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에 푸코는 디디에 에리봉과 가진 미발표 인터뷰에서 사르트르와 라캉이 얼마나 ‘엇갈린 동시대인‘이었는지를 지적했다. 그는 30년대에 두 사람 모두 반쇼비니즘 운동의 일원이었으며 그래서 독일 철학에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같은 시기에 이탈리아 신문인 [일 코리에라 델라 세라 Il Corriere della sera]에 실린 또 다른 인터뷰에서 푸코는 자기 생각을 좀더 자세히 밝혔다. 이에 따르면 푸코에게 50년대에 라캉과 레비-스트로스의 저서를 발견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혁신적인 점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우리는 철학과 인문과학이 여전히 인간 주체에 대한 아주 전통적 개념을 바탕으로 존속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철학에서처럼 주체가 근본적으로 자유롭다고 말하거나 인문과학에서처럼 주체는 사회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하는 것이 충분치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대명사 ‘나‘의 아주 단순해 보이는 사용 뒤에 숨겨진 모든 것을 밝혀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필요성을 발견했다. 주체: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주 어렵지만 또한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복합적이면서도 불안정한 어떤 것.˝ 푸코는 이어서 라캉의 비의적 언어가 ˝불투명한 글과 주체의 복합성을, 글을 읽는 데 들어가는 노력과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일치시키려는˝ 그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른 한편 소위 라캉의 ‘공포심 조장(terrorism)‘ 혐의에 관해서 푸코는 ˝누군가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해서 결코 그가 어떤 권력으로 강요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다시 말해 라캉은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만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엇갈린 동시대인. 이것은 확실히 자유에 관한 두 대가의 역사적, 이론적, 정치적 입장을 잘 요약해주고 있었다. 이들은 실제로는 직접 가깝게 교류한 적은 없었지만 1943년부터 끊임없이 엇갈리고 비교되고 서로 대립했다. [에크리]가 출판되었을 때 사르트르는 프로이트와 정신분석을 모두 오인했다는 일반적인 비난에 직면하고 있었다. 존 휴스톤의 요청으로 씌어진 훌륭한 [프로이트 시나리오]는 아직 출판되지 않은 상태였고, 사르트르가 프로이트 저서의 과학적이고 이론적인 내용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사르트르와 정신분석의 관계에 대해 60년대의 구조주의 세대가 알고 있었던 것은 [존재와 무]에 나타난 현상학적 입장과 [말]에서 신랄하게 제기된 주장에 국한되어 있었다. 여기에 영국의 반정신의학적 태도에 대해 그가 공감을 보였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그것은 사르트르가 일종의 초기 반프로이트주의를 지지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게다가 같은 세대의 거의 모든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사르트르도 라캉을 읽지 않았다. 그의 프로이트는 ‘사르트르적‘인 프로이트였으며, 결코 라캉의 재해석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와 달리 라캉은 사르트르의 훌륭한 독자였다. (150-151)
  • 자크 라캉 2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지음, 양녕자 옮김새물결 2000-12-07장바구니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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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에 앙리 에는 그에게 『내-외과학 백과사전 Encyclopedie médico chirurgicale』에 실을 논문을 써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것은 SPP의 입장을 대표하는 모리스 부베의 논문과 동시에 실릴 것이라고 했다. 부베는 치료 형태에 관해 신프로이트주의 식의 논문을 작성했고, 라캉은 「표준 치료에 대한 변형태들」이라는 제목의 텍스트를 준비했다." 라캉은 분석가의 위치는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명제를 다시 채택해 ‘로마강연‘에서 발표한 것과 유사한 치료 이론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는 부베와 SPP 내의 반대파들을 비난했고, 이때부터 그가 ‘미국식 정신분석‘이라고 이름붙인 것을 공격했다. 이 표현은 미국의 프로이트주의의 역사적 현실이 아니라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정도를 벗어난‘ 관점이라고 설명한 것, 다시 말해서 이드가 아니라 자아에 초점을 맞추고, 개인의 사회적 적응을 지향하는 학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는 안나 프로이트주의와 ‘자아심리학‘을 비롯해 빈 학파에서 나온 모든 이론을 여기에 포함시켰다. 이를 통해 그는 예전에는 찬사를 보냈던 방어 메커니즘이라는 개념과 ‘자율적 자아‘라는 개념을 공격하게 되었다. 그는 이것을 그와 일정한 공통점을 갖고 있던 페렌치와 발린트의 헝가리 전통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주의에 대한 자기의 재검토와 대비시켰다. 프로이트주의에 대한 그의 재검토는 주체의 진실과 함께 자아의 환상을 넘어선 무의식의 욕망을 드러내려는 탐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 논문은 너무 난해하다고 평가되어 1960년에 『백과사전』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분노한 라캉은 1966년에 『에크리』에 포함시키기 위해 이 논문을 보다 신랄한 어조로 수정했다. - P20

