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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근선망과 내 안의 나쁜 감정들 - ‘명색이 페미니스트’ 마리 루티의 신랄하고 유쾌한 젠더 정신분석
마리 루티 지음, 정소망 옮김 / 앨피 / 2018년 12월
평점 :
프로이트의 천재성이 인간 욕망과 동물 본능 간의 차이를 알아본 것이었다면, 라캉의 천재성은 인간 주체성의 사회적 특징과 우리가 느끼는 근본적인 결여감 사이의 관련성을 설명한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사회화를 겪으며 본인들의 인지 능력을 초과하는 의미의 상징세계를 접하게 되고, 그 결과 (실존적으로 또 존재론적으로 겸허하게) 부족감과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존재 (내) 결여와, 프로이트가 반복강박과 연결시킨 대인 관계에서 겪는 구체적인 고행 양상을 실제로 구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두 가지 결핍 형태는 서로를 보강하는, 삶을 특정 짓는 방법들일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맥락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의 존재론적 결여가 특별히 인간적인 경험으로서 욕망을 발생시킨다는 라캉의 가설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적인 부분이 잘려 나갔다고(잘못 배치됐다고) 느끼기 때문에 사물들을 원하며, 그러한 것들이 우리를 다시 온전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희망을 품는다. 우리는 아이 시절에 (어느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을지언정)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회적 세계에 노출되기 때문에, 이후 우리 삶에는 논리적인 방식으로 연애적 선택을 인도하는 생식 본능은커녕 상실의 흔적 없는 욕망, 단순한 욕망 따위는 있을 수 없다. 라캉의 이 이론이 반발을 산 것은, 이처럼 너무나 인간적인 곤경을 묘사한 데다 '거세'(결여)를 여성의 부족함을 드러나는 징후가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조건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역사적으로 여성에게 결여의 낙인을 강요한 것은 많은 남성들이 자신들의 결여(상처 입음)를 필사적으로 피하려 했음을 드러내는 표시다. 만약 남성들이 이 결여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면, 굳이 여성을 폄하하거나 억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 버지니아 울프로부터 동시대의 페미니스트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여성 지식인들이 주장했듯이, 여성은 모든 시대에 걸쳐 남성들의 온전함을 재확인시키기 위해 결여를 의인화하도록 요구받아 왔다. 남성들이 능동적이고 행위적인 주체라는 그들의 지위를 마음 편히 믿을 수 있도록, 여성은 수동적인 대상으로 코드화되어 왔다.
라캉은 사정 후 축 늘어지는 페니스가 발기된 페니스의 억압된 쌍둥이며 또 예견할 수 없는 결과라는 점에서, 페니스보다 더 명백하게 거세를 상징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 부분은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음미해 볼 것이다. 이번 장에서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영혼의 동반자라고 믿는 사람만큼 우리의 영혼을 충만하게 해줄 대상은 없다는 일반적인 믿음을 고찰하려 한다. 그 한 사람에 대한 집착, 개인을 완성시키는 과정으로서 결혼에 대한 강조, 개인을 보호해주는 장치로서 핵가족의 소중함에 대한 환상으로 이루어지는 우리 사회의 연애 시스템은 인간 존재의 불완전함에 대한 단순한 반응으로 형성되었을 수 있다.
라캉의 욕망 이론은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보완한다는, 서로 '결여된' 것을 제공한다는 이성애가부장제 관념을 어느 정도는 따라간다. 우리 사회의 문화적 신화에 따르면, 남성보다 더 따뜻하고 높은 감성지능을 소유한 여성은 메마른 남성들을 구원해주는 존재이다. 따라서 여성은 자신들의 세심함과 인내심, 너그러운 보살핌으로 남성을 인간답게 만들어야 할 책무가 있다. 그 대가로 남성은 여성에게 보호와 실용적인 지원을 제공한다. 여성 특유의 불합리성이 상황을 위태롭게 만들 때에도 남성은 특유의 이성으로 이를 바로잡을 의무가 있다. 이러한 신념들이 성별 고정관념 형성의 핵심 이념이다. 그런데 라캉은 온전함에 대한 갈망이 특히 자신에게 결여된 바를 "자연적으로" 소유한 다른 사람들에게 그 결여를 메우도록 잘못 부담지우는 방식을 설명하며, 이 신념들의 환영적이고 순전히 이념적인 기반을 강조했다.
욕망이 생식 면에서 효율적이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욕망은 초점을 아이들이 아니라 심리적 온전함과 관련된 성적 파트너에게 맞춘다는 것이다. 번식의 욕구가 인간 삶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당연히 역할이 있다. 일부 사람들에겐 자식이, 라캉이 진단한 바로 그 존재 안의 구멍을 메우는 역할을 한다. 부모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그 구멍으로부터 효과적으로 시선을 돌리게 할 수 있다.
