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와 [보바리 부인]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작품이 아니다. 어리석은 미치광이 돈키호테와 광기어린 사랑으로 자신을 망쳐버린 보바리는 세르반테스와 플로베르가 창조한 인물이지만, 그들에게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야기 속의 세계가 계속 되기를 바라고, 그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 우리가 거기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인물들에 매료되고 자기도 모르게 책장을 넘기며 그들의 뒤를 따라간다. 그러는 사이 그들이 우리의 의식에 침투해 우리의 일부를 돈키호테와 엠바 보바리로 바꾸어놓는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읽은 소설은 우리가 읽음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일부가 된다. 한번 읽어버린 소설은 더 이상 우리가 자신과 분리할 수 없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이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나가사와의 말은 그런 면에서 일리가 있다.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은 두 사람의 자아 안에 공유할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니까.
동시에 소설도 우리를 통해 증식을 거듭한다. 그렇게 이야기와 인간이 하나가 되면서 이야기의 우주가 무한히 확장해간다. 한때 나는 인간이 이야기의 숙주라 생각했다. 이야기가 유전자처럼 인간을 탈것으로 삼아 다음 세대로 전승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달리 생각한다. 세상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한 대부분을 이야기로부터 배웠고, 그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그 해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그런 인간은 과연 무엇일까?
그렇다. 인간이 바로 이야기다.
돈키호테와 엠마 보바리는 비록 현실의 존재는 아니지만 김영하라는 생물학적 존재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살아남을 것이고 앞으로도 증식을 거듭할 것이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라는 어떤 우월한 존재가 책이라는 대량 생산품을 소비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이야기가 책이라는 작은 틈을 통해 아주 잠깐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세계와 영겁의 시간에 접속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인간이 바로 이야기이고, 이야기가 바로 우주다. 이야기의 세계는 끝이 없이 무한하니까. (54-56)
다다다김영하 지음복복서가 2021-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