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로드
조너선 프랜즌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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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1970년대 시카고 교외의 가상의 마을 뉴프로스펙트에 있는 제일 개혁 교회의 부목사 러스 힐데브란트가 교인인 프랜시스 코트렐에게 끌려 어떻게 하면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고심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러스는 아내와 4남매를 둔 한 집안의 가장이고, 프랜시스는 자녀 둘을 둔 젊은 과부다. 그러니까 러스는 유부남이면서 감히 불륜을 꿈꾸는 부도덕한 목사인 셈이다. 프랜시스와 함께 흑인 교회로 봉사활동을 가서 웃통을 까고 육체노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거나, 목사 사무실에 단둘이 남아 음악을 들으며 자신의 매력으로 프랜시스를 어떻게든 꼬셔보려고 요리조리 머리를 쓰는 모습을 읽고 있으면 가관이다. 하지만 목사가 바보도 아니고 싫다고 단호하게 자르는 사람에게 무작정 들이대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프랜시스도 목사에게 은근히 추파를 던지고 여지를 남기는데 그 모습에 러스는 더욱더 욕망이 끓어오른다.


 

이 소설은 힐데브란트 가족 구성원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 가족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서로에게 어떻게 상처를 주는지를 따라가는 가족 대서사다. 작가 조너선 프랜즌은 이 이야기를 3부작으로 구상했고, 《크로스로드》는 그중 첫 번째로 출간된 작품이다. 이 책도 800쪽이 넘는 벽돌인데 앞으로 두 권이 더 나올 것이라니...이 가족으로 그렇게나 할 말이 많다는 사실에 일단 놀라고, 이렇게 긴 책인데도 지루하지 않고 인물들에게 빠져 읽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작가의 글빨에 또 한 번 놀란다.

아무튼 힐데브란트 가족 중 가장 막내인 9살 저드슨을 제외하고는 부모와 세 자녀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부모인 러스와 매리언의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웠다. 그래서 아마도 이 리뷰는 러스와 매리언을 중심으로 쓰게 될 것 같다.


 

다시 러스 목사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러스는 프랜시스와의 불륜을 꿈꾸면서 동시에 청소년부 지도자인 릭 앰브로즈 전도사에게 엄청난 반감을 드러낸다. 이 교회의 청소년부 모임 이름이 바로 ‘크로스로드’인데, 러스와 릭이 함께 지은 이름이고 한때는 러스도 청소년부에서 십대 아이들을 지도했었다. 하지만 3년 전 러스는 아이들의 반감을 사 크로스로드에서 굴욕적으로 쫓겨나고 만다. 자신의 편을 들어줄 줄 알았던 릭 앰브로즈는 러스의 추방을 그저 방관하기만 했고, 러스는 그가 이 모든 사건을 부추겼다고 앙심을 품고 있다. 아이들은 모임마다 성경과 신에 대해 설교하는 러스 목사보다는 히피 같은 모습으로 아이들에게 공감하며 심리 상담을 해주는 릭을 훨씬 믿고 따른다. 러스는 그런 젊고 힙한 릭이 질투 나 죽을 지경이다.

하지만 3년 전 러스가 크로스로드에서 쫓겨나게 된 사연을 보면, 러스가 그렇게 억울해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요즘 시대였으면 청소년부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 이상의 벌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십대의 인기 많은 금발 소녀가 부모의 이혼으로 불안한 상황을 러스에게 상담하러 왔고, 러스는 그 아이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 자신도 아내 매리언과의 부부생활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정확히는 잠자리를 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던 것이다. 미쳤나? 교회에서 목사가 십대 소녀한테 이런 소리를 한다고? 이 일로 십대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러스는 정말 개자식으로 통했고, 결정적으로 크로스로드에서 아이들의 신뢰를 잃고 만다.

이 일로 아이들은 릭 앰브로즈와 상담했고, 러스는 릭에게 십대 소녀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추궁당한다. 러스는 그저 소녀의 부모가 겪는 위기는 모든 부부가 겪는 일이며 자신도 마찬가지라며, 소녀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려 했다고 변명한다. 하지만 당시 자신의 성적 욕망이 십대 금발 소녀를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러스는 스스로 알고 있었다. 어쨌든 이건 러스 자신의 내면의 일이고 릭은 러스가 보기에 아이들의 신뢰도 앗아가고 자신을 크로스로드에서 몰아낸 괘씸한 인간이기 때문에 3년 동안 한 교회에서 말도 한마디 안 나누고 삐친 채로 지내왔던 것이다.

