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스트라우트의 바로 직전 소설 오 윌리엄이후 1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부터 시작한다. 아직 새로운 전염병 코비드19에 대해 미국이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던 초기의 시기, 이제 막 미국에도 퍼지기 시작하는 초봄이다. 루시의 남편 윌리엄은 기생충을 연구하는 과학자였기 때문에 이 전염병의 심각성을 알고 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뉴욕을 떠나 피신해 있으라고 알려준다. 첫째 딸은 남편과 비어있는 시댁으로 들어가고 둘째 딸은 윌리엄의 충고에 따라 뉴욕을 떠나려고 했으나 남편이 그러길 원치 않아서 그냥 뉴욕에 남기로 한다. 루시는 윌리엄과 함께 메인주로 가기로 한다. “당신 생명을 구해주려는 거야라는 윌리엄의 확신에 순순히 따라 나서는 루시.

 


이때까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은 크게 각각 두 곳의 장소에서 주요한 두 명의 인물이 이끌어가는 시리즈로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올리브 키터리지가 대표하는 메인주와 루시 바턴이 자랐던 일리노이주의 앰개시. 이렇게 두 곳의 배경으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그동안의 스트라우트의 소설들에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올리브 키터리지의 세계와 루시 바턴의 세계는 그간 딱히 연결되는 건덕지가 없었는데 이번 소설로 두 세계의 연결을 볼 수 있다. 스트라우트의 소설들을 많이 읽고 좋아하던 독자들은 아마 이번 책으로 예전 인물들을 만날 수 있어서 무척 반가울 것이다. 내가 그랬다.

 

루시가 전남편 윌리엄과 메인주로 이주하면서 살게 되는 집은 바로 밥 버지스(소설 버지스 형제”)가 관리하던 집이었다. 윌리엄과 밥 버지스는 이미 알던 사이였고 그렇게 알게 된 이유가 윌리엄이 젊은 시절 연구소에서 함께 일하던 조수가 바로 밥 버지스의 전부인 팸이었기 때문이다. 윌리엄과 팸은 그당시 불륜관계였다고 한다.

루시는 밥 버지스를 통해서 캐서린 캐스키(소설 “Abide With Me”)도 만난다. 캐서린은 자신의 아버지 타일러 캐스키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루시에게 들려주고, 밥 버지스와 캐서린 캐스키가 어린 시절 한순간 만난 적이 있음을 알게 되고 놀라워하는 장면도 나온다.

또한 루시는 바로 올리브 키터리지의 소식도 듣게 된다. 루시가 자원봉사하러 간 곳에서 만난 여자가 바로 올리브 키터리지의 집 청소 일을 하는데 루시에게 성질 고약한 노인 올리브 키터리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여전히 트럼프를 욕하고 첫 번째 남편에 대한 얘기도 늘 하고, 여지저기 참견하며 다니는데 좀 외로워 보이는 노인이라면서.

올리브 키터리지가 아직 살아 있다니... 올리브 키터리지의 팬인 나는 참 반갑고 짠해지는 순간이었다!

올리브 키터리지의 소식 속에 스치듯 이저벨(소설 에이미와 이저벨”)의 근황도 나온다. 거동을 못 한다는...

, 이런 식으로 루시 바턴 시리즈의 세계관과 올리브 키터리지 시리즈의 세계관이 만나게 된다. 어쩌면 다음 소설에서는 루시와 올리브가 직접 만나는 장면도 가능하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오 그렇다면 스트라우트의 다음 소설을 읽을 이유가 또 생긴 셈이다. 과연 올리브와 루시는 만날 것인가 두근두근.

 

 

이렇게 루시는 메인주로 피신해 와서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겪는다.

일단 루시와 윌리엄이 머물고 있는 집은 거실 창을 통해 바다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전망 좋은 집이다. 뉴욕보다 훨씬 춥지만 경치는 끝내 주는 곳. 이곳에서 루시는 변화무쌍한 바다를 관찰하고 날씨를 예민하게 느끼며 매일 주변을 산책하며 지낸다. 나는 루시가 묘사하는 이 집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사실 너무 부러웠다. 아니 이런 경치 좋은 곳에선 코로나로 갇혀있다 한들 얼마나 좋아. 매일 바다 보면서 먹고 자고 바다 보면서 산책하고...나라면 정말 잘 갇혀 살 수 있을 거 같은데...했는데 루시는 여전했다. 우리가 그동안의 책들에서 보아온 바로 그 루시였던 것이다. 낯선 곳을 무서워하고 종종 공황발작을 일으키며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서 다 벗어나지 못 한 루시. 문득문득 어릴 때 겪었던 가난과 부모의 학대가 생각나고, 재혼했었던 남편과 2년 전에 사별한 아픔이 마음속에 비통함으로 남아 있는 루시.

