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밤에 이 소설을 다 읽고 잠자리에 들었다. 잠을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머릿속에 소설의 여운이 남아서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들었다. 약간의 서운함과 슬픈 감정이 남아 있었던 탓이다. 내가 겪지도 않았지만 찰스와 세바스찬의 옥스퍼드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내 마음속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옥스퍼드 근처에도 안 가봤는데 이게 대체 뭐람?

잠을 자기 위해서 슬픈 여운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그 자리에 누구도 보지 못하는 나만의 상상이긴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오글거리는 것들로 소설의 빈곳을 채워 넣는 구상을 하고 있자니 잠이 솔솔 왔다.

다음날 소설을 처음부터 찬찬히 한번 더 들여다봤다.

매우 재밌고 풍성하며 아름다운 문학이 다시금 내 마음에 쏙 들어왔다.

 

 

이 소설은 가톨릭이 등장인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는 매우 종교적인 냄새를 풍기는 소설이기도 하다. 불가지론자인 찰스의 시선으로 영국에서 그 수가 얼마 되지 않는 가톨릭 귀족 집안의 가족 구성원의 삶을 따라가는데, 그들이 결국은 가톨릭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는 모습을 보며 찰스조차도 가톨릭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말하니까 이 소설이 고루하고 교훈적인 종교 소설인거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종교를 말할 때 독실한 쪽의 논리와 불가지론자 찰스의 논리가 부딪히지만 독실한 쪽의 논리는 설득력이 부족하고 그것을 주장하는 인물들이 결코 호감이 가는 면면들이 아니다 보니 독자들은 종교에 순순히 마음의 문을 열 수 없을 것이다. 에벌린 워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쓴 소설이라 가톨릭에 긍정적인 태도를 고수할 거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딱히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가톨릭에 대한 새로운 감화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절대적인 신이라는 존재가 이 힘든 세상 이런저런 부침을 겪는 인간들에게 위로를 주는 마지막 울타리가 될 수도 있다는 식으로 나는 이 소설 전반에 깔려있는 가톨릭을 이해했다.

 

종교적인 색채와 더불어 이 소설을 채우고 있는 강렬한 색채는 바로 사랑이다.

이 소설이 그토록 인기를 얻고 드라마화 되고 영화화 된 이유. 바로 그 사랑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찰스와 서배스찬의 여름 같은 사랑~

열아홉 옥스퍼드에서 처음 만난 둘은 상큼하고 푸릇푸릇한 에피소드들을 뿌리며 둘 만의 아르카디아에서 행복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아쉽게도 너무 짧았다.

찰스와 서배스찬의 사랑이 이토록 짧게 끝난 것에 대해서 표면상에 드러난 이유는 서배스찬의 알콜 중독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 서배스찬은 왜 그렇게 망가져야만 했고 그의 감정은 어떤 것이기에 찰스를 떠날까 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찰스의 시선으로 소설이 전개되기 때문에 문장 속 작은 단서들로 서배스찬을 짐작할 수밖에 없어 그에 대한 설명엔 빈칸이 많지만 이 소설이 설레는 이유는 그 빈칸을 독자 나름대로의 관찰로 채워 넣을 수가 있다는 데에 있다.

내가 채워 넣은 답은 이렇다.

서배스찬은 곰돌이 인형을 가지고 다니며 대학 생활을 할 만큼 어른이 되기를 거부해왔다. 그는 자신의 성적지향을 알았을 것이고 그것이 자신의 종교와 사회에서 허락되지 않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어른이 되는 것을 꺼려왔을 것이다. 그런데 찰스를 만나고 서로 사랑하게 된다. 물론 그 둘은 아직 풋풋하기만하지 어른의 사랑은 아니었다.

시간은 흘러 서배스찬과 찰스는 어른이 되어야 하고 어른의 사랑을 감당할 수 있느냐는 이제 찰스에게 달렸다. 찰스는 서배스찬의 가족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으로 사회적 규범 안으로 점점 들어가고 서배스찬은 그럴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서배스찬은 술로 도피하고 결국 찰스를 떠나버린다.

외국에서 서배스찬은 돌봄을 받기만 하던 어린아이에서 자신이 누군가를 돌봐줄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고 느끼게 하는 커트라는 남자와 비로소 진짜 어른의 사랑을 했을 것이다. 커트를 잃게 되자 서배스찬은 완전히 무너진다.

