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넘게 이 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읽다가 놓다가 했다. 오랫동안 읽느라고 더 그랬는지 마지막에는 이 책이 정말 지겨워져서 그만 읽고 싶기도 했다. 어쨌든 다 읽고 나서 속이 후련했다. 이제 다른 책 읽어야지 하고 있는데 자꾸만 이 책 생각이 나는 거다. 롤런드의 이야기가 뭔가 정리되지 못 한 개운하지 않은 맛으로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백자평으로 롤런드는 14살 때 피아노 교사와의 관계가 삶에 영향을 미친 건 맞지만 그게 다가 아닌 것 같다고 썼다. 롤런드는 너무 어릴 때 교사와 성적인 관계에 있다가 결국 학교를 그만둔다. 피아니스트가 되거나 문학적 재능을 뽐낼 수도 있었던 미래의 가능성을 저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변변한 직업 없이,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야망 없이 평생을 표류하며 살았다. 그 삶 속에서는 사랑했던 여자도 있고 아들도 있으며 원치 않던 이별도 있다. 말년에 가서는 확장된 가족을 이루어 가족의 사랑 안에서 비교적 평온하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다소 무기력하고 지루한 사람이지만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았던 한 사람을 따라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게 된다

피아노 교사에게 분명 상처를 받기는 했지만 인간의 삶 전체를 놓고 보면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인생이 다 그렇듯 엄청나게 행복하고 엄청나게 불행하기 보다는 그럭저럭 살다보면 살아진다. 나를 떠났던 사람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만나면 반갑고 서로 삶이 그리 쉽지 않았구나 이해하며 토닥토닥하다가 그렇게 평온하게 인생을 정리하는 노년을 맞고... 뭐 이런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지겹다 지겨워!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서 하루가 지나면서 계속 생각해 보니 롤런드의 인생이 이렇게 흘러간 원인은 어린 시절 피아노 교사와의 그 사건 때문이었다고 이 긴 소설은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롤런드는 피아노 교사 미리엄의 영향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결국 그가 사진을 정리하면서 미리엄의 사진도 끼워 넣는 것도 그 이유라고

그러니까 평생을 간직한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냐면 롤런드가 한때 시를 쓰고자 노력했지만 끝내 쓰지 못 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써온 일기를 결국 다 태워버린다는 것에서 어쩌면 롤런드는 평생 미리엄의 영향 속에서 살고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롤런드는 자신이 겪은 그 경험을 고발할 수 없었다.

미리엄이라는 경험을 드러내지 않고 쓴 시는 모호하기만 할 뿐 예술적 성취가 될 수 없었다

앨리사가 롤런드를 떠나서 위대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앨리사는 자신의 진실을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남들을 불편하게 하고 설사 타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게 진실이 아닐지라도, 예를 들어 앨리사의 어머니에 대한 앨리사의 관점이 모두 진실은 아닐지라도, 어찌되었든 앨리사는 자신의 관점을 고수하며 끝까지 글로 밀어붙이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롤런드는? 과거 피아노 교사와의 관계를 계속해서 기억으로 불러내지만 그것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일에 망설인다. 어린 시절 그루밍 성범죄에 해당하는 게 맞다고 남들은 생각할 테지만 롤런드 자신은 그 당시 그도 즐겼다고, 미리엄을 그때는 사랑했다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지 못 한다

만약 아들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는 당연히 분노할 테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도 당연히 분노하는 게 마땅하지만 그는 50년이 지나 노년이 되었을 때도 여전히 과거 그때는 자신도 미리엄을 사랑했노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자신의 이런 모호한 관점을 솔직히 드러내서 독자에게 판단을 맡기는 논쟁적인 글을 쓸 용기도 없다. 아니 그럴 생각 자체가 없다. 그래서 그는 창작자가 아닌 관찰자로만 남겨진다.