그런데 프랜시스가 러스에게 릭과 화해하라고 말한다. 러스가 다시 크로스로드에 들어와야 자신과 함께 애리조나 수련회에 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프랜시스의 아들도 크로스로드에 소속되어 있어서, 수련회에 부모 대표로 프랜시스가 따라가기 때문이다.

러스는 프랜시스와 함께 있기 위해서 원수 같던 릭과 화해해야 하는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까? 프랜시스를 욕망하는 데에 목사 신분으로 아무 거리낌이 없어 보이던 러스. 그는 대체 어떤 논리로 자신의 불륜을 정당화 하는 걸까? 러스는 프랜시스를 주님이 그에게 주시는 두 번째 기회라고 생각한다. 기쁨에 찬 여인과 기쁘게 사랑을 나누라고 주님이 주신 기회라고. 그 여인 때문에 원수같이 지내던 릭을 용서할 마음을 먹는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전하신 말씀의 정수이자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357쪽)라고 생각한다.

캬~ 러스 목사님 정말 대박! 자신의 욕망을 신앙의 언어로 바꾸는 솜씨 정말 대박!

아무튼 이렇게 러스는 정신이 딴 데 팔린 채 가족을 대하고 목사 일을 하고 있다. 아무도 모를 줄 알겠지만, 사실 러스와 프랜시스의 관계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눈치 채고 있다. 좁은 동네에서 둘이 붙어 다니는데 모를 수가 없지 않겠는가? 이로 인해 큰아들 클렘은 안 그래도 실망스러운 아버지에게 더욱 실망하고, 딸 베키는 아버지와 멀어지면서 교회까지 옮겨 버린다. 약물 중독에 빠져드는 작은아들 페리의 문제는 프랜시스와의 불륜에 정신이 팔린 러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면서 점점 더 악화되어 간다.

 


부인인 매리언 또한 러스의 불륜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괴로워한다. 결혼 생활 내내 남편과 아이들에게 헌신하며 자신을 돌보지 않고 살아온 매리언은 살이 찌고 생기 없는 모습으로, 러스에게 전혀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 사실을 매리언도 잘 알고 있다. 최근 남몰래 심리상담을 받고 있는데, 그 상담을 통해 매리언의 과거와 진심이 밝혀진다. 매리언은 왜 지금의 모습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살고 있는지가.

캘리포니아에서 나고 자란 매리언은 꽤나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 부유함은 모두 아버지의 빚으로 이루어진 모래성이었고, 빚을 감당할 수 없었던 아버지가 자살하자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연기에 재능이 있었던 매리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배우가 될 생각으로 LA로 가지만, 꿈은 좌절되고 생계를 위해 일을 하던 중 만난 유부남과 사귀게 된다. 그 관계에서 큰 상처를 받고 정신이상까지 일으켜 정신병원에서 1년을 보낸 뒤, 애리조나에 있는 외삼촌 집에서 살게 되고, 가톨릭 성당에 다니며 고통스러웠던 마음의 상처를 신에게 의지해 잊으려 한다. 여기까지가 매리언이 러스를 만나기 전의 과거였다.

애리조나에서 러스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려 했을 때, 매리언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러스에게 진실을 말하고 싶지만 차마 털어놓을 수 없어서, 러스를 만나기 전 철없던 시절 성급하게 결혼했다가 이혼했다고 거짓 고백을 한다. 러스는 큰 충격을 받지만 매리언을 사랑했기에 그녀의 과거를 문제 삼지 않고 결혼한다. 매리언은 차마 밝히지 못했던 과거 때문에 결혼생활 내내 죄책감에 시달리며 러스에게 헌신해 왔다.

