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작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 분)는 손님들로부터 매일 이른 새벽에 유모차를 끌고다닌다는 노파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데 얼마후 그는 집을 나서는 길에 우연히 노파와 그 유모차 안에 타고 있는 죠제(이케와키 치즈루 분)를 만나게 된다. 하반신이 마비된채 바깥 세상과 단절되어 집에서만 지내던 죠제에게 이른 새벽의 산보는 세상과 만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 그 만남을 계기로 츠네오와 죠제는 서로의 마음을 열어가는 사이가 되지만 츠네오의 여자친구가 한 말로 인한 오해로 죠제는 상처를 받고 둘 사이는 멀어진다. 얼마후 죠제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죠제를 다시 찾은 츠네오는 죠제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으로 바뀌어있음을 알고 함께 지내기 시작하는데...

  죠제와 츠네오가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열어가는 그 과정을 보노라면 사람과 사람이 소통한다는 것,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해 깊이 공감하게 된다. 할머니와 함께 좁고 불편한 집에서 주워온 책들을 통해 세상에 대한 지식을 쌓아가던 죠제는 츠네오를 통해 진짜 세상과 만난다. 츠네오에 대한 죠제의 감정은 그의 고백에서 잘 드러난다. 자신은 츠네오를 만나기 전까지 아무것도 없는 깊고 어두운 바다 밑바닥을 돌아다녔지만 이제는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고. 그러나 츠네오가 떠나면 또다시 어두운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조개처럼 될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나 그들이 함께 했던 소중하고 아름다왔던 시간들은 어느날 갑자기 끝나버린다. 츠네오는 예전의 여자친구에게 다시 돌아가고 죠제는 혼자만의 일상으로 돌아온다. 왜 죠제와 헤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츠네오는 "자신이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라고만 독백할 뿐, 더이상의 설명은 없다. 그리고 다시는 죠제를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츠네오와 함께 지내는 동안 죠제는 휠체어를 사자는 츠네오의 제안을 거절한다. 츠네오의 등에 업힐 수 있다는 것은 죠제에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행복을 느끼는 하나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츠네오가 떠난 후 전동 휠체어를 타고 바깥을 다니는 죠제의 모습은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 뒷모습에서는 쓸쓸함이 묻어난다. 죠제는 이제 홀로 깊은 바다 속을 헤매는 조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 두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졌더라면... 이라고 한탄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더러는 함께 할 수 없는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그 두사람이 함께 사랑했던 그 시간들,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만나 어둡고 깊은 바다밑에서 수면 가까이로 떠올랐던 그 황홀한 순간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눈부시게 빛나던 사랑의 아름다운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서 빛나고 아름다운 것들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 것 같다. 지속될 수 없는 것,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은 언제나 슬프고 쓸쓸한 그림자를 남긴다. 그런 이유로 많은 이들은 그 괴로움을 자신의 것으로 하기 보다는 이루어진 사랑의 남루한 일상을 끌어안고 사는 것을 택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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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1-15 21:57   좋아요 0 | URL
보고싶었던 영화를 놓쳤네요.

혹시 어디 하는 데 없는지 알아봐야겠어요.

저도 일본영화 좋아합니다.

기타노 다케시 것은 극장에서 거의 다 봤어요.

최근 것 빼고......

푸른별 2004-11-15 22:06   좋아요 0 | URL
괜찮은 영화인데 개봉관을 많이 못잡은 것 같아요. 지금도 상영하고 있을 것 같은데... 하나와 엘리스 보셨나요? 나름대로 재미있게 본 영화였습니다. 특히 끝부분의 발레장면이 아름다웠지요.
 