서배스찬과 헤어진 찰스는 어땠을까? 그는 화가가 된다. 그리고 결혼을 해서 아이도 낳는다. 하지만 부인이나 아이들에게 크게 애정을 느끼지 못 한다. “서배스찬을 그리는 외로움이 결혼한 이유 중 하나라고 찰스는 말한다. 그는 서배스찬 이후 다른 사랑에 빠지지 못 했다.

이때 서배스찬의 여동생 줄리아가 나타난다. 찰스는 줄리아에게서 서배스찬과 똑 닮은 외양을 본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나는 서배스천을 잊지 않았다. 그는 줄리아 안에서 날마다 나와 함께했다. 아니, 그보다는 그 옛날 아르카디아의 나날에 내가 서배스천 안에서 안 존재가 줄리아였다. (494)”

 

종교 문제 때문에 결국 줄리아랑 헤어지게 되는 찰스는 줄리아를 통해서 느꼈던 서배스찬과의 사랑도 이젠 정말로 과거의 한때로 남겨둘 수밖에 없게 된다.


첫사랑, 달콤한 열정, 이루지 못한 사랑, 늘 마음속에 그리움으로 남겨진 사랑......

중년이 된 찰스가 전쟁 중 다시 브라이즈헤드 저택에 돌아와서 그토록 아름답게 회상하는 사랑.

바로 이러한 사랑 이야기를 이 소설은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과거 회상조의 문체가 그렇듯 찬란한 한때를 묘사하는 서정적인 문장들이 빛이 나는 작품이다. 하지만 말랑말랑한 감정에 빠져 있기만 하지는 않는다. 툭툭 튀어나오는 유머와 풍자가 소설을 맛깔스럽게 하기도 하고 개성 강한 인물들의 생생한 대사들이 재미를 더하기도 한다. 특히 찰스 아버지의 그 뚱하고 무뚝뚝한 대사 속에 아들을 어떻게든 내 눈앞에서 치워버리겠다는 악의가 담긴 비꼼의 대사는 진짜 너무 웃기고 재밌던 부분이기도 했다.

너무 만족스러운 독서였고 에벌린 워의 소설을 더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망고야 뭐해?)


앗 쓰다보니 2023년이 되었네

2023년 첫 글이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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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23-01-01 00: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망고 안녕! 다정하고 따스한 누나 집사님과 토끼해 올해도 건강하고 행복하렴~~^^
새해가 밝았네요! 오늘부터 쭈욱~~굿데이!
새해 좋은 첫 글 감사합니다!^^

망고 2023-01-01 00:56   좋아요 2 | URL
새해부터 망고녀석 말을 안듣고 카메라를 안 쳐다봐서 저런 사진입니당ㅋㅋㅋㅋ애플님 새해에는 행복만 하시길요🥰

scott 2023-01-01 00: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사랑 둥이 망고
계묘년 건강하게
새해 복 마뉘 🐰🐇🐰🐇

망고 2023-01-01 00:59   좋아요 2 | URL
오냐오냐 길러서 버릇이 없어요ㅋㅋㅋㅋ새해 복 많이많이 받으세요😍

Falstaff 2023-01-01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올해엔 에벌린 워의 다른 작품, 특히 초기 작품을 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좋다는데요.

망고 2023-01-01 12:25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명성에 비해 번역된게 없어서 저도 찾아보고 좀 놀랐어요😆골드문트님 새해소망이 다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당^^

기억의집 2023-01-01 2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망고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즐거움과 해피한 한 해 보내시길 바랍니다~ 검색해 보니 45년 작품인데도 저 작품이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는데.. 그럼 튜링은 왜 자살했을까? 이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어요. 소설이기에 가능한 동성애일까요?? 궁금해지네요!

망고 2023-01-01 22:36   좋아요 1 | URL
당시 사회에서는 여전히 동성애는 금지였더라구요 근데 이 소설은 직접적으로 이둘이 육체적 사랑 뭐 이런 언급이 전혀 없고요 어릴때부터 남녀가 분리된 교육기관에서 교육받아서 남학교에서 흔히 보이는유의 우정인듯 사랑인듯한^^어른이 되기전 스치는 감정같이 묘사됩니다 사실 당시에도 남학교에서 동성간 이정도 사랑은 꽤 흔했다고도 하고요 어른들은 저런것도 다 한때고 지나간다 이런식으로 생각합니다ㅎㅎ하지만 이 소설 읽어보시면 감정이 굉장히 깊고 분명 그이상 무언가 더 있다는 해석을 하게 만듭니다😊그래서 애매모호한 빈틈에 살을 붙여 독자들을 상상하게 만드는 소설이기도 하고요 재밌어요😁

망고 2023-01-01 22:38   좋아요 0 | URL
아참 그리고 기억의집님 새해 복 많이많이 받으세요😄
 



(다시 찾은 브라이즈헤드 357쪽)


서배스천아 너가 지금 누구를 돌본다는 거야! 찰스에게 돌아가라고!!