그리고 현재 체중이 불은 우울한 중년의 매리언은 심리상담사에게 과거의 진실을 털어놓고 있다. 그런데 묻어두었던 과거를 들춰낼수록, 스무 살 때 만났던 그 유부남에 대한 열망이 다시 피어오르는 것 같다. 그때 제대로 끝맺지 못한 집착적인 관계가 여전히 매리언을 끌어당긴다. 매리언은 그를 다시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결혼 생활의 위기 속에서 과거의 남자를 다시 만나려는 열망에 사로잡힌 매리언은 남편에게 헌신해온 삶에서 벗어나려 한다. 다시 담배를 피우고 러스의 빨래를 해주지 않고, 살을 빼고, 지역 극단에 들어간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찾아가던 매리언은 아들 페리의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다시 러스에게 돌아오는데...


 

페리의 일이 자신이 프랜시스에게 빠져 있을 때 일어난 일이라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러스를 보며 매리언은 자신의 과거를 생각한다. 과거 자신이 빠졌던 남자, 그로 인해 선택했던 일들을. 죄 많은 자신은 러스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리는 매리언은 자신의 죄책감을 러스에게 고백하지 않은 채, 오히려 러스가 고백하는 죄를 용서하는 입장에 서서 살아가기로 한다. 그렇게 부부는 다시 결합한다. 매리언은 이것이 바로 신의 뜻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을 겪고도 돌고 돌아 결국 다시 제자리다. 매리언은 앞으로도 러스의 설교문을 써주고, 빨래를 해주고, 러스에게 헌신하며 살아갈 것이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부터 시작된 매리언의 뿌리 깊은 죄책감은 매리언의 신앙의 토대가 된 듯 보인다. 어떻게 보면 신에게 의지하고 종교가 필요했던 사람은 러스 보다는 매리언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자급자족하는 보수파 기독교도들의 공동체에서 나고 자란 러스의 신앙은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가지게 된 것이라면 매리언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상처와 마음속에 감춰둬야만 하는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 찾게 된 신앙이라는 점이 달랐다. 그러니 더 간절히 매달리고 진심으로 구원을 찾는 쪽은 목사인 러스보다는 매리언 쪽에 더 가깝지 않을까? 그러니 신의 피조물인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자고 러스를 달래는 쪽도, 기도를 하라고 종용하는 쪽도 매리언일 수 밖에...

 

 


이 소설은 1970년대 진보적인 개신교 교회의 목회자 가족이라는 이때까지 책을 읽으면서 좀처럼 접하지 못 했던 배경을 이야기 하고 있어서 아주 재밌게 읽었다. 문제 많은 목사와 목사 사모뿐만 아니라 그 자식들 까지 다사다난하다. 그 집단을 경험해 보지 않고는 도저히 이렇게 까지 세밀하게 쓸 수 없을 것 같은데 아마도 작가는 청소년시절 크로스로드 같은 교회 모임에 참석해 봤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작가 인터뷰에서 언급한 걸 얼핏 본 기억도 나고...

인물들의 상처와 죄책감, 은밀한 욕망, 내밀하고 뒤틀린 인간의 심리로 꽉꽉 채워진 소설이었다. 힐데브란트 가족의 다음 이야기도 기대된다.

한달동안 가지고 다니면서 읽느라 팔이 아팠지만 보람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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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어린 시절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말하는나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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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적 은유를 바탕에 깔고 인간과 세상에 대한 순수한 질문을 던진다. 2+2가 왜 반드시 4여야만 하는가를 묻는 것처럼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세계의 질서와 규칙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철학적이고 우화적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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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보석상을 하다가 은퇴한 롤랑은 항해와 낚시에 대한 열정으로 부인 루이자, 두 아들 삐에르와 장과 함께 항구도시 르아브르에 이사 와서 살고 있다. 서른 살인 장남 삐에르는 의학 공부를 하고 병원을 차리기 위해 준비 중이고, 다섯 살 아래의 장은 막 법학 학위를 마쳤다.

삐에르와 장은 형제지만 생김새도 다르고 성격도 완전히 다르다. 삐에르는 흥분을 잘 하는 성격에 비현실적인 꿈들을 가지고 이것저것 여러 직업에 도전해 본다거나 뜬구름 잡는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는(잘난 척도 곁들인) 성격이라면, 동생 장은 온화하고 침착하고 부모님 말씀 잘 듣는 부드러운 성격의 사람이다. 이런 두 형제는 최근 서로 경쟁하는 관계에 놓이게 되는데, 그건 이웃에 사는 로제미유 씨 부인 때문이었다. 남편 로제미유 씨가 죽고 홀로 된 그 부인은 소설 속에서 이름이 나오지 않고 그냥 로제미유 씨 부인이라고 언급된다. 왜 이름을 쓰지 않았는지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모빠상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물어볼 수 없어 답답하구만... 아주 조금씩 나오는 낚싯배 선장이나 약국 주인 등등도 다 이름이 있는데 왜 로제미유 씨 부인만 이름이 없는지 살짝 궁금했다.

