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청 사람들'은 1990년대를 풍미했던 범죄 수사 재연 프로그램이었다. 1993년에 첫 방송을 탄 이 프로그램은 방영 시간이 수요일 저녁 8시였다. 실제 수사 기록을 바탕으로 사건을 해결한 경찰들과 보조 출연자들이 극을 재연했다. 뭔가 어설픈 구석이 있었음에도, '경찰청 사람들'이 가진 리얼리티는 독보적이었다. 수요일 저녁이면 나도 모르게 TV 앞에 앉아 있곤 했다. 일반인 경찰들이 하는 연기를 보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었다. 그저 국어책 따라 읽는 정도의 연기에서부터 전문 조연 배우 뺨치는 연기력을 보여주는 이들도 있었다. 그 형사 반장은 후자에 속하는 이였다.

  한 번은 그가 팀원들과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왔더랬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불렀는데, 정말이지 조용필도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듣다가 울 것만 같은 감성을 보여주었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로 시작되는 독백 부분이 이 노래의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형사 반장이 읊조리는 그 가사는 듣는 이의 심금을 울렸다. 아마도 노래가 표현하는 '고독한 사냥꾼'인 킬리만자로의 표범에 범죄자를 찾아 헤매는 그 자신의 상황이 감정이입이 되어서 그러했으리라.

  작년인가, 영화 검색을 하다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H의 소식을 아주 철 지난 기사로 읽었다. 같이 수업 듣고 공부했던 이들, 스쳐지나가면서 얼굴을 알았던 이들의 소식을 그렇게 인터넷을 통해 듣게 되는 때가 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이들도 있고, 정말로 반가운 이들의 소식도 있다. 상업 장편 영화를 찍었다는 H의 소식은 무척 반가웠다. 나에게는 영화 제목도 생소하지만, 그래도 늦은 나이에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찍었다니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학교 다닐 때 내가 보았던 H는 인간적으로도 꽤 괜찮은 친구였다. 기사의 사진 속 H의 얼굴이 편안해 보이는 것이 참 좋았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영화를 공부한 건 그것을 하지 않으면 남은 생애 동안 후회할 것 같아서였다. 그 후회는 '한(恨)'과는 좀 다른 정서이다. 사실 '한'의 정서는 나의 세대에 보편적으로 인식되는 정서가 아니다. 좀 더 윗세대의 사람들에게는 그 정서가 익숙할 것이다. 가난 때문에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던가, 시대적 상황 때문에 개인적으로 심한 좌절을 겪었다던가 하는 경우... 정말로 간절히 바라고 원했지만 강력한 외부적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하지 못했던 일에 대한 아쉬움은 '한'으로 남는다. 어떤 면에서 '한'의 감정은 한국 사회에서 사회 체제적 압박감이 개인의 삶에 남긴 흔적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내가 영화를 공부하지 않았다고 해도 좀 후회로 남을 수는 있어도, 결코 한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끔씩 영화가 삼켜버린 무수한 이들의 청춘의 시간들과 인생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영화로 행복한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H도 길고 힘든 시간을 견딘 끝에 겨우 자신의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사실 슬프고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아주 이른 나이에 불운하게 세상을 뜬 C가 그러했다. 미국 영화사를 강의했던 평론가 선생은 오랜 병고로 한창때의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누구보다도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넘쳤던 이였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중략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한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 


  그렇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들으면 뭔가 마음 속 밑바닥에서 묵직하게 올라오는 감정들이 있다. 오늘도 '괜찮은 영화'를 찾아나서는 늙은 영화광의 하루가 천천히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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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헤르만 헤세는 '가을날'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는다고. 이 가을에는 뭔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보다는 해왔던 것을 마무리해야한다는 뜻이야. 여러분에게 이 시의 뜻이 잘 새겨지길 바란다."

  스무 살, 내가 재수생이었던 시절의 일이다. 학원의 담임 선생은 9월인지 10월인지 가을의 어느 날, 아침 조례 시간에 시 한 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저, 그건...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인데요."

