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에르 마슈레, 『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서민원 옮김), 동문선, 2003.
▷ Pierre Macherey, À quoi pense la littérature?, Paris: PUF, 1990.

1) 얼마 전 우연찮은 계기에 피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의 논문 「조르주 바타이유와 유물론적 전복(Georges Bataille et le renversement matérialiste)」을 국역과 대조해가며 오랜만에 다시 꼼꼼히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이 논문은 마슈레의 문학론을 모은 책인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À quoi pense la littérature)?』에 실려 있는 글인데, 바타이유의 사상에서 발견되는 이른바 '유물론적' 입장에 대한 희귀한 탁견을 담고 있음과 동시에 [사르트르(Sartre)와 바타이유의 비교 못지 않게 중요한] 브르통(Breton)과 바타이유의 비교 분석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주목을 요하는 논문이다. 원서는 현재 절판 상태이며 개인적으로는 복사본만을 갖고 있다(그러한 이유로 인해 원서 표지의 사진을 올리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 양해를 구하며, 동시에 혹시라도 이 책을 해외 중고서적 웹사이트에서 발견하여 알려주시는 분께는 후사를 약속하고 또한 장담하는데, 몇 년째 틈날 때마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이 책을 찾곤 하는 나로서는, 이제는 약간 포기하는 심정에 가까운 쪽으로 기울었다는 점을 솔직히 고백해야 하겠다). 국역본에 관해서는, 별로 따로 말하고 싶지 않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절대 구입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만을 적어두기로 하자(이러한 부정적인 언급이 또한 때때로 판촉의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일 것이다). 도대체 이 국역본은, 책의 제목을 문자 그대로 차용하자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번역되었을까, 내가 제일 궁금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사실 말이 나온 김에 동문선 출판사의 번역본들에 대해서 한 마디만 하자면, 왜 그런 명저들의 판권을 다량으로 가져가서는 그토록 허술한 번역본들을 양산해내는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할 밖에, 하지만 물론 몇몇 예외도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바로 떠오르는 그 예외의 일례를 들자면 당장 곽광수 선생의 바슐라르(Bachelard) 번역을 제시하고 싶지만, 그런데 이 책은 가만히 생각해보니, 사실 예전에 이미 민음사의 이데아 총서를 통해 선보였던 책이 아닌가 말이다!).




▷ Louis Althusser, Étienne Balibar, Roger Establet, Pierre Macherey, Jacques Rancière, Lire le Capital, Paris: PUF(coll. "Quadrige"), 1996.

2) 아는 사람들은 다 알다시피, 마슈레는 알튀세르, 발리바르, 랑시에르, 에스타블레 등과 함께 『자본론 읽기(Lire le Capital)』(초판은 Maspero,1965)를 저술한 '마르크스주의자'이다. 이 책을 일독하라는 권유는 개인적으로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생각한다. 60년대 사상이 일으킨 폭풍의 핵심에 위치했던 저서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마르크스에 대해서 [여전히] 새롭게 사유하게끔 만들어주는 책이기 때문이다(이러한 마르크스의 '재전유'에 대해서는 후일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책들만을 따로 소개하는 기회에 보충하기로 한다). 아주 예전에ㅡ아마도 90년대 초반 두레 출판사를 통해서였던 것으로 기억하지만ㅡ이 책의 국역본이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 번역의 질에 대해서는 왈가왈부 말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개인적으로 직접 국역본의 질을 확인해볼 기회는 불행히도(다행히도?) 아직까지 없었다. 어쨌거나 이러한 평가는 소문에 속지 말고 직접 확인하고 수행해보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종류의' 소문은 대부분 맞는다는, 그리고 맞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있는데, 그렇다면 현재 이 국역본이 절판이라는 사실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불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른바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의 쇄신'이라는 이름에 값할 운동 속에서 마슈레가 차지했던 위치에 대해서는 이미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바 있지만, 그가 또한 문학에 관해 몇 권의 묵직한 저서를 상자한 비평가의 면모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국내에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여기서 잠시, 프랑스의 사상 조류를 '문학화[안전화?]'하여 소화하는 경향이 있는 영미권의 비평계가 이러한 마슈레를 어떻게 수용하며 평가하고 있는지가 문득 궁금해지는데,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ㅡ보라, 나는 '영어를', 그러니까 '영어로', 병기한다ㅡ라는 '-ism' 또한 문학비평의 한 형태로서 가장 먼저 받아들였던 영미권의 학문적 '소화력'과 '편식 양태'에 대해서는 일종의 정밀한 ['문화적'] 정신분석이 필요하다는 개인적인 생각 한 자락만 밝혀두고 지나간다.


