내려간다. 파라다이스 입구의 다리에 서있던 타마코는 그 칼이 떠가는 것을 바라본다. 오토쿠의 짧게 끝난 행복의 시간, 타마코의 요시지에 대한 덧없는 연모의 마음도 그렇게 강물에 흘러간다. 영화 '스자키 파라다이스'는 남녀의 질긴 정념(情念)의 타래를 스산한 적선 지대의 풍광 속에 펼쳐놓는다.


*사진 출처: pen-online.jp  요시지 역의 미하시 타츠야(
三橋達也)와 츠타에 역의 아라타마 미치요(新珠三千代). 두 사람은 카와시마 유조의 영화 '풍선(1956)'에서도 함께 출연해서 좋은 호흡을 보여준다.



**카와시마 유조 감독의 영화들 리뷰

막말태양전(幕末太陽傳, Sun in the Last Days of the Shogunate, 195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sun-in-last-days-of-shogunate-1957.html

여자는 두 번 태어난다(女は二度生まれる, Women Are Born Twice)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5/women-are-born-twice-196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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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환갑을 앞둔 아키 여사는 5남매를 두었다. 모처럼 가족이 모인 자리,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집 이야기가 나온다. 시세가 얼마인지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막내딸 하루코가 계산기를 찾으면서 뭔가 분위기가 달라진다. 하루코는 대략의 감정가를 바탕으로 가족 구성원들 각자가 받게될 돈을 계산한다. 하루코의 셈법을 듣다 보면, 당시 일본 민법에서 여성 배우자의 상속분은 3/1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루세 미키오의 1960년작 '딸, 아내, 어머니(Daughters, Wives and a Mother)'를 관통하는 주제는 역시 '돈'과 긴밀히 얽혀 있다. 어머니 앞에서 태연히 유산 상속분을 이야기하는 자식들. 어머니 아키 여사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 자식들을 바라볼 뿐이다.

  영화 '딸, 아내, 어머니'의 가족 구성원들은 돈과 관련된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장남은 아내의 삼촌이 하는 공장에 투자하면서 형제들 모르게 집을 저당잡혔다. 둘째 딸 카오루는 홀시어머니의 시집살이에서 벗어나 분가를 하고 싶다. 그런데 돈이 없다. 큰며느리 카즈코(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툭하면 사업 자금 빌려달라고 찾아오는 삼촌 때문에 괴롭다. 이 가족에게 큰딸 사나에(하라 세츠코 분)가 가진 백만 엔의 돈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갑작스런 사고로 남편을 잃은 사나에는 남편의 보험금을 받는다. 큰오빠는 투자 좀 하겠다고, 여동생은 아파트 얻을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러닝 타임 2시간 3분, 컬러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로 제작된 이 영화는 나루세 미키오의 완성판 가족극 같다. 영화 속 아키 여사의 자녀들은 큰딸 사나에를 제외하고 매우 계산적이고 냉정하다. 유이치로는 처삼촌의 부도 때문에 집이 은행에 넘어가게 될 거라고 동생들에게 알린다. 그러자 동생들은 자신들의 상속분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유이치로가 폭탄 선언을 한다. "그럼 난 어머니 모실 수 없다. 의무도 똑같이 나누어야 맞지 않냐?" 나루세 미키오가 그려낸 이 가족극은 쓸쓸함과 비감함이 느껴진다. 전후의 세대는 경제적 풍요 속에 물질적 가치에 경도되었다. 전통과 개인주의적 가치관은 여지없이 충돌한다. '딸, 아내, 어머니'에 나오는 가족의 모습에는 급변하는 일본 사회의 세태가 반영되어 있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가족 영화가 아니라 노인 문제에 대한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카오루의 잔소리쟁이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분가 선언에 분노하며 양로원으로 가버린다. 영화 속 양로원의 모습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 고령층 인구의 복지 문제가 서서히 대두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카오루의 시어머니는 아키 여사에게 '이런 곳에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말한다. 자린고비 시어머니는 그곳의 요금이 꽤 높다는 점도 언급한다. 자식의 봉양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노인의 선택지는 매우 한정적이며, 그것은 나중에 아키 여사의 괴로운 고민거리가 된다. 