  담임 선생은 나름 무안해하면서도 시인의 이름을 정정해준 나를 칭찬했던 것 같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릴케의 시집은 중학생 때부터인가, 내 책장에 꽂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을날'이라는 시가 릴케의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일 이후로, 언제부터인가 나는 가을만 되면 릴케의 시를 떠올리게 되었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그 시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싯귀를 꼽으라면 그 부분일 것이다. 집이 없는 사람이라... 청춘의 날들을 지나 이제는 그 시간들로부터 한참이나 멀어진 지금까지 그 싯귀는 내 머릿속에 선문답처럼 남아있다. 집이 없는 사람, 방랑하는 고독한 예술가에 대한 묘사는 어떤 면에서 시인 자신에 대한 고백처럼 들리기도 한다. 과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온전한 나만의 것, 안락한 처소, 완벽하게 성취된 꿈이란 것이 존재할까? 그 질문에 그렇다, 라고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몇이나 될까? 아마도 그런 이유로 이 시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주는 불안한 울림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휘젓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가지고 있는 릴케의 시집은 혜원 출판사에서 펴낸 '영원한 릴케의 명시'이다. 나는 오랜 세월에 누렇게 갱지처럼 떠버린 책장을 조심스럽게 넘겨본다. 책이 인쇄된 날짜를 보니 1985년 5월 10일이다. 무려 38년이나 된 책, 이 시집의 역자는 송영택(宋永擇)씨이다. 내 나이 세대의 사람들이 헤세의 소설을 읽었다면 대부분 이 분의 번역본으로 읽었을 것이다. 수레바퀴 밑에서, 데미안, 지와 사랑, 유리알 유희, 싯다르타... 웬만한 헤세의 소설책 표지에서 송영택 씨의 이름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릴케의 소설 '말테의 수기'도 송영택 씨의 번역본으로 읽었다. 참으로 오래전의 일이다.

  '나이 50이 되고 보니, 이젠 대충대충 살고 싶어집니다.'

  내가 들르는 커뮤니티 사이트에 누군가 그렇게 글을 써놓았다. 나는 무심한듯 써놓은 그 글에서 문득 릴케의 '가을날'을 떠올렸다. 중년의 나이는 한 사람의 삶을 계절로 본다면 가을날에 해당할 것이다. 나는 새삼 글쓴이의 마음이 되어본다. 대충대충 살고 싶어지는 마음은 어쩌면 더이상 그 무언가에 애착을 두고 싶지 않다는 뜻일 수도 있다. 아등바등하며 힘겹게 살아왔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다 별 거 아니었네,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쉰다. 그렇다면 앞으로 무엇을 꿈꾸고,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할까? 아직 겨울은 오지 않았지만, 스산한 바람이 부는 가을날에 중년의 누군가는 릴케의 시에서처럼 이리저리 헤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을날(Herbsttag)

                            번역: 송영택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 후도 오래 고독하게 살며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길을 헤맬 것입니다.



*사진 출처: 직접 찍은 사진


**번역본의 '-읍니다'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책이 출판된 1985년에는 아직 표준어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이다. 오늘날 '-습니다'로 쓰는 표준어 개정이 이루어진 것은 1988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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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알고 지내는 수녀님이 나를 수녀원의 '성소자(聖召者)의 날' 행사에 초대하셨다. 그 행사는 수녀원의 성소 모임을 위한 후원 바자회였다. 수녀님들은 직접 만든 음식과 물품들을 바자회에 내놓았다. 물론 수도회의 성소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높이기 위한 행사였으므로 특별한 순서도 있었다. 수도회에 입회한 어느 지원자 자매의 아버지가 간증을 하기 위해 연단에 섰다.

  "저의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딸이 수도회에 입회하고 나서, 저는 치유의 은사를 체험했습니다. 오랫동안 앓고 있던 병이 나은 것입니다. 그토록 저를 괴롭히던 안구건조증이 말끔하게 사라졌습니다. 안과의사들은 이 병을 불치병이라고 부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불치병을 치유해주셨습니다."