       

    

▷ Pierre Macherey, Introduction à l'Éthique de Spinoza. La première partie: la nature des choses, Paris: PUF, 1998.
▷ Pierre Macherey, Introduction à l'Éthique de Spinoza. La seconde partie: la réalité mentale, Paris: PUF, 1997.
▷ Pierre Macherey, Introduction à l'Éthique de Spinoza. La troisième partie: la vie affective, Paris: PUF, 1995.
▷ Pierre Macherey, Introduction à l'Éthique de Spinoza. La quatrième partie: la condition humaine, Paris: PUF, 1997.
▷ Pierre Macherey, Introduction à l'Éthique de Spinoza. La cinquième partie: les voies de la libération, Paris: PUF, 1994. 

3) 마슈레는 또한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노자주의자' 중의 한 명이기도 하다. 그가 펴낸 위의 다섯 권으로 된 스피노자 『윤리학(Ethica)』에 대한 주석서는 이미 스피노자 해석에 있어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지 오래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일독을 권한다. 또한 이 책들을 일종의 안내자로 삼아서 스피노자의 『윤리학』 원전 독해에 도전해보는 것도 권할 만하다(또 다른 스피노자 해석의 고전들, 예를 들어 게루(Gueroult)와 마트롱(Matheron)과 들뢰즈(Deleuze) 등의 책들은 다른 기회에 다른 자리에서 소개하기로 한다). 개인적으로, 국내에도 이미 하나의 학문적 '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많은 '스피노자주의자'들ㅡ이는 현재 국내에서 '라캉주의자'들만큼이나 하나의 '대세'라고 말하고 싶은, 하지만 또한 동시에 하나의 '거품'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은, 그런 느낌의 규정어인데ㅡ중의 한 명이 저 노작들의 번역에 어서 착수해주기를 고대해마지 않는다. 국내 스피노자 전공자들의 역량이 이제 그만큼 되었다는 느낌도 있거니와, 또한 이른바 소위 말하는 '국가적'이나 '민족적'인 입장으로 보았을 때도, 다른 나라와 비교해 한국에서 더욱 특수하게 비약적으로 성장해가고 있는 스피노자학 연구의 축적된 성과가 발휘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Pierre Macherey, Avec Spinoza. Études sur la doctrine et l'histoire du spinozisme, Paris: PUF(coll. "Philosophie d'aujourd'hui"), 1992.
▷ Pierre Macherey, Hegel ou Spinoza, Paris: La Découverte(coll. "Armillaire"), 1990.
▷ 피에르 마슈레, 『 헤겔 또는 스피노자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4.

4) 이 주석서들보다 조금 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는 마슈레의 스피노자 관련 논문집인 『스피노자와 함께(Avec Spinoza)』를 들 수 있겠다. 이 책은 이른바 '스피노자의 현대성'을 논함에 있어 중요한 저서 중의 하나로서, 다른 근대 철학자들(홉스, 파스칼 등)과의 비교에 관한 논문 및 현대 철학자들(러셀, 하이데거, 아도르노, 푸코, 들뢰즈 등)과의 영향 관계에 관한 논문들도 수록하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Hegel ou Spinoza)』(초판은 Maspero, 1979)의 일독을 권한다는 말 또한 빠트릴 수 없겠는데(사실 이 책은 마슈레의 책들 중에서도 '강추' 목록에 속한다), 이것이 마슈레의 가장 대표적인 주저라고 할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제목의 "또는(ou)"은 스피노자의 유명한 명제인 'Deus sive natura'에서 따온 것으로, 이 책의 논의 전개 상에서 'sive', 'ou', '또는'은 단순히 간과할 수 있는 성질의 접속사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둔다). 이 책은 몇 해 전 진태원 선생의 훌륭한 번역을 통해 이제이북스에서 국역본이 출간된 바 있다. 진태원 선생의 번역은 언제나 충실한 해제와 역주,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구열을 불태우게 만드는 꼼꼼하고 적확한 번역이 강점인데, 이 번역본에서도 역시 이러한 미덕이 십분 발휘되고 있다(나는 여기서 슬그머니 '강점(强點)'을 '미덕(美德)'으로 치환하고 있는데, 이는 '힘'으로부터 파생되는 '아름다움'과 '실천성/도덕성'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장 소박하고 맹목적인 예찬이려나, 하는 잡생각 한 자락만을 풀어놓은 채로, 조만간 데리다의 저작들에 대한 다른 소개글을 통해 그의 후기작 『법의 힘(Force de loi)』과 그 번역의 강점과 미덕ㅡ그리고 '약간의' 문제점들ㅡ을 다루게 될 때 다시 이 주제로 돌아오기로 하자). 


