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강의를 맡아 한 학기동안 헤매면서 가르쳤다. 어젯밤 성적입력마감을 몇 시간 남기고 성적을 입력했다.
나름대로 성적을 잘 주려고 노력했다. 요즘 대학에선 예전과 다르게 상대평가제도 때문에 성적 인플레이션 현상이 적다. 이를테면, B이상이 30%가 넘으면 입력 저장 자체가 안되는 시스템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상대평가로 학생을 분류할 수 밖에 없다.
상대평가도 참 야박하다. 어쩌면 습자지 한장 차이일 수 있는 학생들의 실력을 정확히 숫자로 갈라야 하고, 그에 따라 B를 받기도 하고 C를 받을 수도 있다. 때문에 시험의 난이도는 올라가고, 평가 결과에 대한 항의에 대비하기 위해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시험문제를 출제하게 된다. 평가자의 주관이 개입되는 시험문제는 그래서 위험하다.
내가 담당한 교직과목은 다행히도 이런 상대평가에서 제외된다. 그래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학생들의 교직과목 성적에 대한 기대치가 높다는 것이 문제. 전공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한 학생들은 그것을 교직과목에서 만회하려 한다. 수업시간 중에도 은근히 '점수 잘 주세요'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교직과목은 모두 A이상 준다던데'라는 말도 한다. 심지어 이 수업을 위해 개설한 인터넷 카페의 게시판에는 '교원임용고시에서 우리 학교가 지방대에 비해 내신성적이 낮기 때문에 훨씬 불리하다'며 '학생들의 시험 합격을 돕는 차원에서라도 열심히 한 학생들에 대해서 좋은 점수를 주어야한다'고 은근히 압력을 주는 글도 올라와 있다. 댓글로 학생들이 동조한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인지 채점을 하는데 있어 상당히 압박을 받았나 보다. 물론, 과제물 꼬박꼬박 내고 시험에서 제대로 쓴 학생들에 대해서는 점수를 잘 줄 생각은 있었다. 특히나 지루하기 짝이 없는 강의를 들으며 그래도 꾸벅꾸벅 졸지 않고 강사의 말을 잘 들어주는 가끔 눈마주치는 학생들에 대해서는 더 좋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시험문제를 어렵게 낸다는 생각은 안했지만, 이렇게 다들 잘 쓸지는 몰랐다. 비슷한 답변들 중에 옥석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좌절했다. 특히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답안을 작성하라는 문제 하나를 냈기 때문에 더했을 수도 있다. 성적을 매기면서도 내가 정말 객관적으로 잘 하고 있는건지 끊임없는 의문이 들었다. 교생실습을 다녀온 기간을 뺀 10주 동안 50명 남짓한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을 모두 외우기는 쉽지 않았다. 다행히 학생 얼굴이 들어간 출석부가 이후에 배포되긴 했지만, 여전히 70-80%의 학생들만 정확히 기억이 났고, 그런 얼굴들과 이름들은 내 평가의 객관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시험을 망치지 않았거나 과제물을 잘 제출한 학생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A를 주었다. 뭔가 과제물을 빠뜨렸거나 시험을 망친 학생들에 대해서도 B이상 주려고 했다.
드디어 성적을 조회할 수 있는 오늘 아침 9시. 출근하자마자 어느 여학생의 전화가 왔다. 뜨끔. 혹시 성의없게 글 썼다고 B를 준 학생일까? 그런데, 그 학생은 A를 맞은 학생이었다. '교수님, 점수를 잘 주셔서 감사한데요, 죄송한데 저 열심히 잘 해서 A+이 나올거라 생각했는데, 어떤 부분이 모자랐는지 설명 좀 해주시면 안될까요?' 당황스럽다. 아침 9시부터 이런 전화라니. '내가 지금 정확한 채점표를 안가지고 있어서 정확히 설명은 못하지만, 학생의 시험이나 과제물이 다른 학생에 비해 특출나지 않았다고 기억합니다'라는 말로 대략 설명했더니, 착한 학생이라 그런지 끈기없는 학생이라 그런지 수긍을 하고 전화를 끊는다.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성적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못했다. 이쁜 여학생들에게는 A를, 남학생들에겐 C를 주기로 소문난 한 교수에 대해서는 집단적인 항의가 있을 법도 했지만, 그 시절엔 그러지도 못했다. 과제 하나 안냈다고 D+를 준 국문과 그 교수 이름만 들어도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분통이 터지지만, 그 당시엔 찾아뵐 생각조차 안했다. 그에 비하면 A를 받고도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교수에게 전화를 한 그 학생이 참 당당해 보이기도 하고, 예전에 비해 훨씬 심해진 취업난으로 학교 성적도 무시할 수 없게 되어버린 상대평가 시대 학생들의 어려움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물론 나도 내 기준에 맞춰서 점수를 매기려 했지만,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학생들의 성적을 나누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는가? 내가 매긴 성적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학생들의 모습을 상상하자니 괴롭다. 그렇다고 학생들이 원하는 단답식이나 괄호채우기식의 시험문제를 출제하는 것은 여러모로 편하겠지만, 내 수업이 학원의 임용고시 수업과 다른 뭔가가 되기 위해서는 문제 또한 이렇게 출제하면 안되는 것이다.
아무튼 9시부터 이런 전화를 받고 나니 두렵다. 당당하지 않아도 좋다, 그냥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끄덕만 해다오.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