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12월 7일에 쓴, 프랑스 작가 콜레트를 떠올리는 전혜린의 일기를 보자. ‘(예술 작품)은 어던 확실한 대상인 것이다.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일(직업)을 이해해야 한다. 천분과 재질에 의해서만 콜레트가 위대한 여류 작가가 된 것은 아니다. 펜은 때때로 그 여자의 생활 수단이었고 그 펜에 의해 그녀는 세심한 작업을 요청받았었다. 마치 수공업자가 자기 연장에 의해 그런 요구를 받듯이. 고금을 통해 프로라는 것은 아마추어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전혜린은 뒤이어 시인 체사레 파베제의 글을 인용한다. ˝이 생활 속에서는 임의의 심리학적 내용이 아니고 예정된 엄격성을 압도하는 생활의 테크닉, 즉 한트베르크(Handwerk)가 중요했다.˝

이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몇 년 뒤 한국에 돌아와 현대 독일문학 선집을 기획할 때, 그녀는 일본에서 수입된 정전의 목록이나 수상 경력 등에 얽매이기보다 자신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품 내 가치, 허구의 주인공들이 동시대의 혼란스러운 한국인들에게 어떤 위안이나 기준을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 등을 고려하며 새로운 기획력을 선보일 수 있었던 건 아닐까. 15
(15. 첨언하자면 데미안은 1965년 초 전혜린의 사망 이후 출간된 유고집에 실린 두 개의 세계를 읽은 독자들이 구입하기 시작하면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게 된다. ˝당시 신생이었던 문예출판사가 그 원고를 사들여 1966년에 데미안을 출간하였고, 5천부 넘으면 베스트셀러가 되던 그 시절에 1년에 5만부나 팔리는 진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서은주, 앞의 글, 36쪽. 2017년 현재까지도 전혜린 번역 버전의 데미안과 생의 한가운데는 계속 판을 거듭하며 서점에 나오고 있다.)

나중에 좀 더 살펴보겠지만, 1920년대 ‘1세대 여류‘작가들에 대해서도 남성 평자들은 ‘작품 없는 문학가‘ 운운했다. 그 발언이 실은 그 여성 작가들이 남긴 소설이나 시, 번역, 수필 등에 대한 가차 없는 폄하와 조롱, 왜곡된 인식에서 비롯되었던 것처럼, 전혜린을 ‘문인‘ 혹은 ‘작가‘라고 부르기를 다소 저어했던 현대의 평자들은 역시 그가 남긴 수필과, 그가 현대 독일문학을 소개하는 데 있어 선정 및 번역이라는 과정을 거치며 추구했던 바, 문학에서 귀중하게 생각하는 바를 형상화했던 과정에 대해서는 ‘문학 생산‘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일까. 전혜린은 ˝식민지를 거쳐 분단과 전쟁으로 페허가 된 50-60년대 현실에서 일본어가 아닌 서구의 언어로 읽고 생각하고 썼던, 몇 안 되는 번역가˝이자 ˝유학 체험을 통해 당시 유럽의 다양한 문화, 예술의 경향을 본고장의 언어와 감각으로 생생하게 체험˝했기 때문에 [데미안]과 [생의 한가운데]를 비롯하여 현대 독일문학의 현주소를 ‘적집적으로‘ 한국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매개체였다는 사실의 의미를 애써 지워버리는 건 아닐까. (116-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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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밑줄

둘은 또한 하나의 신비로 드러나는데, 이는 둘이 무의식적 지식에 의해 재현될 수 없는 구멍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인 지식조차도 오로지 둘의 신비에 해당하는 그 무엇을 메우기 위해 창안됩니다." 끝으로, 둘은 본래 분열되어 있지만 서로 겹칠 가능성에 열려 있는 두 개의 무의식적 지식을 가리킨다. 사랑이 어떤 매개도 없는 회복 불가능한 분열이라고 말한 이후 라캉은 이렇게 첨언한다. 사랑은 또한 "두 지식이 회복 불가능하게 구분되어 있는 한에서 두 지식 간의 연결입니다. 그러한 연결이 일어날 때 매우 특권적인 무언가가 창조됩니다. 두 무의식적 지식이 겹칠 때, - P79