이것저것 요구하는 아이들을 키우는 와중에 존재적 부족함을 느끼기란 어려운 일이다. 얼니 자녀 셋을 둔 친구는 "나 아직 살아 있는 거 맞지?"라고 내게 물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에 난 구멍이 우선순위로 떠오를 리 없다.
사람들은 생식을 원한다. 하지만 생식이 우리 욕망의 주 목적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목적을 이루는 데 집중하며 욕망을 잘 배분하여 합리적으로 사용할 것이며, 그랬다면 친밀한 관계가 안겨 주는 고통 따윈 없었을 것이다. 욕망이 그토록 고통스럽고 실망스러운 이유는 그것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즉 자기완성을, 결여의 무효화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았다. 플라톤의 [향연 The Symposium]에는 인간이 한때는 네 개의 팔과 네 개의 다리, 그리고 서로 반대 방향을 보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균형 있는 생물이었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설명이 나온다. 그런데 어느 날 인간의 오만함에 화가 난 제우스가 인간을 약하게 만들고자 절반으로 나눠 버렸고, 그때부터 인간은 자기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헤매다가 어렵사리 그 반쪽을 찾으면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노라 맹세하게 되었다고 한다.
라캉은 이 같은 추론 방식으로 인간이 신경을 갉아먹는 결여의 감각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이 고통의 경감을 다른 사람, 특히 욕망의 대상에게 기대한다고 분석했다. 아마도 다른 동물들은 이런 문제를 겪지 않을 것이다. 동물들의 욕망은 자신의 존재적 불안을 마법처럼 없애려는 바람이 욕망의 동기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욕망을 종의 번식 본능으로 단순화시킬 수 없는 이유이다. (209-213) (강조는 인용자)
신경질 내는 인간들을 제일 싫어라 하는데 현대인들 치고 신경증자 아닌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니 뭔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_ 폭염이라고 한다. 물론 이렇게 비유적으로 표현할 일은 아닌데 신경질 그득 내는 인간들 보면 남녀 성구별 없이_ 쪼그라붙은 페니스가 저절로 연상이 된다. 여기서는 팔루스라고 표현해야 하나 남녀 모두에게니까. 하지만 모두 각자의 페니스(팔루스)가 있다고 치고 어마무시한 분노에 사로잡혀 맞은편에 있는 상대(맞은편에 있다는 건 대부분 소중한 관계를 뜻한다, 우리는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상처를 받지, 저 머나먼 거리감이 있는 타인들이 뭐라 떠들건 무관심하니까)에게 할 말 못할 말 하는 걸 보고 있자면 페니스가 쪼그라붙었군, 라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된다. 하나 더, 젊음에 대해서도. 내 나이가 쉰인지라 물론 중늙은이라고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젊어보이려고 안달복달할 때인데 특히나 한국 아줌마들의 젊음에 대한 열풍은 어마무시하지 않은가. 팽팽하고 미끈미끈한 젊은 여성들의 피부 관련 이미지를 마주하다가 이또한 발기한 페니스 아닌가, 젊음에 대한 모든 인간들의 에너지. 하지만 팔자주름 진해지고 주름살 많아지고 피부 얇아지고 그런 건 축 늘어진 페니스, 쪼그라붙은 페니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너나 할 거 없이 미친듯 운동을 하고 피부과에 가고 그러는 걸 텐데 한껏 부풀어오른 페니스를 너도 나도 갖고자. 하지만 인간이란 내내 그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으흠. 건강하게 살고자 매일 미친듯 운동을 하고 그랬는데도 이거 봐라 감기 걸려 한여름에 미친듯 기침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드는 생각은 이게 한계가 있군, 인간아 너는 그래봤자 인간이라고, 라는 불멸의 존재들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다. 네가 아무리 온갖 공을 들여 네 팔루스를 가꾸려고 해봤자 그건 어느 순간 쪼그라붙은 페니스에 불과한....... 그런 소리들.
