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견뎌내. 왜냐하면 아무도 당신을 대신할 수 없고, 자살은 영영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뜻이니까. 아니, 그러면 안 돼. 사랑은 고집스럽게 삶에 매달린다는 뜻이야. 사랑은 그걸 받아들인다는 뜻이야. (...) 살아. 계속 살아. 난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간호사라고 말하겠어. 그리고 이 따뜻한 수프 한 그릇을 주면서 마시라고 하겠어. (299-300)


 

이 소설의 작가 루이스 어드리크가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이 문장이 아니었을까? “살아. 계속 살아.”

이 소설은 작가의 실제 결혼 생활에 대한 자전적인 성격이 짙은 소설이다. 루이스 어드리크는 마이클 도리스라는 유명 작가와 16년의 결혼 생활 후 이혼을 했다. 둘 다 미국 원주민 혈통이었고 작가이기도 해서 이상적인 커플이라고 부러움을 샀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은 결국 파경을 맞았고 이혼 직후 마이클 도리스는 모텔 방에서 수면제와 술을 마시고 자살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당신은 나를 소유하려고 해. 그리고 내 실수는 이거야. 당신을 사랑한 나머지 당신이 진짜로 나를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 (34)

 

소설 내내 이 부부에게 일어나는 일은 바로 이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남편 길은 부인 아이린에 대한 집착과 질투, 폭력, 광기를 드러내며 부인을 소유하려고 하고 아이린은 그것에 진절머리가 나서 길과 이혼을 결심하지만 막상 또 길 앞에 서면 결심은 무너져 내리고 길이 자신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답답한 상황이 소설 전반에 쫘악 깔려 있어서 굉장히 우울한데 이것이 작가의 현실 결혼 생활의 반영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참 뭐라 말하기가 쉽지가 않다.

작가 루이스 어드리크의 인생도 쉽지 않았구나 싶은 생각만 든다. 작품과 작가의 사생활은 따로 떼어 놓는 게 맞겠지만 이 소설 너무나 자전적인 소설인데 어디 그게 가능한가?

 




길은 다른 남자의 욕망 속에서 나를 원했어. 그는 그걸 알지도 못했지만, 사실이었어. 그래서 나를 더욱 관능적으로 그린 거야. 나의 형상으로 관객을 약 올린 거지. 길은 경쟁하고 있었어. 다른 남자들이 바라는 것을 소유하고 싶었던 거야. 물론 그건 남자가 품는 지극히 일반적인 소망이지만. 그 욕망의 방정식에서 나는 완전히 배제되어버렸어. (233)

 

이렇게 잘 알면서 떠나지 못 하고 계속 받아주는 아이린. ... 왜 그러는거야 대체ㅜㅜ

 

 



그나저나 이 소설 역시 문장이 참 좋다

답답한 캐릭터들이 내내 답답한 짓을 하는데도 작가가 글을 너무 잘 써서 계속 읽고 싶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루이스 어드리크. 다른 작품들도 계속 읽어볼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목련 2023-09-26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소설 구매한 기억은 있는 데 읽은 기억은 없어요. 물론 찾아보니 책도 없고요 ㅎ

망고 2023-09-26 12:42   좋아요 0 | URL
헐 어떻게 된 걸까요? 책이 작아서 어디 쳐박혀 있으면 잘 안보일거 같긴 한데요...
 



드디어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다 읽었다. 야호~ 나도 이제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단행본이라는 이 유명한 고전 소설이 무슨 내용인지 알게 되었다. 이제 아주 속이 시원하네.

사실 나는 동화책을 제외하고 찰스 디킨스 소설을 읽은 건 위대한 유산이 유일했다. 이것도 최근에 읽었다. “위대한 유산은 문장마다 유머가 가득하고 상황이 코믹스러워서 매우 재밌게 읽었고 찰스 디킨스의 소설들은 다 이런 스타일 일 줄 알았다. 그래서 두 도시 이야기도 유머가 가득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심각한 내용이었고 묵직한 서술이 그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래서 읽으면서 슬슬 괜히 시작 했나하는 후회가 밀려올 정도로 약간 지루한 감이 있었는데 그래도 꾹 참고 끝까지 읽었다. 사실 썩 재밌지는 않았다.