  청중석의 맨 뒷줄에서 그 간증을 듣고 있던 나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소리내어 웃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곳곳에서 자그맣게 큭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의사'임을 강조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직업 자부심부터 시작해서 지루한 장광설까지 그 사람은 참으로 밉상이었다. 내 옆에 앉아있던 수녀님까지 '아이고, 저분은 좀 너무하시네' 했을 정도였다. 뭐 안구건조증이 나았다고? 그게 불치병이라고?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안구건조증'이란 질병이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눈이 좀 마르는 게 뭐 어떻다는 건가 했었다.

  그랬던 내가 안구건조증을 앓아온지 어느덧 20년이 되어간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눈안에 모래알이 굴러다니는듯한 뻑뻑함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안과에서 처방받은 눈물약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 같았다. 그렇게 한 10년 동안 눈물약을 달고 살았다. 나는 눈물약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이 눈물약은 치료약이 아니며, 내가 이 눈물약에 의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눈물약을 끊어버렸다. 대신에 내가 선택한 방법은 눈 청결제로 눈을 닦는 것이었다. 알레르기성 결막염까지 겹쳐서 내 눈에는 늘 눈곱이 끼고 가려웠다. 눈 청결제로 그걸 닦아내면 뭔가 눈이 시원해지고 맑아졌다. 그런데 이것도 쓰다보니 눈물약처럼 하루에 여러 번 닦아내지 않으면 안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눈물약을 안쓴다고요? 이건 아무리 많이 써도 눈에 아무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중독이 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안과의사는 나를 무식한 환자 보듯 바라보며 약간의 조소를 보냈다. 환자에게 말하는 본새하고는... 권위의식과 재수없음이 겹친 의사를 만나는 일은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결막낭이 뭔지도 몰라서 대학병원에 가보라며 진료의뢰서를 써준 그 안과의사를 나는 더이상 찾아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눈이 붓고 아파서 안과에 갈 일이 생겼다. 염증 때문에 처방받은 안약에는 스테로이드와 항생제가 들어있었다. 안약을 넣으니 염증은 곧 가라앉았다. 신기하게도 안구건조증도 나은 것처럼 느껴졌다. 내 눈은 더이상 뻑뻑하거나 아프지 않았다. 나는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건조증이 심해지면 그 안약을 조금씩 넣었다. 그렇게 해서 항염증 성분의 안약과 눈 청결제, 거기에다 눈에 윤활제 역할을 하는 리포직 점안겔을 함께 쓰게 되었다. 뭔가 그런 조합이 건조증이 악화되는 것을 막아주는듯 했다.

  물론 스테로이드 안약의 장기간 사용이 안압을 높인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한편으로는 어떻게 스테로이드 성분의 안약이 안구건조증에 작용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거기에는 나름 근거가 있었다. 이제 안과에서 안구건조증은 단순한 눈물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염증성 질환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심한 안구건조증에 쓰이던 기존의 면역억제제 성분의 안약은 효과가 나타나려면 1달에서 2달이 걸린다. 스테로이드 성분의 안약을 단기간 쓰면서 눈의 염증을 완화시키고, 거기에 면역억제제 성분의 안약을 쓰면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었다(가천대 길병원 안과 김동현·백혜정 교수팀의 논문, 출처: 의협신문 2022년 4월 http://www.doctorsnews.co.kr).

  그래서 그랬던 것이구나... 뭔가 작은 의문이 풀린 기분이었다. 그래도 스테로이드 성분의 안약을 남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요새는 안구건조증에 IPL을 이용한 레이저 치료도 하고 있다는데, 그 치료의 효과가 사람마다 다 제각각인 모양이다. 나는 눈에다 레이저를 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무서워서 앞으로도 해볼 생각이 전혀 없다.

  가끔 그 지원자 부친의 간증을 떠올려 본다. 그의 안구건조증은 정말로 완전히 나았을까? 나는 그때 비웃었던 나 자신에 대해 살짝 반성하는 마음도 된다. 그렇다. 나는 이제 안구건조증이 '불치병'이라는 것을 잘 안다. 안구건조증에 효과가 있는지 애매한 오메가 3와 루테인을 나는 끊을 수가 없다. 다음번 안과 정기 검진 때에는 새로운 의사 선생님에게 내 오랜 안구건조증이 좀 나아질 수 있는지 물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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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9-08 00:19   좋아요 0 | URL
결막염으로...대학병원이라니! 전혀 이 분야 모르는 제가 들었을 때도, 신뢰가 안 가네요. 안구건조증에서 자유로워지시기를...