나는 이런 루시를 보면서 사실 좀 아 루시 또야?’ 하는 불평을 마음속으로 했다. 이미 오 윌리엄에서 루시의 감정상태를 공감하고 이해했고 안타깝기도 하고 장하기도 하다며 응원했는데 다시 또 그것을 반복하자니 좀 지치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1년이라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고 사람이 1년 동안 뭐 얼마나 변하겠어. “오 윌리엄에서의 루시나 이 책에서의 루시나 그 루시가 그 루시인 건 잘못된 게 아닌 거다. 그러고 보니 나는 루시를 대하는 방식에서는 윌리엄의 성향과 비슷한 면이 있는 거 같다. 윌리엄은 루시 옆에서 위로도 해주고 힘든 세상일을 척척 해주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지만 루시가 감정적으로 공감을 얻고 싶을 때 거의 대부분 아무 말도 안 해주거나 루시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준다. 루시는 이런 윌리엄에게 화가 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이해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우울하고 슬픈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루시 자신도 알고 있으니까.

뉴스에서 코로나로 죽은 사람들의 관이 쌓여있는 장면이나 루시도 아는 지인의 부고 기사나 인종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들이 나올 때 루시 자신도 그것들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화면을 응시하지 못 하고 눈을 돌리곤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언젠가 밥 버지스는 루시에게 루시의 소설은 어머니와 딸에 대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서 계급을 가로질러 건너려고 노력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해준다. 자신 또한 루시 보다는 아니지만 가난한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면서. 루시는 이 말을 듣고 밥 버지스를 좋아하게 된다. 약간 사랑일지도...^^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루시는 자신이 소설에서도 썼던 계급차이를 현재 더 확연히 느낀다

뉴욕에서 피신 온 사람들에게 토착 주민들은 뉴욕 사람들을 돈 많은 잘난척쟁이라며 적대감을 드러낸다. 루시네 차에다가도 뉴욕으로 꺼져버리라는 종이를 붙이기도 한다.

루시의 언니는 아직 앰개시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데 하필 코로나 상황에서 근본주의 교회에 등록을 해서 매주 교회에 참석한다. 그러면서 뉴스는 다 거짓말이며 교회에 다니면 코로나에 안 걸린다는 믿음을 굳게 믿고 있다.

루시의 오빠는 부모가 살던 작은 집에서 여전히 혼자 살고 있다. 코로나 이전이나 지금이나 혼자서 고립된 채 사는 건 마찬가지라던 그는 코로나에 걸려도 병원을 가지 않는다.

루시가 푸드 뱅크에서 자원 봉사 하다가 만난 여자는 요양원 청소일을 하는데 트럼프 선거 캠페인을 차에 붙이고 다닐 정도로 열혈 지지자다.

루시는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삶, 이들을 사회에서는 무시하고 경멸해 왔다. 온갖 매체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묘사하는 방식,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들을 대하는 경멸적 태도 등에 이들은 화가 나있다.

루시 자신도 언젠가 대학에 강연을 하러 간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만난 학생들의 태도에 당황한 적이 있었다. 루시가 쓴 책에서 루시 아버지에 대해 천박하다며 경멸하는 학생과 루시를 바라보지도 않고 질문도 하지 않는 학생들. 부자 동네 출신들이 대다수였던 학생들은 루시가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가난을 이해하지 못 했다

루시는 이들의 태도를 어떻게 느꼈던가. 루시는 속으로 깊은 분노를 느끼고 학생들을 저주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신을 마주하며 놀라기도 한다.

루시는 그 당시 자신을 돌아보며 루시가 한때 속했던 계층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분노를 이해한다.

아울러 인간은 상실감을 느끼면 비이성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음도 경험으로 이해한다. 내가 가지지 못 했다는 상실감, 내가 존경 받지 못 하고 있다는 상실감 등은 어떤 계층에서도 겪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루시 자신이 윌리엄과의 결혼 생활 동안 윌리엄의 불륜을 알게 되고난 후 자신 또한 바람을 피운 것과 연결해서 생각한다. 현재 루시의 딸들이 남편의 불륜과 유산의 상실감을 겪으며 어떤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지를 보면서도 생각한다.

