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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또한 하나의 신비로 드러나는데, 이는 둘이 무의식적 지식에 의해 재현될 수 없는 구멍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인 지식조차도 오로지 둘의 신비에 해당하는 그 무엇을 메우기 위해 창안됩니다." 끝으로, 둘은 본래 분열되어 있지만 서로 겹칠 가능성에 열려 있는 두 개의 무의식적 지식을 가리킨다. 사랑이 어떤 매개도 없는 회복 불가능한 분열이라고 말한 이후 라캉은 이렇게 첨언한다. 사랑은 또한 "두 지식이 회복 불가능하게 구분되어 있는 한에서 두 지식 간의 연결입니다. 그러한 연결이 일어날 때 매우 특권적인 무언가가 창조됩니다. 두 무의식적 지식이 겹칠 때, - P79

놀라운 뒤범벅이 만들어집니다." 때로 사랑의 둘은 두 분열된 지식의 교차를 통해 출현한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특권적이고 놀라운 사건, 하나의 축복이자 심연인 사건 말이다.
요컨대 라캉의 둘이 성의 구조, 분리된 성, 성적 비관계, 증상, 신비로운 구멍, 분열되고 연결 가능한 지식과 같은 다양한 맥락에 관련되는 한편, 둘에 대한 이러한 레퍼런스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성의 문제에 깊이 연루되는 사랑의 둘은 라캉에게 의심스러운 것으로 남는다는 점이다. 사실 이것은사랑의 둘의 치명성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정신분석가로서는 임상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입장이다. 그의 초기 논문(「편집증적 범죄의 동기: 파팽 자매의 범죄에서 라캉은 말라르메에게서 가져온 "둘이라는 질병 (mal d‘étre deux)"을 상상적 사랑으로서의 치명적 정념에 연결시킨다. 후기 라캉이 보다 "교화된 [문명화된]"사랑의 출현에 대한 정신분석의 기여 가능성을 언급한다는 점을 고려할때, 둘이라는 질병의 함의를 상상적 층위 너머로 확장시키는 것은 합법적일 것이다. 후기 라캉이 실재를 "작동되지 않는 것 (ce qui ne marche pas)"으로 정의한다는 점을 근거로 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랑의 둘은 그 치명적 정념 때문에 상상적으로 잘 작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화롭지 못한 주이상스 때문에 실재적으로 잘 작동하지 않는다. 또 실재에서 잘 작동하지 않는 것이 증상으로 출현하는 한, 모든 사랑의 둘은 증상적이다. - P80

사랑의 무대는 현상학적 경험이 아니라 주체적 구축의 문제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무대가 영원한 재구축 과정에 놓여 있다는 점인데, 왜냐하면 연인들은 둘의 확장과 둘을 위협하는 대상의 회귀 사이에서 늘 서투르게 나아가기 때문이다. [한편 정신분석은 연인들이 서투르게 나아가는 이유는 그들이 오이디푸스적 (Oidipous)이기 때문에, 즉 그들의 발이 부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할 지도 모른다.] 나아가 바디우는 또 다른 함수t를 제안한다. - P82

요컨대 라캉과 바디우 모두 융합적이고 통합적인 하나를 비판한다. 그러나 라캉이 성적 둘의 병리학에 초점을 둔다면, 바디우는 사랑의 둘의 가능성에 초점을 둔다. 라캉이 수학소 "그들/둘을 갖고 둘 주변을 맴돈다면, 바디우는 진리로서의 둘의 힘을 확신한다. 바디우에게 사랑은 세계의 무한에 관여하는 과정적 둘이다. 둘은 접근 불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사랑의 절름발이를 계속 밀고 나가기로 결심하는 한에서 말이다. 둘은 성적 비관계와 충동의 유한성을 통해서 또 그것들 너머에서 사랑의 무한을 창조하기 위한 매개로 기능한다. - P85

라캉의 다음의 발언을 보자. "실재를 정의하는 이러한 난관, 이러한 불가능성과의 대면을 통해 사랑은 시험되지 않습니까? 파트너와 관련해서 사랑은 제가 이러한 치명적인 운명에 대한 용기라고 불렀던 것을 현실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랑과 불가능성의 매개자는 용기이다. 사랑은 능력, 상황, 여건의 문제가 아니라 불가능성과 마주하는 용기의 문제이다. 용기는 불가능한 것을 견디게 하고 불가능한 것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한다. 용기에 의해 지탱되는 사랑은 단순히 반작용하지 않으며 성적 비관계라는 치명적인 운명에 적극적으로 직면한다. 불가능성을 메울 때, 사랑은 상상적 보충물이다. 불가능성 - P86

을 통과할 때, 사랑은 용감한 모험이다. 사랑은 성적 비관계의 난관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난관을 용감히 통과하는 것이다. - P87

사랑의 절차는 이 발언과 다른 요소 간의 연결에 대한 탐색을 통해 구축될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는 세계의 무한과 연동되는 사랑의 무한을 창조하는 중심 재료로 기능할 것이다. 바디우는 이렇게 말한다. "이를테면 내가 알지 못했던 누군가와의 만남이라는 완벽한 우연이 결국 하나의 운명이라는 외양을 띠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의 선언은 우연에서 운명으로 이르는 이행의 과정"이다. 운명이 팔루스 함수의 필연적 작용에 다름 아닌 라캉과 달리 바디우에게 운명은 진리로서의 사랑을 지칭한다. 그러나 우연에서 운명으로의 이행에서 핵심은 단순히 ‘나는 너를 사랑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조직된 무질서로서의 우연을 극복함으로써 둘이라는 준(準)안정적 질서를 조직하는 주체적 과정에 있다. 운명으로서의 사랑은 만남의 힘을 초과하는 충실성의 사후작용 덕분에 가능하다. 시를 단어 하나하나를 통해 우연을 극복하는 실천으로 여기는 말라르메를 원용하며 바디우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에서 충실성은 이러한 끈질긴 승리를 지칭합니다. 다시 말해 지속성의 고안 속에서, 한 세계의 탄생 속에서, 나날 이후의 나날로 인해 극복된 만남의 우연을 지칭하는 것이지요." 충실성은 고정된 도그마나 도덕적인 의리, 정적인 보수주의가 아니다. 충실성은 재창안의 운동이며, 만남의 불연속적 힘을 소생시킬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에 대한 일관된 창조이다. 그것은 만남의 무작위에 대한 투쟁과 승리를 통한 주체적 세계의 구축을 가리킨다. 오직 충실성만이 만남을 (사랑의 선언에 의해 그 단초가 세워지는) 운명으로 전환시키는 사랑의 과업을 완성시킬 수 있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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