바로 이 문제가 1960년 가을에 본느발에서 있었던 유명한 회의에서 다루어지게 되는데, 이곳에서 현상학적 프로이주의 지지자들과 구조주의 옹호자들이 대립했다. 라캉은 커다란 승리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그를 지지할 것으로 여겼던 친구 메를로-퐁티는 무의식이 전적으로 언어 법칙에 지배받는다는 식의 라캉의 주장이 전체주의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를 들어 정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 P27

스톡홀름 ‘지침‘의 적용은 결국 융과 아들러처럼 일탈 노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클라인처럼 정통 프로이트주의를 따른다고 선언한 학설을 IPA에서 추방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측면에서 1963년의 분열은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정신분석 운동사에서 최초로 프로이트를 엄격히 따르는 학파가 실제로는 정통 프로이트주의에서 배척된 것이다. 한편 이처럼 색다른 파문을 계기로 라캉은 본의 아니게 새 학파를 세우게 된다. 이 학파는 프로이트(주의)적인 것이라고 이름붙여졌지만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라캉(주의)적인 것이 된다. - P33

스톡홀름대회에서 중앙 집행부의 ‘지침‘은 더이상 돌토의 제명을 언급하지 않았고 에스나르와 라포르그의 이름도 제명 대상 명단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2년 전 에딘버러에서 발표된 ‘권고 사항‘은 계속해서 적용되었다. 따라서 에스나르와 돌토는 라캉을 따라 추방의 길을 오르는 것 외에는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81년 9월에 돌토는 그녀가 그렇게 오랫동안 운명적으로 따랐던 남자에 대한 추억을 이렇게 떠올렸다. "처음으로 어린이 정신분석을 연구하고 싶어하는 젊은 정신분석가들을 받기 시작했을 때 어린이들의 말을 가장 잘 듣고 또 어린이들의 충격을 가장 잘 감수할 수 있는 정신분석가들은 주로 라캉에게서 분석받은 사람 중 - P34

에서 발견되었다. 다시 말해 어린이, 심지어 아주 어린아이를 전문적인 교육 심리학자나 규범주의적인 소아 심리학자를 위한 연구 대상이 아니라 자기를 표현하려는 욕망을 가진 주체로 인정할 준비가 된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이들 사이에서뿐이었다. 이런 사실을 통해 나는 라캉이 진정한 정신분석가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다른 많은 정신분석가들은 많은 학설을 알고 있고 정신분석가라는 직함에 자부심을 느꼈지만 단지 그것을 하나의 직업으로만 삼았을 뿐이다." - P35

하버드에서 권력의 인격화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던 중에 라캉을 만난 장 라쿠튀르는 라캉이 그러한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라캉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제가 권력의 동기와 형태들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연구한 적이 있었습니까?" - P68

프로이트가 블로일러와 융과 논쟁하면서 또 플리스와 결별하면서 편집증을 이론화했다면 라캉은 자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체험한 내밀하고 공포스런 경험을 이론 수립에 이용했다. 그가 슈레버 아버지의 교육 이론에 대해 가졌던 부정적이고 열정적인 관심에서 우리는 분명 한편에서는 자기 아버지와 할아버지 간의 관계,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 어머니와 친가 쪽 여자들 간의 관계의 장면들이 어린 시절에 불러일으켰던 공포스런 회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슈레버의 회고록에 대한 라캉의 훌륭한 해석이 얼마나 폭군적인 아버지와 모욕당한 아버지 간의 변증법, 즉 이미 헤겔에게서 빌려온 변증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는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부터 라캉의 구조주의 시대의 바로크 풍의 두 가지 개념, 즉 폐제와 아버지-의-이름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 P85

프랑스 구조주의 사상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레비-스트로스와 라캉, 벤베니스트, 뒤메질, 베르낭이 최초로 구조주의 방법을 사용한 선구자들이었고 이들의 뒤를 이어 푸코와 데리다, 알튀세 역시 같은 방법을 사용했지만, 이용되는 양상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따라서 프랑스 구조주의의 역사는 이론적으로 두 단계로 나뉘어질 수 있다. 첫번째 단계에서는 언어학이 정신분석, 인류학, 고대사 분야에서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두번째 단계에서는 매우 다양한 일련의 연구 주제들이 공통으로 소쉬르의 구조주의를 토대로 이용했다. 이 두번째 단계에서 라캉의 이론은 프로이트의 발견에 대한 과학적 재검토로 보였다. - P94