이게 바로 피아노 레슨이 그에게 남긴 교훈이 아닐까? 미리엄은 그의 삶을 지배했고 그 강렬했던 지배력이 점점 약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끝까지 남아서 롤런드의 삶과 함께했다. 자신이 완벽한 피해자라는 인식을 거부하고 미리엄을 가해자의 위치에만 두지 않는다는 그 자체로만 봐도 미리엄이 롤런드의 삶에 끼친 영향력은 끈질겼다. 롤런드는 결코 과거의 상처로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상처로부터 자유롭지도 못 했다. 불행하지는 않았지만 미리엄에게서 도망친 후 그 상태에서 변화하지 못 하고 멈춰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노년이 되어 찾은 평온은 그러한 삶에 그저 적응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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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2-19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들어서도 지난 일에 대한 통렬한 반성 없다면 그 늪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교훈으로 느껴집니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감싸고 정당화시킨다면 반성할 게 있을까요?ㅠㅠ

망고 2025-12-20 00:58   좋아요 0 | URL
반성이라기 보다는 이 책의 주인공이 11살때 피아노 교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14살때 그 교사와 성관계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루밍 성범죄의 피해자인데 그가 일생동안 그 피해에 대해 자신을 제대로 피해자의 위치에 놓지 못 해요. 이런걸 보면서 저는 이 주인공이 트라우마를 치유하지 못 하고 계속 피아노 교사의 영향력 아래에서 살아온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어요. 한마디로 주인공의 삶 자체가 어릴때 당한 그 사건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거죠.

다락방 2025-12-20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롤런드 인생에 대해 나쁘다고 타인이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일이 롤런드 인생에 영향을 미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인생이 흘러간 거요. 망고 님도 언급하셨지만, 사진들 속에 피아노선생님을 껴둘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사실 저도 제 리뷰 제목을 ‘과거는 언제나 미래에서 나를 기다린다‘ 라고 쓰려고 했거든요. 그건 가해자에게도 그렇지만 피해자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요. 완독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잠자냥 2025-12-20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흐르고 인생이 흘러도 한 사람의 생에선 결정적인 순간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롤런드의 삶에서 피아노 선생님도 그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나저나 읽고 별로인 작품 리뷰 남기기 쉽지 않은데 망고스키 박수👏👏👏
 
레슨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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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 때 피아노 교사와의 관계가 롤런드의 삶에 분명 영향을 미치긴 했겠지만 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과연 그게 다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뜻밖의 고난과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삶에서 할 수 있는 건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롤런드는 그렇게했고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았다. 나는 지루하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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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12-19 0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평이 좋습니다. 저도 지루하게 읽을까봐 미루고 있었는데요 ㅋㅋㅋ

망고 2025-12-19 12:55   좋아요 1 | URL
저는 롤런드라는 인물이 매력적이지 않았는데 또 이 소설은 그 인물 중심이라...게다가 다루는 시간대가 워낙 넓다보니 지루했던 것 같아요ㅠㅠ

잠자냥 2025-12-19 0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망고는 지루했다! 이언 매큐언아!

망고 2025-12-19 13:00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역시 이언 매큐언은 꾸준히 저랑 안 맞아요! 그리고 롤런드라는 인물 자체가 저랑 너무 안 맞아요. 그 인물이 지루했고 노년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정말 으... 이언 매큐언이 이제 노년이라 이런 글을 썼을 것 같은데 저는 읽으면서 너무 힘이 빠지고 그만 읽고 싶었어요. 그래도 생각할 부분이 꽤 있긴 했어요^^

잠자냥 2025-12-19 14:12   좋아요 1 | URL
저도 이언 매큐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프랑켄슈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160
메리 셸리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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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자마자 혐오스럽다고 버림받고 그래도 사랑받고 싶어 세상에 다가가지만 배척당해서 점점 증오로 악마가 된 괴물, 미치광이 과학자인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멀쩡한 사람이었던 프랑켄슈타인. 공포소설인 줄 알았는데 탁월한 심리묘사,아름다운 문장이 감동이었다. 역시 원작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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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11-22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죠잉? 영화 속 빅터 너무……🤣

망고 2025-11-22 23:16   좋아요 0 | URL
영화 속 빅터는 정말 인간미가 없었어요 전혀 매력적인 캐릭터도 아니고! 영화만 보고 소설 안 읽었으면 완전 오해할뻔😡

Falstaff 2025-11-22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케네스 브레너의 <프랑켄슈타인>이 원작하고 제일 가깝더라고요. 드니로의 괴물도 좋았던 기억인데 벌써 몇 년 전이라 가물가물하기는 합니다.
제 의견으로 이번 댈 토로의 영화는 완전 망작인 걸로....