*스포일러 있음 

  평범한 여대생 나카무라 유미(시바사키 코우 분)에게 갑자기 주변 사람들이 연달아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더군다나 죽은 이들은 죽기전 자신의 음성이 담긴 메시지를 받는데 그 메시지를 보내온 시각은 현재가 아닌 미래. 메시지를 보낸 시각에 그들이 어김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을 알게된 유미는 자신마저 죽음의 메시지를 받게 되자 공포에 사로잡히고, 참혹하게 죽은 여동생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아내려는 장례업자 야마시타 히로(츠츠미 신이치 분)와 함께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유미와 야마시타는 마침내 이 사건의 배후에는 한 어린아이의 원혼이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 여동생과 살고 있었던 미미코는 여동생 나나코에게 칼로 상처를 입힌 후 사탕을 주고 동생을 보살핌으로써 일하는 어머니의 관심을 끌어내고자 하나 여러번 그런일이 반복되자 어머니에게 들키고 만다. 상처입은 나나코를 병원에 데려가려는 순간에 미미코는 천식 발작을 하지만 어머니는 매몰차게 미미코를 못본채 떠나버리자 결국 미미코는 고통 속에 죽게 되었고 죽은 미미코의 원혼이 어머니는 물론 어머니의 핸드폰에 담긴 전화번호의 인물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게 된다는 것이 이 영화의 대강의 얼개이다. 

  이런 줄거리라면 참 심심한 공포영화가 아닐 수 없는데 미이케 다카시의 저력은 역시 관객의 기대와는 배반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우여곡절 끝에 착신 메시지의 예고된 죽음의 시각을 넘기고 집으로 돌아온 유미의 방에서 갑자기 시계가 거꾸로 돌면서 죽음의 시각을 향해 간다. 왜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가? 어린 시절 유미에게는 어머니에게 심한 육체적 학대를 당한 경험이 있었고 그것이 심한 심리적 외상으로 남아 어른이 되어서도 고통스러워했던 유미는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과거의 어머니와 대면하게 되고 그 당시의 공포와 두려움을 다시 느낀다. 학대당하는 입장이었던 유미가 필요로 하는 것은 주변의 관심과 배려였음에도 그것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의 고통과 분노가 마침내 가해자(동생 나나코에게 상해를 입힘)이면서 피해자(어머니의 관심과 배려를 어리고 연약한 동생에게 빼앗김)인 미미코의 원혼과 만나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 모든 일은 인간의 연약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관심과 배려, 사랑을 받고 싶다는 욕망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충족되지 않을 때 이 채워지지 않은 욕망은 파괴와 극단의 참혹한 결말을 향해 달려나가기도 한다. 미미코의 원혼이 저지른 살인은 죽어서도 미처 채워지지 못한 사랑과 관심을 끌어내려는 울부짖음과 다르지 않다. 

  <착신아리>에서 미이케 다카시는 가장 친밀한 관계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전제로 하는 혈연의 가족이 실은 학대의 폭력과 공포가 쉽게 일상화될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일상화된 학대의 고리가 단절되지 않고 세대에 세대를 거쳐 전이될 뿐 아니라 자신과 관계없는 타인의 삶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이다. <착신아리>를 단순한 공포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미미코의 혼에 빙의된 유미는 자신을 구하러온 야마시타를 칼로 찌른다. 야마시타는 혼수상태에서 미미코에 의해 죽임을 당한 여동생 리스코를 만나는데 리스코는 기이한 말을 남긴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수만큼의 하늘이 있다고...

  이 영화에는 서로 다른 자신만의 하늘을 가진 여러 인물들이 나온다. 유미를 학대했던 어머니,  그 학대를 받았던 유미, 동생을 학대했던 미미코, 자신을 학대한 언니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믿는 동생 나나코, 동생이 겪었던 죽음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는 야마시타... 그들 각자가 가진 하늘은 다른 이의 눈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결국 사람들이 하나의 하늘 아래서 사랑과 평화를 꿈꾸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야마시타는 자신에게 칼을 숨긴채 다가서는 유미(미미코의 혼에 빙의된)가 건네주는 사탕을 맛있게 받아 먹는다. 그가 유미와 미미코를 보살핌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바라는 파괴적인 사랑과 배려의 방식에 동의함으로써 그들은 비로소 하나의 하늘 아래서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이다. 미이케 다카시는 이 고통스런 결말을 통해 인간을 가장 두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에 자리한 채워지지 못한 일그러진 사랑과 관심의 욕구임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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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곱고 아름다운 영상과 잔잔한 바람 소리 같이 들리는 음악이 깔리는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불안과 두려움의 징후를 읽어내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마리 이야기>를 보면서 나에게 중첩되었던 이미지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캐리>였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영화가 기이하게도 나의 마음 안에서 공명을 일으킨 것이다.