 

프랑스 혁명이 배경이 되는 소설인데, 특별한 점은 혁명 이후 혁명에 반하는 사람이라고 지목되면 마구잡이로 기요틴으로 끌고 가는 공포 정치 시대가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로써 혁명이 비인간적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와중에 찰스 디킨스의 나라 영국은 프랑스의 혼란한 상황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혀를 끌끌 차면서 영국의 체제가 더 안정적이고 우월하다는 인상을 감추지 않는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이 잔인한 프랑스 혁명가들 대 이성적이고 인간적인 영국인들이라는 대립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 의도가 대충 파악이 되기도 한다.

급기야 영국인 인물 중 한명은 예수처럼 남의 죄를 대신하여 숭고한 최후를 맞는 것으로 소설 속에서 칭송받기까지 하는데... 아아...! 이런 부분들은 좀 낯뜨거웠다. 사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그 여자의 남편을 구해주려고 대신 죽는다는 설정의 멜로드라마를 만들려면 아예 처음부터 이 두 인물에만 집중해서 팠어야 하는데 이 소설은 이 남녀가 내내 비중 있는 주인공이 아니었다가 남자가 갑자기 사랑한다며 폭주하며 예수 같은 행동을 하니 뜬금없을 수밖에. 빅토리아 시대 소설이니 현재의 소설 스타일대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요즘 이렇게 쓰면 막장드라마라고 욕먹는다고!

영국인이 썼으니 프랑스 혁명 속에서도 영국인이 부각되는 건 약간 거슬리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려니 하고 넘겨야겠지.

그렇다고 이 소설이 프랑스 혁명 자체에 대해서 떨떠름한 입장을 취하고 있냐하면 그런 것은 전혀 아니다. 전체적으로 찰스 디킨스는 귀족의 횡포와 극단적인 빈부격차로 인해 혁명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기조를 소설 속에서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혁명이 제대로 흘러가지 않고 초심을 잃는 상황을 비판하고자 이 소설을 썼다고 이해할 수 있다. 권력에 대항하여 권력을 잡은 인간들이 권력의 맛에 취해가는 인간 보편의 속성에 대해서 꼬집고 있는 것이지 혁명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어쨌든 그렇게 재밌게 읽지는 않았지만 나도 이제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읽은 사람이 되었다. 어디 가서 아는 척 할 수 있어서 이것만으로도 뿌듯한 것이다^^

 

이렇게 페이퍼를 끝내기 너무 어이없을 정도로 내용이 없으니까

소설의 첫 문장으로 가장 잘 썼다는 평을 듣는다는 이 소설의 첫 문장을 옮겨 놓는 것으로 마무리 하겠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자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들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13)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목련 2023-09-11 0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망고 2023-09-11 10:04   좋아요 0 | URL
움하하하하 저는 다 읽어서 너무 후련합니다!

다락방 2023-09-11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 책 읽으면서 디킨스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비판적이구나, 생각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저도 디킨스 소설은 이 책보다 [위대한 유산]이 더 좋았고요. 위대한 유산은 읽다가 막판에 울었네요 ㅠㅠ
그렇지만 두 소설 모두 읽어두면 좋을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위대한 유산의 핍과 해비셤 부인은 문학 작품 읽다보면 수시로 막 등장해서요 ㅎㅎ

망고 2023-09-11 13:3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말씀처럼 찰스 디킨스 소설들은 하도 언급하는 곳이 많아서 저도 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위대한 유산˝ 읽을 때는 문장마다 위트가 넘치고 너무 재밌다 하고 읽어서 찰스 디킨스 역시 대문호다 하고 인정했거든요. 근데 사실 이 책 ˝두 도시 이야기˝는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들이 많고 모든 등장 인물들이 어쩌다 보니 다 연결되어 있다는 설정이라 마치 막장드라마 같기도 했어요ㅋㅋㅋㅋ아무튼 이 유명한 작품을 드디어 읽게 되어서 뿌듯 후련합니다.
 