  나루세 미키오는 세대 갈등과 가족주의의 균열을 그려내면서도, '여성의 삶'에 대한 면밀한 탐구를 이어간다. 시대는 변하고 있지만 여전히 여성의 삶은 남성에게 매여 있다. 과부가 된 사나에는 가족과 주변으로부터 집요한 재혼 요구를 받는다. 여성의 사회적 기능은 오로지 가족 내부의 '딸, 아내, 어머니'의 자리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사나에는 자신에게 구애하는 젊고 매력적인 농장주 대신에 부유한 중년의 남성과 재혼한다. 엄마를 함께 모시고 살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딸은 가족의 어려움을 짊어진다. 한편 큰며느리 카즈코는 삼촌의 파산 때문에 남편이 겪고 있는 곤란에 미안함을 느낀다. 계속 시어머니를 모시겠다는 카즈코의 결정은 아내로서 남편과 그 가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영화 속 여성들은 가족주의가 부여한 규범과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개인주의로 무장한 새로운 세대인 막내딸 하루코는 변화의 기점에 서있는 여성인지도 모른다. 하루코는 엄마의 거취에 대해 그다지 고민하지 않으며, 큰언니의 재혼으로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데에 안도한다. 희생, 배려, 의무... 이러한 가치들로부터 하루코와 같은 세대의 여성은 점차로 중립적이 되어갈 터였다.

  영화의 마지막, 아키 여사는 유모차를 끌고 나온 동네 영감과 마주친다. 손주인줄 알았던 아이는 영감이 용돈벌이를 위해 돌보는 이웃집 아이였다. 그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아키 여사는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린다. 아이를 부드럽게 어르는 그 모습은 어머니로 살아온 세월의 무게를 짐작하게 한다. 양로원을 알아 보던 이 어머니는 아직 누구와, 어디에서 살 것인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렇게 영화는 닫힌다. 나루세 미키오는 '딸, 아내, 어머니'를 통해 시대의 변화와 여성의 삶을 정교하게 포개어 놓는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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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조지 로메로(George Romero) 감독의 잊혀진 영화가 발견되었다. 'The Amusement Park(1975)'는 그때까지 영화학자들 사이에서 그 존재만 알려졌을 뿐, 실제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펜실베이니아의 루터교 봉사 협회(Lutheran Service Society)는 로메로에게 의뢰한 작품을 받아보고 너무 놀라서 그냥 협회 캐비닛에 넣어버렸다. 협회 관계자들 눈에 그건 노인 학대 방지 캠페인 영화가 아니라 견디기 힘든 공포 영화였다. 16mm 필름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복원 과정을 거쳐서 2021년에 다시 관객들과 만날 수 있었다.

  공포 영화의 대부로 불리는 로메로와 노인 학대 방지 캠페인이라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 이 기묘한 조합은 뜻밖의 결과물로 나왔다. 제목 'The Amusement Park'의 뜻대로 영화는 유원지를 배경으로 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배우 링컨 마젤이 자신을 소개한다. 그는 노인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짤막한 설명을 곁들인다. 화면이 바뀌면 온통 하얀색인 방에 흰색 양복을 입은 두 명의 노인(링컨 마젤이 연기함)이 보인다. 한 노인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얼굴에는 상처가 나있고 몰골이 말이 아니다. 또 다른 노인은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다친 노인을 염려스럽게 쳐다 본다. 무언가 도와줄 것이 없냐고 묻자 지친 노인은 손을 내저으며 말을 잇지 못한다. 멀쩡한 노인이 그럼 자신은 밖에 나가보겠다고 하자 그제서야 그 노인은 외친다. "나가지 마! 거긴 아무 것도 없어. 아무 것도 없다구!"