푸코는 이렇게 지적한다. "‘의미‘란 아마도 표면적 효과, 반짝임, 거품일 뿐이며 우리에게 정말로 깊은 감동을 주는 것, 우리 전에 존재하는 것, 시간과 공간에서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체계이다. 이 점을 레비-스트로스는 사회와 관련해서, 라캉은 무의식을 대상으로 하여 보여주었다. 그때가 혁명적인 전환점이었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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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루티 언니 문장들을 쑥 훑어내려가다가 앞뒤 말이 다르고 올곧게 하나를 이어가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 애매모호함에서 언제나 분노가 폭발했다는 걸 알게 됨. 어젯밤 민이 이야기 나누다가 엑스와의 카톡에서 간쓸개 내줄 것처럼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더니만_이라는 표현에서 간쓸개 내줄 것처럼 좋아서 좋아했던 걸 테고 이제는 내 간쓸개 챙길래, 에서 절교로 이어진 거 아니겠는가 해서 그러니까 적당히 거리를 지켜야_ 라고 해서 간쓸개 내줄 것처럼 좋아 간쓸개를 실제로 이 사람한테는 내줄 수도 있겠다 싶은 거겠지만 봐라 내 간쓸개라도 내줄 것처럼 좋아야 관계가 관계인 거 아닌가 사랑과 우정의 맥락을 다르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 했다. 서로 몇 마디 더 주고받다가 내 창의 날이 뾰족하게 선 걸 감지한 엑스는 민이한테 직접 들을게 하고 방패로 막았다. 밤이 늦었으니 전투를 치르지는 않았다. 엄마 지인 중에 시엄마인데 자신의 며느리 엄청 욕하는 사람 있다. 무식하고 힘만 센 년_이라고 표현한다고. 그 며느리도 아는 엄마는 자신의 남편에게 신장 줄 수 있는 여자가 흔하지 않다. 얼마나 대단한 거냐_라면서 며느리 욕 그만 하라고 하면 그 지인은 정말 싫어라 한다. 그 며느리는 자신의 남편에게 신장을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시엄마가 미친듯 주라고 주라고 제발 내 아들 좀 살려달라고_ 무릎 꿇고 매일 괴롭혀서 신장을 내어준 것이다. 자신의 신장 한쪽을 내어주고 그 며느리도 그 이후부터 골골대기 시작. 한탄을 하는 바 아니지만 언젠가는 우리 엄마를 붙잡고 울었다고 한다. 관계들이란 무엇인가. 내 간쓸개와 내 신장을 내어준다는 건 대체 무엇인가, 그런 생각들.