아무튼 로제미유 씨 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두 형제는 은근히 경쟁을 벌인다. 남자다움을 과시하기 위해 배의 노를 더 빨리 저으려고 경쟁하거나 하는... 하지만 로제미유 씨 부인은 자신과 성격이 비슷한 온화한 장에게 더 끌리고 그것을 삐에르도 느끼고 있는 참이다.


이렇게 비교적 단란하게 지내던 롤랑 가족에게 뜻밖의 소식이 전해져 온다. 파리에 살 때 알고 지내던 마레샬이라는 사람이 죽으면서 적지 않은 유산을 남겼고 막내인 장에게 상속한다는 거다. 아버지, 어머니, 상속을 받게 될 장은 이 뜻밖의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 하는데, 단 한명 장남 삐에르는 기분이 꽁해 진다. 횡재에 행복해 하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혼자 있고 싶었던 삐에르는 내가 왜 이럴까, 내 기분이 왜 이렇게 안 좋을까 생각해 본다. 그것은 자신이 아닌 동생에게만 상속된 유산 때문이었다. 바로 질투의 감정.

이 이상하게 언짢고 서운하기도 하고 뭔가 좀 까슬까슬한 감정을 모빠상은 어떻게 표현했는지 보자.

 


“그는 마음이 편치 않았고, 몸이 묵직한 느낌이었고, 기분 나쁜 소식을 받아들게 되면 그러듯이 불만스러웠다. 꼭 집어낼 수 있는 어떤 생각 때문에 마음이 상한 것이 전혀 아니어서, 처음에는 영혼의 짓눌림과 육체의 묵직함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지 말할 수 없었으리라. 어느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가 괴로웠다. 고통을 낳는 아주 미세한 지점이, 정확한 자리를 찾아내지 못하나 거북스러움, 피로, 슬픔, 짜증을 유발하는 상처가, 별다른 느낌은 없지만 치명적이라고 할 만한 그러한 상처가, 겪어보지 못한 가벼운 고통, 슬픔 한 알갱이 같은 그 무엇인가가 그의 안에 들어 있었다. (65~66쪽)”


 

그러니까 동생이 부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삐에르가 느꼈던 묘한 짜증과 답답함을 모빠상은 이렇게 표현했다. 아직 자신이 왜 기분이 나쁜지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마음 어딘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상처 하나가 생긴 것처럼 표현한다. 역시 이름난 작가는 다르구나 싶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이렇게 다양하고 생생한 표현으로 공감할 수 있게 쓰다니. 어휘력 없는 평소의 나라면 그냥 “아, 짜증!” 이 한마디로 끝날 말을 말이다. 특히 ‘슬픔 한 알갱이’ 이 표현 너무 좋다. 기억했다가 써먹어야지.

 

 

이제 삐에르는 장이 부자가 되었으니 로제미유 씨 부인과 곧 결혼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을 하니 질투가 솟아나지만... ‘로제미유 씨 부인은 멍청해서 내가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뭐’ 하면서 애써 자기위안을 한다. 로제미유 씨 부인이 평소에 장을 더 좋아한다는 티를 냈기 때문에 삐에르가 이런다는 걸 잘 알겠고, 여기까지는 유산도 못 받아 언짢아 보이는 삐에르가 조금 불쌍해 보이기도 해서 읽으면서 별다른 나쁜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 뒤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툭툭 튀어나오는 여성을 바라보는 삐에르의 시선들에는 조금씩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다.


 

삐에르가 마음이 울적해서 찾아간 지인들은 동생만 유산을 받았다는 소식에 묘한 암시를 내비친다. 이를테면 “어쩐지 삐에르와 장은 서로 닮지 않아 보이더라니” 같은...

