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 명의 내래이터, 하나의 이야기

  다큐는 두개의 이야기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축은 김윤아가 내래이터로 등장하는 1948년 제주 4.3 항쟁을 전후한 역사적 사실 관계에 관한 기술이며, 두 번째 축은 일반 성우가 내래이터로 나와서 간첩 사건의 피해자인 강희철에 관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 이 두개의 축은 전혀 다른 개별적 이야기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종국에 있어서는 만나게 되는데, 그러한 점에서 본다면 두 명의 내래이터가 말하는 것은 본래는 하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제작진은 두개의 이야기 축을 설정하고 서로 다른 내래이터로 하여금 다르게 보이는 듯한 이야기를 하게 만든 것일까?

  그것은 이 다큐의 중심 이야기가 되는 강희철이라는 개인이 1986년에 체포되어 16년간 복역해야했던 참혹했던 고통의 뿌리가 1948년 4월 3일에 제주도에서 시작된 일에 있었기 때문이다. 무려 사십년 전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한 개인의 인생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만큼의 위력을 가졌다면 그 사건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하나의 이야기 축은 4.3 항쟁의 시작에서, 또 다른 이야기 축은 강희철의 현재의 삶에 두고 그 두 이야기를 교차 편집을 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48년의 4.3 항쟁과 2005년을 살고 있는 강희철이라는 개인의 역사가 만나게 된다.

  김윤아가 내래이터로 나오는 첫 번째 이야기 축은 4.3 항쟁을 전후한 제주도의 상황을 역사적 사료에 근거해서 차근차근 짚어나간다. 여기에 주로 사용된 기법은 재연인데, 주목할만한 점은 대사와 행동의 변화가 정적이라는 점이다. 마치 정지된 사진 이미지처럼, 칼라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화면 구성은 그 자체로 당시의 자료 화면을 연상케 만든다. 특히 54년 북촌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묵념 사건에 대한 기술에 있어서는 연출된 여러 장의 사진 이미지들을 조합해서 보여줌으로써 그 사건의 실재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이미지를 중시하는 특징은 핏빛이 주조를 이루는 애니메이션 장면의 삽입에 있어서 더욱 두드러진다. “빨갱이”로 몰려서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했던 민간인들을 상징하는 색이자, 희생과 분노의 의미를 담고 있는 붉은 색은 매우 강렬한 시각적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다 김윤아가 직접 부르는 노래들은 시청자들에게 정서적으로 강하게 호소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첫 번째 이야기 축은 비극적 역사에 대한 시청자들의 감정 이입과 동화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반면 일반 성우가 내래이터로 나오는 두 번째 이야기 축은 차분하고 건조하게 진행된다. 강희철 자신이 말하는 개인사와 간첩 사건과 관련된 진실은 주변 인물들의 증언에 의해 뒷받침 되고 있다. 또한 강희철 이전에도 조작된 간첩단 사건인 65년 혁명당 조작 사건과 77년의 강우규 간첩 사건의 피해자들을 조명하면서 4.3 항쟁의 고통스러운 그림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깊이 드리워졌는가를 또렷이 응시하게 만든다.

  이 두 번째 이야기 축에서도 재연이 사용되기는 하지만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물들의 인터뷰 그 자체만으로도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데에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보도된 신문 자료와 인물들의 현재의 삶을 담아낸 화면은 이 이야기 축에 사실성과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두개의 축을 따라가던 각각의 이야기들은 마침내 2005년 현재에서 만나게 된다. 김윤아의 내래이션은 1948년에서 4.3 특별법과 턱수건 할머니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알려진 오늘날로 사뿐히 날아온다. 또 다른 이야기 축이었던 강희철은 2005년인 지금, 보안관찰을 연장한다는 통보를 제주지검에서 받는다. 합쳐진 하나의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직도 4.3은 끝나지 않은, 여전히 피 흘리고 있는 현재의 역사라는 것이다.          


2. 왜 김윤아의 제주도인가

  앞서서 이 다큐는 두개의 이야기 축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기술하였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그 이야기들을 구분짓는 편집상의 특징은 무엇일까? 바로 노래이다. 김윤아가 부르는 노래는 하나의 이야기 축에서 다른 이야기 축으로 이동할 때 나오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노래들의 사용은 내용의 전체적인 통일성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을까? 

