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에 관한 저서나 논문을 읽는 일은 실로 많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중요한 것은, 역사에 관한 글은 연역적일 수 없고 언제나 귀납적인 방식으로 결론을 도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귀납법의 추동력은 결국 풍부한 사료이다. 사료가 얼마나 풍부하고 다양하며 집중적인가에 따라 그 사료를 근거로 한 결론이 힘을 얻는다. 뒤집어서 말한다면, 수백 쪽에 달하는 사료가 단 한 줄의 결론적인 문장을 도출하는 것이다. 여기서 저술에 사용된 사료들은 모두 그 구체적인 내용과 시대 그리고 등장인물들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어떤 하나의 '현상'과 동일한 주제에 대한 여러 변주(variation)들이다. 그러므로 역사책 읽기란 곧 결론 읽기가 아니라 서론 읽기, 본론을 가장한 서론을 꼼꼼히 읽어나가는 행위인 것, 또한 그 독서는 지극히 '개인적으로' 사회적인 행위 중의 하나인 것. 이하 몇 개의 연속적인 글들을 통해 거시와 미시를 넘나드는 몇몇 뛰어난 역사서들을, 역시나 지극히 '개인적으로' 소개해보고자 한다.

           

▷ Philippe Ariès, L'homme devant la mort, I. Le temps des gisants
    Paris: Seuil(coll. "Points histoire"), 1985(1977¹).
▷ Philippe Ariès, L'homme devant la mort, II. La mort ensauvagée
    Paris: Seuil(coll. "Points histoire"), 1985(1977¹).
▷ 필립 아리에스, 『 죽음 앞의 인간 』(고선일 옮김), 새물결, 2004.

2) 역사에 대한 글의 독서를 지난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단 한 줄의 결론에 도달하기 위하여 그 모든 사료들을 말 그대로 '건너가고 거쳐가야' 하는 읽기의 과정이다. 우리는 물론 단 한 줄의 결론만을 읽고 재빠르게 그것만을 취할 수도 있다(저 많은 사료가 '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는 '이유 없는' 반항). 또는 보통 역사서의 맨 마지막 장에 위치한 결론만을 읽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ès)의 책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방식과 죽음을 경험하는 주체는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는 결론에 바로 도달할 수 있다(『죽음 앞의 인간(L'homme devant la mort)』. 당신은 훌쩍 1000쪽을 넘는 이 두터운 번역본을 읽으며 번역의 미덥지 못함을 발견할 때마다 내가 느끼는 소심하고 신경증적인 짜증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사실은, '일반적으로' 하는 말이지만, 위 번역본의 가독성은 상당히 뛰어난 편에 속한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라는 물음은 역사책의 독서에서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문형이다. 그리고 이 '어떻게'를 이해하고 이론적인 근거로 내재화하는 것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일이다. 역사서 읽기에는ㅡ물론 이 '부재하는 지름길'에 대한 비유는 너무도 식상해서 이 수사법을 사용할 때는 마치 죄를 짓는 기분까지 들지만ㅡ지름길은 없다. 다만 한 걸음 한 걸음 저자가 어떤 일정한 순서와 배치를 통해 모아놓은 사료들의 이런저런 지형들을 걸어 지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것이 역사에 대한 글을 읽는 고통스러운 쾌락이다. 곧, 그 쾌락은 하나의 길인 것, 하나의 결론을 위해 치달아야 하는 '건너가고 거쳐가야' 하는 과정이 아닌 것, 그것은 방편이 아니라 그 자체가 머무를 수 있고 머물러야 하는 하나의 길이다.

3) 아리에스가 서구의 죽음을 분류한 저 유명한 구분법에 대해서는 여기서 따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급사(急死)를 일종의 저주로까지 여겼던 '예고된 죽음'의 시대에 관한 것이다. 예고되는 죽음, 미리 알고 있는 죽음은 정리의 시간을 전제로 한다. 죄를 사함, 곧 고해를 위해 준비된 시간이 바로 그것이다. 급사는 그러한 준비를 위한 시간, 구원을 위한 시간을 갖지 못한다. 급작스러운 죽음은 삶을 온전하게 완결짓지 못한 치욕스러운 일인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특히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만 '죽음을 예견하는 능력' 같은 것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이 시대의 '죽음'이란 무엇보다 이러한 정리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준비된', 그리고 '예고된' 죽음'이어야 했다'. 이 '일요일의 역사가' 아리에스를 심성사(心性史, histoire des mentalités)의 대표적 역사가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당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지니고 있던 이러한 '심성'에 대한 그의 풍성한 분석력 때문인 것이다. 위 책들의 일독을 권한다. 원서의 초판은 1977년에 나온 바 있고, 1985년에 두 권으로 분책되어 'Points histoire' 총서의 문고판으로 다시 출간되었다(소장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문고판). 또한 아래의 책들을 먼저 읽고 다시 위의 책들을 읽는 순서도 권할 만하다. '그림으로 보는 <죽음 앞의 인간>' 정도의 표제를 가져야 할 책인데, 실은 『죽음 앞의 인간』보다 먼저 번역되었고(그래서 "죽음 앞에 선 인간"이라는 다소 어중간한 제목을 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죽음에 관한 매력적인 도판들을 다수 싣고 있으며 일종의 '요약판' 내지는 '도해판'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이 시점에서 문득 떠오르는 책은 바로 바타이유(Bataille)의 『에로스의 눈물(Les larmes d'Éros)』인데, 바타이유가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펴낸 이 눈부신 책에 관해서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 Philippe Ariès, Images de l'homme devant la mort, Paris: Seuil, 1983.
▷ 필립 아리에스, 『 죽음 앞에 선 인간, 上 』(유선자 옮김), 동문선, 1997. 
▷ 필립 아리에스, 『 죽음 앞에 선 인간, 下 』(유선자 옮김), 동문선, 1997.

