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환갑을 앞둔 아키 여사는 5남매를 두었다. 모처럼 가족이 모인 자리,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집 이야기가 나온다. 시세가 얼마인지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막내딸 하루코가 계산기를 찾으면서 뭔가 분위기가 달라진다. 하루코는 대략의 감정가를 바탕으로 가족 구성원들 각자가 받게될 돈을 계산한다. 하루코의 셈법을 듣다 보면, 당시 일본 민법에서 여성 배우자의 상속분은 3/1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루세 미키오의 1960년작 '딸, 아내, 어머니(Daughters, Wives and a Mother)'를 관통하는 주제는 역시 '돈'과 긴밀히 얽혀 있다. 어머니 앞에서 태연히 유산 상속분을 이야기하는 자식들. 어머니 아키 여사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 자식들을 바라볼 뿐이다.

  영화 '딸, 아내, 어머니'의 가족 구성원들은 돈과 관련된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장남은 아내의 삼촌이 하는 공장에 투자하면서 형제들 모르게 집을 저당잡혔다. 둘째 딸 카오루는 홀시어머니의 시집살이에서 벗어나 분가를 하고 싶다. 그런데 돈이 없다. 큰며느리 카즈코(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툭하면 사업 자금 빌려달라고 찾아오는 삼촌 때문에 괴롭다. 이 가족에게 큰딸 사나에(하라 세츠코 분)가 가진 백만 엔의 돈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갑작스런 사고로 남편을 잃은 사나에는 남편의 보험금을 받는다. 큰오빠는 투자 좀 하겠다고, 여동생은 아파트 얻을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러닝 타임 2시간 3분, 컬러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로 제작된 이 영화는 나루세 미키오의 완성판 가족극 같다. 영화 속 아키 여사의 자녀들은 큰딸 사나에를 제외하고 매우 계산적이고 냉정하다. 유이치로는 처삼촌의 부도 때문에 집이 은행에 넘어가게 될 거라고 동생들에게 알린다. 그러자 동생들은 자신들의 상속분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유이치로가 폭탄 선언을 한다. "그럼 난 어머니 모실 수 없다. 의무도 똑같이 나누어야 맞지 않냐?" 나루세 미키오가 그려낸 이 가족극은 쓸쓸함과 비감함이 느껴진다. 전후의 세대는 경제적 풍요 속에 물질적 가치에 경도되었다. 전통과 개인주의적 가치관은 여지없이 충돌한다. '딸, 아내, 어머니'에 나오는 가족의 모습에는 급변하는 일본 사회의 세태가 반영되어 있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가족 영화가 아니라 노인 문제에 대한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카오루의 잔소리쟁이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분가 선언에 분노하며 양로원으로 가버린다. 영화 속 양로원의 모습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 고령층 인구의 복지 문제가 서서히 대두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카오루의 시어머니는 아키 여사에게 '이런 곳에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말한다. 자린고비 시어머니는 그곳의 요금이 꽤 높다는 점도 언급한다. 자식의 봉양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노인의 선택지는 매우 한정적이며, 그것은 나중에 아키 여사의 괴로운 고민거리가 된다. 

  나루세 미키오는 세대 갈등과 가족주의의 균열을 그려내면서도, '여성의 삶'에 대한 면밀한 탐구를 이어간다. 시대는 변하고 있지만 여전히 여성의 삶은 남성에게 매여 있다. 과부가 된 사나에는 가족과 주변으로부터 집요한 재혼 요구를 받는다. 여성의 사회적 기능은 오로지 가족 내부의 '딸, 아내, 어머니'의 자리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사나에는 자신에게 구애하는 젊고 매력적인 농장주 대신에 부유한 중년의 남성과 재혼한다. 엄마를 함께 모시고 살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딸은 가족의 어려움을 짊어진다. 한편 큰며느리 카즈코는 삼촌의 파산 때문에 남편이 겪고 있는 곤란에 미안함을 느낀다. 계속 시어머니를 모시겠다는 카즈코의 결정은 아내로서 남편과 그 가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영화 속 여성들은 가족주의가 부여한 규범과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개인주의로 무장한 새로운 세대인 막내딸 하루코는 변화의 기점에 서있는 여성인지도 모른다. 하루코는 엄마의 거취에 대해 그다지 고민하지 않으며, 큰언니의 재혼으로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데에 안도한다. 희생, 배려, 의무... 이러한 가치들로부터 하루코와 같은 세대의 여성은 점차로 중립적이 되어갈 터였다.

  영화의 마지막, 아키 여사는 유모차를 끌고 나온 동네 영감과 마주친다. 손주인줄 알았던 아이는 영감이 용돈벌이를 위해 돌보는 이웃집 아이였다. 그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아키 여사는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린다. 아이를 부드럽게 어르는 그 모습은 어머니로 살아온 세월의 무게를 짐작하게 한다. 양로원을 알아 보던 이 어머니는 아직 누구와, 어디에서 살 것인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렇게 영화는 닫힌다. 나루세 미키오는 '딸, 아내, 어머니'를 통해 시대의 변화와 여성의 삶을 정교하게 포개어 놓는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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