  이 영화는 외견상 사춘기 소년의 잊을 수 없는 추억에 관한 이야기라는 인상을 주지만 그 추억은 마냥 기쁘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 이면에는 상실과 이별에 대한 두려움, 성장에 대한 당혹스러움과 떨림의 느낌이 자리하고 있다. 열두살 소년 남우에게 이별은 익숙한 옷처럼 보인다. 아버지의 부재,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머니, 심장병으로 인해 얼마남지 않은 여생을 보내는 할머니, 서울로 떠나는 친구 준호, 철거를 앞두고 있는 마을의 등대... 이것이 남우를 둘러싼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우가 찾고 싶어하는 위로와 평화는 결코 사람으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기껏해야 떠돌이 고양이 요와 천사가 들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구슬이 전부인 것이다.

   그런 남우가 마리를 만나게 된다. 마리를 과연 누구로 보아야할 것이냐에 따라 이 작품을 보는 시각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제작의 시놉에 나온 원래의 의도는 "마리"란 한 마리, 두 마리와 같이 살아있는 것을 지칭하는 것에서 따온 것으로 생명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러므로 마리의 사랑은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마리는 주인공 남우의 무의식의 현현(顯現)이다.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신을 분리시키고 배제하는 주위 환경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남우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완충적 복제물로 보인다.  

  성장이란 깨어짐의 아픔없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알 속의 새는 자신의 부리로 단단한 알껍질을 깨부수고 나와야지만 세상의 빛을 만날 수 있다. 소년을 둘러싼 환경은 언제부터인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새로운 탄생을 위한 마지막 부서짐의 몫은 온전히 소년의 것이다. 그 순간에 어떻게 두려움과 떨림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년은 잠시 멈추어서 알 속의 세계를 눈에 담고 마지막으로 작별을 고한다.

  <캐리>가 사춘기 소녀의 성장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가져오는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양상에 대해 보여주었다면- 캐리는 자신은 물론 학교 친구들, 어머니까지 죽음으로 몰고 간다 -<마리 이야기는> 매우 정제된 결말을 보여준다. 친구 준호의 아버지를 태운 배는 세찬 밤바다의 폭풍우를 이겨내고 마침내 잔잔한 아침 바다를 만난다. 그 장면은 마치 소년 남우의 내적 여정을 그대로 재현해낸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어른이 된 남우는 마침내 고백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그 추억을 잊지 않겠다고 누군가에게 약속한 것 같은데 그것이 누군지 모르겠다고, 어쩌면 자기 자신이 아니었을까 하고. 깨어짐의 아픔을 전제로 한 성장의 첫 관문에서 가장 큰 두려움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 자신이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스스로 파괴해야한다는 두려움과 공포, 불안과 당혹스러움을 직면하는 사람만이 껍질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소년 남우가 만난 마리는 바로 그 자신이었다. 소년의 이야기는 우리의 내면에 자리한 성장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을 보여준다. 진정한 성장이란 바로 자신을 바라보는 데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그리고 때론 그것이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일지라도 지나간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마리 이야기>는 넌즈시 일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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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읜 오리하라 유카(와쿠이 에미 분)는 IQ 70의 지적 장애를 지녔지만 타고난 예술적 재능으로 자신만의 미술 작품을 만들며 어머니와 함께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너무나도 순수한 영혼을 지닌 유카였기에 어머니와 사촌 료는 유카가 사람들이나 세상에 의해 상처를 받을까 걱정하며 보호하는 것이 최선이라 여긴다. 그렇지만 그런 새장 속의 삶에 답답함을 느끼고 세상을 향한 비상을 꿈꾸는 유카에게 어느날 한 사람이 나타난다. 부모의 자살로 고아원에서 성장하며 사랑 따윈 믿지 않게 되어버린 차가운 얼굴의 기자 사와타리 토오루(츠츠미 신이치 분)는 밤길에서 불량배에게 괴롭힘을 당할 처지에 있는 유카를 구해주면서 둘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데...

  이 드라마, 외양만 보면 확실히 신파에 가깝다. 지능은 떨어지지만 순수한 영혼을 지닌 여자와 결코 치유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남자의 사랑 이야기는 결국 남자의 죽음으로 끝을 맺으며 슬픔을 극대화한다. 더군다나 처음의 빠른 이야기 전개가 후반부로 들어서면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질질 끄는 듯한 피로감마저 준다. 그런데도 이 드라마가 나름의 힘을 갖는 것은 섬세하고 뛰어난 심리 묘사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바보일지 모르나 다른이의 영혼을 투영하는 마음의 눈을 지닌 유카는 토오
루를 바라보며 말한다.

