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 명의 내래이터, 하나의 이야기

  다큐는 두개의 이야기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축은 김윤아가 내래이터로 등장하는 1948년 제주 4.3 항쟁을 전후한 역사적 사실 관계에 관한 기술이며, 두 번째 축은 일반 성우가 내래이터로 나와서 간첩 사건의 피해자인 강희철에 관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 이 두개의 축은 전혀 다른 개별적 이야기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종국에 있어서는 만나게 되는데, 그러한 점에서 본다면 두 명의 내래이터가 말하는 것은 본래는 하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제작진은 두개의 이야기 축을 설정하고 서로 다른 내래이터로 하여금 다르게 보이는 듯한 이야기를 하게 만든 것일까?

  그것은 이 다큐의 중심 이야기가 되는 강희철이라는 개인이 1986년에 체포되어 16년간 복역해야했던 참혹했던 고통의 뿌리가 1948년 4월 3일에 제주도에서 시작된 일에 있었기 때문이다. 무려 사십년 전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한 개인의 인생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만큼의 위력을 가졌다면 그 사건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하나의 이야기 축은 4.3 항쟁의 시작에서, 또 다른 이야기 축은 강희철의 현재의 삶에 두고 그 두 이야기를 교차 편집을 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48년의 4.3 항쟁과 2005년을 살고 있는 강희철이라는 개인의 역사가 만나게 된다.

  김윤아가 내래이터로 나오는 첫 번째 이야기 축은 4.3 항쟁을 전후한 제주도의 상황을 역사적 사료에 근거해서 차근차근 짚어나간다. 여기에 주로 사용된 기법은 재연인데, 주목할만한 점은 대사와 행동의 변화가 정적이라는 점이다. 마치 정지된 사진 이미지처럼, 칼라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화면 구성은 그 자체로 당시의 자료 화면을 연상케 만든다. 특히 54년 북촌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묵념 사건에 대한 기술에 있어서는 연출된 여러 장의 사진 이미지들을 조합해서 보여줌으로써 그 사건의 실재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이미지를 중시하는 특징은 핏빛이 주조를 이루는 애니메이션 장면의 삽입에 있어서 더욱 두드러진다. “빨갱이”로 몰려서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했던 민간인들을 상징하는 색이자, 희생과 분노의 의미를 담고 있는 붉은 색은 매우 강렬한 시각적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다 김윤아가 직접 부르는 노래들은 시청자들에게 정서적으로 강하게 호소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첫 번째 이야기 축은 비극적 역사에 대한 시청자들의 감정 이입과 동화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반면 일반 성우가 내래이터로 나오는 두 번째 이야기 축은 차분하고 건조하게 진행된다. 강희철 자신이 말하는 개인사와 간첩 사건과 관련된 진실은 주변 인물들의 증언에 의해 뒷받침 되고 있다. 또한 강희철 이전에도 조작된 간첩단 사건인 65년 혁명당 조작 사건과 77년의 강우규 간첩 사건의 피해자들을 조명하면서 4.3 항쟁의 고통스러운 그림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깊이 드리워졌는가를 또렷이 응시하게 만든다.

  이 두 번째 이야기 축에서도 재연이 사용되기는 하지만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물들의 인터뷰 그 자체만으로도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데에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보도된 신문 자료와 인물들의 현재의 삶을 담아낸 화면은 이 이야기 축에 사실성과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두개의 축을 따라가던 각각의 이야기들은 마침내 2005년 현재에서 만나게 된다. 김윤아의 내래이션은 1948년에서 4.3 특별법과 턱수건 할머니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알려진 오늘날로 사뿐히 날아온다. 또 다른 이야기 축이었던 강희철은 2005년인 지금, 보안관찰을 연장한다는 통보를 제주지검에서 받는다. 합쳐진 하나의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직도 4.3은 끝나지 않은, 여전히 피 흘리고 있는 현재의 역사라는 것이다.          


2. 왜 김윤아의 제주도인가

  앞서서 이 다큐는 두개의 이야기 축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기술하였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그 이야기들을 구분짓는 편집상의 특징은 무엇일까? 바로 노래이다. 김윤아가 부르는 노래는 하나의 이야기 축에서 다른 이야기 축으로 이동할 때 나오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노래들의 사용은 내용의 전체적인 통일성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을까? 

