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헤르만 헤세는 '가을날'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는다고. 이 가을에는 뭔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보다는 해왔던 것을 마무리해야한다는 뜻이야. 여러분에게 이 시의 뜻이 잘 새겨지길 바란다."

  스무 살, 내가 재수생이었던 시절의 일이다. 학원의 담임 선생은 9월인지 10월인지 가을의 어느 날, 아침 조례 시간에 시 한 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저, 그건...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인데요."

  담임 선생은 나름 무안해하면서도 시인의 이름을 정정해준 나를 칭찬했던 것 같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릴케의 시집은 중학생 때부터인가, 내 책장에 꽂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을날'이라는 시가 릴케의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일 이후로, 언제부터인가 나는 가을만 되면 릴케의 시를 떠올리게 되었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그 시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싯귀를 꼽으라면 그 부분일 것이다. 집이 없는 사람이라... 청춘의 날들을 지나 이제는 그 시간들로부터 한참이나 멀어진 지금까지 그 싯귀는 내 머릿속에 선문답처럼 남아있다. 집이 없는 사람, 방랑하는 고독한 예술가에 대한 묘사는 어떤 면에서 시인 자신에 대한 고백처럼 들리기도 한다. 과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온전한 나만의 것, 안락한 처소, 완벽하게 성취된 꿈이란 것이 존재할까? 그 질문에 그렇다, 라고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몇이나 될까? 아마도 그런 이유로 이 시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주는 불안한 울림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휘젓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가지고 있는 릴케의 시집은 혜원 출판사에서 펴낸 '영원한 릴케의 명시'이다. 나는 오랜 세월에 누렇게 갱지처럼 떠버린 책장을 조심스럽게 넘겨본다. 책이 인쇄된 날짜를 보니 1985년 5월 10일이다. 무려 38년이나 된 책, 이 시집의 역자는 송영택(宋永擇)씨이다. 내 나이 세대의 사람들이 헤세의 소설을 읽었다면 대부분 이 분의 번역본으로 읽었을 것이다. 수레바퀴 밑에서, 데미안, 지와 사랑, 유리알 유희, 싯다르타... 웬만한 헤세의 소설책 표지에서 송영택 씨의 이름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릴케의 소설 '말테의 수기'도 송영택 씨의 번역본으로 읽었다. 참으로 오래전의 일이다.

  '나이 50이 되고 보니, 이젠 대충대충 살고 싶어집니다.'

  내가 들르는 커뮤니티 사이트에 누군가 그렇게 글을 써놓았다. 나는 무심한듯 써놓은 그 글에서 문득 릴케의 '가을날'을 떠올렸다. 중년의 나이는 한 사람의 삶을 계절로 본다면 가을날에 해당할 것이다. 나는 새삼 글쓴이의 마음이 되어본다. 대충대충 살고 싶어지는 마음은 어쩌면 더이상 그 무언가에 애착을 두고 싶지 않다는 뜻일 수도 있다. 아등바등하며 힘겹게 살아왔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다 별 거 아니었네,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쉰다. 그렇다면 앞으로 무엇을 꿈꾸고,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할까? 아직 겨울은 오지 않았지만, 스산한 바람이 부는 가을날에 중년의 누군가는 릴케의 시에서처럼 이리저리 헤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을날(Herbsttag)

                            번역: 송영택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 후도 오래 고독하게 살며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길을 헤맬 것입니다.



*사진 출처: 직접 찍은 사진


**번역본의 '-읍니다'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책이 출판된 1985년에는 아직 표준어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이다. 오늘날 '-습니다'로 쓰는 표준어 개정이 이루어진 것은 1988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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