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연합군 총사령부(GHQ)는 일본의 공창제(公娼制)를 폐지시켰다. 종래의 사창가는 특수음식점 거리로 부르며 경찰의 관할 구역으로 지정되었다. 그곳의 명칭이 이른바 적선지대(赤線地帯)이다. 청선지대(青線地帯)는 외형은 일반 주점과 음식점의 간판을 내걸었으나 암암리에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곳을 뜻했다. 적선과 청선으로 나뉘어 관리되던 일본의 성매매 산업은 1956년에 의회에서 통과된 성매매 방지법으로 전환기를 맞는다. 카와시마 유조 감독의 영화 '스자키 파라다이스(Suzaki Paradise: Red Light, 1956)'는 바로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이듬해에 제작된 그의 영화 '막말태양전(Sun in the Last Days of the Shogunate, 1957)'에도 그러한 시대 배경이 삽화적으로 제시된다.

  전후 일본 영화사에서 나루세 미키오가 성취한 '여성의 삶'에 대한 정밀한 초상은 독보적이다. 그에 비한다면 카와시마 유조(川島雄三) 감독이 그려낸 전후 일본 사회와 여성에 대한 영화적 탐구는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그의 영화 '풍선(風船, The Balloon, 1956)'은 이 감독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전쟁 미망인으로 술집 여종업원이 된 여성은 부자 애인에게 버림받자 죽음을 택한다. 남자는 여자의 죽음에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그와 그의 어머니는 윤리적 과오조차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풍선'에서 카와시마 유조는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풍경과 하층민의 삶을 분명하게 대비시킨다. 이 영화는 전후의 경제적 풍요가 가져다준 탐욕과 내면의 타락을 직시하게 만든다.

  '풍선'과 같은 해에 만들어진 '스자키 파라다이스'에서 카와시마 유조의 시선은 사회의 맨 밑바닥으로 향한다. 영화의 주인공 츠타에와 요시지는 당장 수중에 밥 사먹을 돈도 없는 가난한 연인들이다. 남자와 여자의 행색에서는 궁핍함이 줄줄 흘러내린다. 그들은 딱히 갈 곳도 없다. 여자가 무작정 버스에 올라타자 남자가 뒤를 따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인들이 내린 곳은 적선 지대, '스자키 파라다이스'라는 출입문의 큰 글씨가 보이는 곳이다. 조만간 시행될 매춘 방지법 때문에 이 거리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 츠타에와 요시지는 적선 지대 외곽에 자리한 작은 주점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오토쿠라는 중년의 여성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츠타에는 사람 좋은 오토쿠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설명하고 일자리를 부탁한다. 그렇게 두 사람의 '파라다이스'에서의 삶이 시작된다.

  츠타에가 오토쿠의 주점에서 보여주는 행동은 이 여자의 과거를 짐작케 한다. 손님들을 유혹하는 츠타에 때문에 요시지는 속을 끓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그는 소바 가게에서 배달원으로 일을 시작한다. 돈푼깨나 있는 라디오 상점 주인 오치아이의 등장은 가난한 연인들을 불화로 이끈다. 오치아이의 돈에 끌린 츠타에는 스자키 파라다이스 거리에서 사라져 버린다. 요시지는 상심한다. 아마도 그에게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닐듯 하다. 소바 가게의 착한 여종업원 타마코는 그런 요시지를 따뜻하게 대한다.

  '스자키 파라다이스'에서 카와시마 유조는 하층민의 삶을 연민과 애정을 가지고 그려낸다. 빗물이 떨어지는 오토쿠의 집 안방, 당장 내다버려도 아깝지 않을 요시지의 낡은 구두, 여름에도 낡은 겨울 기모노를 입고 있는 츠타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삶. 비록 삶은 구차스럽고 너절해도, 마음 속 정념의 불길까지 꺼진 것은 아니다. 돈을 따라간 츠타에는 요시지를 잊지 못하며, 요시지는 타마코에게 좀처럼 마음을 주지 않는다. 오토쿠는 젊은 여자와 바람나서 집을 나간 남편을 4년째 일편단심 기다린다.

  이 영화에서 카와시마 유조가 보여주는 일련의 '다리' 쇼트들은 흥미롭다. 영화의 초반부, 오타쿠의 가게 다락방에서 함께 누워있는 츠타에와 요시지의 다리가 덩굴처럼 얽힌다. 요시지가 츠타에를 찾으러 한여름 거리를 헤매는 장면에서는 힘없이 질질 끌리는 요시지의 다리가 보인다. 마침내 그들이 재회해서 새로운 곳으로 떠나려고 할 때, 츠타에의 게타와 요시지의 낡은 구두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맴돈다. 그런가 하면, 오토쿠는 가게 밖을 서성이는 남자의 다리를 보고 남편이 돌아왔음을 알아챈다. 카와시마 유조는 신체의 일부분인 '다리'에 삶과 정념의 의미를 부여한다.

  영화의 마지막, 오토쿠의 아들은 아빠가 사준 장난감 칼을 잃어버렸다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 칼은 스자키 파라다이스를 가로지르는 강물에 유유히 떠내려간다. 파라다이스 입구의 다리에 서있던 타마코는 그 칼이 떠가는 것을 바라본다. 오토쿠의 짧게 끝난 행복의 시간, 타마코의 요시지에 대한 덧없는 연모의 마음도 그렇게 강물에 흘러간다. 영화 '스자키 파라다이스'는 남녀의 질긴 정념(情念)의 타래를 스산한 적선 지대의 풍광 속에 펼쳐놓는다.


*사진 출처: pen-online.jp  요시지 역의 미하시 타츠야(
三橋達也)와 츠타에 역의 아라타마 미치요(新珠三千代). 두 사람은 카와시마 유조의 영화 '풍선(1956)'에서도 함께 출연해서 좋은 호흡을 보여준다.



**카와시마 유조 감독의 영화들 리뷰

막말태양전(幕末太陽傳, Sun in the Last Days of the Shogunate, 195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6/sun-in-last-days-of-shogunate-1957.html

여자는 두 번 태어난다(女は二度生まれる, Women Are Born Twice)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5/women-are-born-twice-196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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