그들을 이해하는 것, 완벽하지 않은 인간을 연민하는 것, 그렇게 나를 돌아보는 것.

바닷가에서 루시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인간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며 루시답게 이렇게 보낸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들. 저기 위에 "타인의 여름"은 "에이미와 이저벨" 번역서다. 1999년엔 저런 제목으로 나왔더라. "올리브 키터리지"를 읽고 너무 감동 받아서 중고 서점에서 산 책이다)




루시가 우울해하는 걸 읽을때마다 내가 좀 투덜대긴 했지만 여전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글은 너무 좋다. 간결하고 짧지만 깊다. 그래서 내년에 나올 소설도 기대가 된다. 또 루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작가님의 글을 계속 읽는 다는 건 큰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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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2-05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타인의 여름이란 제목으로 출간된적이 있었군요
바닷가 루시 완독하신 망고님
내년 신작 설레이는 맘으로 기다려 보귀😍

망고 2022-12-05 17:57   좋아요 1 | URL
타인의 여름 당시엔 이런식의 제목이 유행이었나봐요 비슷한 제목의 영화도 있었던거 같고ㅎㅎㅎ 내년에도 과연 가을에 신작이 나올까요? 두근두근
 
Lucy by the Sea (Hardcover)
Random House Group / 2022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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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윌리엄‘ 이후의 팬더믹 상황을 살아가는 루시. 루시 시리즈 뿐만 아니라 작가의 전작들 속의 인물들이 한번씩 나와서 반갑기도 하지만 루시는 여전히 루시였다 ‘오 윌리엄‘에서 봤던 루시! 또다시 그 루시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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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2-01 18: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트라우트 작품속 모든 인물들이 전부 나오나봅니다
루시 그 루시 내년 신작에도 😊

망고 2022-12-01 18:58   좋아요 2 | URL
주요 인물들이 한번씩 언급되는데 오랜 친구 만난듯 반갑더라구요ㅋㅋ근데....여운이 남으며 감동스러웠던건 오 윌리엄 읽고나서였는데...이번 루시는 약간 좀 너무 텀이 짧았던듯해요^^또 루시? 이런 느낌이요🤭그래도 작가에 대한 제 팬심은 식지 않았답니다ㅎㅎㅎ
 



작년 12월달부터였나 토지를 읽기 시작해서 이제 끝을 보았다. 부담 갖지 말고 천천히 읽자 하면서 1년 목표로 잡았었는데 잘 달성한 셈이다. 

19세기 후반부터 해방이 되는 날까지 거의 50년의 역사를 토지 사람들과 함께한 느낌이다.

정말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과 그들의 얽히고 설킨 관계 속에서 풀어내는 이야기들, 그 시대와 맞물려 가며 고뇌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한껏 빠져서 읽었다. 

읽으면서 내내 박경리 작가는 진짜 천재다! 하면서 감탄하기도 했다. 어떻게 이렇게나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이토록 설득력있게 풀어낼 수 있는지......대단합니다 작가님ㅠㅠ



아무튼

오늘 20권 다 읽은 기념으로 20권에 밑줄 그은 문장을 옮겨 놓는다.



자아, 이만하면 숨이 가쁜 불행의 연속이 아니고 무엇일꼬. 모두 힘들게 살아왔고 비극적 삶을 끝낸 사람들도 많지만 어찌하여 그다지도 불행의 여신은 석이네 식구들에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가. 절망적인 파도를 넘고 넘어 살아왔으며 또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인생이 엄숙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만 본능적인 삶에의 욕구, 죽음이 두려운 때문이가, 전생의 업을 갚기 위한 때문인가? 그렇다면 남희는 전생에 무슨 악행을 범했더란 말인가. 사냥감같이 잡혀서 전선으로 보내어지는 조선의 순결한 딸들은 어떤 업을 짋어졌기에 일본군대 야수 같은 몸뚱이 밑에서 살이 썩어가야만 하는가. 대체 조선 민족은 일본 민족에게 갚아야 하는 죄업이 무엇인가. 개인 하나하나의 행로를 바꾸어놓은 대일본제국의 군국주의, 침략의 그 마성을 적자생존이라는 이른바 지식인들의 논리로 진정 마감해야 하는 건가.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악이 힘이라면 선도 힘이요, 공격이 힘이라면 방어도 힘이다. 악의 승리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네들은 지금 공중에서 찢기어 살점들이 흩어지고 옥쇄! 옥쇄! 전멸! 전멸! 막 스스로에 의한 지옥이 펼쳐져 있지 않은가.