  "당신의 한쪽 날개, 부러져 있어요." 

  그의 부러진 날개를 치유해서 자유롭게 날게 하고 싶다는 열망에서 유카의 특별한 사랑이 시작된다. 사랑이란 상대방에게 얻을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의 상처를 응시하고 함께 나누고 싶어하는 것임을 유카는 자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통해 보여준다. 이런 사랑에 자신과 세상을 향해 쌓아왔던 높디 높은 벽을 허물고 화해의 손길을 내밀게 되는 토오루는 죽음의 순간에 유카와 그가 만든 작품을 바라보며 비로소 구원을 얻었음을 고백한다.

  세상이 규정한 조건과 장애를 뛰어넘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유카와 토오루를 보노라면 아무리 무심한 사람이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진정한 사랑이란 한 개인의 문제를 뛰어넘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토오루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만드는 작품으로 자신과 다른 이의 생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려는 유카의 모습을 통해서이다.  

  "나는 죽어서 하늘이 되지 않고 언제까지나 너의 마음 안에서 살아있을 거야. 언제까지나."

 
  이제껏 죽음의 의미를 하늘이 된다는 것으로만 알고 날마다 하늘을 바라보며 아버지가 그 속에 있다고 믿었던 있던 유카는 토오루의 죽음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마음에 살아있으며 그것이 살아갈 힘이 되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상처입어서 부러진 영혼의 날개, 그 날개를 치유하는 사랑의 힘, 그리고 구원의 의미...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이 세상에 진정한 사랑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나, 삶의 의미를 찾느라 지친 길목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번쯤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찾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첨언: 아무래도 8년 전 드라마라 배우들의 의상이나 세트, 배경이 지금의 눈으로 보면 촌스러운 부분이 많다. 삐삐가 극의 전개에 의미있는 역할을 하는 것도 꽤 흥미로운 점이다. 또한 유카가 만드는 작품들이 독특한데 점토와 나무를 이용한 미술 작품으로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소품으로 나온다. 그런데 정말 너무한 것(!)은 여주인공 유카의 의상인데 11회 내내 외투로는 겨자색 더플 코트만 입고 나온다. 이 점은 토오루 역의 츠츠미 신이치에게도 해당되는데 그 터틀넥 스웨터와 가죽 점퍼, 목도리... 아, 드라마의 의상담당, 왜 그랬는지 말해주오. 정말 주연배우들이 보기 딱할 지경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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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메로스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욱송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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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다자이 오사무를 읽다보면 작가란 완만한 경사의 산을 올라가는 등산가라기 보다는 지뢰가 지천으로 깔린 전장 사이를 누비는 전사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곳을 떠나고 싶지만 어떤 이유로든 떠날 수 없어서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그런 삶. 허무와 광기로 점철된 이십대를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작가의 길로 들어선 다자이 오사무의 글에서는 그 삶의 고단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8편의 단편들로만 엮인 이 책의 작품들 속에는 마치 고백성사를 하듯 자신의 청춘의 이력을 써내려가는 다자이 오사무가 있다. 매우 안정된 문체와는 달리 그가 보여주는 이십대의 모습은 불안과 두려움, 회한으로 가득차 있다. 자신에게 한때는 치명적이었던 상처들에 대해 그토록 담담해질 수 있었던 것은 글쓰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이 뿜어내는 엄청난 독기를 중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무기를 발견한 그는 어쩌면 행운아인지도 모르겠다.

  자전적인 단편들의 내용이 더러는 중복되기도 해서 다소 지루하고 밋밋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여학생>의 경우는 다자이 오사무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매우 빼어난 글이다. 예민하게 흔들리는 여학생의 내면의 풍경이 마치 한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지는 이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어느새 나도 그 여학생의 일상에 들어와있는 듯한 느낌이다. 어디론가를 향해 끊임없이 부유하는 것들의 슬픔에 대해 작가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글이 나올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들에서는 생의 독기를 보듬어낸 필사적인 흔적이 엿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버거웠던 것일까? 결국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책은 그가 세상에 남긴 슬프고도 아름다운 유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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