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중지추(囊中之錐)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 2002)'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소설을 쓴 사람은 필립 K. 딕(Philip K. Dick)으로 그는 기괴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언젠가 필립 K. 딕의 삶에 대한 다큐를 본 적이 있다
다큐는 그가 어떻게 해서 SF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그의 작품 세계와
개인적은 삶은 어떠했는지 자세하게 풀어놓았다 그 다큐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필립 K. 딕이 왜 다작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는 돈이 필요했다 아주 절실하게 필요했다
당시 그가 기고했던 잡지들은 글자 수대로 원고료를 지급했다
그래서 필립 K. 딕은 자신의 글을 엿가락처럼 늘려서 쓰기로 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타자기는 글자를 찍어낼 때마다 돈을 만들어내는 마법의
기계가 된 셈이다 물론 원고료는 박했으므로 필립 K. 딕은 미친듯이 글을
써냈다 그렇게 글을 써서 돈을 받아도, 돈은 계속 빠져나갔다 순탄치 못한
사생활이 문제였다 거듭된 이혼으로 위자료를 비롯해 양육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러니까 필립 K. 딕은 생계를 위해 필사적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그는 44편의 장편과 121편의 단편 소설을 남기게 되었다
돈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은 경멸할 만한 일인가? 적어도 필립 K. 딕에게 돈은
아주 매력적인 동인(動因)이었다 물론, 그가 열심히 글을 썼어도 사람들이
읽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들을 만들어 내었고 그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글을 썼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글을 좋아할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내 생각에 그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건 어떤 면에서 운(運)의 영역에 속한다 자신이 쓰고 싶은 글과
그것을 알아주는 독자와 만나는 기가 막힌 운의 때 같은 것, 낭중지추(囊中之錐)의
진정한 의미는 어쩌면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송곳이 날카로워서
주머니 밖으로 비어져 나온다고 해도, 제대로 쓰이지 않으면 그저 땅바닥에
떨어져 사람들의 발에 치일 뿐이다 때로 운과 마주치지 못하는 재능이란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는 불행의 근원이며 저주가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오늘도 나는 이렇게 불운한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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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차


나는 감기가 오면 주로 목으로 온다 목이 심하게 붓고 아프다
어디서 들으니, 목련차가 목과 코감기에 좋다고 했다 목련차는
봄에 핀 목련꽃을 따서 그 꽃잎을 말려서 사용한다 말린 꽃잎은
잘 달구어진 팬에다가 아주 살짝 덖어준다 그렇게 해서 만든
목련차를 뜨거운 물에 우려서 마신다 그렇게 목련차를 만들어서
마셔봤는데, 이게 효과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뭔가 애매한 지점이 있었다 따뜻한 차를 마시면 목의 통증이 덜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기껏해야 차 따위로 질병을 치료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목련차를 마시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목련차의
약리적 성분은 무엇인가? 아무리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적거려봐도
속시원한 답을 찾기는 어려웠다 목련꽃에 있는 정유(精油) 성분은
대개의 식물의 잎과 꽃에서 추출할 수 있는 휘발성 기름이다 어떤
자료에서는 목련꽃의 알칼로이드 성분이 약효를 갖는다고도 했다
알칼로이드(alkaloid)는 쓴맛, 말하자면 일종의 약한 독(毒) 성분에 가깝다
식물도 곤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무기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목련차의 효능이라는 것은 그냥 민간요법의 플라시보 효과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이 목련차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옛날 중국의 어느 왕조 시대에 지독한 비염에
시달리던 선비가 있었다 선비는 과거 시험을 열심히 준비했지만, 그의
질병은 공부하는 데에 심각한 방해가 되었다 번번이 낙방한 그는
마지막으로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 길에서 만난 누군가
선비에게 목련꽃으로 만든 차를 마시면 나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선비는 목련차를 구해서 마셨다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던 비염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는 과거 시험에 합격했다 나는 목련차의 효능
보다도 그 선비의 이야기가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이지만, 목련차는 그토록 오랜 역사를 가진 차였다
때로 희망이 끝나가는 곳에서 그렇게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고
아픈 목으로 침을 삼키는 초겨울밤, 진심으로 믿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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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If...)


