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 칸기 라시드 앗 딘의 집사 2
라시드 앗 딘 지음, 김호동 옮김 / 사계절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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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서 연장을 4번이나 하는 동안 한달이 지나가버렸다. 한 달 동안 이 책을 읽은 것은 아니고, 빌리고 보니 꽤 두터운 부피, 한도 끝도 없이 나오는 무수한 인명에 질려서 책 읽기를 미루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정작 이 책을 읽는데 걸린 시간은 단 하루였다. 마음먹고 최고의 집중력을 쏟은 것이다.

 

   칭기스칸의 조상과 그의 일대기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낸 이 책은 그렇게 쉽게 읽히는 책도, 아주 재미있다고 할 수 있는 책도 아니다. 부족의 통일을 이루고 더 나아가 중국과 중앙 아시아를 지배한 칭기스칸 일생에서 대단한 모험담이나 박진감 넘치는 전쟁을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면 분명 실망할 것이다. 이 책에는 무자비한 살육, 피비린내나는 권력투쟁의 냉혹함이 무미건조한 문체로 담겨져 있다. 

 

  결국 이 책이 내게 던진 마지막 물음은 과연 무엇이 그로 하여금 죽는 날까지 말을 타고 전쟁터를 누비게 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피와 전쟁에 도취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원대한 세계 정복의 이상을 지닌 군주였을까? 어쩌면 그가 살았던 시대는 생존하기 위해서 폭력이 필수적인 야만의 시대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현대성이라는 세련된 의식을 지니며 살고 있다고 믿는 지금의 세기는 기이하게도 이 책이 묘사하는 시대의 그것과 닮아있다. 내게는 그 점이 더 놀랍게 생각될 뿐이다.

 

  때로 독서의 경험은 재미를 뛰어넘은 그 무언가에 도달하는 작업이라는 생각도 든다. 사명감과 열정이란 말이 어울리는 이 책을 낸 출판사와 역자의 노고가  읽는 내내 많은 힘을 주었다. 새로운 독서의 세계를 체험하게 해준 이 책을 보다 많은 이들이 알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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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죠운 현대영미드라마학회 영한대역 23
조지 버나드 쇼 지음, 김봉정 옮김 / 동인(이성모)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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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5학년 때, 전학을 가는 나에게 잔 다르크와 그리스도의 전기를 선물해준 아이가 있었다. 초등학생이 보기엔 다소 작은 활자로 인쇄된 그 책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보니 사실 대단한 감동 보다는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로 읽혔던 것 같다. 특히 잔 다르크가 영국군에게 붙잡힌 후 높은 감옥에서 뛰어내려 탈출을 시도하는 장면에서는 기이한 경외감마저 느꼈다.

 

  나이가 들어서 만난 잔 다르크는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한 영화의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최근 들어서는 EBS에서 해준 2부작 TV물을 보았으나 별로 눈길을 끌만한 점은 없었다. 그러다가 자끄 리베트 감독이 연출한 잔 다르크를 보고나니 그 인물이 이전과는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 같다.

 

  버나드 쇼가 그려낸 잔 다르크는 어떤 맥락에서는 리베트의 시각, 즉 성녀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면모, 그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예리한 시각으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통한다는 생각도 든다. 쇼는 이 희곡에서 잔 다르크의 무용담이 아닌 혁신을 주장하는 새로운 인물에 대한 기득권층과 시대의 불협화음에 더 초점을 두었다. 그것은 예수가 유대 지도자들과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하는 것과 비슷해 보이며, 실제로 극의 구조는 그리스도의 수난극을 재현하고 있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쇼의 재능은 죽은 잔 다르크와 재판에 관련된 이들, 샤를 국왕의 대면이 꿈 속에서 이루어지는 마지막 장에서 빛난다. 이 장은 쇼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아무리 정의롭고 선한 가치를 지닌 인물이라 하더라도 법과 제도, 정치적인 판단에 의해 희생될 수 있다는 메시지는 읽는 이의 폐부를 날카롭게 찌른다.

 

  쉽게 읽을 수 있는 가벼운 부피의 책은 아니지만 쇼의 글솜씨에 빠지다보면 시간이 어찌가는 줄도 모른다. 깊이 있는 희곡 읽기를 희망하는 이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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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을 밟다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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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으면서 보르헤스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때가 문득 떠올랐다. 보르헤스는 나에게 놀라움과 충격 그 자체였다. 그의 글 속에 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것, 꿈꾸는 모든 것이 들어있었다. 그때부터 보르헤스는 내 글쓰기와 문학의 이상이 되었다.

 

  이 책의 작가 가와카미가 주는 느낌은 물론 보르헤스만큼 엄청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가 보르헤스를 떠올린 이유는 그의 글이 주는 낯섬과 기이함이 여타 다른 소설과는 확연히 구분되었기 때문이었다. 현실과 꿈의 경계 사이를 유려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는 그의 글은 환상 문학이라던가 하는 범주에 쉽게 넣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닌 듯 하다. 분명히 날 것의 현실은 아니되, 그렇다고 환상성에 매몰되지 않는 작가의 문학 세계는 보르헤스의 글을 떠올리게 하는 지점이 있다.