망고 2025-11-22 23:19   좋아요 0 | URL
저는 프랑켄슈타인을 처음 접한게 이번 영화였어요😅 영화보고 너무 불만족스러워서 소설 읽었더니 소설이 훨씬 좋았어요 저도 망작이란 말씀에 살포시 동의합니다😆

단발머리 2025-11-22 2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화는 한 편도 안 봤지만 결론은 망고님과 같은 걸로 주문할게요.
역시 원작이 최고다! 👍

망고 2025-11-22 23:35   좋아요 1 | URL
영화가 싫었던게 또 너무 징그럽고 잔인한 화면이 길게 나와서 두번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안 들었어요ㅠㅠ 원작에선 그런 설명이 거의 없던데 말이죠
 
와일드펠 저택의 여인
앤 브론테 지음, 손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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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론테 자매들 중 막내인 앤 브론테의 소설은 처음이다. 셋째 이지만 위의 두 언니가 어린나이에 죽어서 실질적으로 장녀가 된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그 동생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너무나 유명한 소설이고 나도 어릴 때 아주 재밌게 읽었다. 사실 브론테 자매라고 하면 나는 샬롯과 에밀리 브론테 둘만 있는 줄 알기도 했다. 막내인 앤 브론테는 두 언니들에 비해 덜 알려진 작가인 줄 알았는데 이 책을 다 읽고 뒤의 해설을 읽어보니 와일드펠 저택의 여인이 출간되자 두 언니들의 작품을 뛰어넘는 놀라운 판매고를 올렸다고 한다. 또한 당시 엄청나게 인기를 끈 소설이었지만 평론가들은 여성은 읽지 말라고 경고할 만큼 위험한 소설로 분류되기도 했다고 한다. 읽어보니 그럴 법도 한 게 그때가 빅토리아 시대라는 걸 감안하면 엄청 급진적인 작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비참한 결혼 생활을 현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여성의 권리를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어서 이 소설이 최초의 진정한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찬사를 받는 것도 당연해 보였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황량한 와일드펠 저택에 그레이엄 부인이라는 젊고 아름다운 과부가 5살 난 아들 아서와 이사를 와서 세 들어 살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그레이엄 부인에게 호기심을 보이지만 부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자세히 하지 않고 이웃과 교류도 잘 하지 않은 채 은둔해서 살아간다. 생계는 직접 그린 그림을 팔아서 해결한다고 한다.

이웃의 총각 길버트 마컴은 그레이엄 부인을 보고 반하게 되고 호감을 표현 하며 책도 빌려 주고, 아들 아서와 놀아주기도 하고, 그레이엄 부인이 그린 그림에 진정한 찬사도 보내면서 점점 친해진다.

그러던 중 마을 사교계에서는 그레이엄 부인에 대한 소문들이 솔솔 피어오른다. 와일드펠 저택의 주인인 로런스가 몰래 그 집을 드나들며 그레이엄 부인과 만나고 다니고 어린 아들 아서가 사실은 로런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라는 거다. 이 소문을 듣고 길버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무시했으나 어느 날 그레이엄 부인과 로런스가 만나는 현장을 우연히 보게 되면서 소문을 믿게 된다. 분노에 휩싸인 길버트는 친구인 로런스를 갑자기 때리고(욱 하는 성격인 듯?) 그레이엄 부인에게 따지고 드는데, 그레이엄 부인은 이 모든 소문이 다 오해라며 길버트에게 자신이 처녀시절부터 써오던 일기를 건네주며 읽어보라고 한다.

 

 

그 일기에는 그레이엄 부인, 아니 헬렌이 겪은 모든 일들이 담겨 있었다.

처음 사교계에 진출해서 남편인 아서를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헬렌의 보호자인 이모는 아서가 좋은 남편감이 아니라며 반대를 했다. 하지만 헬렌은 사랑에 눈이 멀어 아서의 잘못 된 점을 자신이 고쳐줄 수 있다며 결혼을 강행한다. 나쁜 남자에 빠진 여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 고쳐 쓸 수 있다고, 자신이 잘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게 어쩜 이렇게 똑같은가...