엄마 남자사람친구 중에 유산으로 물려받은 40억짜리 건물 통으로 애인에게 빼앗기고 그 애인은 건물 처분하고 다른 젊은 남자와 외국으로 날라버리고 그 아저씨는 단칸방에서 홀로 죽은 이가 있다. 아들딸이 모두 거부를 해서 무연고자로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세상을 뜬. 물론 아저씨는 아들딸에게 이 건물은 내 애인 꺼야. 살아계실 때 그리 했고. 그러니 아들딸이 죽은 아빠를 보고 싶겠는가, 애초에 정도 없었는데. 엄마가 그 이야기를 할 때_ 그 아저씨는 그 애인 진짜 사랑하셨네, 그러니 40억짜리 건물을 통으로 그 여자에게 줬지. 했더니 그게 사랑인가 어디?! 하면서 엄마가 버럭 했는데 웃음이 나서 나도 모르게 웃으며 대꾸했다. 모호하지가 않잖아, 말로만 사랑한다고 그런 것도 아니고. 그 애인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어디 한번 네가 증명을 해봐, 했을 테고 아저씨는 그 40억짜리 건물을 통으로 애인에게 줄 정도의 사랑이 있었던 거지. 그 여자가 사기꾼이건 꽃뱀이건 무관하게. 말을 듣고 있던 엄마와 동생들이 아니 그렇다면 정말로 사랑하면 그냥 아예 통으로 다 내줘야 돼? 다 내줄거야?! 하고 버럭 해서 내 돈을 모두 통으로 가져가려고 하는 것도 쉬운 일 아니고 내 돈을 모두 통으로 가져가려고 한다면 애매모호하게 나를 사랑해서는 안돼, 했더니 다들 아 저 순둥이를 어쩔 거냐,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겠다, 이러면서 서로 이야기를 해서 웃음이 껄껄껄 흘러나왔다. 현대자본주의가 제일 싫어라 하는 인간 유형인 거지. 그 아저씨는 라캉주의자였다. 어린 시절 나 예뻐라 했던 기억도 난다. 민이 세살 때 유일하게 나보고 이혼하고 싶으면 이혼 해라, 인생 길다_ 너는 더구나 잘 살 테고, 이상한 놈 만나 평생 속 끓이며 사는 것보다는 하루라도 젊을 때 새로운 길을 나서는 게 낫다_ 라고 하셨던 분이다. 인생 말년 그 누구보다 불행하고 불행하게 살다 갔다고 엄마는 말씀하셨지만 각자의 삶이다. 어떤 벼랑 아래로 떨어질지 그 아래를 한없이 바라보는 이도 있고 벼랑 아래를 바라보며 저 위를 생각하는 이도 있는 것.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또 하나, 민이 친구 아빠가 키우던 고양이 발정기를 참지 못하고 애가 없을 때 몰래 베란다 문을 열고 고양이를 내보냈다고 한다. 중성화 수술은 시키지 말라 했다고 한다. 그 울음소리를 무슨 수로 견뎌? 이해 불가였다. 울음소리를 참지 못해 버린 거라는 걸 알고 있는데 애한테 우물쭈물 이야기했던 게 그냥 베란다 문을 아빠가 실수로 열어놓고 닫아놓지 않았는데 그새 나가버린 것_이라고 변명했다고. 민이 친구는 이틀 내내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울었고. 그 이야기를 전해들으면서 인간 버리고 동물 버리는 인간들 면상은 대체 어떻게 생긴 건가 궁금해졌다. 그렇게 말을 내뱉은 순간, 인간 버리고 동물 버리고_ 에서 또 짚이는 포인트들이 있어서 다이어리를 펼쳤다. 버려지기 전에 버리겠다_였을지도. 거기에 트라우마가 있다면. 설아, 라캉주의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겠나. 네 나이 쉰 되면 알지도 모르겠다만 어쩌면 영영 모를 수도 있겠다 싶다. 진짜보다는 가짜에 현혹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논하며 나는 진짜_라는 말을 하고자 했던 건지 나는 진짜 같은 가짜_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곰곰 네가 남긴 말들 보면서 분석.

우리는 모두 각자의 신경증을 지니고 있고 고유한 욕망들을 지니고 살아간다. 오독할 자유와 다른 이의 행복과 불행을 마주하며 자신의 상황을 대입시켜 바라본다. 전혀 관심도 없는 이에게 왜 내내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 어리둥절하기 그지 없지만 내 행복을 기원하니 나 역시 그의 행복을 기원한다. 다만 겹쳐지지 않기만을 바랄뿐. 여름이고 더위가 한창이니 사람들은 한층 더 각자의 욕망들을 마주하며 불안에 떨지 않겠는가. 가까이 다가오고 싶다면 예의를 지켜야 하지 않을까. 불쑥 손을 내민다고 해서 내가 그 손을 잡으리라고 생각한다면 당황스럽기 그지 없다. 오독을 했습니다. 책 오래 읽고 많이 읽은 저 뿐만 아니라 제 친구들도. 다만 오독을 했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오해를 하지 않았구나, 제대로 봤구나 하는 안도감은 어쩔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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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6-21 15: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누군가는 뛴다는 거죠? 배팅을 한다는 겁니다. 알 수 없음에 건다는거죠. 그 발 아래 천길 낭떠러지를.
사랑한다는 건 용감해지는 일인 것 같아요. 내 눈에는 너무 반짝이는 욕망도 마찬가지. 나에게만 보인다져. 그것이 ‘고유함’이라는.
한국 사회는 사랑에는 이미 많이 닫혀버린 것 같고. 저는 일단 텍스트 안의 밥탱이들을 읽겠습니다.. 넘어지긴 아직 아퐈~ 내 발목 염증 심해~.