4) 우리가 역사에 대한 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사료들로부터 저자가 뽑아낸 어떤 결론이 아니라 그가 사료들을 조직하고 배열하고 그로부터 결론을 도출해내는 방법론이다. 사실 역사가의 '결론'이란 이러한 그만의 전체적인 '방법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료들은 결코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가의 방법론이 이 사료들의 선택과 성격 그리고 존재 자체까지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곧 역사가의 방법론은 그 역사가가 지닌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닌 것이다. 어떤 사료들을 선택하고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의 문제, 곧 특히 역사적인 서술에서 저자가 채택하고 있는 방법론과 기술 방식 그 자체가 역사에 대한 그의 어떤 '결론'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 스스로 역사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예를 들자면,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아날(Annales) 학파의 역사가들이 그러하고, 미시사(microhistory) 역사가들 또한 그러하다. 물론 여기서 푸코(Foucault)의 거의 모든 저작들이 보여주는 저 '역사성', 그리고 그가 다른 '역사가'들과 맺고 있는 내적인 관계 역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필립 아리에스, 『 죽음의 역사 』(이종민 옮김), 동문선, 1998.
▷ 필립 아리에스, 『 아동의 탄생 』(문지영 옮김), 새물결, 2003.

5) 아리에스의 책으로는 두 권을 더 추천한다. 『죽음의 역사』는, 일단 그의 죽음에 관한 '사분법'을 가장 압축적이고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기에, 어쩌면 아리에스의 역사학에 입문하는 데에 있어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책일지도 모른다. 일견 역사학이라는 학문의 테두리를 넘어서 있는 듯이 보이는 이 '죽음'의 역사는, 결국 하나의 '삶'의 역사, 곧 사람들이 어떻게 죽음을 사고하고 어떤 방법으로 죽음을 '살아내는가'를 보여주는 심성사의 가장 매력적인 주제라는 생각이다. 또한 『아동의 탄생』의 일독을 권한다. 책의 제목에서도 간파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아동'이라는 개념의 탄생, 곧 사람들이 어린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취급'해 왔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잠깐 지나가는 길에 내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탄생'이라는 단어이다. 이 책의 원제는 '앙시앵 레짐 하의 아동과 가족의 삶'으로서, 원래는 제목에 '탄생'이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는다. 사실 국내에서 '탄생'이라는 표제가 유행하게 된 계기는 어쩌면 푸코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임상의학의 탄생', '감옥의 탄생' 등등, 또한 르 고프(Le Goff)의 '연옥의 탄생'ㅡ이는 물론 원제에서도 동일하지만ㅡ이라는 제목과 개념도 역시). 그러나 사실 이러한 '탄생'의 개념이야말로 아날 학파와 심성사의 방법론을 대표하는 표제라는 생각이다. 오히려 푸코가 '탄생'이라는 단어와 개념을 전면에 배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아날 학파의 '배경'을 성공적으로 전유하고 매력적으로 자기화했기 때문이었다. 사건으로서의 역사, 제도로서의 역사가 아닌 하나의 개념과 그에 따르는 심성으로서의 역사, '탄생'의 개념은 바로 이러한 역사학을 이해하는 하나의 훌륭한 키워드인 것.  

6) 앞으로 기회가 될 때마다 이 연재의 일환으로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 뤼시엥 페브르(Lucien Febvre),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조르주 뒤비(Georges Duby), 자크 르 고프(Jacques Le Goff), 카를로 진즈부르그(Carlo Ginzburg) 등의 책들을 차례로 소개해볼까 한다. 말하자면 나는 어떤 '크로스오버'나 '퓨전'에 대한 서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문학화, 철학의 문학화. 저자가 자신의 방법론을 서론에서 밝히는 것, 그것은 서론 속에 결론을 숨겨놓는 것, 옷자락 안에 품은 칼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론은 또 하나의 결론, 책의 서술 순서로부터 역산(逆算)할 수 있는 결론의 원래 모습이다. 거쳐가게 하는 것, 통과해야 하는 것, 말하자면 일종의 '천국 같은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 사실은 말이다. 따라서 사실 이 '지옥' 앞에서 연역법이 먼저인가 귀납법이 먼저인가 하는 물음은 또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식의 '역사학적' 물음이기도 한 것.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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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7-17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재가 고대되는군요.^^

람혼 2007-07-18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로쟈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