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에 앙리 에는 그에게 『내-외과학 백과사전 Encyclopedie médico chirurgicale』에 실을 논문을 써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것은 SPP의 입장을 대표하는 모리스 부베의 논문과 동시에 실릴 것이라고 했다. 부베는 치료 형태에 관해 신프로이트주의 식의 논문을 작성했고, 라캉은 「표준 치료에 대한 변형태들」이라는 제목의 텍스트를 준비했다." 라캉은 분석가의 위치는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명제를 다시 채택해 ‘로마강연‘에서 발표한 것과 유사한 치료 이론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는 부베와 SPP 내의 반대파들을 비난했고, 이때부터 그가 ‘미국식 정신분석‘이라고 이름붙인 것을 공격했다. 이 표현은 미국의 프로이트주의의 역사적 현실이 아니라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정도를 벗어난‘ 관점이라고 설명한 것, 다시 말해서 이드가 아니라 자아에 초점을 맞추고, 개인의 사회적 적응을 지향하는 학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는 안나 프로이트주의와 ‘자아심리학‘을 비롯해 빈 학파에서 나온 모든 이론을 여기에 포함시켰다. 이를 통해 그는 예전에는 찬사를 보냈던 방어 메커니즘이라는 개념과 ‘자율적 자아‘라는 개념을 공격하게 되었다. 그는 이것을 그와 일정한 공통점을 갖고 있던 페렌치와 발린트의 헝가리 전통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주의에 대한 자기의 재검토와 대비시켰다. 프로이트주의에 대한 그의 재검토는 주체의 진실과 함께 자아의 환상을 넘어선 무의식의 욕망을 드러내려는 탐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 논문은 너무 난해하다고 평가되어 1960년에 『백과사전』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분노한 라캉은 1966년에 『에크리』에 포함시키기 위해 이 논문을 보다 신랄한 어조로 수정했다. - P20
바로 이 문제가 1960년 가을에 본느발에서 있었던 유명한 회의에서 다루어지게 되는데, 이곳에서 현상학적 프로이주의 지지자들과 구조주의 옹호자들이 대립했다. 라캉은 커다란 승리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그를 지지할 것으로 여겼던 친구 메를로-퐁티는 무의식이 전적으로 언어 법칙에 지배받는다는 식의 라캉의 주장이 전체주의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를 들어 정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 P27
스톡홀름 ‘지침‘의 적용은 결국 융과 아들러처럼 일탈 노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클라인처럼 정통 프로이트주의를 따른다고 선언한 학설을 IPA에서 추방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측면에서 1963년의 분열은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정신분석 운동사에서 최초로 프로이트를 엄격히 따르는 학파가 실제로는 정통 프로이트주의에서 배척된 것이다. 한편 이처럼 색다른 파문을 계기로 라캉은 본의 아니게 새 학파를 세우게 된다. 이 학파는 프로이트(주의)적인 것이라고 이름붙여졌지만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라캉(주의)적인 것이 된다. - P33
스톡홀름대회에서 중앙 집행부의 ‘지침‘은 더이상 돌토의 제명을 언급하지 않았고 에스나르와 라포르그의 이름도 제명 대상 명단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2년 전 에딘버러에서 발표된 ‘권고 사항‘은 계속해서 적용되었다. 따라서 에스나르와 돌토는 라캉을 따라 추방의 길을 오르는 것 외에는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81년 9월에 돌토는 그녀가 그렇게 오랫동안 운명적으로 따랐던 남자에 대한 추억을 이렇게 떠올렸다. "처음으로 어린이 정신분석을 연구하고 싶어하는 젊은 정신분석가들을 받기 시작했을 때 어린이들의 말을 가장 잘 듣고 또 어린이들의 충격을 가장 잘 감수할 수 있는 정신분석가들은 주로 라캉에게서 분석받은 사람 중 - P34
에서 발견되었다. 다시 말해 어린이, 심지어 아주 어린아이를 전문적인 교육 심리학자나 규범주의적인 소아 심리학자를 위한 연구 대상이 아니라 자기를 표현하려는 욕망을 가진 주체로 인정할 준비가 된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이들 사이에서뿐이었다. 이런 사실을 통해 나는 라캉이 진정한 정신분석가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다른 많은 정신분석가들은 많은 학설을 알고 있고 정신분석가라는 직함에 자부심을 느꼈지만 단지 그것을 하나의 직업으로만 삼았을 뿐이다." - P35
하버드에서 권력의 인격화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던 중에 라캉을 만난 장 라쿠튀르는 라캉이 그러한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라캉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제가 권력의 동기와 형태들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연구한 적이 있었습니까?" - P68
프로이트가 블로일러와 융과 논쟁하면서 또 플리스와 결별하면서 편집증을 이론화했다면 라캉은 자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체험한 내밀하고 공포스런 경험을 이론 수립에 이용했다. 그가 슈레버 아버지의 교육 이론에 대해 가졌던 부정적이고 열정적인 관심에서 우리는 분명 한편에서는 자기 아버지와 할아버지 간의 관계,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 어머니와 친가 쪽 여자들 간의 관계의 장면들이 어린 시절에 불러일으켰던 공포스런 회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슈레버의 회고록에 대한 라캉의 훌륭한 해석이 얼마나 폭군적인 아버지와 모욕당한 아버지 간의 변증법, 즉 이미 헤겔에게서 빌려온 변증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는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부터 라캉의 구조주의 시대의 바로크 풍의 두 가지 개념, 즉 폐제와 아버지-의-이름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 P85
프랑스 구조주의 사상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레비-스트로스와 라캉, 벤베니스트, 뒤메질, 베르낭이 최초로 구조주의 방법을 사용한 선구자들이었고 이들의 뒤를 이어 푸코와 데리다, 알튀세 역시 같은 방법을 사용했지만, 이용되는 양상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따라서 프랑스 구조주의의 역사는 이론적으로 두 단계로 나뉘어질 수 있다. 첫번째 단계에서는 언어학이 정신분석, 인류학, 고대사 분야에서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두번째 단계에서는 매우 다양한 일련의 연구 주제들이 공통으로 소쉬르의 구조주의를 토대로 이용했다. 이 두번째 단계에서 라캉의 이론은 프로이트의 발견에 대한 과학적 재검토로 보였다. - P94
푸코는 이렇게 지적한다. "‘의미‘란 아마도 표면적 효과, 반짝임, 거품일 뿐이며 우리에게 정말로 깊은 감동을 주는 것, 우리 전에 존재하는 것, 시간과 공간에서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체계이다. 이 점을 레비-스트로스는 사회와 관련해서, 라캉은 무의식을 대상으로 하여 보여주었다. 그때가 혁명적인 전환점이었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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