   

   

▷ 스피노자, 『 에티카 』(강영계 옮김), 서광사, 1990.
▷ Spinoza, Die Ethik nach geometrischer Methode dargestellt(übersetzt von Otto Baensch), Hamburg: Felix Meiner, 1994.
▷ Spinoza, Éthique(traduit par Bernard Pautrat), Paris: Seuil(coll. "L'ordre philosophique"), 1988.
▷ Spinoza, Éthique(traduit par Bernard Pautrat), Paris: Seuil(coll. "Points essais"), 1999.

5) 『윤리학』의 국역본으로는 이미 오랜 시간 동안 강영계 선생의 번역이 통용되어 왔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원전과의 비교를 통해 가감해서 읽는 독해 방식이 요구되는 번역본이지만, 그냥 따로 읽는 데에도 크게 문제는 없다. 하지만 앞으로 스피노자 전공자들에 의해 개역판이 나오기를 가장 갈망하게 되는 책은 뭐니 뭐니 해도 저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아니겠는가. 라틴어 원전과 그 인구어 번역은 베르나르 포트라(Bernard Pautrat)가 편집한 라틴어-불어 대역본을 추천한다. 누락 부분에 관한 정오표를 따로 실었던 본래 판본을 수정하여, 현재는 문고판(Points 총서)으로도 구해볼 수 있다. 독일어 번역으로는, 물론 가장 유명한 카를 겝하르트(Carl Gebhardt) 편집의 전집판 외에도, 마이너(Meiner) 출판사에서 간행된 오토 바엔쉬(Otto Baensch)의 번역본을 추천한다. 이 책은 1994년에 나온 번역본인데, 개인적으로 특히 [스피노자 이후] 칸트와 헤겔 등이 사용한 독일어 개념어와 관련한 비교 독해를 할 때 상당히 유용한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프랑스의 스피노자학을 이끌고 있는 피에르-프랑수아 모로(Pierre-François Moreau)의 지휘 아래 프랑스 대학 출판부(PUF)를 통해 계속 출간되고 있는 스피노자 저작 선집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스피노자를 본격적으로 다루거나 발리바르의 저작들을 다룰 때 따로 언급하기로 한다.


   

▷ Georges Bataille, Œuvres complètes. Tome I: premiers écrits 1922-1940, Paris: Gallimard, 1970.
▷ Denis Hollier(éd.), Le Collège de Sociologie 1937-1939, Paris: Gallimard(coll. "Folio essais"), 1995.

6) 바타이유의 유물론은 논자들 사이에서 그리 자주 '애호'되는 주제는 아니다. 이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바타이유의 유물론'이라는 표현이 그 자체로 이미 어색한 느낌을 준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겠다. '바타이유의 신비주의' 혹은 '바타이유의 니체주의'라는 표현은 왠지 익숙하지만, 마치 '바타이유의 마르크스주의'라는 존재를 상기시키는 듯한 '유물론'이라는 단어와 '바타이유'라는 이름의 결합은 어쩐지 그 자체로 '바타이유적'인 생경한 언어의 조합을 드러내는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바타이유의 유물론'을 말하는 마슈레의 탁견이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마슈레가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텍스트들은 '유물론'에 관한 바타이유의 초기 논문들인데, 이 글들은 바타이유 전집 1권에 수록되어 있다. 마슈레가 문제 삼고 있는 글들은 대부분 잡지 『도큐망(Documents)』에 수록되었던 것들인데, 이와 관련해서는 드니 올리에가 편집한 '사회학회' 시절 바타이유의 저술들(초판은 Gallimard, 1979) 또한 일독을 권한다. 이 책에 수록된, 이른바 근대사회 안의 '신성(神性/divinité)'이라는 문제에 천착했던 이들 집단ㅡ여기에는 바타이유 외에도 로제 카이유와(Roger Caillois), 미셸 레리스(Michel Leiris), 피에르 클로소프스키(Pierre Klossowski), 장 발(Jean Wahl) 등이 포함되는데ㅡ의 글들은 부단히 재독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텍스트들이다. 또한 이 시기의 지적 교류와 저술들이 바타이유의 '일반경제'론에 끼친 영향사는 언제나 매력적인 연구 영역으로 남아 있다.