라고 지금 내 마음 속에서 절규하고 있다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이제 3부 읽어야 하는데 아름다운 청춘의 행복한 시절이 다 간거 같아서 서운하고 마음 아파서 책을 덮어뒀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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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12-26 19: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재밌게 읽었는데요! 에벌린 워는 초기의 위트 있는 작품이 정말 짱인데, 왜 계속 번역하지 않는지 안타깝습니다!!!

망고 2022-12-26 19:13   좋아요 3 | URL
너무 재밌어요! 빙빙 돌려서 농담같이 돌려까는 문장들도 재밌고 예의 차리고 하나도 안 웃으면서 웃기는 영국식 유머도 재밌어요ㅎㅎㅎ근데 번역 난이도 엄청 높을거 같아요 번역문만 봐도 원문이 되게 화려한 느낌이라😆뭐 어렵다고 번역출간 안 하는건 아니겠지만요^^

scott 2022-12-26 20: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 영드도 재밌습니다 😄

망고 2022-12-26 20:11   좋아요 2 | URL
혹시 제러미 아이언스 나온 옛날드라마 말씀하시나요?ㅎㅎ 저 그거 아주 예전에 초반만 봤는데 자막도 없이 보느라 이게뭐냐 하면서 꺼버렸다는ㅋㅋㅋㅋㅋㅋ책 읽으며 그 드라마 생각했는데 어디가야 볼수 있을지 모르겠어요ㅋㅋㅋ

scott 2022-12-26 20:16   좋아요 2 | URL
2008년도에 영화로 나왔습니다
에벌린 워 한줌의 먼지도 잼나고
스쿱도 명작입니다 😊

망고 2022-12-26 20:20   좋아요 2 | URL
아 영화 알죠ㅎㅎㅎ보지는 않았지만^^사실 옛날 드라마 배우들 외모가 캐릭터에 더 잘 어울리는거 같아요ㅋㅋㅋ벤 위쇼 팬들한테 돌맞을라 조심스럽지만🤭

scott 2022-12-26 20:21   좋아요 2 | URL
솔직히 오래전 영드가 원작에 더 가깝 🙊
 



이사벨 아처는 20대 초반의 미국인으로 부모 없이 결혼한 언니와 살고 있었다. 그녀는 물려받은 유산이랄 것도 없어서 수입이 거의 없었으나 그런 물질적인 것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는 다소 무모한 이상주의자였다. 독립심이 강한 성격에 세상을 두루 보겠다는 자신감이 넘치고 많은 독서량으로 지적인 면모도 빼어난데다 사회에 대한 정의감이 있어서 진보적인 여성 기자와 절친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20대 초반으로 세상 경험이 별로 없으면서도 자신의 정의감과 독립심에 자만하는 성향이 있었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책에서 배운 정의가 올곧게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다는 고집스러움이 그녀의 성격적 결함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사벨의 나이엔 그런 자만심이 그렇게 큰 결함이 아닐 수도 있다. 그 시기에는 다들 내가 아는 게 다 인줄 알면서 세상 무모하게 살 그런 시기니까.

하지만 이 소설이 쓰여진 19세기에는 이사벨 또래의 여성은 결혼이라는 중대사를 늘 앞두고 있고 한번 잘못 선택한 결혼은 되돌리기가 쉽지가 않았으니 이사벨의 고집과 자만심으로 잘못된 판단을 내려 이상한 사람과 결혼을 하면 인생을 송두리째 비극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일찍이 영국으로 이주해서 부유하게 살고 있던 이사벨의 이모는 이사벨을 영국으로 데리고 온다. 아름다운 대저택에서 살고 있던 이모부와 사촌 랠프는 생기발랄한 이사벨의 상상력이 풍부하고 독립심이 강한 성격에 단번에 매료된다. 그리고 또 한사람 랠프의 친구인 귀족 워버튼경이 이사벨에게 반하게 되면서 그녀에게 청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사벨은 자신의 인생은 결혼으로 시작하지 않을 것이며 너무나 조건 좋은 워버튼 경 같은 사람과 결혼하면 자기 자신은 사라지고 아내라는 존재만 남을 것이란 생각에 그 대단한 청혼을 거절한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부터 알고 지낸 사업가 청년 굿우드도 영국으로 이사벨을 따라와서 청혼을 하지만 이사벨은 거절한다. 자신은 세상을 더 보고 싶고 앞으로 결혼 같은 건 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며 집요한 굿우드의 구애를 내쳐버리는 것이다.

