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발


족저근막염으로 고생한 지 벌써 1년이 넘었다
오른쪽 발만 아프던 것이 얼마 전부터는 왼발까지
아프다 걸을 때마다 찌르는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의사는 오래갈 거라고, 그렇지만 언젠가는 나을 거라고
말할 뿐이다 그 언젠가가 언제인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며칠 전, 해외 뉴스를 검색하다가 미얀마의 내전 소식을
접했다 2021년에 시작된 미얀마 내전은 2024년인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정부군과 반군이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면서
미얀마 국민들의 삶도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다 참혹한
소식 가운데 하나는 그런 상황에서 무차별적으로 설치된
지뢰에 희생되는 이들이 연간 1000명이 넘는다는 것이다
기사를 읽다가 문득 들었던 생각은 이랬다 내가 미얀마에서
태어났더라면 지뢰에 양쪽 발을 잃거나 죽었을 수도 있다
지금 이렇게 아픈 발 때문에 거의 질질 끌다시피 걷고 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걷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게 어디냐
그런 생각이 드니까, 발이 아픈 것에 대한 괴로움을 조금은
잘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 위안에는
기묘한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왜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성찰할 때에만 자신의 현실 인식을 달리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세상에 누군가의 불행과 고통이 없다면, 평안하고 행복한
나의 일상은 도달하지 못하는 멀고 먼 이상일 뿐인가?
인터넷으로 클릭한 미얀마 내전의 뉴스 웹사이트는 순식간에
닫힌다 그렇지만 내가 아픈 발로 걸을 때마다, 나는 지뢰로
고통받는 미얀마 사람들을 생각하게 될 것 같다 타인의
고통은 그렇게 그물처럼 걸쳐지며 연대(solidarity)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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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길 사람 속


오래전, 사회심리학 강의를 들을 때의 일이다
강의를 맡은 강사 선생은 박사 학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였다 선생은 사람은 좋았으나 강의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수업 시간은 꽤나 어수선했다
수업은 뭔가 선생 혼자 앞에서 말하는 시간 같았다
나는 그런 강사 양반이 딱해서 수업을 더 열심히 들었다
어느 날, 선생이 늘어진 수업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자기 선배가 쓴 박사 논문에
대한 것이었다 논문의 주제는 외모에 대한 사람들의
가치 판단과 관련이 있었다 선생의 선배는 실험을 하나
고안했다 그는 사람들이 단정한 거지와 더러운 거지, 둘 중
어느 쪽에 더 많이 적선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자신이
직접 거지 분장을 하고 지하철에 탔다 그리고 그렇게
지하철에 나갈 때마다 자신이 구걸로 받은 돈을 기록했다
거지 분장을 한 서울대 심리학과 박사과정생이라니,
생각만 해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튼 이야기가 그쯤
되자 졸던 학생들까지 죄다 눈이 반짝거리면서 무슨
학회 토론 분위기가 되었다 지하철의 승객들은 걸인의
어떤 차림에 자신의 주머니 속 돈을 더 꺼내어 주었을까?
그 실험의 결과는 좀 의외였다 선생의 선배는 다소
단정한 차림의 거지로 나갔을 때 더 많은 적선을 받았다
찢어진 옷에 냄새나는 거지에게 사람들은 거리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보다는 다소 말쑥한 옷차림의
걸인에게 적선을 하는 것이 편안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 지하철의 승객들은 품격있는 거지, 그러니까
자존감을 지키며 구걸하는 걸인에게 더 마음이
기울었던 것일까? 가끔 그 실험의 의미가 무엇이었을지
생각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그것이지, 말하게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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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젤리