이런 암시 속에서 삐에르는 점점 의문을 품게 된다. 왜 하필 장에게만 유산을 상속했을까? 아버지의 친구이고 두 형제를 모두 다 알고 있는 마레샬 아저씨는 왜 장에게만 그렇게 각별했을까?

그리고 이 의문들 속에서 어머니에 대한 의심이 쌓여가기 시작한다. 혹시? 설마?

그렇게 의문은 확신으로 변하고 삐에르는 가족 사이에서 겉돌기 시작한다. 어머니에게 신랄한 말을 내뱉고 혼자서 분노를 품으면서.

동생에 대한 질투는 이제 어머니에 대한 분노로 바뀐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분노는 여성 전체에 대한 혐오로 나아가는데...... 급기야 해변에 놀러 나온 잘 꾸민 여자들을 보면서도 저 여자들은 모두 남자를 꼬시고 배신하려고 저러고 돌아다니는 거라고 삐딱한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어머니에 대한 분노는 그렇게 큰데, 정작 아버지에 대한 연민은 삐에르 마음속에서 거의 읽을 수 없다는 점이. 아버지가 아내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어머니에게 배신당했다는 듯이 분노한다. 삐에르는 남편의 입장도 아니면서 마치 자신이 아버지의 대리인이라도 된 것처럼 어머니를 심판한다. 아버지가 얼마나 상처받았을지 생각해 보는 장면은 없다. 삐에르의 분노와 고뇌는 있지만, 그 감정의 중심에는 아버지의 상처보다 자신의 모욕감과 분노가 더 크게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의 불륜은 어느새 자신의 일이 되어버리고, 자신이 배신당한 것처럼 세상의 모든 여자들을 혐오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삐에르 너의 부인이 널 배신한 게 아니야! 너는 결혼도 안 했잖아 이 녀석아. 무슨 너가 남자 대표로 여자한테 배신당한 것 마냥 그렇게 세상 모든 여자들을 쳐다보냐고! 라고 읽으면서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삐에르가 어머니를 향해 쏟아내는 분노는 정말 아버지를 대신한 정의감에서 나온 것일까?

생각해보면 삐에르의 분노는 장에게 느끼던 질투와 열등감에서 촉발된 것이다. 장에게만 상속된 유산, 그리고 그로 인해 로제미유 씨 부인과 결혼할 수 있는 장의 유리한 조건이 삐에르의 자존심을 건드렸을 것이다. 왜 자신이 아닌 동생이 항상 선택받는지 질투가 나고 억울하기도 했겠지.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이 어머니의 부정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라면?

삐에르는 자신이 계속 동생에게 밀리는 것처럼 돌아갔던 상황들이 모두 어머니의 비밀과 연결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그동안 품고 있던 동생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 찌질한 감정들까지 모두 어머니 탓으로 돌릴 수 있지 않을까? 스크래치 난 자존심과 명예도 그렇게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어머니와 여성 전체에게 책임을 돌리며 자기합리화를 한 것은 아닐까.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엄마 때문이야. 더 나아가서는 여자들이 나를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여자들은 다 엄마같이 부정하기 때문에 내가 안 좋아하는 거야!!!




(찾아보니 영화도 있었다. TV용 영화)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되고 분노하는 삐에르의 감정선을 따라가면서 이 녀석이 언제 폭발할까 조마조마 하면서 읽었다. 곧 폭발해서 다 폭로해 버릴 것 같은 심리상태를 긴장감 있게 풀어냈다. 결론이 어떻게 날지 생각해 보기도 했는데 내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서 그것도 나름 신선했다.

짧은 분량에 어떻게 보면 단순한 이야기인데 인간의 심리를 다채롭게 표현해 내어서 저절로 집중이 되는 책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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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6-09-16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비밀이... 비밀 맞긴 맞는건가요? 남 탓, 자기 합리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이... 이런 걸 고전이라고 하나 봅니다.

영화 포스터에 오른쪽이 피에르, 왼쪽이 장일까요? 안닮긴 했네....