결혼하자마자 신혼여행을 갔을 때부터 이 결혼 뭔가 잘못 되었다는 느낌이 왔지만 신혼 때는 남편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걸 이해하고 그에게 맞춰 주려고 노력을 했다. 하지만 남편 아서는 조만간 헬렌에게 싫증을 내고 총각 시절부터 알고 지내며 시시덕거렸던, 헬렌과도 아는 사이인 친구의 사촌과 바람을 피운다. 헬렌이 남편을 추궁하자 남편은 뻔뻔스럽게 그래서 너가 뭘 할 수 있는데?”를 시전하고 헬렌은 그때부터 그저 공식적으로만 아내인 채로 살아가기로 한다. 결혼을 한 여자는 남편에게 종속된 채 남편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대. 헬렌은 남편의 폭언과 학대를 견디며 그저 남편을 무시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결혼 생활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남편이 어린 아들까지 망치게 하는 행동을 서슴없이 하자 아버지 닮은 개쓰레기 아들로 키울 수 없다는 결심이 더더욱 굳어지게 되면서 아들을 데리고 도망가기로 계획한다.

비참한 결혼생활의 끔찍한 기록들을 자세하게 묘사해서 그 시대 여성들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고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소설은 그 상황을 벗어나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헬렌은 남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장 먼저 한다. 지주인 친 오빠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는데도 헬렌은 오빠가 도와준 살림살이 등의 비용까지 돈을 벌어 갚을 거라고 다짐하는 점에서 자립의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자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남편의 돈도 오빠의 돈도 받지 않고 스스로 자립해야 한다는 의지가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 캐릭터에게 굳건히 심어져 있는 것에서 작가 앤 브론테의 현명한 통찰이 엿보인다.

 


헬렌의 이 모든 기록들을 읽어 보고 길버트는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확인하고 헬렌의 끔찍한 결혼생활을 알게 되면서 헬렌을 이해하게 된다. 헬렌에 대한 사랑은 더욱 깊어지지만 아직 남편이 있는 상태, 이혼하지 않은 상태의 유부녀에게 계속 구애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헬렌의 뜻에 따라 더 이상 만나지 않고 시간을 갖기로 한다.

여기에서 길버트와 또 다른 남자 하그레이브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헬렌의 비참한 결혼 생활 동안 끊임없이 구애해 왔던 남편의 친구 하그레이브. 처음에는 친절하게 헬렌을 도와주는 듯 보였지만 싫다는 헬렌에게 계속해서 구애하며 왜 나를 안 만나 주냐고 화를 냈던 남자였다.

하그레이브 역시 남편 아서와 마찬가지로 여성을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고 소유물로 생각하는 자였고 남편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조금 더 신사의 예절을 가장하고 있을 뿐이라는 정도.

헬렌과 길버트의 로맨스가 약간은 뜬금없고, 로맨스가 로맨스로 다가오지 않아서 전혀 떨림이 없다는 불만이 있기는 한데, 이 소설에 나오는 남자들 중 가장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좋은 남편감에 대한 교훈을 작가는 길버트를 통해 이야기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결혼해서 더 불행해 지는 경우가 말도 못 하게 많아 안 하고 살아도 괜찮겠지만(실제로 헬렌은 아끼는 동생에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해 준다) 그래도 한다면 최소한 길버트 같이 섣불리 소문에 휘둘리지 않고 이기적인 구애를 하지 않으며 기다려라고 할 때 기다릴 줄 아는 남자랑 하라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두 언니들의 작품에 비해서 이 소설은 그렇게 즐기지 못 했다. 읽는데 시간도 오래 걸렸고. 문제를 현실적이고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해결 방안 까지 제시하는 의미 있는 소설인 건 맞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기대하는 상상력이 들어설 공간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게다가 이렇게나 길게 세세하고 교훈적인 대화와 묘사가, 그리고 감흥 없는 로맨스가 조금은 사족처럼 붙어서 나오는 건 읽기에 인내심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래도 앤 브론테가 이 소설이 출간되고 다음 해인 29세에 세상을 떠났다니까 이 소설은 20대 중후반에 썼다는 점을 감안하면 참 대단한 것 같기도 하다. 그 나이에 여성의 현실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깊이 있는 작품을 써냈다는 점에서 말이다. 내가 그 나이일 때 뭐 했더라...

아무튼 브론테 자매들은 참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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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나는 그림을 보러 가서 그림을 보지 않았던 것 같다.

한때는 미술관에 많이 다녔고 여행을 가서도 유명한 미술관들을 둘러보며 할 수 있는 만큼 많이 예술을 눈에 담으려고 노력을 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내가 무엇을 봤던가?

교과서에 나오는 유명한 작품들을 보긴 봤는데 내가 내 눈으로 봤다는 생생한 기억은 없고 원래 알고 있던 그림의 이미지만 떠오르는 건 왜일까?