할 일이 한그득인데 모조리 다 동생들에게 떠맡겼다. 하필 이때 아프고, 엄마는 서운함을 표시했고 그러니까 왜 하필 이때 아픈 거란 말인가, 진이도 엄마랑 똑같은 소리. 왜 하필 이때 아프고. 선풍기 틀어놓고 속옷만 입고 있다가 티셔츠랑 반바지 꿰어차고 과일주스 하나 사갖고 와서 슬슬 오늘을 시작해야겠다. 민이 베프에게 절교당했다. 그저 이렇게 쏘쿨해도 괜찮은가? 물었더니 집중할 것들에만 집중하려고, 라고 말해서 순간 속으로 움찔했다. 독고다이, 인생은 어차피. 라는 자기 아빠 말을 그대로 하면서. 그래서 아가,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그럴까 하다가 관뒀다. 엄마는 관계중독자야! 라는 소리를 들을까봐.......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독고다이인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어떤 식으로든지 인간은 타인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 관계들이 나를 만드는 거고. 떠난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나를 만들었고 나는 그를 만들었다. 그러니 딸아이가 베프와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쏘쿨하게 구는 태도 너머로 아이는 여러 생각들을 하고 있을 거다. 그러니 선을 넘지 말도록 하자. 마리 루티 언니 책을 읽다가 든 생각인데 언니 너무 열심히 산 거 아닌가 싶다. 그래서 에너지 너무 과하게 써서 잘 살아보겠노라고 그렇게 온갖 고생을 다 하다가 결국 병 들어 일찍 죽은 건 아닌가 싶은 망상에 사로잡혔다. 얼마 전에 관계를 끝낸 지인이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언니는 왜 이렇게 항상 룰루랄라 모드야, 아무리 한량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살면 안돼. 사람이. 라고 해서 아이스라떼를 쪽 빨대로 빨면서 한 말이란, 님은 너무 열심히 사셔서 암 걸리기 바로 직전에 갔고 그래서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려 항상 힘들어하시는 건 아닐까요? 저와 반대로? 말했더니 아 맞네 맞아 하고 웃었다. 웃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람이 사람에게 너 그렇게 살면 안돼, 라는 말을 하는 건 어떤 관계일까? 엄마도 아빠도 나에게 그렇게 말한 적 한 번도 없는데. 그러다가 문득 엑스가 내게 그 말 자주 해서 언젠가 분노에 사로잡혀 너나 그렇게 살지 마, 님아, 제발, 이라고 했던 옛날 광경이 떠올랐다. 그리고 또 누군가가 요즘 내게 그런 말을 했는데 하고 가만히 떠올려보니 아 댓글 떠올랐다. 님아 그렇게 사랑에 모든 걸 걸면 빠져죽어요, 라고 했던 댓글. 그리고 빠져죽었다, 라고 문장을 맺지 못하는 건 죽지 않고 헤엄쳐 살아나왔습니다. 뭍으로 나오니 그렇게 댓글을 단 지인 아닌 지인이 수건을 건네면서 거봐, 내 말 맞지? 하고 므흣하게 웃으며 우리 다시 친구 하자, 라고 손을 내밀어서 당황스러웠다. 아듀 비취, 라고 속으로 그러고 차단했던 것이다. 너 뒤끝 작렬이야_라는 내 엑스의 말은 맞았던 것이다. 내 새끼 나 닮았네 🙄
나를 알고 내 욕망을 아는 게 이토록 중요하다는 걸 마리 루티 언니 글을 읽으면서 다시 알게 된다. 그러니까 고로 라캉을 읽어야 함. 미친듯 기침을 하면서 속옷만 입은 채로 판다 눈두덩이를 하고 그러하다, 현대인들이여 라캉을 읽자, 라고 홀로 중얼거리고 있노라니 완전 폐인 모드인데;;; 싶어 웃음이 한없이 나온다. 아무래도 갱년기 증상이랑 겹쳐져 오는듯. 이 비루한 육체 같으니라구. 하지만 이 비루한 육체는 나의 것. 이 몸으로 모든 것들을 마주하도록 할 터. 기운을 차리고 활력을 되찾아 다시 풍덩 뛰어드는 일을 두려워할 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라캉이, 프로이트가, 마리 루티가 내게 알려주는 바, 네 욕망에 충실하라. 거기 네 주체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주체성이 깃들어있으니. 나 역시 누군가들에게는 한없이 멀리 하고 싶은 bitch. 바나나책은 기대했던 그 이상이었다. 올해의 책으로 삼아볼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한없이 흘러가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 하지만 감내해야 할 것들은 감내해야 한다고 마리 루티 왈. 영생을 꿈꾼 적도 없지만 나름의 자기 존재에 대한 위무는 있어야 한다고 여겼기에 그런 선택들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사후적으로 판단해본다. 내 안의 나쁜 피가 한없이 흐르고 흘러 어딘가에 닿고 싶어한다면 그 시간과 그 선택과 그 욕망은 내 것들이다. 그러니 함부로 잣대로 판단하지 말라.
"여인이 자기 생각을 말하면 다 저속하다고 하지요."
브리저튼 시즌 3 속 대사 한 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