수이 2024-06-21 16:17   좋아요 2 | URL
우리 모두는 각자 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뭔가를 갈아넣으면서 살아가죠. 그게 누군가에게는 돈이고 누군가에게는 책이고 누군가에게는 사랑이겠죠. 뭔가를 갈아넣지 않으면 더 나은 내일이 올지 안 올지, 더 나은 나 자신이 될지 되지 않을지 모르죠. 그래서 갈아넣는 거고. 다만 예의를 지켜주기를 바랄뿐. 우리 각자의 고유한 욕망을 비웃을 자격들이 과연 누구에게나 있을까요? 어디에서 감히 깜냥도 안 되는 게…… 라고 우아하지 못한 생각을 해버렸습니다, 반성중
 
남근선망과 내 안의 나쁜 감정들 - ‘명색이 페미니스트’ 마리 루티의 신랄하고 유쾌한 젠더 정신분석
마리 루티 지음, 정소망 옮김 / 앨피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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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천재성이 인간 욕망과 동물 본능 간의 차이를 알아본 것이었다면, 라캉의 천재성은 인간 주체성의 사회적 특징과 우리가 느끼는 근본적인 결여감 사이의 관련성을 설명한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사회화를 겪으며 본인들의 인지 능력을 초과하는 의미의 상징세계를 접하게 되고, 그 결과 (실존적으로 또 존재론적으로 겸허하게) 부족감과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존재 (내) 결여와, 프로이트가 반복강박과 연결시킨 대인 관계에서 겪는 구체적인 고행 양상을 실제로 구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두 가지 결핍 형태는 서로를 보강하는, 삶을 특정 짓는 방법들일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맥락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의 존재론적 결여가 특별히 인간적인 경험으로서 욕망을 발생시킨다는 라캉의 가설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적인 부분이 잘려 나갔다고(잘못 배치됐다고) 느끼기 때문에 사물들을 원하며, 그러한 것들이 우리를 다시 온전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희망을 품는다. 우리는 아이 시절에 (어느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을지언정)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회적 세계에 노출되기 때문에, 이후 우리 삶에는 논리적인 방식으로 연애적 선택을 인도하는 생식 본능은커녕 상실의 흔적 없는 욕망, 단순한 욕망 따위는 있을 수 없다. 라캉의 이 이론이 반발을 산 것은, 이처럼 너무나 인간적인 곤경을 묘사한 데다 '거세'(결여)를 여성의 부족함을 드러나는 징후가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조건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역사적으로 여성에게 결여의 낙인을 강요한 것은 많은 남성들이 자신들의 결여(상처 입음)를 필사적으로 피하려 했음을 드러내는 표시다. 만약 남성들이 이 결여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면, 굳이 여성을 폄하하거나 억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 버지니아 울프로부터 동시대의 페미니스트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여성 지식인들이 주장했듯이, 여성은 모든 시대에 걸쳐 남성들의 온전함을 재확인시키기 위해 결여를 의인화하도록 요구받아 왔다. 남성들이 능동적이고 행위적인 주체라는 그들의 지위를 마음 편히 믿을 수 있도록, 여성은 수동적인 대상으로 코드화되어 왔다.

라캉은 사정 후 축 늘어지는 페니스가 발기된 페니스의 억압된 쌍둥이며 또 예견할 수 없는 결과라는 점에서, 페니스보다 더 명백하게 거세를 상징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 부분은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음미해 볼 것이다. 이번 장에서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영혼의 동반자라고 믿는 사람만큼 우리의 영혼을 충만하게 해줄 대상은 없다는 일반적인 믿음을 고찰하려 한다. 그 한 사람에 대한 집착, 개인을 완성시키는 과정으로서 결혼에 대한 강조, 개인을 보호해주는 장치로서 핵가족의 소중함에 대한 환상으로 이루어지는 우리 사회의 연애 시스템은 인간 존재의 불완전함에 대한 단순한 반응으로 형성되었을 수 있다.

라캉의 욕망 이론은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보완한다는, 서로 '결여된' 것을 제공한다는 이성애가부장제 관념을 어느 정도는 따라간다. 우리 사회의 문화적 신화에 따르면, 남성보다 더 따뜻하고 높은 감성지능을 소유한 여성은 메마른 남성들을 구원해주는 존재이다. 따라서 여성은 자신들의 세심함과 인내심, 너그러운 보살핌으로 남성을 인간답게 만들어야 할 책무가 있다. 그 대가로 남성은 여성에게 보호와 실용적인 지원을 제공한다. 여성 특유의 불합리성이 상황을 위태롭게 만들 때에도 남성은 특유의 이성으로 이를 바로잡을 의무가 있다. 이러한 신념들이 성별 고정관념 형성의 핵심 이념이다. 그런데 라캉은 온전함에 대한 갈망이 특히 자신에게 결여된 바를 "자연적으로" 소유한 다른 사람들에게 그 결여를 메우도록 잘못 부담지우는 방식을 설명하며, 이 신념들의 환영적이고 순전히 이념적인 기반을 강조했다.

