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와 위반은 서로 기묘한 공생관계를 형성한다. 위반이 초자아의 망에 잡혀있는 한 위반은 결코 법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위반과 처벌의 악순환은 지속되는 것이다. 위반은 더 이상 반역의 실천이 아니라 죄의식에 이르는 통로이다. 이런 식의 위반은 결국 법의 현상유지나 강화에 기여할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위반이라고 볼 수 없다.
반면 라캉의 윤리가 긍정하는 욕망은 법과 위반의 틀에 매어 있는 욕망이 아닌 그 틀을 벗어나는 욕망이다. 그것은 죄의식과 초자아의 논리를 넘어서서 그 악순환을 깨는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위반의 욕망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초자아의 교묘한 감시의 눈을 벗어날 수 있을 때 비로소 위반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위반의 욕망에 바탕을 둔 정신분석의 윤리는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윤리적 주체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좋음으로써 초자아의 가학적인 요구를 무력화하고 욕망의 만족을 성취하고자 한다. 성욕의 희생을 강요하는 ‘문명‘이라는 이름의 지배질서는 따라서 근원적으로 부정되고, 만족에 기초한 새로운 질서가 지속적으로 추구된다. 위반은 결국 아버지의 도덕주의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으로서 그 의미를 지닌다. - P22
아버지를 살해한 후 형제들의 손에 남는 것은 오직 견딜 수 없는 죄의식뿐이다. 금지의 기제를 통해 탄생한 금지 너머의 희열은 사후에 구성된 환상인 것이다. 그것은 소외 이전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소외 이후에 등장한 소외의 부산물이다. 물론 아버지의 법 안으로 편입된 주체는 소외 이전의 상태에 대한 환상을 품기 십상이다. 현실을 구성하는 배제의 논리가 필연적으로 환상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소외되지 않은 원래의 상태라는 관념은 허구이다. 여기서 주체는 대상의 결여 또는 부재를 상실로 착각한다.
‘결여(lack)‘와는 달리 ‘상실(loss)‘은 상실 이전의 완전한 충만의상태를 전제한다. 대상은 이제 처음부터 없던 것이 아니라 주체가 잃어버린 대상, 따라서 다시 되찾아야 할 대상으로 바뀐다. 흔히 과거는 보다 아름답고 보다 완벽한 시간으로 기억된다. 그것이 현재의 시점에서 재구성된 환상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본질적인 속성으로 오인되고 나아가서 현재의 시간은 과거로부터 소외된, 즉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불완전한 시간으로 인식된다. 현재는 잃어버린 과거를 욕망하게 된다. 오이디푸스 이전의 어머니의 충만함 같은 관념도 역시 마찬가지다. 주체는 부재하는 대상으로서가 아닌 잃어버린 대상으로서 어머니의 몸을 구성한다. 부재를 상실로 전환함으로써 어머니의 몸에 대한 근원적인 환상을 품게 되는 것이다. - P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