7) 마슈레가 논하고 있는 바타이유의 유물론이 지닌 가장 큰 핵심은, 해소될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는 '모순'이 아니라 극명한 '대립'의 끝없는 지속 그 자체에 있다. 바타이유의 텍스트 안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고 있는 저 '극성(polarité)'이라는 주제가 이에 상응한다. 생산과 소비, 사회와 희생, 이성과 非知(non-savoir), 금기와 위반 등의 대립어들은 그 자체가 '탈-변증법적 변증법'의 계기들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원문의 "ambivalence"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모호성'이라기보다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양가성'이라는 말로 번역되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바타이유에게서 극성을 띤 두 개의 대립항들을 대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가성'은 지양되어버릴 운명의 제 3항을 전제하지 않으며, 모순(contradiciton)의 해소가 아닌 지속적인 대립(opposition)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개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슈레는 바타이유의 유물론을 전복의 유물론, 이른바 "이원론적 유물론(matérialisme dualiste)"으로 규정하면서 "일원론적 유물론(matérialisme moniste)"과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원문, p.108 참조).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반(反)-변증법으로만 요약될 수 없는 어떤 전복적인 운동이다. 바타이유가 전집 1권의 「유물론(Matérialisme)」이라는 글에서 말하고 있는 주요한 논지는 '순진한' 유물론의 필연적 실패이며, 그 실패는 단지 관념론 안의 상층부와 하층부의 위치만을 뒤바꿀 뿐인 피상적 유물론의 바로 저 '순진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던지고 싶은 물음은 다음과 같다: 바타이유의 '유물론'이란 결국엔 마슈레에게 있어서 '유물론'의 철저화된 형태, 혹은 '변증법'의 전복된 형태를 가리키는 것인가.

8) 이러한 전복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철저화 또는 첨예화라는 생각이다. 마슈레에게ㅡ사실 그보다 더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에게ㅡ문제가 되는 것이 마르크스의 철저화이듯, 그리고 또한 라캉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프로이트의 철저화이듯 말이다. 그렇다면 바타이유는, 혹은 바타이유의 '유물론'은, 무엇의, 누구의 철저화인가, 하는 물음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평자와 주석가들이 바타이유에게 있어서 니체의 강력한 영향을 많이 거론하고 있지만, 오히려 내 생각에는, 특히나 더욱이 마슈레가 말하고 있는 '유물론'의 문제가 중심이 된다고 할 때에는, 바타이유가 철저화하고자 하는 것은 니체가 아니라 바로 헤겔이라고 말하고 싶다(나는 물론 여기서, 니체의 '철저화'라고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이론적 작업인가, 그런 것이 있다고 한다면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 라고 하는, 곁가지의 질문 하나를 더 던져볼 수도 있을 것이며, 또한 이른바 바타이유의 '유물론' 속에서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라고 하는 통합적인 함의의 일단을 목격할 수도 있다는, 곁가지의 언급 하나를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바타이유의 『저주의 몫(La part maudite)』은 이러한 헤겔[-마르크스]적 문제의 첨예화와 철저화라는 관점의 연장선 상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바로 그러할 때 이 저작의 '일반경제적' 성격이 보다 정확하고 분명하게 평가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또한 이러한 헤겔의 철저화 또는 첨예화의 문제는 라캉과 상당 부분 교집합을 갖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앞서 다른 글에서 라캉에 관한 몇 권의 입문서를 소개할 때도 잠시 언급했지만, 이러한 바타이유와 라캉 사이의 교집합이라는 문제는 현재까지 극소수의 필자들만이 지적했을 뿐 아직 본격적으로 천착되지는 못한 연구 영역이다(물론 라캉과 헤겔의 접점에 관해서는 지젝의 매력적인 책들이 여러 권 있기는 하지만). 이 교집합 안에 포함되고 있는 주요 개념어들만 소개한다고 해도, 불가능성(impossibilité), 실재[계](le réel), 금기(interdit)와 위반(transgression) 등등 실로 엄청난 수맥을 갖고 있는 이론의 지평이 이들 둘 사이에 잠재하고 있다는 생각 한 자락 밝혀둔다. 