욕망이 생식 면에서 효율적이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욕망은 초점을 아이들이 아니라 심리적 온전함과 관련된 성적 파트너에게 맞춘다는 것이다. 번식의 욕구가 인간 삶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당연히 역할이 있다. 일부 사람들에겐 자식이, 라캉이 진단한 바로 그 존재 안의 구멍을 메우는 역할을 한다. 부모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그 구멍으로부터 효과적으로 시선을 돌리게 할 수 있다.

이것저것 요구하는 아이들을 키우는 와중에 존재적 부족함을 느끼기란 어려운 일이다. 얼니 자녀 셋을 둔 친구는 "나 아직 살아 있는 거 맞지?"라고 내게 물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에 난 구멍이 우선순위로 떠오를 리 없다.

사람들은 생식을 원한다. 하지만 생식이 우리 욕망의 주 목적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목적을 이루는 데 집중하며 욕망을 잘 배분하여 합리적으로 사용할 것이며, 그랬다면 친밀한 관계가 안겨 주는 고통 따윈 없었을 것이다. 욕망이 그토록 고통스럽고 실망스러운 이유는 그것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즉 자기완성을, 결여의 무효화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았다. 플라톤의 [향연 The Symposium]에는 인간이 한때는 네 개의 팔과 네 개의 다리, 그리고 서로 반대 방향을 보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균형 있는 생물이었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설명이 나온다. 그런데 어느 날 인간의 오만함에 화가 난 제우스가 인간을 약하게 만들고자 절반으로 나눠 버렸고, 그때부터 인간은 자기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헤매다가 어렵사리 그 반쪽을 찾으면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노라 맹세하게 되었다고 한다.

라캉은 이 같은 추론 방식으로 인간이 신경을 갉아먹는 결여의 감각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이 고통의 경감을 다른 사람, 특히 욕망의 대상에게 기대한다고 분석했다. 아마도 다른 동물들은 이런 문제를 겪지 않을 것이다. 동물들의 욕망은 자신의 존재적 불안을 마법처럼 없애려는 바람이 욕망의 동기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욕망을 종의 번식 본능으로 단순화시킬 수 없는 이유이다. (209-213) (강조는 인용자)







신경질 내는 인간들을 제일 싫어라 하는데 현대인들 치고 신경증자 아닌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니 뭔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_ 폭염이라고 한다. 물론 이렇게 비유적으로 표현할 일은 아닌데 신경질 그득 내는 인간들 보면 남녀 성구별 없이_ 쪼그라붙은 페니스가 저절로 연상이 된다. 여기서는 팔루스라고 표현해야 하나 남녀 모두에게니까. 하지만 모두 각자의 페니스(팔루스)가 있다고 치고 어마무시한 분노에 사로잡혀 맞은편에 있는 상대(맞은편에 있다는 건 대부분 소중한 관계를 뜻한다, 우리는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상처를 받지, 저 머나먼 거리감이 있는 타인들이 뭐라 떠들건 무관심하니까)에게 할 말 못할 말 하는 걸 보고 있자면 페니스가 쪼그라붙었군, 라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된다. 하나 더, 젊음에 대해서도. 내 나이가 쉰인지라 물론 중늙은이라고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젊어보이려고 안달복달할 때인데 특히나 한국 아줌마들의 젊음에 대한 열풍은 어마무시하지 않은가. 팽팽하고 미끈미끈한 젊은 여성들의 피부 관련 이미지를 마주하다가 이또한 발기한 페니스 아닌가, 젊음에 대한 모든 인간들의 에너지. 하지만 팔자주름 진해지고 주름살 많아지고 피부 얇아지고 그런 건 축 늘어진 페니스, 쪼그라붙은 페니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너나 할 거 없이 미친듯 운동을 하고 피부과에 가고 그러는 걸 텐데 한껏 부풀어오른 페니스를 너도 나도 갖고자. 하지만 인간이란 내내 그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으흠. 건강하게 살고자 매일 미친듯 운동을 하고 그랬는데도 이거 봐라 감기 걸려 한여름에 미친듯 기침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드는 생각은 이게 한계가 있군, 인간아 너는 그래봤자 인간이라고, 라는 불멸의 존재들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다. 네가 아무리 온갖 공을 들여 네 팔루스를 가꾸려고 해봤자 그건 어느 순간 쪼그라붙은 페니스에 불과한....... 그런 소리들.