난해한 현대미술을 보면서 당황스러웠던 기억은 있는데 정확히 뭘 봤는지 떠오르지 않는 이유는 뭘까?

이게 다 내가 그림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보는 식이란 바로 이렇다. 그림을 한번 쓰윽 보고 제목을 보고 다시 그림을 쓰윽 보고 제목에 나온 게 이거구나 확인하고 다음 그림으로 넘어가서 또 같은 행동을 반복. 이렇게 한 그림 앞에서 길어야 고작 3분 정도의 시간만 할애해서 그림을 봤으니 기억이 안 나는 게 당연하다.

조금 느긋한 전시실에서는 오랫동안 한 그림 앞에 서 있어 보기도 했다. LA 현대 미술관에 갔을 때 마크 로스코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때 마침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로스코의 그림 앞에 가만히 오랫동안 서 있어 봤다. 이 장면은 내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때 그림을 보고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 조용한 미술관에 커다란 로스코 그림 앞에 서 있는 나, 이 공간과 이 시간을 누리고 있는 나, 그러니까 평소의 나 같지 않은 나의 모습에 취해 있었던 거다. 그러면서 로스코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나의 뒷모습을 빨리 사진 찍으라고 같이 간 언니를 닦달했었지ㅋㅋㅋㅋ

이러나저러나 결론은 나는 그동안 잘 보지 못 했다는 거다.

 

 

이 책은 예술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에서 출발한다. 난해한 현대미술 앞에서 이게 무슨 예술이란 말인가 라는 생각들을 해보지 않았나? 이 책의 저자도 우리 같은 예술 문외한들과 같은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 예술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삶이 옥죄어드는 벽같이 느껴지자 예술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단다.

저자의 할머니가 유대인 수용소 생활을 하던 와중에도 미술을 가르치고, 여든이 넘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더욱더 궁금해 졌다. 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하나도 중요해 보이지 않는 예술에 그토록 열정을 쏟을까?

그래서 예술을 이해해보고자 미술계에 직접 뛰어든다.

갤러리에도 취직을 하고 화가의 잡다한 일을 처리해 주는 보조로도 일을 하고 미술관에서 경비원으로 일을 하기도 한다. 틈틈이 다른 미술계 관련자들, 컬렉터들을 인터뷰하기도 하고 예술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세미나에 참석하기도 한다.

몇 년 동안 직접 발로 뛴 생생한 경험과 방대한 자료 조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로 옆에서 예술작품을 많이 아주 많이 보게 되면서 처음의 문외한의 시선으로 이게 무슨 예술이야!” 라고 했던 불신을 벗어 던지고 열린 마음으로 예술을 즐기게 된다.

 

 

이 과정을 따라가다가 나는 반성의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보긴 봤는데 보지 않은 것과 같았던 그동안의 나의 미술관 관람 방식을 말이다.

저자는 미술관 경비원으로 일을 하면서 몇 시간이고 한 작품 앞을 지키고 서 있어야 했을 때 작품 속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것들이 보이는 경험을 한다. 한번만 쓰윽 봤을 때는 느끼지 못 했을 작품 속의 이야기들이 진득하게 오래 바라보자 들려오기 시작했단다. 보는 사람이 얼마나 그 작품 속에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작품은 새롭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경험을 할 때는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느낌이 든단다. 시간이 그냥 흐르는 게 아니고 흥미진진한 경험으로 흐르니까 삶이 풍요로워 진다는 것이다.

더 많은 작품을 보려고 하지 말고 천천히 보면서 한 작품을 오랫동안 바라보라, 작품의 곁다리인 제목이나 작가의 이력에 대한 배경은 생각하지 말라, 그저 작품만 보면서 그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라, 작품을 보고 떠오르는 감정을 어떤 해설서의 언어가 아니라 내 언어로 표현해 보라. 멈추고, 알아채고, 감탄하라. 저자가 권하는 예술 감상법이다.