에메랄드 시티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메랄드 시티를 찾으러 떠났다가 혹은 찾았다고 생각했다가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들. 단편들 중에서 ‘성심학교‘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제니퍼 이건의 첫번째 장편 ‘인비저블 서커스‘와의 접점도 많이 보이는 단편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몰 플레저
클레어 챔버스 지음, 허진 옮김 / 다람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날도 덥고 요즘 책에 집중하기도 힘들어서 가벼운 소설을 읽고 싶은 마음으로 도서관에서 서성이다가 책 표지 색깔이 예뻐서 집어 들었다. 책날개에 있는 작가 소개에 따르면 영국에서 1999년에 발표한 소설이 올해의 로맨틱 소설로 뽑혔던 적이 있었다나. 그 후 여러 소설을 쓰고는 오랜 기간 침잠해 있다가 이 소설 스몰 플레저는 무려 10년 만에 발표한 작품이란다. 나는 이런저런 설명보다는 올해의 로맨틱 소설에 뽑혔었다는 첫 문구에 혹해서 그렇다면 이 소설도 로맨틱 소설일 확률이 크고, 로맨틱 소설=가벼움 이라는 나만의 편견 가득한 공식에 의해서 흔쾌히 읽어보기로 했다.

근데 처음 몇 장 읽어보니 딱 감이 왔다. 가볍고 흔한 로맨스 소설이 전혀 아니구나 하고... 이 책 문장이 정말 좋은 거다. 가벼운 외피를 덮고 있긴 하지만 툭툭 무심하게 던지는 섬세한 문장들에 감격해서 나는 결국 책을 사고야 말았다.

읽어 나가면서는 문장도 좋았지만 특히나 다양한 여성의 삶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에 공감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이 더욱 흡족하게 다가왔다.

 

 

1957년 런던 외곽의 작은 지역 신문사 기자로 일하고 있는 진은 39살 독신 여성으로서 늙은 어머니를 부양하며 살고 있다.

진의 어머니는 간섭이 심하고 의존적이라 진의 퇴근 후의 시간과 휴일을 옭아맨다. 39살 독신 여성이지만 진은 혼자만의 자유로운 시간이라고는 없다. 어머니가 목욕을 하는 고작 30분 정도가 그녀에게 허락된 해방의 시간이고 그 짧은 순간을 즐기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 이토록 진의 삶에서 즐거움은 아주 작은 것들이었다.

 

하루의 첫 담배, 일요일에 점심식사를 하기 전에 마시는 셰리 한 잔, 일주일 동안 쪼개 먹는 초콜릿 바 하나, 봄의 첫 히아신스, 단정하게 잘 다려서 개어놓은 여름 향기 나는 빨래, 눈 덮인 정원, 보물 서랍에 넣으려고 충동 구매한 문구 (456)

 

이런 작은 즐거움들로 기운을 차리고 살아가던 진의 삶에 새로운 사건이 다가오는데 그것은 바로 신문사 앞으로 온 편지 한통에서 시작된다. 그레천이라는 여성이 10년 전 순수하게 처녀 생식으로 아이를 낳았다고 주장하는 믿기 힘든 사연이 그 내용이었다. 진은 이 처녀 생식에 대한 제보를 조사하고 기사를 쓰는 일을 맡게 되면서 사연의 주인공 그레천과 그녀의 가족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10대 시절 관절염으로 수녀들이 운영하는 요양원에 입원한 적이 있던 그레천은 그곳에서 퇴원하고 나서 임신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요양원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확실한데 그레천은 순진무구하게도 자신은 전혀 남자와 관계가 없었다고 확신한다.

아름답고 이국적인 외모의 그레천과 그런 그녀와 똑 닮은 10살 된 딸 마거릿을 만나본 진은 그레천이 딱히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다고 느낀다. 게다가 그레천의 남편 하워드 까지도 아내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이 가족은 진의 눈에는 그레천의 정갈한 살림 솜씨로 빚어진 안락한 집과 자상하고 따뜻한 남편 그리고 예쁘고 똑똑한 딸이 있는 그야말로 교외의 이상적인 가족의 표본처럼 보인다. 진은 그레천의 처녀생식 주장을 그저 믿어 주고 싶을 정도로 이 가족에게 매료된다. 그리고 어느새 마거릿에게는 비공식 이모가 되고 하워드와는 서로 비밀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 이상의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진은 마거릿을 향한 모성애와 하워드를 향한 사랑으로 행복과 양심의 가책을 동시에 느끼며 이 가족의 삶을 점점 더 가까이에서 지켜본다. 그러자 처음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레천이 가족 내에서 그리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 채게 된다. 알고 봤더니 이 가족은 이상적인 완벽한 가족이 아니었다. 그레천과 하워드는 부부관계 없이 마치 삼촌과 조카 사이처럼 살고 있는 겉모습만 부부였던 것이다.

