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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을 밟다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으면서 보르헤스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때가 문득 떠올랐다. 보르헤스는 나에게 놀라움과 충격 그 자체였다. 그의 글 속에 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것, 꿈꾸는 모든 것이 들어있었다. 그때부터 보르헤스는 내 글쓰기와 문학의 이상이 되었다.
이 책의 작가 가와카미가 주는 느낌은 물론 보르헤스만큼 엄청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가 보르헤스를 떠올린 이유는 그의 글이 주는 낯섬과 기이함이 여타 다른 소설과는 확연히 구분되었기 때문이었다. 현실과 꿈의 경계 사이를 유려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는 그의 글은 환상 문학이라던가 하는 범주에 쉽게 넣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닌 듯 하다. 분명히 날 것의 현실은 아니되, 그렇다고 환상성에 매몰되지 않는 작가의 문학 세계는 보르헤스의 글을 떠올리게 하는 지점이 있다.
어느 날 무심코 밟은 뱀과 동거하게 된 여자가 뱀과 의식을 공유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뱀을 밟다”의 섬세한 묘사와 흡인력 있는 문체도 좋지만, 이 책에 실린 세편의 글 가운데 나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사라지다”였다. 작가의 상상력이 풀어내는 이 기이한 이야기 속에서 현실의 가족의 모습을 읽어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가와카미는 이 책에 실린 글을 스스럼없이 “거짓말”이라고 칭한다. 그의 거짓말은 그 어떤 것보다 진실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 되어준다는 점에서 매혹적이다. 그래서였을까? 오래전, 보르헤스를 읽으면서 심하게 흔들렸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책을 덮으면서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만약 보르헤스가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글을 쓰지 않았을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