▷ Alenxandre Kojève, Introduction à la lecture de Hegel, Paris: Gallimard(coll. "Tel"), 1979.

9) 사상사적으로 보았을 때 바타이유와 라캉이 추구한 이러한 헤겔의 [재]해석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것은 물론 코제브(Kojève)의 『정신현상학』에 관한 강의록이다. 이 책은 아쉽게도 '아직도-여전히' 국역되지 못하고 있다(하지만 영역본은 1980년에 출간된 바 있다). 어쨌거나 일독을 권한다. 코제브의 이 강의록은, 한때 헤겔에 관한 논문을 바타이유와 공저하기도 했던 시인 크노(Queneau)의 정리와 편집으로 1947년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를 통해 처음 출간되었다(내가 갖고 있는 책은 1979년에 Tel 총서로 발간된 판본이다). 이 강의록이 라캉의 욕망(désir/Begierde) 개념이나 바타이유의 지상권/절대권(souveraineté) 개념에 미친 영향에 관해서는 따로 소개할 자리가 있겠지만, 또한 코제브가 특히나 더욱 강조했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더 이상의 강조가 필요 없을 정도로 하나의 '상식'이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이겠지만, 20세기 초반 프랑스 철학계에 스며든 헤겔 철학의 영향과 그 계보를 파악하는 작업에 있어서 이 책이 반드시 여러 번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코제브는 당대 그의 '수강생'들에게 마치 헤겔의 '현신(現身)'과도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는 풍문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이러한 일화는 당시 프랑스 지성계 풍경의 일단을 그려볼 수 있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매우 흥미롭다). 개인적인 기준에서 이 책 중에서도 특히나 라캉과 바타이유의 여러 공통된 주제들과 관련하여 더욱 주의 깊게 독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헤겔 철학에 있어서 죽음의 관념(L'idée de la mort dans la philosophie de Hegel)」인데, 또한 이 글이 보드리야르의 책 『상징적 교환과 죽음(L'échange symbolique et la mort)』과 맺고 있는 '내적' 관계도 개인적으로 깊은 관심의 대상이다.




▷ Jean Baudrillard, L'échange symbolique et la mort, Paris: Gallimard(coll. "Bibliothèque des sciences humaines"), 1976.

10) 사상의 전유, 그 전유의 몸짓 자체가 문제되는 지점이 있다. 특히나 '철저화'나 '첨예화' [따위의 부차적인?] 논의가 이론적인 문제로 부상할 때는, 마치 '부상당한' 내 신체의 일부를 바라보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누가 누구의 첨예화이자 철저화라는 것은 내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하는 다소 헛되이 반항적이기만 할 뿐인 명제가 그런 느낌을 갖게 하기도 한다. 이에는 물론 복합적인 감정들이 섞여 있다. 이미 아주 오래된 '근대적' 이론의 주제들 중의 하나인 '마르크스-니체-프로이트의 통합적 이해'에 언제까지 매달려 있을 것인가, 하는 반론 또한 내 몸 어느 곳에선가 꿈틀거림을 감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이 통합의 과제가 '본래' 무엇을 의미했던가를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통합'이란 단순히 거대한 사상적 인물들 사이의 통합도 아니고ㅡ예를 들어 물리학에서의 통일장 이론과 같은ㅡ거대 담론과 이론들 사이의 통합도 아니다. 그들이 근대성-자본주의-국가주의를 바라보았던 시선에는 공통된 무언가가 있었다. 그 공통 지점은 일반적인 정치경제학, 철학(혹은 문헌학), 정신분석의 경계와 통합을 넘어서 있는 어떤 무엇이다. 그 무엇은 무엇인가? 결국 이러한 통합의 과제는 근대의 '봉합'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지만, 그 '균열'과 '상처' 자체에 대한 확인 앞에 머무르게 된다. 이러한 통합(統合)은 결국 통합(痛合)인 것이다. 내가 게걸스럽게 갈구하는 이론에 대한 관심은 결국 무엇인가, 하는 물음, 그리고 나는 무엇 때문에 끝도 없는 책과 이론들의 고리를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채로 따라가고 있는가, 하는 물음, 결국 이러한 물음들, 이러한 물음들의 부상(浮上)은, 나의 행위가 곧 부상(負傷)당한 신체의 생채기에 계속 침을 바르며 달래는 행위는 아닌가 하는, 그래서는, 결국에는, 역설적으로 그 생채기를 오히려 덧나게 하고 고름 흐르게 하는 그런 '자해'와 같은 짓은 아닌가 하는, '부활과 갱생과 발효'에 관한 또 다른 물음들을 부상하게 하고, 또 부상당하게 한다.