어쩌면 이들 또한 진과 마찬가지로 그저 안락한 가정이라는 작은 즐거움들에 의지한 채 자신들의 근본적인 행복을 유예하며 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처녀 생식이라는 미스터리를 조사해 나가는 와중에 진이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성들이다. 거의가 독신 여성들이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시 그레천을 잘 알던 간호사는 현재 독신의 병든 몸으로 혼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간호사로 일하며 어머니를 부양하고 여동생의 아들까지도 대신 길러주며 힘든 삶을 살았다. 그녀는 남을 돌봐주면서 평생을 살았지만 현재 노년이 된 그녀 옆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그저 그동안 수집한 도자기 인형만이 곁을 지켜주고 있는 작은 즐거움일 뿐이다.

그레천의 입원실 동기였던 마사는 관절염을 앓으면서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혼자서 궁핍하게 살아가고 있다. 지저분하고 추운 집에서 근근이 살아가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인지 태도만큼은 당당하다.

또 다른 입원실 동기인 키티는 보조 호흡기 통 속에서 살아야 할 정도로 허약하지만 종교에 의지한 채 나름 긍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예전 요양원 입원실에서 만난 낯선 남자를 천사라고 굳건히 믿고 있을 정도로 해맑게 신실하다.


1950년대를 살아가는 이 소설 속 여성들은 이토록 나름대로 자기만의 작은 즐거움들로 고된 삶을 견디고 있는 듯 보인다. 과거의 깊은 슬픔과 현실의 갑갑함과 미래의 암담함에서 의지할 수 있는 건 그녀들이 만들어낸 작은 즐거움들이다. 그 작은 즐거움들은 그녀들이 살아가는 희망이지만 자기기만이기도 하다. 그것이 가장 잘 응축된 상태는 그레천의 처녀 잉태라는 믿음이다. 현실은 그것이 참담한 범죄의 결과라고 똑똑히 말하고 있지만 아마도 순전한 여성이어야만 한다는 당시의 종교 혹은 교육으로 인해 그레천은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 했을 것이다. 현재도 딸 마거릿이 천사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믿고 있듯이 여전히 그레천은 작은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자기기만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

진이 쓰지 않고 모아둔 서랍 속 예쁜 물건들처럼 작은 즐거움은 일상을 예쁘게 장식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이 산부인과 의사에게 들었던 폭언 같이, 그레천이 남몰래 당한 범죄 같이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을 참고 외면해야지만 그나마 여성들이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들어낸 위장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 이야기 속 여성들의 작은 즐거움들은 미스터리가 밝혀지고, ‘사랑같이 근본적인 행복을 찾았을 때 하나씩 사라지고 만다. 그레천이 그토록 정갈하게 가꿔왔던 아름다운 가정처럼, 진의 억제된 일상을 비추던 작은 즐거움들처럼.

 

 

이 소설은 약간의 미스터리와 살짝 달달한 로맨스와 반전 유머가 섞인 가벼운 소설로 읽을 수도 있다. 쉽게 쓰여 있고 구조도 복잡하지 않다. 하지만 이야기 겉포장의 가벼움을 걷어 제치고 나면 당시 우울하고 힘든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보일 것이다. 그녀들의 이야기가 다만 60년 전의 옛날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없을 만큼 현재와 연결되는 지점들도 많다. 특히 진의 미래를 암시하는 듯 했던 병든 노년의 부모를 부양하는 독신 여성의 이야기는 지금 현재에서도 와 닿는 부분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저 가벼운 소설인 줄 알았다가 아름답고 통찰력 가득한 문장들과 무거운 주제를 가뿐하게 엮어낸 이야기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을 받으며 책을 덮었다.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은 결코 작지 않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3-09-01 1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땡스투 합니다요~

망고 2023-09-01 19:3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요~
 
셰임 머신 - 수치심이 탄생시킨 혐오 시대, 그 이면의 거대 산업 생태계
캐시 오닐 지음, 김선영 옮김 / 흐름출판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치심이 탄생시킨 혐오 시대, 그 이면의 거대 산업 생태계라고 책 표지에 쓰여 있는데 이 문구가 바로 이 책의 주제를 요약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얼핏 생각하기로는 수치심이란 인간이 느끼는 부끄러워하는 개인적인 감정인데 이 수치심으로 사회와 산업이 연결되는 지점이 무엇일까 하고 책을 읽기 전까진 잘 와닿지 않았다.