이사벨의 이러한 결정을 옆에서 지켜본 랠프는 결혼하지 않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자유롭게 세상을 두루 경험하고 살 것 같은 이사벨의 인생을 응원해 주고 싶었다. 아직 이사벨은 돈 없이 독신으로 산다는 것의 고달픈 현실을 모를 정도로 대책 없는 청춘이지만 돈이 없으면 자유로운 여성으로 살기 힘들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랠프는 아버지에게 이사벨에게 막대한 유산을 상속해 주십사 간청한다.

뜻밖의 유산 상속으로 부자가 된 이사벨은 세상을 두루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고 그곳에서 그녀를 가슴 뛰게 하는 운명의 남자 오즈먼드와 만나게 된다. 원래 미국인인 오즈먼드는 어릴 때 유럽으로 이주한 유럽 속의 미국인 이민자였고 오래전에 부인과 사별해서 이미 다 큰 딸이 있는 나이 많은 홀아비인데 이사벨은 그를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어떤 점이 이사벨을 사로잡았냐하면 세상의 부와 권력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초연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점,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품에 대한 취향이 세련된 점, 그리고 가난하다는 점이었다. 이사벨이 생각하기엔 이 사람 옆에 있으면 누구의 부인으로 종속된 삶이 아니라 독립적인 자신으로 살아가면서 남편과 예술에 대한 지적인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재산으로 가난한 남편을 구원해 주는 삶을 살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것은 내 생각이지만 어쩌면 이사벨은 조건이 좋지 않은 오즈먼드의 상황 때문에 관계의 주도권을 자신이 잡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것은 오즈먼드가 가난해서 더 좋다는 이사벨의 말에서 짐작한 것인데, 오즈먼드의 가난을 구제해 줄 수 있는 이사벨의 입장은 일종의 권력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사벨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독립적인 기질과 가난한 오즈먼드가 최적의 조합이라고 느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것은 오즈먼드에 대한 이사벨의 오해였고 환상이었다. 사실 그는 이사벨이 생각하는 그런 인물이 전혀 아니었지만 이사벨은 이미 눈에 콩깍지가 씌워져서 자신이 만들어낸 오즈먼드 외에는 보이지 않게 된 상황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이사벨의 성격적 결함이 크게 작용하게 된다. 자신에 대한 자만심과 고집. 오즈먼드가 어떤 인물인지 세상 경험 많은 이모와 랠프는 뻔히 보여서 그 결혼을 반대하는데 이사벨은 그들보다 자신이 내린 판단이 더 확실하다며 결혼에 대한 결심을 더욱더 확고하게 굳힌다.

 

이사벨의 결혼 생활은 역시나 예상대로 불행해진다. 결혼해서 보니 오즈먼드는 굉장히 속물스러운 사람이었고 세상에 초연한 듯 보였던 모습은 애초에 자신이 가질 수 없었던 부와 권력이니 관심 없는 척 한 것뿐이고 실제로는 남의 이목에 어마어마하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 이사벨의 돈으로 호화롭게 살면서 이사벨에게는 남편인 자신에게 종속적인 삶을 살 것을 강요하고 이사벨을 자신의 구미에 맞게 통제한다. 결혼생활을 하면서 이사벨은 남편에게 맞추려는 모습, 남편이 화를 내면 그것에 대해서 정당한 이유가 있음을 애써 찾으며 남편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이며 결혼한 여자라는 사회적 인습에 꽉 매여서 처녀시절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추구했던 모습과는 달라진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러는 와중에 오즈먼드의 딸을 결혼시키는 문제로 이사벨과 오즈먼드는 크게 싸우게 되고 남편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어 남편을 점점 더 참을 수 없게 된 이사벨은 결국 영국으로 돌아온다.