할 일이 한그득인데 모조리 다 동생들에게 떠맡겼다. 하필 이때 아프고, 엄마는 서운함을 표시했고 그러니까 왜 하필 이때 아픈 거란 말인가, 진이도 엄마랑 똑같은 소리. 왜 하필 이때 아프고. 선풍기 틀어놓고 속옷만 입고 있다가 티셔츠랑 반바지 꿰어차고 과일주스 하나 사갖고 와서 슬슬 오늘을 시작해야겠다. 민이 베프에게 절교당했다. 그저 이렇게 쏘쿨해도 괜찮은가? 물었더니 집중할 것들에만 집중하려고, 라고 말해서 순간 속으로 움찔했다. 독고다이, 인생은 어차피. 라는 자기 아빠 말을 그대로 하면서. 그래서 아가,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그럴까 하다가 관뒀다. 엄마는 관계중독자야! 라는 소리를 들을까봐.......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독고다이인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어떤 식으로든지 인간은 타인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 관계들이 나를 만드는 거고. 떠난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나를 만들었고 나는 그를 만들었다. 그러니 딸아이가 베프와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쏘쿨하게 구는 태도 너머로 아이는 여러 생각들을 하고 있을 거다. 그러니 선을 넘지 말도록 하자. 마리 루티 언니 책을 읽다가 든 생각인데 언니 너무 열심히 산 거 아닌가 싶다. 그래서 에너지 너무 과하게 써서 잘 살아보겠노라고 그렇게 온갖 고생을 다 하다가 결국 병 들어 일찍 죽은 건 아닌가 싶은 망상에 사로잡혔다. 얼마 전에 관계를 끝낸 지인이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언니는 왜 이렇게 항상 룰루랄라 모드야, 아무리 한량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살면 안돼. 사람이. 라고 해서 아이스라떼를 쪽 빨대로 빨면서 한 말이란, 님은 너무 열심히 사셔서 암 걸리기 바로 직전에 갔고 그래서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려 항상 힘들어하시는 건 아닐까요? 저와 반대로? 말했더니 아 맞네 맞아 하고 웃었다. 웃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람이 사람에게 너 그렇게 살면 안돼, 라는 말을 하는 건 어떤 관계일까? 엄마도 아빠도 나에게 그렇게 말한 적 한 번도 없는데. 그러다가 문득 엑스가 내게 그 말 자주 해서 언젠가 분노에 사로잡혀 너나 그렇게 살지 마, 님아, 제발, 이라고 했던 옛날 광경이 떠올랐다. 그리고 또 누군가가 요즘 내게 그런 말을 했는데 하고 가만히 떠올려보니 아 댓글 떠올랐다. 님아 그렇게 사랑에 모든 걸 걸면 빠져죽어요, 라고 했던 댓글. 그리고 빠져죽었다, 라고 문장을 맺지 못하는 건 죽지 않고 헤엄쳐 살아나왔습니다. 뭍으로 나오니 그렇게 댓글을 단 지인 아닌 지인이 수건을 건네면서 거봐, 내 말 맞지? 하고 므흣하게 웃으며 우리 다시 친구 하자, 라고 손을 내밀어서 당황스러웠다. 아듀 비취, 라고 속으로 그러고 차단했던 것이다. 너 뒤끝 작렬이야_라는 내 엑스의 말은 맞았던 것이다. 내 새끼 나 닮았네 🙄

나를 알고 내 욕망을 아는 게 이토록 중요하다는 걸 마리 루티 언니 글을 읽으면서 다시 알게 된다. 그러니까 고로 라캉을 읽어야 함. 미친듯 기침을 하면서 속옷만 입은 채로 판다 눈두덩이를 하고 그러하다, 현대인들이여 라캉을 읽자, 라고 홀로 중얼거리고 있노라니 완전 폐인 모드인데;;; 싶어 웃음이 한없이 나온다. 아무래도 갱년기 증상이랑 겹쳐져 오는듯. 이 비루한 육체 같으니라구. 하지만 이 비루한 육체는 나의 것. 이 몸으로 모든 것들을 마주하도록 할 터. 기운을 차리고 활력을 되찾아 다시 풍덩 뛰어드는 일을 두려워할 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라캉이, 프로이트가, 마리 루티가 내게 알려주는 바, 네 욕망에 충실하라. 거기 네 주체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주체성이 깃들어있으니. 나 역시 누군가들에게는 한없이 멀리 하고 싶은 bitch. 바나나책은 기대했던 그 이상이었다. 올해의 책으로 삼아볼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한없이 흘러가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 하지만 감내해야 할 것들은 감내해야 한다고 마리 루티 왈. 영생을 꿈꾼 적도 없지만 나름의 자기 존재에 대한 위무는 있어야 한다고 여겼기에 그런 선택들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사후적으로 판단해본다. 내 안의 나쁜 피가 한없이 흐르고 흘러 어딘가에 닿고 싶어한다면 그 시간과 그 선택과 그 욕망은 내 것들이다. 그러니 함부로 잣대로 판단하지 말라.