놀라운 뒤범벅이 만들어집니다." 때로 사랑의 둘은 두 분열된 지식의 교차를 통해 출현한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특권적이고 놀라운 사건, 하나의 축복이자 심연인 사건 말이다.
요컨대 라캉의 둘이 성의 구조, 분리된 성, 성적 비관계, 증상, 신비로운 구멍, 분열되고 연결 가능한 지식과 같은 다양한 맥락에 관련되는 한편, 둘에 대한 이러한 레퍼런스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성의 문제에 깊이 연루되는 사랑의 둘은 라캉에게 의심스러운 것으로 남는다는 점이다. 사실 이것은사랑의 둘의 치명성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정신분석가로서는 임상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입장이다. 그의 초기 논문(「편집증적 범죄의 동기: 파팽 자매의 범죄에서 라캉은 말라르메에게서 가져온 "둘이라는 질병 (mal d‘étre deux)"을 상상적 사랑으로서의 치명적 정념에 연결시킨다. 후기 라캉이 보다 "교화된 [문명화된]"사랑의 출현에 대한 정신분석의 기여 가능성을 언급한다는 점을 고려할때, 둘이라는 질병의 함의를 상상적 층위 너머로 확장시키는 것은 합법적일 것이다. 후기 라캉이 실재를 "작동되지 않는 것 (ce qui ne marche pas)"으로 정의한다는 점을 근거로 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랑의 둘은 그 치명적 정념 때문에 상상적으로 잘 작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화롭지 못한 주이상스 때문에 실재적으로 잘 작동하지 않는다. 또 실재에서 잘 작동하지 않는 것이 증상으로 출현하는 한, 모든 사랑의 둘은 증상적이다. - P80

사랑의 무대는 현상학적 경험이 아니라 주체적 구축의 문제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무대가 영원한 재구축 과정에 놓여 있다는 점인데, 왜냐하면 연인들은 둘의 확장과 둘을 위협하는 대상의 회귀 사이에서 늘 서투르게 나아가기 때문이다. [한편 정신분석은 연인들이 서투르게 나아가는 이유는 그들이 오이디푸스적 (Oidipous)이기 때문에, 즉 그들의 발이 부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할 지도 모른다.] 나아가 바디우는 또 다른 함수t를 제안한다. - P82

요컨대 라캉과 바디우 모두 융합적이고 통합적인 하나를 비판한다. 그러나 라캉이 성적 둘의 병리학에 초점을 둔다면, 바디우는 사랑의 둘의 가능성에 초점을 둔다. 라캉이 수학소 "그들/둘을 갖고 둘 주변을 맴돈다면, 바디우는 진리로서의 둘의 힘을 확신한다. 바디우에게 사랑은 세계의 무한에 관여하는 과정적 둘이다. 둘은 접근 불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사랑의 절름발이를 계속 밀고 나가기로 결심하는 한에서 말이다. 둘은 성적 비관계와 충동의 유한성을 통해서 또 그것들 너머에서 사랑의 무한을 창조하기 위한 매개로 기능한다. - P85

라캉의 다음의 발언을 보자. "실재를 정의하는 이러한 난관, 이러한 불가능성과의 대면을 통해 사랑은 시험되지 않습니까? 파트너와 관련해서 사랑은 제가 이러한 치명적인 운명에 대한 용기라고 불렀던 것을 현실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랑과 불가능성의 매개자는 용기이다. 사랑은 능력, 상황, 여건의 문제가 아니라 불가능성과 마주하는 용기의 문제이다. 용기는 불가능한 것을 견디게 하고 불가능한 것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한다. 용기에 의해 지탱되는 사랑은 단순히 반작용하지 않으며 성적 비관계라는 치명적인 운명에 적극적으로 직면한다. 불가능성을 메울 때, 사랑은 상상적 보충물이다. 불가능성 - P86

을 통과할 때, 사랑은 용감한 모험이다. 사랑은 성적 비관계의 난관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난관을 용감히 통과하는 것이다. - P87

