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회고전' 한 자락.
중학교 때 그렸던 몇 장의 그림들, 사실 거의 잊고 있었는데, 실로 오랜만에 베란다 정리를 하다가 발견하고 말았다(아니, '발굴하고 말았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옛 추억들이 새록새록 밀려온다. 그래서 달콤하면서도 고통스럽다. 예전에는 그림 그리는 걸 참 좋아했는데, 요즘은 너무 오래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말하자면, 다시 그리고 싶은 거다. 그림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면서, 그림에 대해 품고 있던 그때의 열정들도 다시 되살아나고,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회한도 밀려오고,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그저 그리고 싶은 거다.
▷ 람혼, <담배를 쥐고 있는 노인>(1991).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렸던 그림으로 기억하고 있다. 화면 좌측 상단의 커다란 붉은 손톱(?) 같은 것은 붉은 그믐달을 그린 것이다. 기억 속에만 어렴풋이 존재하던 그림인데, 무엇보다 이 그림을 '발굴'할 수 있어서 가장 좋았다고 말해야겠다. 이 그림을 그렸던 당시 김호석 화백님이 이 그림에 대해 한 마디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 말씀의 정확한 내용은 지금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중학생이 이런(?) 그림을 그린 걸 신기하게 생각하시면서도 왠지 안쓰럽게(?) 여기신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때의 내 느낌이 정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김호석 화백님은 그때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약간은 착잡한 표정을 머금으셨던 것도 같다. 당시 화백님의 작품들은 실사(實寫) 화면을 한가득 채운 슬픈 은유들로 내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다. 그러나 그러한 아픔의 느낌은 내가 당시 김호석 화백님의 작품들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계기이자 이유이기도 했다. 이 그림에는 어쩌면 그런 영향들이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 람혼, <無題>(1991년경).
역시나 중학교 때 그린 그림. 커다란 탱화 한 점을 그려보고자 시작했으나 결국 미완성으로 남은 작품이다. 실로 오랜만에 '발굴'하고 정말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고운 주황색 종이가 완성되지 못한 그림을 곱게 숨긴 채 그렇게 곱게 접혀 있었다.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펼치고 사진을 찍었다, 어둡게, 어두운 마음으로.
▷ 람혼, <침 흘리는 여인>(1990년경).
이것도 중학교 때의 그림. 데생 시간에 시키는 그림은 안 그리고 이런 짓을 하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스스로 평가해보자면, 전체적으로 피카소(Picasso)의 영향이 강력하게 느껴지는 그림이라고 하겠는데, 왜 의자에는 저렇게 많은 금들이 가 있는지, 왜 저렇게 빈틈없이 균열되어 있는지, 지금의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 람혼, <야, 우리도 돈 좀 벌자!>(1991년경).
위의 <담배를 쥐고 있는 노인> 그림과 비슷한 시기의 그림으로 추정된다. 오른편에 '야, 우리도 돈 좀 벌자!'라는 글이 쓰여 있다. 난 그때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알 수 없다. (또한 '美史'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로 썼던 것일까? 모르겠다. 그 시절의 아호였던가?) 갱지에 붓 가는 대로 마구 휘갈겼던 그림, 그래서 오히려 더 소중하다, 순간을 담고 있어서. 섬섬옥수, 악의와 허약함을 동시에 가득 담고 있는 듯한 손가락들이, 지금에 와서 뒤늦게, 아찔하고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 람혼, <얼굴-연작>중 일부(1992년경).
중학교 3학년 때쯤의 그림으로 추정된다. 그때 난 점점 '표현주의적'이 되어 가고 있었나 보다. 이때쯤 '얼굴 연작'을 구상했던 기억이 난다. 다양한 모델들을 바탕으로 변조된, 다소 위악적이고 거친 화면 구성을 통한 몇 백 장의 얼굴들을 그리는 연작을 구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결국 완성은 하지 못했다. 이 연작의 일부들도 모두 미완성으로 남은 것들.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 얼굴들은 모두 내 마음속에 있다, 하지만 찾을 수는 없다, 그저 그렇게 있을 뿐.
▷ 람혼, <莊子, 應帝王, 第七에 대한 한 해석>(2006).
이건 2006년 첫날에 쓰고 그린 것인데, 현재 내 서재의 한쪽 벽에 부착되어 있다. 말하자면 『莊子』의 한 장면에 대한 작은 형상화를 의도했던 것. 그러나 그림은, 글은, 언제나 그 의도를 가볍게, 그러나 또한 무겁게 벗어난다. 이성복 식으로 말하자면, 입이 없는 것들,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기관 없는 신체들, 그런 것들(사실 이 모든 것들은 말이다, 말일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구멍 뚫리고 찔리고 당하는 것들, 그런 것들(그러나 말은, 여기서, 말의 무게를 벗어난다, 혹은 말이 아닌 것의 무게를, 마치 말처럼, 덧입는다). 돌이켜보면, 이렇듯 20대 때의 그림은 저 10대 때의 그림보다 뭔가 좀 더 '미니멀'해진 그런 느낌이다. 30대의 그림은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그게 궁금하다. 그러니 다시 그릴 수밖에.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모든 그림들을 실로 오랜만에 갑자기 베란다에서 '대량 발굴'하고 나니, 그리고 이렇듯 들쑥날쑥 다양한 스타일의 그림들로 구성된 때아닌 회고전(?)을 열고 나니, 정말 새롭게 그림을 시작해보고 싶은 욕망이 치솟는다. 다시 그림을 그려야겠다, 가능하다면, 치열하고 탐욕스럽게, 어쩌면 그저 탐욕스럽게만, 그렇게, 지금은 다만 그러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라고 말한다, 불가능하겠지만, 이라고 말하지만,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불가능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라는 물음을 남기며. 노파심에서 다시 말하자면, 이는 '불가능은 없다'는 식의 순진한 희망에 대한 예찬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 어쩌면 오히려 기쁜 절망 같은 것에 가까울 터.
— 襤魂, 合掌/合葬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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