  분명히 음악이 나오는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 음악이 가사가 있는 노래라면 시청자들의 주의력은 화면뿐만 아니라 노래의 가사를 파악하는 것에 분산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반복, 삽입된 노래들은 이야기의 중심에 쉽게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문제는 김윤아가 내래이터로 나오는 이야기 축에서 중심이 되어야하는 것이 4.3 항쟁의 역사적 궤적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김윤아의 노래들과 그 독특한 음성이 더 지배적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김윤아의 제주도”인가? “김윤아”라는 이름이 대표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가수라는 직업적 정체성 외에 제주 4.3 항쟁을 잘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를 대표한다는 뜻일까? 확실히 김윤아는 여느 인기 가수들과는 차별되는 코드를 지니고 있다. “자우림”이라는 인디에서 출발해 이제는 메이저가 된 밴드의 보컬로 활동하면서 자신만의 독자적 음악세계를 구축해왔을 뿐만 아니라 음악 외적인 면에서도 여성 문제라던가, 다른 사회 문제에 있어서 나름의 목소리를 내왔던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4.3항쟁을 다룬 기존의 다큐들과 확연히 다른 지점을 구축하기 위해 “김윤아”라는 카드를 쓴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다큐 중간 중간 삽입되는 노래들을 직접 부른 김윤아의 모습이나, 감각적인 비주얼이 들어간 애니메이션, 재연 부분에 들어간 사진적 이미지의 구성은 이 프로가 젊은 세대들을 주 시청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이 프로그램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어느 정도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지녔는가에 관해서는 의문이 든다. 뮤직 비디오를 찍는 것도 아닌데 노래를 부르는 김윤아의 클로즈업된 얼굴을 여러 번 보는 것은 김윤아의 팬이 아닌 다음에야 매우 곤혹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깊게 논의되어야할 점은 김윤아가 하는 내래이션에 관한 것이다. 

  그의 내래이션은 과연 자신의 내적 체험과 통찰에서 나온 것일까? 단지 대본 작가가 써준 것을 그대로 읊어 내려가는 것이었다면 내래이션의 화자가 “나(김윤아)”로 나오는 부분은 솔직하지 못한 것이며 사실이 아니다. 내래이터를 유명인으로 쓰는 문제에 있어서 신중해야할 부분은 바로 그런 점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제작진은 “김윤아”라는 카드를 씀에 있어서 형식적이고 외적인 부분에 치우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3. 진실의 힘

  이 다큐를 보면서 나는 새삼 방송을 만드는 이들의 사명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방송 프로그램은 때론 즐거움을 주기 위해 제작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목적은 가난하고, 소외받고 있으며,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쉽게 잊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이유로 침묵 속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공평하다는 것은 그러한 사회적 약자들에게 발언의 기회를 주고, 그들이 우리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웃임을 일깨우는 일일 터이다. 방송은 그 중요한 역할을 놓쳐서는 안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윤아의 제주도”는 그런 점에서 본다면 그 기획 의도를 나름대로 높이 사줄만 하다. 제주 4.3 항쟁이 오늘날까지 드리운 치유되지 않는 상처와 고통의 그림자를 응시하게 만들고, 그 그림자 속에서 침묵을 강요받았던 한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잊혀진 목소리를 불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다큐를 통해 들을 수 있었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거기에 서린 깊은 슬픔은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와닿았다. 이것은 오직 그 목소리에 실린 진실의 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진실의 힘, 그것 외에 다른 것들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이 아무리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마음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을 구태여 보기 쉽고, 듣기 좋게 포장해야할 필요가 있다면, 그만큼 오늘날에는 진실마저도 미디어와 자본의 논리에 좌우되고 있고, 이러한 상황에 우리들이 무감각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다큐에 나온 가수 김윤아나, 그의 노래나, 눈길을 끄는 애니메이션 등과 같은 시도는 결국 포장일 뿐이다. 그것은 이 다큐가 가진 창조성과는 상관이 없고, 그 보다는 대중성을 고려한 결과이다. 방송 다큐가 시청률과 광고주의 요구를 고려하여 갈수록 연성화되어가는 경향은 참으로 우려할만하다.

  보다 많은 이들에게 진실을 얼굴을 마주보게 만드는 다양하고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김윤아의 제주도”에 그러한 방법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쉽고 편하게 가려고 했다는 점이다. 이 다큐를 보고난 다음에 김윤아의 노래와 그 얼굴이 더 오래 남는다면 이것은 분명 실패한 다큐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내게는 제작진이 진실이 가진 힘을 보다 신뢰하고 기대었어야한다는 아쉬움이 남는 다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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