  분명히 음악이 나오는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 음악이 가사가 있는 노래라면 시청자들의 주의력은 화면뿐만 아니라 노래의 가사를 파악하는 것에 분산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반복, 삽입된 노래들은 이야기의 중심에 쉽게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문제는 김윤아가 내래이터로 나오는 이야기 축에서 중심이 되어야하는 것이 4.3 항쟁의 역사적 궤적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김윤아의 노래들과 그 독특한 음성이 더 지배적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김윤아의 제주도”인가? “김윤아”라는 이름이 대표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가수라는 직업적 정체성 외에 제주 4.3 항쟁을 잘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를 대표한다는 뜻일까? 확실히 김윤아는 여느 인기 가수들과는 차별되는 코드를 지니고 있다. “자우림”이라는 인디에서 출발해 이제는 메이저가 된 밴드의 보컬로 활동하면서 자신만의 독자적 음악세계를 구축해왔을 뿐만 아니라 음악 외적인 면에서도 여성 문제라던가, 다른 사회 문제에 있어서 나름의 목소리를 내왔던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4.3항쟁을 다룬 기존의 다큐들과 확연히 다른 지점을 구축하기 위해 “김윤아”라는 카드를 쓴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다큐 중간 중간 삽입되는 노래들을 직접 부른 김윤아의 모습이나, 감각적인 비주얼이 들어간 애니메이션, 재연 부분에 들어간 사진적 이미지의 구성은 이 프로가 젊은 세대들을 주 시청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이 프로그램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어느 정도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지녔는가에 관해서는 의문이 든다. 뮤직 비디오를 찍는 것도 아닌데 노래를 부르는 김윤아의 클로즈업된 얼굴을 여러 번 보는 것은 김윤아의 팬이 아닌 다음에야 매우 곤혹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깊게 논의되어야할 점은 김윤아가 하는 내래이션에 관한 것이다. 

  그의 내래이션은 과연 자신의 내적 체험과 통찰에서 나온 것일까? 단지 대본 작가가 써준 것을 그대로 읊어 내려가는 것이었다면 내래이션의 화자가 “나(김윤아)”로 나오는 부분은 솔직하지 못한 것이며 사실이 아니다. 내래이터를 유명인으로 쓰는 문제에 있어서 신중해야할 부분은 바로 그런 점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제작진은 “김윤아”라는 카드를 씀에 있어서 형식적이고 외적인 부분에 치우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3. 진실의 힘

  이 다큐를 보면서 나는 새삼 방송을 만드는 이들의 사명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방송 프로그램은 때론 즐거움을 주기 위해 제작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목적은 가난하고, 소외받고 있으며,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쉽게 잊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이유로 침묵 속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공평하다는 것은 그러한 사회적 약자들에게 발언의 기회를 주고, 그들이 우리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웃임을 일깨우는 일일 터이다. 방송은 그 중요한 역할을 놓쳐서는 안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윤아의 제주도”는 그런 점에서 본다면 그 기획 의도를 나름대로 높이 사줄만 하다. 제주 4.3 항쟁이 오늘날까지 드리운 치유되지 않는 상처와 고통의 그림자를 응시하게 만들고, 그 그림자 속에서 침묵을 강요받았던 한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잊혀진 목소리를 불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다큐를 통해 들을 수 있었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거기에 서린 깊은 슬픔은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와닿았다. 이것은 오직 그 목소리에 실린 진실의 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진실의 힘, 그것 외에 다른 것들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이 아무리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마음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을 구태여 보기 쉽고, 듣기 좋게 포장해야할 필요가 있다면, 그만큼 오늘날에는 진실마저도 미디어와 자본의 논리에 좌우되고 있고, 이러한 상황에 우리들이 무감각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다큐에 나온 가수 김윤아나, 그의 노래나, 눈길을 끄는 애니메이션 등과 같은 시도는 결국 포장일 뿐이다. 그것은 이 다큐가 가진 창조성과는 상관이 없고, 그 보다는 대중성을 고려한 결과이다. 방송 다큐가 시청률과 광고주의 요구를 고려하여 갈수록 연성화되어가는 경향은 참으로 우려할만하다.

  보다 많은 이들에게 진실을 얼굴을 마주보게 만드는 다양하고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김윤아의 제주도”에 그러한 방법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쉽고 편하게 가려고 했다는 점이다. 이 다큐를 보고난 다음에 김윤아의 노래와 그 얼굴이 더 오래 남는다면 이것은 분명 실패한 다큐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내게는 제작진이 진실이 가진 힘을 보다 신뢰하고 기대었어야한다는 아쉬움이 남는 다큐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스페인 회화 아트 라이브러리 13
재니스 톰린슨 지음, 이순령 옮김 / 예경 / 200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도 계속해서 발간되고 있는 예경의 아트 라이브러리 시리즈는 도판이나 미술사적 균형감각에 있어서 만족할만한 수준을 보장해주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 본 “인상주의”와 “스페인 회화”는 즐거운 책읽기의 체험을 제공해주었다. 