  문이 열리고, 바로 놀이공원이 펼쳐진다. 그곳에서 노인이 앞으로 겪게 될 모험이 영화를 채운다. 사실 모험이라기 보다는 차별과 멸시, 강탈과 몰락의 경험이다. 노인들은 유원지 입장 티켓을 사기 위해 자신들의 소중한 물건을 내다 판다. 매입업자는 말도 안되는 헐값에 물건을 사들인다. 이 놀이공원에서 노인은 결코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다. 노인들은 각가지 금지사항이 적힌 놀이기구 앞에서 입장을 거부당한다. 범퍼카를 탄 노부부의 에피소드에서는 현실의 교통사고 장면을 은유적으로 재현한다. 그들의 범퍼카는 젊은 남자의 범퍼카와 부딪힌다. 경찰이 출동하고, 충돌 장면을 본 노인은 젊은 남자의 과실을 증언하려고 한다. 하지만 노인이 안경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증언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노년의 신체적 노화는 판단 능력의 손상이라는 편견과 직결된다.

  아이들에게 가까이 가서 말을 걸었다는 이유로 노인은 소아성애자로 몰리기도 한다. 노인들이 유일하게 입장을 환영받는 곳에 가보니 그곳은 재활 치료 센터이다. 사기꾼들과 소매치기는 노인들의 돈을 노린다. 노인은 소매치기를 당하고, 폭주족들에게는 얻어맞으며 유원지에서의 공포 체험을 이어간다. 물론 그곳에서도 부자 노인은 환영받는다. 음식점의 종업원들은 부자 노인의 시중에만 응하며 우리의 흰양복 노인은 무시한다. 노인은 마지막으로 교회에서 위로를 찾고자 한다. 하지만 노인이 도착하자 교회는 입장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모든 수모를 겪으며 깔끔했던 노인의 행색은 노숙자처럼 변해간다.

  기괴한 대머리 고무 마스크를 쓰고 낫을 든 남자의 형상은 분명히 죽음의 사신(Grim Reaper)을 의미한다. 다소 우습고 기괴한 모습의 그 남자는 노인의 주변에 출몰한다. 조지 로메로는 현실의 놀이공원을 배경으로 노년에 마주하게 되는 여러 고통을 묘사한다. 노화, 경제적 궁핍, 사회적 편견, 질병, 인간 관계의 단절...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는 이 영화의 은유는 밋밋하며 참신함과도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평생을 공포 영화에 천착한 이 감독이 동시대의 사회 문제에도 날카로운 감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영화는 저예산 제작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다. 주연 배우인 링컨 마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원 봉사로 참가한 일반인들이 연기했다. 무엇보다 품질의 심각한 손상은 조악한 사운드 녹음에 있다. 러닝타임 54분 동안 지지직거리는 소음이 계속 깔린다. 그런데 그것이 역설적으로 노인이 느끼는 내면의 슬픔과 공포를 직관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세월의 더께를 벗겨내고 만나게 된 영화 'The Amusement Park'는 하나도 무섭지 않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의 진정한 공포는 영화가 환기시키는 진실에 있다. 우리 모두는 늙어가고 있으며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노인에 대한 혐오와 학대를 멈추라'. 루터교 봉사 협회의 제작 의도는 로메로에 의해 완벽하게 구현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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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탐욕이 음악 축제와 만났을 때:

Woodstock 99: Peace, Love, and Rage(2021)


  프로모터인 Michael Lang과 John Scher는 1994년, Woodstock의 영광을 재현하는 뮤직 페스티벌을 뉴욕에서 열었다. 축제는 평화롭게 치뤄졌으나, 갑작스럽게 내린 비 때문에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5년 후, 두 사람은 새롭게 Woodstock '99를 기획한다. MTV에서는 축제 전기간의 공연을 생중계하기로 했다. 뉴욕 Rome에서 열린 축제에 무려 40만 명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인파였다. DMX, Limp Bizkit, Korn, Red Hot Chili Peppers, Rage Against the Machine, Metallica 같은 뮤지션들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 축제는 성황리에 끝났을까? 다큐 'Woodstock 99: Peace, Love, and Rage(2021)'의 감독 Garret Price는 시작부터 못을 박는다. "그 축제는 공포 영화 같았습니다."

  1969년의 Woodstock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그 시대의 반문화(counter culture)를 대표하는 평화와 사랑의 축제이다. 다큐 'Woodstock(1970)'으로 우드스탁은 일종의 신화적 상징성을 획득했다. 그럼에도 그 축제의 이면에는 폭력과 마약, 성범죄와 같은 문제가 엄연히 존재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Woodstock '99는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기는커녕 오명만을 뒤집어 쓴다. 지독한 상업주의와 결합한 이 음악 축제는 폭력과 방화, 총체적인 혼란으로 점철되었다. 다큐는 그러한 실패의 원인을 축제 관계자와 뮤지션들, 참가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나씩 되짚어 나간다.