(토지 20권 318쪽~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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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22-10-21 16: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하시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완독 기념으로 망고 사진 한 장 부탁요~~

망고 2022-10-21 16:27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당😊망고 사진은 조만간 올릴게요ㅋㅋㅋ

scott 2022-10-21 16: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망고님 토지 완독 추카합니다
황금빛 메달🎖놓고 가여🤗

망고 2022-10-21 17:30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당~뿌듯하기도하고 시원하기도 한데, 해방후 역사가 또 비극이라는걸 아니 좀 슬프기도 했어요ㅠㅠ

scott 2022-10-21 17:33   좋아요 2 | URL
망고님 토지 완독만으로도 인생에 커다란 의미가 될것 같습니다 😊

망고 2022-10-21 17:37   좋아요 2 | URL
맞아요 사실 내내 숙제로 남아있었는데 이젠 숙제끝~이런느낌😆

거리의화가 2022-10-21 17: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현재 토지를 읽고 있어서 그 감동이 얼마나 크실까 상상이 됩니다^^ 축하드려요!

망고 2022-10-21 17:34   좋아요 3 | URL
오 토지 읽고 계시는군요😄다 읽고나니 스포당할 걱정없이 이젠 맘내키는대로 토지 몇부든 꺼내 읽을 수 있어서 좋아요ㅋㅋㅋ이젠 심심할때마다 아무곳이나 펼쳐서 읽으려고요^^화가님도 완독까지 화이팅!

기억의집 2022-11-30 2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20권을 일년동안!! 다른 책에 대한 유혹도 많었을 것 같은데.. 저도 망고님처럼 일년 잡고 읽어봐야겠어요!! 매번 반지의 제왕이나 황금 나침반같은 외국 작품 읽지 말고…

망고 2022-11-30 23:16   좋아요 0 | URL
사실 북플 이웃님들 같이 책 좋아하시는 분들은 맘잡고 읽으면 한두달이면 읽으실거 같아요 저는 그냥 이것저것 다른 책들도 기웃거리며 느긋하게 읽으려고 1년 목표잡은 거라서요^^기억의집님도 토지 도전 응원합니당😁
 

(마당에서 꺾어 온 다알리아 앞에서~ 노란책 예쁘다)


나는 단편소설을 잘 못 읽는 편이다. 장편에 길들여졌는지 이상하게 단편을 읽으면 집중도 잘 안되고 읽고 나서도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주로 단편을 읽어야 할 때는 아주 좋아하는 작가가 아닌 이상 e북을 사서 한번 훑고 마는 수준으로 읽는다. 이러니 더 기억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래서 단편소설집은 잘 소장하지 않는 편인데 얼마 전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작가의 다른 소설들은 어떨지 호기심이 마구마구 일어서 자본주의의 적이라는 장대한 제목의 이 소설집을 샀다. 소설집 제목부터가 빨치산의 딸이라는 작가의 내력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지레 짐작하기로 여기에는 뭔가 역사적인 큰 이야기를 하고 있겠다 싶었는데 내 예상은 역시나 늘 그렇지만 크게 빗나간 것이었다.

 

첫 번째에 실려 있는 자본주의의 적은 너무나 소심하고 내성적이라 세상에 나서기를 극도로 불편해 하는 현남 가족의 이야기다.

무언가를 갖고 싶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기꺼이 무한 경쟁 속으로 뛰어들어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라면,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고로 뭔가를 가지려고 용쓰고 싶지 않다의 상태. 즉 현남 가족이 대표하는 바로 이런 욕망의 부재 상태가 바로 자본주의의 적이라고 화자인 현남의 소설가 친구는 명명한다. 너무나 조용한 사람들이라 세상에 존재하는 지도 모를, 눈에 잘 띄지도 않을 그저 희미하기만 사람들을 정의하는 단어로는 안어울리게 거창하고 위협적이라 오히려 하찮고 귀여운 자본주의의 적

 

이 소설집에서는 이런 전혀 무섭지 않은 자본주의의 적들을 수월찮이 만나볼 수 있다.