"여인이 자기 생각을 말하면 다 저속하다고 하지요." 

브리저튼 시즌 3 속 대사 한 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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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4-06-21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제가 해드릴 말씀은 그저 님은 뒤끝 작렬 아니고 오독 작렬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잘 사세요 ㅋㅋㅋㅋ늘 그러길 빕니다 ㅋㅋㅋㅋㅋ

수이 2024-06-21 14:28   좋아요 0 | URL
어떻게 오독인지? 제 친구들도 다 그렇게 읽었던데요? 저주를 왜 함? 이라고_ 말씀해보세요, 여기선 친구의 친구니까 제가 상대해드리죠. 혹여 저를 걱정하는 마음에 그렇게 댓글을 다셨나요? 오독해서 미안합니다. 님도 수능공부 열공하셔서 내내 행복을 누리시기를, 천년만년.
 




 감기에 걸렸다. 깨발랄하게 요가도 미친듯 하고 먹기도 잘 먹고 다녀서 감기 따위 걸리지 않은 게 어언 8개월째라고 자랑질을 하자마자 바로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이때 또 인간의 오만함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것인지 깨닫게 된다. 대체 어느 지점에서 감기에 걸리게 된 건가, 온몸에 소름이 돋아 아 추워라고 느꼈던 거기였던가. 곳곳에 에어컨 바람은 쌩쌩 불고 덥다고 미친듯 얼음이 동동 뜬 아이스음료만 마시다가 결국 내 몸은 또 여름 감기에 걸리게 된 것. 왜 작년에는 걸리지 않았지? 하고 지난 일기를 들춰보니 이혼해야겠다! 다짐하고 미친듯 여름 거리를 쏘다니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 진짜 오랜만에 썬크림을 얼굴에 바르지 않고 실내에 머물며 선풍기 팬이 휙휙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고 있다. 마야 안젤루 책은 읽다가 관뒀다. 글자가 너무 작아서 눈이 아프다는 핑계로 중간까지 읽고 몇년 전 던져두었는데 새로운 판형으로 이렇게 나왔구나 알게 되었다. 일단 집에 있는 책으로 읽고 좋으면 살까 싶은 마음. 번역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궁금하고. 마리 루티를 읽고 있다. 마리 루티의 바나나책을 열심히 탐독하던 중 향락사회론이 눈에 보여 바로 질렀고. 7월에는 살 책이 나오지 않겠지 라는 마음으로 마리 루티 언니 책을 미리 주문했다. 마리 루티 책이 꽤 번역되어 나오기는 한 거 같은데 그의 라캉 관련서는 별로 번역되어있지 않다. 바나나책 정도가 전부인 거 같은데. 그의 다른 책들도 서서히 번역되어 출간되기를 기다려본다. 폭염이다. 한여름에 개도 걸리지 않는다는 감기를 친구도 나도 걸려 콜록거리고 있다. 조심조심. 비루한 육체를 지니고 여기저기 너도 나도 모두 다 좋아요를 누르면서 너의 존재에 나 역시 관심 있어, 너의 삶에 나 역시 관심 있어, 너의 읽기에 나 역시 관심 있어_ 그러니 내게도 좀 관심을 보여줘, 라고 하는 건가. 제일 기대되는 책들. 오랜만에 읽기의 세계로 돌아와 정신이 없는 와중에 비키니를 입고 책 읽는 사진을 지민에게 찍어줘! 억지로 강요하면서 대신 뱃살은 다른 책으로 가리도록 하자, 라면서. 어느덧 여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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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6-19 1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 텅장이 되었기 때문에 향락사회론은 구립도서관에 넣어뒀습니다............ 2024년 불현듯 내게 와버린 라캉............

수이 2024-06-19 12:04   좋아요 1 | URL
바나나책 미리 알아보신 분들, 단발님과 쟝쟝님 열심히 바나나책 읽으실 때 전 뭘 읽고 있었나요 대체

단발머리 2024-06-19 1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젤루... 저는 그 작은 책, 작은 글씨로 읽었는데, 이번 한글판은 좀 아닌 거 같네요. 너무 진지합니다.
전 마리 루티 책 중에서 그 바나나책을 제일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그 책이 최고구요! 그 때 수이님 뭐하고 계셨나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곰곰)

수이 2024-06-19 17:32   좋아요 1 | URL
미쳐서 제정신이 아니었죠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