  축제가 열린 곳은 폐쇄된 공군 기지로 유해 물질에 오염된 지역(superfund)이었다. 이미 문제가 있는 장소에서 열리는 축제. 거기에다 날은 미치도록 더웠다. 38도가 넘는 더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물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화장실과 샤워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 사람들은 물탱크의 물을 마구 끌어다 썼고, 곧 기지 전체는 배설물과 진흙이 뒤섞인 거대한 진창이 되었다. 매점의 음식은 터무니없이 비쌌다. 특히 생수에 대한 폭리가 심했다.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가 해결되지 않는 상태에서 더위와 성적 흥분이 참가자들의 이성을 점차 마비시켜 갔다.

  다큐는 축제 참가자 대다수가 20대 초반의 백인 남자 대학생들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당시 언론은 이른바 X 세대(Generation X) 청년들을 '분노의 세대'로 불렀다. 거기에는 1999년의 미국 사회 분위기도 한몫을 한다. 그 해에는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 클린턴의 르윈스키 스캔들로 미국이 시끄러웠다. 기성 세대에 대한 지독한 불신, 지나치게 개방적인 성의식도 X 세대가 이전 세대와 다른 점이었다. '가슴을 보여달라(show us your tits)'고 외치는 남성들의 구호가 현장을 지배했다. 그러한 분위기는 여성 참가자들에 대한 성범죄로 이어졌다.

  3일 동안의 공연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한 이 다큐에는 당시 참가자인 David DeRosia의 일기가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온다. 데이비드는 공연에 대한 감상과 현장의 분위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런데 그는 축제 마지막 날의 일기를 쓸 수 없었다. '탈수증'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축제 현장에서는 데이비드를 포함해 3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곳곳에서 기물 파손과 난동 행위가 일어났다. 그 정점은 방화였다. 참가자들은 닥치는대로 물건을 불태우고 약탈했다. 결국 경찰 병력과 소방차가 출동한 뒤에야 사태는 진정되었다.

  Woodstock '99는 결국 최악의 뮤직 페스티벌로 남았다. 축제를 기획한 Michael Lang과 John Scher는 인터뷰 내내 변명으로 일관한다. 뮤지션들이 관객의 폭력 행위를 부추겼고, 중계를 포기하고 철수한 MTV가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켰다고 성토한다. 러닝타임 1시간 50분 동안 미쳐 돌아가는 음악 축제의 실상을 보는 것은 감독의 말대로 공포 영화나 다름없다.

  그러한 광기와 폭력이 어디에서부터 흘러나왔는지, 그 근원에 대한 의문은 다큐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머릿속을 맴돈다. 1999년의 미국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X 세대 백인 대학생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자본과 긴밀하게 결합한 대중 문화 사업의 본질적 속성 때문일 것이다. 주최 측은 제대로 된 보안 인력도 배치하지 않았고, 그저 참가자들의 돈만을 쥐어짜내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음악을 사랑한 평범한 대학생 데이비드의 죽음은 어떤 면에서 착취적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만들어낸 비극인 셈이었다. 


*사진 출처: hbo.com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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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6-16 11:04   좋아요 0 | URL
축제를 맨발로 즐겨본 적 있던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배설물로 엉망이 된 바닥, 흥분한 군중, 성범죄.

말씀 그대로 공포스러워지네요

푸른별 2022-06-16 11:13   좋아요 0 | URL
그냥 다큐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현장의 광기가 느껴지더군요. 결국 안좋은 의미로 ‘전설의 음악 축제‘가 되어버렸지요. 이 다큐는 documentarymania.com에서 무료로 볼 수 있어요. 팝음악 좋아하는 이들은 뮤지션들 공연을 보는 나름의 의미는 있겠네요. 그런데 뮤지션들 인터뷰 보니 그들도 무대 위에서 관중들 보면서 무서웠다고 회고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