사랑의 절차는 이 발언과 다른 요소 간의 연결에 대한 탐색을 통해 구축될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는 세계의 무한과 연동되는 사랑의 무한을 창조하는 중심 재료로 기능할 것이다. 바디우는 이렇게 말한다. "이를테면 내가 알지 못했던 누군가와의 만남이라는 완벽한 우연이 결국 하나의 운명이라는 외양을 띠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의 선언은 우연에서 운명으로 이르는 이행의 과정"이다. 운명이 팔루스 함수의 필연적 작용에 다름 아닌 라캉과 달리 바디우에게 운명은 진리로서의 사랑을 지칭한다. 그러나 우연에서 운명으로의 이행에서 핵심은 단순히 ‘나는 너를 사랑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조직된 무질서로서의 우연을 극복함으로써 둘이라는 준(準)안정적 질서를 조직하는 주체적 과정에 있다. 운명으로서의 사랑은 만남의 힘을 초과하는 충실성의 사후작용 덕분에 가능하다. 시를 단어 하나하나를 통해 우연을 극복하는 실천으로 여기는 말라르메를 원용하며 바디우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에서 충실성은 이러한 끈질긴 승리를 지칭합니다. 다시 말해 지속성의 고안 속에서, 한 세계의 탄생 속에서, 나날 이후의 나날로 인해 극복된 만남의 우연을 지칭하는 것이지요." 충실성은 고정된 도그마나 도덕적인 의리, 정적인 보수주의가 아니다. 충실성은 재창안의 운동이며, 만남의 불연속적 힘을 소생시킬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에 대한 일관된 창조이다. 그것은 만남의 무작위에 대한 투쟁과 승리를 통한 주체적 세계의 구축을 가리킨다. 오직 충실성만이 만남을 (사랑의 선언에 의해 그 단초가 세워지는) 운명으로 전환시키는 사랑의 과업을 완성시킬 수 있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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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서점이라는 게 유행을 하면서부터 더 이상 자주 교보에 가지는 않지만 일주일에 서너 번은 항상 교보에 들려서 새로 나온 책이 매대에 깔렸나 하고 구경하는 것이 취미일 때가 있었다. 지금은 일주일에 한번 나갈까 말까 정도. 그때는 어렸을 때고 지금처럼 관심 분야가 폭 넓었던 것도 아니었던지라 주로 시와 소설 섹션에 불과했지만. 그때보다 훨씬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걸 인터넷 서점과 광화문 교보에서 마주하지만 책 읽는 이들이 줄어가고 있다는 정보와 마주하면 당황스럽다. 가벼운 철학책이 베스트셀러 섹션에 꽂혀 있는 광경을 마주하면서 현대인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스스로 물어보았다. 그들은 어떤 참된 조언을 구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어지럽고 뒤숭숭하고 어두컴컴한 자신의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걸 바라는 것처럼. 뭐 아닐 수도 있고. 내가 모르는 걸 누군가는 이미 알 수도 있고 그 누군가가 멋들어진 문장들로 현명한 말을 해준다면 그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내 마음 속 동굴에 빛이 한 줄기 들어올 테고 그럼 그 빛줄기만으로도 다시 길을 더듬어 나갈 힘을 얻게 될지도. 뭐 아니면 말고. 


 얼마 전, 딸아이를 데리고 공공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철학 강연을 들었다. 어떤 재단에서 100억을 투자해서 철학 관련 사업을 대대적으로 한다고, 그 100억이란 돈이 허튼 곳으로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그 100억이 철학 관련으로 아이들과 성인들에게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해준다면 좋겠구나 여겼다. 그러니까 끼리끼리 그들끼리 해먹는 그런 거 말고 철학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걸, 일상 안에서도 충분히 마주할 수 있다는 걸, 철학함을 배우게 되면 조금 더 삶이 수월해질 수도 있다는 걸 알려주면 좋겠다 싶은 마음. 총 3회의 강연을 듣는 동안 느낀 점 몇 가지. 질문을 하라는 것.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 그 질문들이 보기에 시시하고 하찮다해도 자신에게 하라는 것, 가까운 이들에게 물어보며 답하며 서로에게 더 깊은 질문을 하라는 것. 질문을 하다 보면 궁금한 것들이 더 많아지고 궁금한 것들이 생기면서 더 많은 호기심이 일고 그 호기심이 매듭과 매듭을 맺어 이어진다는 것. 어린 시절, 그 수많은 호기심은 살아가면서 서서히 빛이 바래진다. 왜일까? 우리는 모두 그토록 찬란한 질문과 끝없는 호기심에 반짝거렸던 어린이들이었는데. 


 왜일까? 삶이 퍽퍽해져서. 사람들이 더 이상 책을 읽지 않으려고 하는 까닭이 쉬이 접할 수 있는 영상 매체들이 다양하게 퍼져서 그런 거라고 하지만 의외로 책을 읽고 싶어하는 이들은 많다. 영상이 주는 것들은 영상이 주는 것들이고 활자들이 주는 것들은 영상이 대체할 수 없다고 여긴다. 활자들 사이에서 더 오랜 시간을 뛰어놀아 그런 나만의 배경도 있겠지만 이제 막 서서히 책에 빠져들기 시작하는 딸아이에게 물어보아도 영상이랑 책이 주는 것들은 다른 거 같아, 활자들 사이에서 그 여백들이 더 많이 생겨나, 엄마. 라고 답했다. 사고의 폭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말하면 좀 시큰둥한 거 같고 음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카페인이 아직 들어가지 않아서일까, 뇌가 빠릿빠릿 돌아가지 않는다. 뇌는 좀 느릿느릿 돌아가도 좋아, 나는 마음이 빠릿빠릿 돌아가는 인간이 되고 싶은걸. 그러고 보면 철학도 뇌보다는 역시 마음을 빠릿빠릿하게 만드는 거 같아. 다시 돌아가서_ 한동안 질문을 거의 하지 않고 지내던 나는 요즘 슬슬 질문을 하기 시작하는데 까닭은 꽉 조이던 힘을 조금씩 풀기 시작해서 그런 걸 수도. 친구들이 계속 읽고 쓰자, 우리가 할 일은 그것들, 이라고 노상 이야기를 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곤히 잠든 아이를 깨울 시간인지라 일단 여기까지만.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자 하는 걸까?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면서 질문해보는 오늘 아침. 당신은 무슨 책을 읽고 있을까? 궁금해지는 오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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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4-03-17 0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수이님:) 여전히 열심히 읽고 쓰는 삶을 살고 계시네요...전 그렇지 않은 삶을 살고 있지만 ㅋㅋ 오늘 아침에는 한강의 ‘ 작별하지 않는다‘ 을 조금 읽었습니다. ㅎㅎ