어렸을 적에 집에 손님이 오시면 사 들고 오는
선물에는 고급 젤리가 있었다 알록달록한 색의
젤리에는 고운 설탕 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물컹하게
씹히는 그 젤리의 맛은 색깔과는 상관없이 모두 다
똑같은 맛이었다 중학교 가사 시간에 가공식품에
대해 배울 때, 젤리의 주성분이 젤라틴이며 그것이
주로 돼지 껍데기에서 추출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은 그런 진짜 젤리를 먹어본 적은
없을 거예요, 비싸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가사 선생은
비뚤게 웃었다 우뭇가사리에서 추출한 한천(寒天)이
그 색색 가지 젤리의 성분이었다 나는 젤라틴으로 만든
진짜 젤리의 맛은 어떤 것일까 가끔 궁금해지곤 했다
얼마 전, 하리보(Haribo) 젤리가 세일하길래 샀다
질기디질긴 곰돌이 모양의 젤리를 입안에 넣고 우물우물
힘을 주어서 씹는다 이상하게도 이 젤리를 먹을 때마다
이것이 진짜 젤리라고 되뇌게 된다 어렸을 적에 먹은
싸구려 한천 젤리에 대한 배신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잘게 조각난 곰돌이를 힘겹게 삼키는 일은 때로
기이한 죄책감을 동반한다 작은 곰 모양을 씹는 것도
그렇고, 이 젤리가 돼지 껍데기에서부터 나왔다는
사실도 그렇다 오늘은 젤리를 먹는데, 돼지가 꺼억꺼억
우는 소리가 얼핏 들리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되는 이유를 알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쉽게 으깨지던, 그 한천으로 만든
형형색색의 젤리가 머릿속에서 천천히 낙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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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래기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는 복도식 아파트가 있다
엊그제, 그곳을 지나가다가 신기한 광경을 보았다
1층에 사는 어느 주민이 빨래 건조대에다 시래기를
잔뜩 널어놓았다 아니, 저걸, 왜, 저기에다가, 저럴까?
아마 베란다는 빨래를 말려야 하니까 시래기가 복도로
밀려난 것일지도 모른다 복도가 공용 공간이라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1층은 바로 흡연자들의 담배 연기가
직접적으로 흘러드는 곳이라는 점에서 시래기를 말리기에
매우 부적합한 곳이다 마침 젊은 남자가 담배를 꺼내어 물고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남자의 팔뚝에는 알아볼 수 없는 한문(漢文)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담배 연기에 한자들이 천천히
분해되며 날아가는 것 같았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마침내 시래기는 거무튀튀한 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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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맛


올해는 감이 풍년이다 한번도 해본 적 없는
곶감을 만들겠다고 베란다에 감을 깎아 걸어
두었다 70개의 감이 옷걸이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곶감은 바람이 불고 서늘한 날씨에
잘 마른다 그런데 올가을은 늦더위가 이어졌고
습도가 높았다 감에는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고
날벌레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재앙이었다
단맛에 환장한 날벌레들이 쉴 새 없이 몰려들어
미친듯이 곶감에 들러붙었다 날벌레를 내쫓으려
선풍기를 틀고, 계핏가루를 뿌려 보아도 별 소용이
없었다 모기장조차 날벌레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베란다는 날벌레의 만찬장이었다 갑작스러운 한파
주의보에 날벌레들이 좀 얼어죽기는 했다 하지만
벌레들의 끈질긴 생존력은 놀라웠다 그들은 다시
풀린 날씨에 생기를 되찾고 마음껏 단맛을 빨아들였다
곶감은 단맛을 수탈당하면서 어설프게 말라갔다
나는 날벌레들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너희들도
먹고 살려고 그러는 거겠지 나는 문득 지나온 인생에서
단맛이란 것이 있었던가를 생각했다 단맛의 기억은
희미하고, 나이가 들수록 단맛이란 만병의 근원이
될 뿐이다 곶감 만들기는 실패했다 베란다의 곶감은
모두 냉동실에서 잠들어 있다 단맛을 잊지 못한
날벌레들은 곶감이 사라진 베란다를 일주일 넘게
떠나지 못했다 나는 벌레들의 마지막 만찬을 준비했다
식초와 설탕, 그리고 주방세제를 풀어서 그릇에 담아
내놓았다 단맛을 잊지 못한 날벌레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눈이 내렸고, 가을이 서둘러 지나가는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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