 

  특별히 “스페인 회화”는 엘 그레코와 벨라스케즈, 고야로 대표되는 스페인 회화의 다양한 측면을 정치적, 지리적, 역사적 측면에서 세밀하게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사실 예술을 그 시대의 상황과 따로 떼어서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내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스페인 역사에 대한 사전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이 부분에 있어서 추천하고 싶은 책은 까치글방에서 나온 “스페인 제국사”이다).    
 

  저자는 스페인 회화를 단지 스페인 출신 화가들의 작품으로 규정하는 것은 스페인 회화의 다채롭고 풍성한 본질을 놓치는 것이라 지적한다. 스페인 회화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다양한 회화적 전통이 정치사적 상황과 맞물려 들어오고 새롭게 변형되면서 이룩된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근대이후 스페인에서 민족주의가 부각되면서 비 스페인 출신 화가들의 작품들이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는 데에 우려를 표명하고, 이 책의 진정한 목적은 바로 소홀히 다루어지거나 잊혀진 화가들과 그 전통을 온전히 복원하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스페인 회화사의 주요한 작품들의 도판을 볼 수 있다는 즐거움과 함께 예술이 갖는 시대적 함의, 예술가의 생애까지도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서양 회화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놓치기 힘든 매력을 지닌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68혁명 당시에 시위 참가자들이 만들어낸 구호 가운데에는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라는 것도 있었다. “안달루시아의 개”는 우리의 현실인식을 부정하는 지점, 즉 상상력이 유일한 권력을 획득하게 되는 무의식의 세계에 관한 영화이다. 여자의 눈을 예리하게 가르는 그 유명한 장면을 보라. 이것이 보여주는 의미는 너무나 분명해서 달리 무슨 말이 필요 없다. 새로운 세계를 보기위한 눈을 뜨라는 것이다.

 

  브뉘엘은 우리가 익숙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현실의 제도와 권력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을 전복시킬 힘에 대해 모색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종교, 계급, 언어, 시공간에 대한 감각 등과 같이 현실적 토대를 이루는 요소들이 조롱과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다. 브뉘엘은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 와서 보시오, 당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과연 그것은 진짜일까?”

 

  영화는 그 질문에 분명히 “아니다”라고 답하고 있다. 그 대답이야말로 이 영화가 현실 비판을 넘어서서 체제 전복적인 메시지까지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것을 꿈꾸는 인간은 권력을 지닌 집단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일 수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때에라야 우리는 진정한 인식과 이해의 눈을 뜨게 된다. 진정한 변혁의 시작은 거기에서부터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브뉘엘은 속삭인다. 문을 열면 바로 해변이 펼쳐지는 놀라운 세계로 오라고. 그곳에서 상상력의 권력을 마음껏 획득하라고. 상상하는 순간 모든 것이 실재하게 되는 세계는 얼마나 멋진가! 이 세계를 보기 위해 우리는 단지 "새로운 눈"을 뜨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히피드림~ 2005-10-09 14:03   좋아요 0 | URL
무라카미 류의 <69>라는 소설에도 이 구호가 인용됐어요. 그땐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유명한 말이더라구요.^^;; 요즘도 가끔 이 말에 대해 생각해 본답니다. 이 영화 꼭 보고 싶네요.
 
리처드 3세 - 전예원세계문학선 316 셰익스피어 전집 16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199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습작기 동안 이런저런 어려움에 부닥치기 마련이다. 단지 열심히 쓴다는 것으로는 만족할만한 좋을 글을 얻기가 힘들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글쓰기에도 정교한 이론과 구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때가 아마도 그 즈음이 아닐까 싶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는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큰 비중을 두어야할 캐릭터 설정에 있어서 좋은 전범이 되어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캐릭터들은 찾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지만 "리처드 3세"는 악역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만드는 캐릭터의 진정한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시대를 뛰어넘어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바로 인간성에 대한 탁월한 통찰에 있다. 이 책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오래전 영국 궁정의 왕과 귀족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인물들의 다양한 속성이 투영된 매우 실제적인 인물들인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인 리처드 3세는 인간에게 내재된 허영과 욕망, 그로 인해 빚어지는 음모와 배신의 그물망을 촘촘히 짜나가며 읽는 이의 마음을 휘어잡는다.   