쉽게 생각해 보면 하루에도 수십 번은 보고 지나칠 법한 미용관련 산업이 떠오르기도 한다. 유행하는 미의 기준에 미치지 못 하는 대다수의 여성들에게 그 상태를 부끄러워하도록 유도해서 화장품이나 성형수술, 다이어트 등을 파는 광고문구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의 초반은 저자가 직접 겪은 과체중 여성으로 살면서 느낀 수치심의 사례들이 나온다. 어느 날 저자가 쿠키 재료를 사러 식료품점에 갔다가 계산대에서 가게 주인이 왜 이런 재료를 사는 거예요? 본인이 뚱뚱하다는 거 몰라요?” 라고 말해서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 수치심에 빠져들었단다. 이 일화는 읽고 있는 나도 경악하게 했는데 직접 겪은 저자는 어떠했겠는가. 사람들이 왜 이렇게 무례한가!

아무튼 이런 식으로 일상적으로 사람들에게 상처받은 마음은 내가 잘 못 살고 있다는 깊은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자학하게 한다. 이때 이들에게 다이어트 산업은 마수를 뻗어온다. 유사과학과 과대광고로 무장한 다이어트 산업은 수치심에 빠진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쓰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다이어트 산업에 돈을 쓴 사람들은 계속해서 다이어트에 실패하게 되어 있고 실패를 거듭할수록 더욱더 수치심을 느끼고 자기혐오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개인은 실패하는데 다이어트 산업은 점점 커진다. 누군가의 수치심은 이토록 돈이 된다.

 

 

빈곤과 약물중독 같은 사회 문제도 수치심 머신이 작동되면 국가가 나서서 고민하고 해결해야하는 부분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는 틈이 생긴다고 이 책은 지적하기도 한다.

빈곤과 약물 중독에 빠지게 된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들여다보기 보다는 그런 사람들은 개인이 게을러서, 노력을 안 해서, 의지가 약해서 저렇게 되는 거니까 세금을 써서 도울 필요 없는 사람들이라는 비난으로 인해 정작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은 수치심에 더욱 움츠리게 되고 자신의 처지에서 빠져나올 의지를 상실한다는 거다. 그러니 그들을 모욕해서 수치심이 들게 하기 보다는 조건 없는 현금 지급 같은 복지 정책으로 국가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 등 현 시대의 인터넷 소통 방식은 건수만 생기면 누군가를 조롱과 혐오를 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대표 수치심 머신이라는 점도 여러 사례를 들어 지적한다.

나도 어디선가 미국 월마트에서 찍힌 비만이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 모음 같은 사진들을 보면서 웃은 적이 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들도 실존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 인터넷으로 퍼진 조롱의 피해자라는 사실에 아차 싶었다. 다시는 이런 사진들을 유머로 소비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한 순간의 실수를 사진 찍어서 인터넷에 유포해 수치심을 주고 조롱하는 이런 행위, 누군가를 혐오하는 발언 등은 페이스 북과 구글 같은 거대 기업이 부채질 하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용자들을 붙잡는 수단으로 조롱과 혐오만큼 손쉬운 것도 없다. 그것들은 조회수가 높고 트래픽을 올리며 수익을 높이는 좋은 수단이므로 알고리즘은 혐오와 조롱으로 사람들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조롱과 혐오가 돈이 되는 시대다.