내일은 비 소식이 있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추위가 몰려
온다고 해서 미리 겨울 외투를 꺼내 놓았다 그런데
내게는 이렇게 겨울만 되면 생각나는 신문 기사가 있다
그해 겨울은 무척 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단독 주택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한파가 밀어닥친
어느 날 밤, 전기장판에 난 화재로 생을 달리했다
할머니의 집에는 보일러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할머니는
보일러를 전혀 틀지 않았다 보일러에 기름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보일러에는 석유가 가득 채워져 있었고,
미리 사다 둔 석유도 두 드럼통이나 되었다 할머니의 아들이
그렇게 다 준비해 둔 것이었다 하지만 비싼 기름값을 생각한
할머니는 오로지 전기장판만을 의지했다 돈에 눈이 먼
싸구려 전기장판 제조업자는 온도 조절기의 중요한 부품을
빼버렸다 전기장판의 과열을 막아주는 그 부품이 없으니
전기장판은 쉽게 불이 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은 어머니가
따뜻한 겨울을 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득그득 보일러에
기름을 채워놓았으나, 결국은 어머니의 죽음을 목도해야만 했다
아끼며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 할머니는 평생을
근검절약하며 살았을 것이다 기름보일러를 돌리는 일은
할머니에게 손이 덜덜덜 떨리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들이 피땀 흘려 번 돈으로 채워준 기름을 쓰느니,
전기장판으로 어떻게든 잘 견디자, 그렇게 생각했을까?
만약에 할머니가 보일러를 틀었더라면, 아들이 가슴 아프게
탄식하는 일이 없었을까? 물론 이 사건의 주요한 원인이
파렴치한 전기장판 제조업자에 있다는 건 분명하다
If로 시작되는 영어의 가정법(假定法)은 대부분 실현 불가능한
일에 대한 서술일 뿐이다 이미 지나간 과거부터 미래의 일까지도
If의 가정법 문장에서는 원망과 한탄, 터무니없는 기대가 감지된다
그 할머니의 죽음에 그 어떤 If를 써본다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너무 아끼며 살지는 말아야지,
나는 올해 처음으로 설치한 보일러의 난방 설정 온도를
18도로 맞추어 놓고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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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마지로(犬馬之勞)


사극을 보다 보면 가끔 듣게 되는 대사가 있다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습니다, 같은 것
개와 말의 하찮은 노력, 이란 뜻의 이 사자성어는
주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자신의 온 힘을 다해
보필하겠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말을 하는 이의 신분은 대개가 미천한 편에 속한다
나의 기억으로는 배웠다는 선비나 좀 거들먹거리는
부자가 이런 대사를 사극에서 주워섬기는 것을 본 적이
별로 없다 권력에 빌붙으려는 잔챙이 같은 무리,
그들은 비굴할 정도로 고개를 바짝 바닥에 대고는
힘있는 자를 향해 큰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러면
그 말을 들은 윗사람은 삐딱하게 내려다 보며
경멸의 웃음을 줄줄 흘리곤 했다 그런 사람을 위해
있는 힘껏 견마지로를 보태던 이들의 말로는 좋지 못했다
권력자는 그들을 진짜로 짐승처럼 생각했으므로
마구 부려먹고는 곧 내버렸다 개와 말의 팔자가 그러했다
개는 기운이 쇠하면 복날에 두들겨 패서 잡아먹었고
말은 온갖 일을 하다 쓰러져 죽으면 그것도 도살하여 먹었다
조선 시대에 말고기는 구하기 어려운 별미로 여겨졌다
진짜 평생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배우지 못했고, 가진 것이라고는 출세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 뿐인
한 남자가 위정자에게 그렇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견마지로를 다하였으나, 처절한 굴종(屈從)과 헌신의
대가(代價)는 예약된 철창 뒤의 기나긴 시간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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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꿈


소설 작법 수업의 소설가 선생은 참으로 솔직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등단작에 얽힌 이야기이며 이런저런 문단의 이야기도
재미나게 들려주었다 선생의 이야기 가운데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있다 선생은 몇 개의 큰 문학상을 거머쥐었는데,
그때마다 자신이 꾼 꿈이 있다고 했다 바로 똥꿈이었다
선생은 꿈에서 엄청난 똥을 보면 돈이 생기겠구나, 라고 여겼다
선생이 받은 상들은 선생에게 큰 상금을 안겨주었다 나에게는
그런 돈이 되는 꿈은 없었다 똥이 돈으로 변하는 꿈의 마법이라니,
나도 그런 꿈을 꾸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똥꿈으로 상금을 받은 것과는 별개로 선생은 작가로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 했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는 것이었겠지
선생은 서서히 문단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선생의
화려한 등단을 생각하면 창작의 소재가 고갈된 작가의
삶이란 얼마나 고달픈가를 절로 깨닫게 된다 돌고 돌아
이제는 문학이 아닌,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선생의 소식을
최근에서야 들었다 선생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을까?
내 생각에 선생에게는 여전히 똥꿈이 필요한 것 같았다
글을 쓰거나 공부하는 일, 그 두 가지는 여간해서는
돈을 만들어내기 힘든, 배고픈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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