푸른별 2023-09-08 00:33   좋아요 1 | URL
얄라알라 님, 그 의사를 내가 나름 이해해보면 이래요. 그 의사 양반은 망막 전문의거든요. 자신은 외안부인 결막에 생긴 질환은 잘 모른다는 거죠. 그래서 대학병원의 외안부 전문의한테 가보라고 말한 거구요. 환자인 내 입장에서는 솔직히 결막의 그 사소한 질환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싶죠. 망막만 열심히 봐와서 모른다, 그럴 수 있다 쳐요. 내가 화가 치밀었던 건 환자를 대하는 태도였어요. 뒤에 환자 밀려서 더 말할 시간 없다고 말하는데 참... 환자를 존중하지 않는 의사 만나는 일은 참 견디기 힘들죠. 그래도 그 이후에 갔던 안과에서 정말로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났어요. 그래서인지 나는 그 의사 양반이 밉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답니다.
 

 

  가끔씩 찾아서 보는 무당의 유튜브 채널이 있다. 이 젊은 여자 무당은 어린 아이 때부터 무업을 시작했다. 이 무당의 친할머니도 무당이었다. 말하자면 그 집안에는 신가물, 즉 집안에 신을 모셔왔던 내력이 흐른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신기가 있다, 신병을 앓았다, 하는 말을 할 때의 그 무당들을 강신무(降神巫)라고 한다. 내가 샤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학부 시절에 들었던 종교학 강의에서부터였다. 무당을 미신이나 무속으로 폄하하는 일반의 인식과는 달리 종교학에서는 '무교(巫敎)'라는 단어를 쓴다. 나의 그 무교에 대한 관심은 어디까지 학문적인 데에 있었다.

  젊은 무당은 스스로를 '**보살'로 불렀다. 보살은 불교에서 말하는 그 보살(菩薩)이 맞다. 한국의 무교는 불교와 많은 부분이 '습합(習合)'되었다. 어찌보면 그 '보살'이란 단어가 무당에게 잘 맞는 것일 수도 있다. 위로는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수행자. 샤먼은 신의 목소리를 들려주며, 고통받는 사람의 마음을 보살핀다. 물론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어떤 이에게 무교의 모든 것들은 용인할 수 없는 이교도, 잡귀에 해당할 것이다.

  내가 그 젊은 보살의 유튜브를 관심있게 찾아보는 이유는 무당이 세상과 사람들을 보는 관점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그 보살은 이런 주제로 유튜브를 업데이트했다. '조심하면 나쁜 일은 피할 수 있나요?' 참으로 흥미있는 주제이다. 사람들이 무당을 찾는 이유들 가운데에는 '다가올 액운을 막는 것'도 있다. 무당에게서 안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 정도에 따라 1. 부적을 쓰거나, 2. 치성을 드리거나, 마지막으로 3. 굿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안좋은 일에도 처방의 급이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그 보살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무당에게서 나쁜 일이 일어날 거라는 말을 듣고, 그 말대로 하면 과연 액운을 피할 수 있는가?

  나에게는 뭔가 무당의 영업비밀을 살짝 알려주는 느낌 같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다. 막을 수 없단다... 내가 그 보살을 좋게 생각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 젊은 무당은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무당으로 살아온 삶의 이력을 바탕으로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선에서 사람들의 인생사를 풀어낸다. 아니, 그럼 무당을 찾아가서도 안좋을 일을 미리 막을 수 없다면 도대체 치성이며 굿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보살은 거기에 이렇게 말을 덧붙인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하면 액운의 정도가 덜해진다고. 다음은 내가 생각해낸 예시이다. 누군가 낙상 수(落傷數)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자. 그 사람이 무당을 통해 신에게 정성을 들이면 두 다리를 다칠 운이 다리 하나만 부러지는 데에서 그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에게 간절히 빌고 애원해서 결국 다리 하나만 다친 것인지 그 인과관계를 입증할 방법은 없다.  