 

이제 소설의 마지막은 과연 이사벨이 비참한 결혼 생활을 깰 수 있을까에 주목한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독립심 강한 성향과 세상을 넓게 보고 싶다는 호기심으로 가득 찼던 아가씨 때의 이사벨을 기억하며 그녀가 하게 될 선택에 의심을 품지 않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아서 얼얼한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 이사벨의 선택이 너무 싫어서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열린 결말이다. 이사벨의 선택은 일단은 실망스럽지만 얼마든지 독자들의 상상력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도 있다는 것인데...

아 정말...결론을 땅땅 내주고 끝내지!!! 마지막에 이렇게 고구마를 먹이다니...

하지만 아무리 열린 결말이라도 나는 이사벨의 선택이 도저히 희망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동안 이사벨의 행적, 잘난 남자가 자신감 있게 결혼 하자고 하면 절대 안 한다고 거절하고, 결혼을 반대하면 더 하고 싶어 하는 그 행적으로 보아 이사벨은 아마 다시 남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모두가 너의 결혼을 깨라고 할 때 이사벨은 아니 깨지 않겠어 끝까지 내 결혼에 책임지겠어할 만한 성향의 사람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사벨의 독립심 강한 성향은 이런 식의 반발로도 뻗어나갈 수 있다는 걸 이 소설 내내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이 긴 소설은 특별한 사건이 두드러지게 일어나지 않으면서 천 페이지 분량을 자랑하는데 거의 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지루하냐면 또 그렇진 않다. 특히 이사벨이라는 인물은 분명 좋은 점이 많이 있지만 결함도 있어서 그 심리를 그리는 방식이 굉장히 입체적이라 보고 있기에 재미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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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2-22 11: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린 결말!
헨리 제임스 심리 묘사의 대가 !^^

망고 2022-12-22 12:41   좋아요 2 | URL
전 열린 결말이 넘 싫어요ㅠㅠ

scott 2022-12-22 15:08   좋아요 2 | URL
영화는 새드 엔딩 이였습니다

제임스 단편 정말 잘쓰는데

한국어판 번역들이 넘 ㅎ 엉망이여서
대 작가의 작품들 안타깝습니다 ㅜ.ㅜ

망고 2022-12-22 15:24   좋아요 2 | URL
영화도 보고 싶어요 영화에서는 이 심리 소설 어떻게 표현했는지 궁금해요 쉽지 않았을거 같은데🤨 번역은... 저는 원문은 안 봤지만 번역된 문장만 봐도 헨리 제임스의 문장이 엄청 복잡하겠다 싶은 느낌이었어요ㅋㅋㅋ번역하기 골치아프고 어려울거 같아요😆

기억의집 2023-01-01 22: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을 헨리 제임스가 아닌 여성 작가가 썼다면 과연 열린 결말로 매듭지었을까요? 이왕 독립적이고 자신의 삶의 주관이 뚜렷한 여성으로 결말 되었으면 헨리 제임스는 소설의 한 획을 그을만한 작품을 썼을텐데… 딱 독립적인 여성상만 보여주는 반쪽짜리 소설이 되었네요…// 저도 이 책 민음사판으로 읽었네요. 어쩐지 뭔가 비슷한 내용을 읽었다 했는데.. 아마 저도 다 읽고 소설사의 한 획을 긋다 말었구나 하고 읽었던 것 같어요. 이 후 헨리 제임스 책 안 읽었고 고전 문학에 대한 매력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어서 고전 문학 안 읽기 시작했어요 ㅠㅠ

망고 2023-01-01 22:50   좋아요 2 | URL
아아 맞아요 열린결말 넘 무책임했어요 저는 사실 이 결말로 작가가 잘난척을 했다는 생각을 좀 했습니다 난 뻔한 결말 안쓴다 이렇게요ㅋㅋㅋㅋ근데 독립적인 여성상도 솔직히 말뿐이었어요 행동으로 주인공이 뭘 보여준건 없잖아요ㅋㅋㅋㅋ인물들의 그때그때 변화하는 심리에만 집중한거 같아요^^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 초상을 그리는 사람은 남성이란 시선이 너무 잘 드러나있죠 그게 좀 시시한 부분이기는 했어요😆

2023-01-06 16: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06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06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06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06 17: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06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인의 초상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30
헨리 제임스 지음, 정상준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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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의 마지막 선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열린 결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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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쇼룸
김의경 지음 / 민음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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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사느냐가 곧 나를 말해 주는 시대에 고작 다이소 제품들이나 이케아에서 가장 싼 가구 정도만 살 수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 하지만 결국 우리가 우리임을 말해주는건 싸구려 물건들이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의 온기였음을 잔잔하게 느낄 수 있는 단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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