 

 

이것을 읽으면서 내 미술 감상법이 형편없었음을 반성하는 동시에 우리 집에 있는 그림 두 점이 생각났다. 내가 애기였을 때 아빠가 생활이 어려운 화가의 그림 두 점을 돕는 셈 치고 사셨다고 했다. 그 그림들은 내가 세상을 기억하는 때부터 언제나 내 옆에 있었다. 어릴 땐 뒹굴뒹굴 하면서 그림을 바라보며 잠이 들곤 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본 그림들이다. 지금도 벽에 걸린 그림을 보면 마음이 포근해진다. 애기 때 그림을 보면서 상상하던 이야기들도 생각나고, 그림 속에 그려진 집의 창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이 어른거려서 이 사람은 누굴까 상상하며 놀았던 시간도 기억이 난다. 만약 이 그림이 어디 전시관에 걸려 있어서 원래 하던 대로의 나의 감상법으로 한번 쓰윽 보고 지나친다면 창문에 비친 사람도 못 봤을 거고 그림 속에 꽤 여러 명의 사람이 작게 그렇지만 모두가 다른 자세로 그려져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넘어갔겠지. 그렇게 감상하면 지금 내가 이 그림에 느끼고 있는 비밀스러운 아름다움도 전혀 느낄 수 없었겠지.

그러니까 이 책의 저자의 말이 정말 맞다. 작품은 오랫동안 바라봐야 한다. 계속 보다보면 처음에 봤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르게 보이기도 하고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그림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고 내가 상상해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렇게 경험하는 감정과 생각들이 시간을 채워서 삶을 살아볼 만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 새로운 생각, 새로 발견하는 아름다움을 예술을 통해서 우리는 채울 수 있다.

 

 

 

...그래 그러니까 앞으로 미술관에 가면 그림을 오랫동안 바라보도록 노력해야겠다. 근데 사람이 너무 붐비는데도 그게 가능할까? 그래도 시도는 해 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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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9-11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워낙 그림을 모르는 사람이라서... 빨리 보는 방법조차도 잘 모르거든요. 망고님 글 읽으면서 다음에 미술관 가게 되면 꼭 이렇게 해야지 다짐하게 되는데.... 언제 갈지는 모르겠지만, 꼭 그래봐야겠어요.
망고님 집의 그림 두 점이 이 책의 씨앗처럼 느껴지네요. 그 점도 참 부럽습니다~~~

망고 2025-09-11 13:32   좋아요 1 | URL
취재를 시작해야 겠다고 생각했던 처음 이 책의 저자도 이 책을 선택해서 읽는 사람들도 다 그림은 봐도 모르겠다의 상태일 건데요 그래도 이 책을 읽다보면 예술에 마음이 약간 열리게 된달까요. 그중에서도 저자가 미술관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터득한 경험으로 미술관 관람객들한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그림을 오랫동안 바라보라 였거든요, 이 부분 읽으면서 그동안의 저의 관람 행태가 생각나서 가슴에 콕 박혀버린거죠. 제대로 보지도 않아놓고 그림은 봐도 모르겠다고 하질 않나, 이게 예술이냐 비아냥대질 않나...제가 그랬거든요ㅋㅋㅋ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일단은 제대로 오래 보자를 실천해야 겠다 생각했어요. 단발머리님도 이 책 읽어보셔요 정말 재밌고 빵터지는 부분도 많아요

거리의화가 2025-09-11 16: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술을 잘 모르지만 미술관에는 종종 가곤 해요. 가다 보면 좀 트이지 않을까 싶어서^^;
오래 보면 좀 더 보이겠지만 처음 한 번 보았을 때는 분명 놓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볼 기회가 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러기는 어려우니까...
이 책 재밌을 것 같네요. 특히나 저는 현대 예술은 아직 많이 난해하더라구요ㅎㅎ 제가 생각하는 범위 이상을 표현하는 것들이 많다보니 늘 물음표가.
그나저나 마지막 문단 너무 공감됩니다!^^

망고 2025-09-12 16:21   좋아요 0 | URL
거리의화가님 이 책 꼭 읽어 보세요 진짜 재밌어요ㅎㅎㅎ예술에 대한 탐구가 깊은데 빵터지게 재밌어요.
그쵸 같은 작품 여러번 보기가 어렵죠 게다가 무슨 유명한 전시 한다고 하면 인파도 엄청 몰려서 한 작품을 진득하게 바라보기가 힘든 현실이죠. 그래도 이 책에서 말하길 한 작품을 아주 오랫동안은 못 봐도 5분 정도는 시간을 주라고 하더라고요 제목은 보지 말고요. 그렇게 바라보다가 생각나는 것을 5가지 말해보라고. 이런식의 감상법을 머리에 익혀서 작품을 보면 또 색다른 경험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현대예술 난해하죠 이 책에서도 진짜 이해하기 힘든 엉덩이 예술가가 나오는데....음....저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약간 열린 마음이 되기는 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