 

 

수치심을 불러 일으켜서 좋은 결과를 내는 경우도 이 책은 소개하고 있다. 수치심 머신이 올바르게 작동된 예랄까? 수치심 머신이 권력과 돈이 없는 약자에게 작동되는 지점은 경계해야 하지만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정치 지도자 같은 권력자에게 작동된다면 좋은 결과를 도출해 낼 수도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이지리아의 독재자를 향한 시위대들은 그의 수치심을 자극해서 국민들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었다. 최근의 미투 운동도 수치심 머신이 긍정적으로 작동한 덕이라고 예시를 들고 있다. 코로나 팬더믹 시기에 마스크를 쓰지 않고 다니는 사람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지적도 안정적인 사회를 위해 필요한 행동이었다고 긍정하고 있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정의를 위한 긍정적인 수치심 유발이라는 저자의 주장 속에 그 기준이 살짝 모호하다는 점에서 의문이 들기도 했다. 인종차별을 해서 SNS로 엄청난 비난에 휩싸여서 결국 회사까지 잘린 백인 여성에 대해서는 그녀를 그렇게까지 몰고 간 점은 너무했다고 했던 저자가 J.K. 롤링에게는 가차없다.  트랜스젠더는 여성으로 인정할 수 없다 라고 한 SNS에서의 발언이 논란에 휩싸였는데 이 발언으로 그녀는 살해협박까지 받는 지독한 사이버 불링에 시달렸다고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J.K. 롤링은 돈 많고 발언 기회가 많은 문학계 거물이라는 이유로 그녀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입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자의 이중성은 고개가 갸웃해지는 지점이었다. 사실 이 부분은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정의감에 불타올라 몰려가서 유명인에게 악플을 다는 행위를 유명인이기 때문에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 해서 좀 꺼림칙했다. J.K. 롤링은 대중들이 나서서 따끔하게 수치심이 들게 혼을 내도 되는 존재란 말인가

일반인과 유명인에게 작동하는 수치심 머신의 기준을 다르게 두는 건 과연 괜찮은 걸까?


 

, 그래서 이 책의 결론은 뭘까?

우리는 살면서 누군가에게 무심코든 의도했든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그러니 서로의 자존감을 지켜주고 지키기 위해 수치심 머신이 작동하려고 할 때 경계하고 서로가 인간임을 잊지 말자라는 것이다. 인터넷에서는 누구나 악플러가 될 수 있고 그것으로 인해 사회가 점점 병들어 갈 수 있으니 서로를 존중하자는 원론적인 말로 결론을 짓고 있다. 특히나 인셀 커뮤니티에 빠진 아들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결책은 그들을 보듬어 주고 늘 돌아올 가족이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주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별다른 해결책이 없구나 싶어서 약간 맥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지금 현 시대,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로 모두가 소통하는 시대에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건전한 의견 제시가 아닌 공격성 가득한 혐오와 조롱이 스멀스멀 돋아나려고 할 때를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도록 자극하기도 했다. 아울러 사람들이 혐오와 조롱으로 열 올릴 때 뒤에서 씨익 웃으며 돈을 버는 거대기업이 있다는 지점에서도 생각할 거리가 꽤 있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얄라알라 2023-08-25 0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 읽었던 재미난 책 TOP10에 전, 올리고 싶어요. 이 책을^^

망고 2023-08-25 06:27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책 재밌게 읽었어요 쉽게 쓰여졌고 예시들도 현재 사회문제와 딱 연결되어 있고요^^

ehgml8282 2023-12-11 1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남겨주신 리뷰에 저자가 백인 여성과 J.K. 롤링에게 비판의 정도를 달리 한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데요, 두 사람이 미칠 수 있는 사회적 영향력의 크기라는 관점에서 비판의 정도를 다르게 한 것이 아닐까요? 예를 들면, 잘 알려지지 않은 환경 운동가가 지구 온난화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널리 알려진 노벨상 수상자의 발언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처럼요. 책 구매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망고 2023-12-11 21:19   좋아요 0 | URL
아 물론 그렇죠. 저도 사회적 영향력 크기의 관점이라고 충분히 이해했고 이 책의 저자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긴 합니다. 그런데 이게 참... 그 기준이란게 좋은 수치심 유발이라고 대중들이 느끼는 순간 비판은 악플로 넘어가고 굉장한 위협을 가하기도 하잖아요. 롤링은 실제로도 살해위협도 받고 있고요. 그래서 과연 좋은 수치심 유발이란게 요즘같이 온라인 상에서 쉽게 서로 상처를 주고 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올바르게 작동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이건 유명인에게 가하는 좋은 수치심 유발이니까 괜찮다 하는 순간 악플은 도를 넘을거 같기에...ㅜㅜ네...뭐...제 개인적인 생각이었고요 암튼 이책 재밌어요^^ 한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