수이 2024-03-18 05:4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한님, 잘 지내시죠? 저는 작년 여름부터 신나게 놀면서 책 안 읽으며 살다가 친구들이 언제까지 방탕하게 살 거냐 잔소리를 어마무시하게 하는 바람에 이제 막 책 다시 읽어요, 이제 겨우 두달 지난 거 같습니다, 다시 읽기 시작한지. 돌아오신 건가요? 테니스 이야기 읽은 게 마지막이었던 거 같은데 ^^
 

어린 시절 충족하지 못한 커다란 결함을 안고 있을 경우, 어린 시절 할 수 없었던 응석을 마음껏 부려보고 그때 하고 싶었던 일들을 직접 해봄으로써, 본래 자기 모습을 되찾고 애착 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
실제로 애착장애가 있는 사람들 중에는, 치료 단계에서 일시적으로 어린아이 시절로 돌아가 아이처럼 응석을 부리거나 아이들이 하는 놀이나 공상에 빠지는 사례도 있다. 나의 환자 중에 어린 시절 매일 밤늦게까지 할머니와 지내야 했던 여성이 있었다. 간호사인 어머니가 주야간 근무를 하느라 딸을 제대로 돌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딸의 성장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상담을 받은 어머니는, 자신이 딸을 너무 오래 방치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성인이 된 딸과 함께 잠을 자거나 수다를 떠는 식으로 딸의 상처를 어루만져주었다. 이런 시간이 6개월 정도 지속되자 딸은 안정을 되찾았고, 자해도 중단했다. 물론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행동하지도 않았다.
늘 품행이 반듯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거나 뭔가에 심취한다면 어린 시절 충족시키지 못한 욕구를 충족시키고 상처받은 애착을 조금이라도 치유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다. 술이나 약물, 쇼핑이나 섹스에 중독된다면 흥분이나 도취감을 통해 자신의 상실감을 잊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배불리 젖을 먹고 편안하게 잠드는 갓난아기의 충족감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부족한 부분이 클수록 회복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안전기지에 대한 욕구는 너무나 절실하기 때문에 무엇을 희생해서라도 충족시키길 바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정이 파탄나거나, 그동안 살면서 이룬 성과들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그 갈망을 쉽게 외면할 수 없다.

이런 욕구는 해결하지 못한 애착장애 때문에 생겼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안전기지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키려는 열망에서 발현된 것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노력으로도 진정한 안전기지를 얻지 못할 경우, 커다란 고통과 손실만 남긴 채 비참한 실패로 끝나버린다는 점이다.
위험한 도박을 하지 않고, 아무 상처도 받지 않으면서 든든한 안전기지를 확보하는 것이 최선이다. 결국 안전기지는,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이 아닌 자신의 주변이나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전기지가 되어주려고 노력하다 보면 본인 역시 안전기지를 얻을 수 있다. 그 대상은 조금만 신경 쓰면 주변에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266-268)
  • 애착수업오카다 다카시 지음, 이정환 옮김푸른숲 2017-12-01장바구니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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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4-03-15 0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에서 끊겼습니다. 죄송죄송죄송. 편집 테크닉은 여름에 익히도록 하겠습니다.

2024-03-15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3-16 0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애착수업 - 나를 돌보는 게 서툰 어른을 위한
오카다 다카시 지음, 이정환 옮김 / 푸른숲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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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안전기지가 된다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지만 모든 관계의 고찰은 애착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지도. 오카다 다카시의 애착론에 대해서 가볍게 훑는 동안 더 많은 반성. 엄마로서 친구로서 딸로서 이모로서 언니로서 연인으로서 누군가의 안전기지가 되는 일에 대해 조금 더 살피고자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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