별 꿈도 없고 딱히 별 재능도 없고 특별한 취향도 없이 한국 시골마을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는 미국 원어민 교사 스텔라의 이야기, 병에 걸려 다 죽게 생겼지만 고치려는 의지도 살고자 하는 욕망도 없이 매일매일 술만 마시는 기택의 이야기에서 첫 번째 소설의 주인공 현남 못지않게 자본주의의 적의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이들에게 왜 그렇게 희미하게 사냐고 손가락질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다소 퉁명스러운 톤으로 말하고 있지만 슬며시 던지는 시선은 푸근하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살아간다.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살아진다. 이런 삶이라도 뭐 어떤가 어쨌든 이래저래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들고 대단한 일인가 하는...

그리고 이런 욕망 없는 사람들이 그 나름대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묘하게 위로가 되기도 하지 않는가하고...물론 그 위로는 뭔가를 열심히 하려고 하는 자의 자기반성의 순간과 함께 찾아오기도 한다. 이렇게

 

 

또 썼더라.

뭐지 이건? 욕인가 싶어 가만히 있으면 이어지는 말이 가관이다.

뭘 그렇게 써대.

역시 욕이다. 문제는 그런 욕을 먹고 내가 반성을 한다는 거다. 자폐가족에게 물든 게 분명하다. 반성의 수준에서 가만히 있으면 더 센 펀치가 날아온다.

정 쓰고 싶으면 혼자 써. 쓰고 버려.

별것도 아닌 걸로 자원 낭비하고 세상에 민폐 끼치지 말라는 거다. 이런 젠장. 내가 이래봬도 과작의 작가라고! 발끈하고 싶은 심정은 둘째요, 느닷없이 부끄러워진다.

그래, 그러면 될 걸 나는 왜 꼭 어딘가 발표해서 누구에게 읽히려고 하는 거지?

(33)

 

 

자본주의에 직접적인 위협이었던 진정한 자본주의의 적이 주인공인 이야기도 있긴 하다.

한때 빨치산이었던 여자는 지금 90넘은 노인이 되어 자꾸만 과거를 소환한다. 지리산에서 죽어간 동료들의 모습, 치매에 걸려 원초적인 본능만 살아있던 짐승 같은 모습의 여동생에 대한 가슴 아픈 기억, 젊은 날 목숨 바쳐 싸웠던 사상이 다 무슨 소용이었을까 하는 회한,

하지만 노인이 떠올리는 이런 기박한 기억들 속에도 간간이 끼어드는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새하얀 눈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같은 것들. 지리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에게 속삭였다는 말 같은 것들. “우리 멩꺼정 다 얹어줬응게 원 없이 살다 오시게

슬프고 아름다운 단편이었다. 읽으면서 조금 울었네ㅠㅠ

 

 

진짜 재밌어서 내내 웃으면서 읽기도 하고 가슴 찡한 문장에 눈물 찔끔하기도 하고 작가의 시선이 마음에 들어서 흐뭇해하기도 하고. 전반적으로 이 소설집 속 이야기들을 내 기억에 딱 붙잡아 둘 수 있겠다 싶었다. 너무 잘 읽었다.

그래서 또 한권의 정지아 작가 소설집을 주문했다^^

분명 난 단편소설 잘 안 읽고 잘 안 산다고 했던 사람인데 말이다.

ㅎㅎ얼른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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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0-10 1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북으로 휘리릭 읽다가 소장하고 싶은 욕구로 종이책도 구입하는 사람
요기 🖐있습니다 ☺
망고님 정원에 핀 다일리아 넘 예쁩니다
은근 화려한 가을가을 꽃 🌼🌼

망고 2022-10-10 14:02   좋아요 1 | URL
다알리아 넘 예쁘죠ㅠㅠ여름부터 늦가을까지 쭈욱 펴서 오래볼수 있어서 더 좋아요😍
 
하버 스트리트 베라 스탠호프 시리즈
앤 클리브스 지음, 유소영 옮김 / 구픽 / 2021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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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냉소적이지만 가끔 따뜻하기도 한 베라형사와 그녀가 이끄는 경찰팀의 캐릭터들이 조화롭다 액션과 과학수사의 현란함이 아닌 각자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고전적인 수사물로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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