  그러니까 그 보살의 말대로라면, 인간에게 다가올 불운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저 우리 인간들은 신의 옷자락이라도 붙잡고 빌고 또 빌어야만(샤머니즘에서는 샤먼이 그 역할을 대행한다) 불운을 조금이나마 비껴갈 수 있다. 부적과 치성, 굿을 통해서 하는 그 모든 행위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쓸데없는 미신일 수도 있다. 나는 그 보살이 하는 이야기가 우리가 믿는 종교의 실상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과연 종교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 신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의탁하지 않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가? 오래전, 나는 성당의 성체조배실에서 기도를 하고 나오다가 기도 게시판에 붙은 무수한 종이들을 보고 놀랐다.

  '우리 아들이 대학 입학 시험을 앞두고 있습니다. 원하는 대학에 붙게 해주세요.'
  '건물을 내놓았는데 보러 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쪼록 좋은 가격에 팔리도록 도와주세요.'
  '***가 몸이 아파서 입원했습니다. 빨리 낫게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 게시판의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누군가를 시험에 붙게 해주는 입시 브로커, 부동산 매물을 좋은 가격에 팔 수 있게 도와주는 중개업자, 현실의 명의를 넘어서는 위대한 치유자, 아무튼 어떤 의미에서 전지전능한 존재였다. 나는 그 기도 게시판에서 신도들의 절실함 보다는, 소원 자판기로 전락한 신의 존재가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나는 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하느님은 어떤 존재인가...

  내가 원인불명의 통증에 시달린지가 어느덧 석 달째이다. 병원에 다니면서 약을 먹고 있지만 이게 언제쯤 나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먹고 있는 약은 치료제가 아니라 그저 통증을 막아주는 진통제이다. 원인을 알 수가 없으니 약도 그렇게 밖에 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병을 앓고 있는 나는 내가 믿는 신을 원망해야 할까? 낫게 해달라고 울며 불며 매달려 볼까?

  지금의 나에게 닥친 '병마'라는 불운을 나는 막아낼 수가 없다. 나는 요즘 구약 성서의 '요나서'를 읽다가 내가 큰 물고기(고래가 아니다)에게 잡아먹힌 요나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요나는 자신이 있는 곳을 '죽음의 뱃속(공동번역 성서 요나서 2장 3절)'이라고 묘사한다. 요나는 간절히 기도한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은 그 물고기에게 명령하여 요나를 뱉어내게 한다(요나서 2장 11절).

  성서는 요나의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주신 것처럼 쓰여져 있다. 하지만 나에게 그 부분은 좀 다르게 다가왔다. 하느님은 당신이 해야만 하는 때에 그 일을 하셨을 뿐이다. 그분에게 요나는 죽음의 뱃속에 있어야할 이유가 있었다. 요나는 그곳에서 자신의 한계와 약함, 비루함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 물고기의 뱃속 깊은 곳에 있게 된 요나는 고통을 겪는 우리 인간들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병고를 통해서 나 자신의 내면을 새롭게 들여다 보고 있다. 요나가 그러했듯, 정해진 때가 되면 이 어두운 물고기의 뱃속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저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요즈음의 내가 하고 있는 기도는 그러하다. 불운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신을 믿는 인간은 그 불운이 가져다준 고통 속에서 자신을 온전히 신에게 의탁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나에게 종교의 의미는,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 이유는 그런 데에 있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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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 왜 그렇게 뭘 자꾸 흘려요?"
  "먹다 보면 좀 흘릴 수도 있지. 얘는 그걸 가지고 그러네."

  요새 들어서 엄마가 음식을 옷에 흘리는 일이 몇 번 있었다. 나는 임시방편으로 가제 수건을 엄마의 목에 둘러주었다. 엄마는 처음에는 좀 어색해하시는 것 같았다. 손바닥만한 작은 가제 수건을 두르고 엄마는 매일의 간식인 핫도그를 맛있게 드신다. 문득 노인 관련 다큐나 프로그램에서 보던 장면이 떠올랐다. 요양원 같은 시설의 노인들은 식사 시간에 모두들 턱받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식판 옆에는 늘 작은 물병이 있다. 그것도 빨대가 있는 물병이다. 나이가 들수록 씹거나 삼키는 기능이 떨어지게 된다. 밥을 먹을 때 물을 조금씩 마시면 음식물을 삼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물병은 식사하다가 일어날 수 있는 안전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도구라고도 할 수 있다. 나도 언제부터인가 엄마에게 간식을 챙겨드릴 때 꼭 물컵을 같이 놓게 되었다.