 

  어느 날 무심코 밟은 뱀과 동거하게 된 여자가 뱀과 의식을 공유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뱀을 밟다”의 섬세한 묘사와 흡인력 있는 문체도 좋지만, 이 책에 실린 세편의 글 가운데 나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사라지다”였다. 작가의 상상력이 풀어내는 이 기이한 이야기 속에서 현실의 가족의 모습을 읽어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가와카미는 이 책에 실린 글을 스스럼없이 “거짓말”이라고 칭한다. 그의 거짓말은 그 어떤 것보다 진실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 되어준다는 점에서 매혹적이다. 그래서였을까? 오래전, 보르헤스를 읽으면서 심하게 흔들렸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책을 덮으면서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만약 보르헤스가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글을 쓰지 않았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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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다큐는 지난 5월, 우즈베키스탄에서 발생한 유혈 사태의 참상에 대한 신속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사태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시청자들의 시사적 안목을 넓혔다는 점에서 정보성과 시의성이 돋보인다. 또한 이 유혈 참극에 있어서 미국의 역할을 규명하고, 석유자원을 둘러싼 강대국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연방 독립국의 정치 경제적 현실을 조명한 부분 또한 논리성이 돋보였다.

 

  무엇보다 이 다큐에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인터뷰의 효과적인 사용에 관한 것이다. 다큐의 전체적인 얼개는 인터뷰가 내레이션에서 제기한 문제와 의문들에 대해 효과적인 답을 주고, 인터뷰에서 제기된 문제는 내레이션으로 설명해주는 반복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방식은 시청자가 주제에 흥미를 잃지 않고 계속적으로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물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인터뷰 대상자의 선정인데 전문가와 전직 관료, 사태 피해자들의 인터뷰는 나름대로 적절했다는 판단이다. 또한 시사 다큐의 특성을 살려서 사태와 관련하여 보도된 TV 자료를 배치한 것도 다큐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데에 기여했다고 본다.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다큐에는 몇몇 허점들이 보인다. 그것은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 보다 다양하고 균형 잡힌 관점을 제시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석유와 미국, 연방국의 민주주의 혁명과의 관련성이 지나치게 부각되어서 다른 측면을 살펴보는 데는 소홀했다는 인상을 준다.

 

  5월 23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강병태 칼럼은 이 다큐가 간과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미국이 러시아, 중국과의 영향력 경쟁과 관련, 이미 카리모프 정권과 노골적으로 갈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지역의 미국 세력 확장에 맞서서 중국과 러시아가 조직한 상하이 협력기구 정상회의(SCO)가 지난해 6월 우즈베키스탄에서 열렸다. 여기서 러시아는 우즈벡과 전략적 동반관계를 맺었고 이를 통해 우즈벡의 석유 공급을 장악하려는 미국의 의도에 타격을 입힌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다음달, 미국과 유럽은 우즈벡의 인권상황을 이유로 경제 원조를 동결했고, 이를 통해 미국은 카리모프 정권의 붕괴를 통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한다는 관측이 나왔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다큐에서는 미국이 카리모프 정권에 대해 지지를 보내고 있다는 점만을 부각시켰고, 우즈벡 정치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분석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끝부분에서야 중국에 관한 부분이 다루어지긴 했지만 사실 그 부분은 다큐에서 계륵과도 같은 느낌이 든다. 생뚱맞다는 인상인 것이다. 그러한 인상을 주게 된 것은 우즈벡과 주변국 사이의 유기적 연관관계에 대한 파악 없이 슬쩍 끼워 넣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디잔 지역의 소요 사태에 정체불명의 무장세력이 끼어들어 교도소와 정부 공격으로 이어졌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사실임에도, 다큐는 수감된 사업가 아버지와의 인터뷰에서 나온 테러조직과 무관하다는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인터뷰는 어디까지나 사실 확인의 단서가 될 수 있을 뿐이지 그 자체가 사실이 아니라는 점에서 제작진의 철저한 자료 조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었다.

 

  시사 다큐가 시의성과 신속함을 필요로 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시청자들의 정확한 이해와 판단을 위해 면밀하고 정확한 자료 분석이 선행되어야만 하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현장 보고> 우즈벡 유혈 사태, 그 진상은?”은 다소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있다. 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자세와 안목으로 이러한 다큐를 제작, 편성한 방송사의 노력이 보다 치열하고 정교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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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만시아.사기꾼 페드로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3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김선욱 옮김 / 책세상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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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곡을 읽다보면 희곡의 번역에는 정확성 이외의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히 든다. 바로 연극성에 대한 이해이다. 희곡의 언어는 상연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읽는 맛이랄까, 그것을 말로 표현했을 때의 생동감과 운율이 살아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그러한 요소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특히 “사기꾼 페드로”를 직접 소리를 내어서 읽었을 때는 얼마나 즐거웠는지. 그것은 세르반테스의 뛰어난 문학성에 기대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역자의 연극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번역이 한몫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만시아”는 “사기꾼 페드로”가 주는 즐거움과는 달리 비장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스페인의 실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이 비극은 전쟁의 광기,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고통과 폭력에 대해 돌아보게 만든다.  

 

  조용한 독서가 지루하다고 생각될 때 희곡집을 펼쳐서 소리내어서 읽어보라. 그 안에 살아서 펄떡이는 언어가 있음을 알고는 놀라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그 언어의 발견을 위한  좋은 안내자가 되어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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