망고 2026-09-16 10:30   좋아요 0 | URL
비밀은 비밀인데 이제 가족 중에서 아버지만 모르는... ㅋㅋㅋ 삐에르의 분노가 처음에는 ‘그래 화가 날 수도 있지‘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데 그게 점점 오버를 하는 바람에... 엄마를 좀 이해할 수도 있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나중에는 삐에르가 반성을 하긴 해서 살짝 불쌍해지기도 해요^^
포스터에는 왼쪽이 삐에르 같아요. 책에서 장은 금발에 잘생겼다고 나오거든요. 근데 오른쪽이 더 나이들어 보여서...모르겠네요ㅋㅋㅋㅋㅋ

다락방 2026-09-16 11: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나니 이 책에 대한 호기심 한 알갱이가 생기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망고 2026-09-16 11:46   좋아요 0 | URL
이 책 재밌어요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저는 마음속에 배고픔 한 알갱이가 돌아다녀서 밥 먹으러 이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6-09-16 12:12   좋아요 1 | URL
전 식욕 두 알갱이…..

망고 2026-09-16 12:44   좋아요 2 | URL
대충 밥 두공기 드셨다는 말로 이해하겠습니다ㅋㅋㅋㅋㅋ

잠자냥 2026-09-16 1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나름 재미나게 읽었어요. <벨 아미>보다 이게 더 재미났던 기억....인데 그 비밀 다 까먹음...ㅋㅋㅋㅋㅋㅋㅋㅋ

망고 2026-09-16 14:21   좋아요 1 | URL
이 책에 걸려있는 잠자냥님 글 다 읽었는데 리뷰 날짜 2015년이더라고요? 까먹을만한 세월이 흘렀군요ㅋㅋㅋㅋㅋ

잠자냥 2026-09-16 14:24   좋아요 1 | URL
🙆🏻‍♀️

Falstaff 2026-09-16 19:01   좋아요 1 | URL
저는 잘 생긴 벨 아미 > 삐에르와 장
모뽜상은 벨아미처럼 남녀상열지사가 좀 있어야... ㅋㅋㅋ

망고 2026-09-16 19:48   좋아요 1 | URL
제가 벨 아미를 안 읽어서...조만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단발머리 2026-09-19 1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파상이 재미있게 잘 썼을테지만 망고님 페이퍼도 너무 재미있어요. 막 홀려서~~~ 아, 어쩌지? 비밀은 뭐야? 하면서 읽었습니다.
저는 벨 아미를 읽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읽어야겠어요^^ 모파상을 두 권 정도는 읽어주는 센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망고 2026-09-19 23:01   좋아요 0 | URL
페이퍼 재밌게 읽으셨다니 너무 감사합니다. 짧은 중편 정도의 분량이라 이 소설 호로록 재미나게 읽을 수 있어요 😄 저는 벨아미를 안 읽었는데 이 소설을 읽고나니 갑자기 모뽜상에게 관심이 가서 벨아미도 읽고 싶어졌어요
 
모든 이야기는 숲에서 시작되었다 - 90세 과학자의 가슴 뛰는 자연 관찰기
베른트 하인리히 지음, 강유리 옮김 / 윌북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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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자연을 직접 관찰해서 자연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생물의 모습과 행동이 어떻게 그렇게 진화했는지를 들려준다. 작은 상모솔새가 혹독한 겨울을 견디는 방법을 알아보기 위해 숲을 따라다니고, 작은 송장벌레가 죽은 들쥐를 옮기는 모습을 관찰한 생생한 기록이 특히 인상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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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의 낮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85
레오나르도 샤샤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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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보는 앞에서 살인이 일어났지만 아무도 목격자가 없는 사회.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는 마피아. 그 침묵의 이유로 시칠리아가 겪어 온 폭력적인 국가 권력에 대한 불신의 역사도 살짝 들려준다. 짧지만 많은 이야기가 응축된, 잘 짜여진 탐정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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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8-27 16: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올빼미를 잡으려고 노려보는 망고냥이.....

망고 2026-08-27 17:15   좋아요 1 | URL
뚠뚠한 망고냥이는 둔해서 그저 바라만 봅니다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6-08-28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빼미의 낮,을 얌전히 장바구니에 넣어둡니다. 탐정소설 무서운데 ㅋㅋㅋㅋㅋ그래도 망고님 4별이라 ㅋㅋㅋㅋ

망고 2026-08-28 12:17   좋아요 1 | URL
이 소설은 안 무서워요ㅋㅋㅋㅋ오별 줄까도 고민했지만 짧아서 하루만에 후루룩 읽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4별 줬습니다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