  가제 수건을 매번 옷에다 고정하는 일은 불편하다. 어제는 생각난 김에 엄마의 턱받이를 하나 사야겠다 싶었다. 쇼핑몰의 검색창에 '턱받이'라고 써넣으니 두 종류가 뜬다. 하나는 유아용, 또 다른 하나는 어른용이다. '성인용 턱받이'로 다시 검색어를 입력해 본다. 그렇게 했더니 얇은 천 턱받이와 실리콘으로 된 제품이 나온다. 실리콘 턱받이는 내구성은 좋아보이는데, 나름 무게감이 있어보였다. 아랫부분에 길게 홈이 패인 그 턱받이는 마치 소의 목에다 거는 여물 주머니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방수처리가 된 폴리에스테르천 턱받이가 나을 것 같았다. 나는 그 턱받이를 클릭하고서는 상품평을 주욱 읽어보았다.

  '요양원에 있는 엄마에게 필요해서 사보냈어요. 요양보호사가 좋아하네요.'
  '한꺼번에 넉 장 샀습니다. 번갈아가면서 쓰면 좋아요.'
  '부모님 간병할 때 이거 쓰면 정말 편합니다.' 

  그 상품평들을 읽고 있노라니 뭔가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턱받이를 하고서 식사를 해야하는 노인들은 대개가 고령에, 몸이 아프고 불편한 이들이다. 나는 알록달록한 무늬의 턱받이를 한 엄마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상품평을 쓴 이들 가운데 누군가 이런 글을 남겼다.

  '너무 길어서 진짜 환자용 같아요. 괜히 샀어요.'

  그렇구나. 내가 원한 건 그 정도 사이즈는 아닌데, 그보다 좀 작은 건 없을까? 그런데 이 제품에는 선택할 수 있는 사이즈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단일한 사이즈만 있을 뿐이다. 나는 체크 무늬가 있는 턱받이 2개를 골랐다. 하늘색과 분홍색으로 나름 무난해 보이는 색이었다. 나는 그 2개를 장바구니에 넣고는 '주문하기' 버튼을 누르려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고 나서는 그냥 주문 화면의 창을 닫아버렸다.

  어떤 감정의 파고가 잔잔하게 밀려드는 것 같았다. 그것은 '서글픔'이었다. 단지 엄마에게 턱받이가 필요해졌다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늙음'이란 단어가 던지는 이런저런 생각들 때문이었다. 왜 늙는다는 것은 슬픔과 괴로움을 안겨주는가?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의 상실에 있을 것이다.

  식사를 하다가 자꾸만 음식을 옷에다 흘린다. 화장실이 급해서 갔는데 생각지도 않게 속옷에다 실수를 해버린다. 잘 걷고 싶은데 허리는 아프고 다리는 질질 끌게 된다... 그렇게 노인들은 신체능력이 떨어지면서 자신의 몸을 통제하기 힘들게 된다. '늙음'은 인간을 무력하고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로 만든다. 하지만 연약한 아기들을 보살피는 일은 수고로워도 가치있는 일인 반면, 아픈 노인을 보살피는 일은 대개는 무의미한 중노동으로 여겨진다. 물론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돌봄 노동(care work)'도 돈으로 충분히 치환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현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나는 엄마의 턱받이 하나를 주문하려다가 '늙음'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다. 서글프고 괴롭고 싫은 것. 그 늙음을 어떻게 잘 받아들이는 방법이 있을까? 내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답이 없다. 그건 마치 폭풍우 속을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걸어가는 방법을 찾는 일과도 같다. 그저 이 악물고 젖은 옷으로 비바람 맞아가면서 신발 잃어버리지 않고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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