  
  어떻게 매력적인 악역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이 책은 놀랄만큼 명료한 답을 제시한다. 글쓰기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또 지금 습작기에 있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리처드 3세"는 매우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화 “소무”에는 주인공 소무가 주점의 아가씨와 거리의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시간을 보내는 시퀀스가 있다. 짓다 말았거나, 마치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건물 안으로 소무는 잠깐동안 들어갔다가 나온다. 내게는 그것이 마치 급격한 개발이 진행 중인 중국의 모습에 대한 은유처럼 생각되었다. “소무”에는 그런 식의 공간적 기호가 곳곳에 포진해있다. 영화는 소도시와 그 외곽의 시골 풍경을 마치 다큐를 찍듯 건조한 화면에 담아낸다. “소무”에 나오는 모든 공간은 전근대성의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친구가 경영하는 잡화점이나, 약국, 미용실, 주점, 소무의 부모님 집을 보라. 이것은 마치 70년대 개발 독재가 횡행하던 한국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이에 반해 "몰완몰료"가 보여주는 도시 공간의 이미지는 서구적이며 세련된 것이다. 물론 북경이라는 공간은 자금성으로 대표되는 역사적 의미가 강한 곳이지만 이러한 옛 건축물들이 몰완몰료에서는 하나의 삽화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초반부의 관광객이 등장하는 장면이라던가, 갈우가 사장을 협박해서 돈을 갖고 나오게 하는 장소 정도인 것이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강조되고 있는 공간은 마치 멋진 모델하우스를 연상하게 하는 오천련의 집을 비롯해, 병원, 경찰서 등과 같은 도시 기능의 핵심을 담당하는 곳이다. 그러한 장소들은 "소무"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낡고 구질구질한 소도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근대화된, 또는 근대화를 지향하고 있는 중국의 모습을 대변하는 기표들로 작동한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에 나오는 음악들 또한 그 기표들을 풍부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몰완몰료”에서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나오는 음악은 빠르고 비트가 강한 랩 음악이고, "소무"에서는 비교적 느린 템포의 중국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영화는 마치 작심을 하고 북경 시내를 보여주기로 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돈을 갖고 나오기로 한 사장과의 약속은 계속 틀어지고, 갈우와 오천련은 하릴없이 차를 타고 북경의 이곳저곳을 쏘다닌다. 카메라는 그들의 차를 따라가면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마치 북경 시내 곳곳을 보여주는 관광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장면들은 영화가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북경의 도시적 이미지, 또는 중국 근대화의 상징적 의미로서의 북경에 강박적으로 집착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두 영화가 보여주는 중국의 모습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현실에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각각의 영화가 제작된 시기가 “소무” 97년, “몰완몰료”는 99년이라는 점은 두 영화가 각각 담아내고 있는 공간적 의미를 단순히 중국의 과거와 현재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다. 두 영화는 근대와 전근대, 개발과 비개발, 도시와 농촌, 새것과 옛것, 실리와 명분이 혼재하는 현대 중국의 초상과 맞닿아 있다.

 

  공간은 단지 배경으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머무르는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방식을 규제하고 변화시킨다. 같은 경찰서라 하더라도 “소무”에 나오는 경찰과 “몰완몰료”에 나오는 경찰의 일처리 방식은 다르다. 전자는 공포와 위압감을 주는 모습으로, 후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모습으로 나온다. 이것은 파기하고 도태시켜야할 전근대성에는 낡고 오래된 건물뿐 만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소무”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제거해야할 공공의 적이며 사회악으로 지목된 소무는 경찰에 연행된다. 경찰이 잠시 자리를 비우는 동안 소무는 수갑이 채워진 채로 방치되고, 곧 길거리에서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된다. 나는 소무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서 증오보다는 깊게 드리워진 수치심을 보았다. 그것은 비단 소매치기 잡범인 소무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소무로 대변되는 그들 자신의 빈곤과 무기력, 부정부패와 미신, 물신적 욕망으로 채워진 자본주의적 심성이 온존하는 전근대적 공간과 생활방식에 대한 자조적 시선으로 읽힌다.  

 

  그에 반해 “몰완몰료”가 보여주는 결말은 급격한 근대화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도입이 가져다준 어두운 일면, 즉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가치의 상실에 대한 중국인들의 열렬한 희구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누나를 결코 포기하지 않고 지켜주려는 갈우, 그의 곁에는 아름답고 마음씨 착한 오천련이 자리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결말은 지금의 중국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것이기에 영화 속에서나 재현된 것일지도 모른다. “소무”에서 소무가 잠시나마 마음을 주었던 주점의 아가씨가 돈 많은 남자를 만나 떠나버리는 것이 현실이라면, “몰완몰료”의 결말은 매우 이상적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작위적인 것이다.

 

  현재와 같은 속도라면 조만간 중국에서 “소무”에서 보았던 정체되고 낙후된 소도시들의 모습은 빠르게 변할 것이다. 중국인들이 열렬히 지지해마지 않는 자본주의는 그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보여줄 것인가? 그래서 그들은 “몰완몰료”가 보여주는 세련된 도시적 공간에서 도덕적인 가치를 지키며 품위 있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어쩌면 중국인들의 바람과는 달리 그들이 잃어버려야할 것들이 너무 많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영화는 그들의 상상 속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지금보다 더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찾아 질주하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