11)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 중의 하나인 최인훈의 소설 『화두』(민음사, 1994, 전 2권)의 서문에는, 일종의 '시대의식'이라 이름할 수 있는 감상에 관한 매력적인 은유가 등장하는데, 사실 나의 감상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작은 기쁨임과 동시에 깊은 슬픔이다. 조금 길지만 이를 그대로 옮겨보면서 이 글을 갈무리하고자 한다: "인류를 커다란 공룡에 비유해 본다면, 그 머리는 20세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야흐로 21세기를 넘보고 있는데, 꼬리 쪽은 아직도 19세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진흙탕과 바위산 틈바구니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짓이겨지면서 20세기의 분수령을 넘어서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ㅡ이런 그림이 떠오르고, 어떤 사람들은 이 꼬리부분의 한 토막이다ㅡ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불행하게도 이 꼬리는 머리가 어디쯤 가 있는지를 알 수 있는 힘ㅡ의식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이상한 공룡의 이상한 꼬리다. 진짜 공룡하고는 그 점에선 다른 그런 공룡이다. 그러나 의식으로만 자기 위치를 넘어설 수 있을 뿐이지 실지로는 자기 위치ㅡ그 꼬리 부분에서 떠날 수 없다. 이 점에서는 진짜 공룡과 다를 바 없다. 꼬리의 한 토막 부분을 민족이라는 집단으로 비유한다면 개인은 비늘이라고 할까. 비늘들은 이 거대한 몸의 운동에 따라 시간 속으로 부스러져 떨어진다. 그때까지를 개인의 생애라고 불러볼까. 옛날에는 이 비늘들에게는 환상이 주어져 있었다. 비록 부스러져 떨어지면서도 그들은 이러저러한 신비한 약속에 의해서 본체 속에 살아 남는 것이며 본체를 떠나지만 결코 떠나는 것이 아니라는. 그러나 오늘의 비늘들에게서는 그런 환상이 거두어졌다. 그리고 상황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비늘들의 신음이 들린다. 결코 어떤 물리적 계기에도 나타나지 않는. 듣지 않으려는 귀에는 들리지 않는. 이런 그림이 보이고 이런 소리가 들린다. 20세기 말의 꼬리의 비늘들에게는 한 조각 비늘에 지나지 않으면서 불행하게도 이런 일을 알 수 있는 의식의 기능이 진화되어 버린 것이다. 이 침묵의 우주공간 속을 기어가는 <인류>라는 이름의 이 공룡의, <역사>라는 이름의 이 운동방식이 나를 전율시킨다."(『화두』 1권, 5-6쪽) 말미에 한 마디 사족을 붙이자면, 나는 이 비감 어린 "전율"을 '헤겔적 전율' 혹은 '헤겔적 비감'이라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거대한 사족(蛇足)이자 용미(龍尾)가 아니었던가.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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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7-06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 생각 없는 번역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였죠. 알라딘에도 둥지를 트신 걸 알라디너의 일원으로서 환영합니다. 덕분에 알라딘을 찾는 재미가 하나 늘 거 같습니다.^^

람혼 2007-07-06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환영 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최근에 루만의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는 소식이 참으로 반가웠는데, 좋은 관련 글 올려주셔서 잘 읽었답니다.^^

열매 2007-07-24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와 관련해 코제브의 책은 81년에 <역사와 현실 변증법>(한벗)으로 번역되어 나왔었습니다.(절판) 설헌영이라는 분이 석사과정때 독일어본에서 번역했다고 나오네요.
여하튼 좋은 소개글 잘 읽었습니다.
서구사상뿐 아니라 일본사상에도 정통하신 분이 새로이 등장하신 것 같습니다^^

람혼 2007-07-24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얼마전에 제 네이버 블로그 쪽에서 이성민 선생이 알려주셔서 저도 번역본이 존재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 독일어본은 아마도 Suhrkamp에서 나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국역본은 앞으로 헌책방에 갈 때 슬쩍 물어나봐야겠습니다.^^

2008-10-18 0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18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