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그 사람이소파에 앉아 시리얼을 먹다가 불현듯 어떤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그것에 대해 흥분해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이를테면 사람들이 이메일 마지막에 겨우 키보드 네 번 더 누르는 수고를 안 하려고 머리글자 하나만으로 서명하는 것이 얼마나 자기를 짜증나게하는지 모른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모습.
혼돈이 그 사람을 집어삼킬 것이다.
혼돈은 부러져 떨어진 나뭇가지나 질주하는 자동차, 총알 하나를 거느리고 밖에서 치고 들어가 그를 으스러뜨릴 수도 있고, 아니면 반란을 일으키는 그 사람의 몸속 세포들과 함께 안에서 박차고 나와 그를 해체해버릴 수도 있다. 혼돈은 당신의 화초를 썩어물러지게 하고, 당신의 개를 죽이고, 당신의 자전거를 녹슬게 할것이다. 당신의 가장 소중한 기억을 부식시키고, 가장 좋아하는 도시를 무너뜨리고, 당신이 간신히 쌓아올린 모든 성스러운 장소를폐허로 만들 것이다.
혼돈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이라는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일어나는가‘ 하는 시기의 문제다. 이 세계에서 확실한 단 하 - P15

나이며,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주인이다. 과학자인 나의 아버지는일찍이 내게 ‘열역학 제2법칙‘은 절대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쳤다.
엔트로피는 증가하기만 할 뿐,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줄어드는 일은 없다고 말이다.
똑똑한 인간은 이 진리를 받아들인다.
똑똑한 인간은 이 진리에 맞서 싸우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1906년 어느 봄날, 팔자수염을 기른 어느 키 큰 미국인이 감히 우리의 주인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의 이름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David Starr Jordan. 여러 방면에서 혼돈과 싸우는 것은 그의 본업이기도 했다. 그는 거대한 "생명의 나무""의 형태를 밝혀냄으로써 지구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일을 하는 과학자, 더 정확히 말하면 분류학자였다. 그리고 생명의나무가 완성되면 모든 동식물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밝혀질거라고 했다. 그의 전문 분야는 어류로, 그는 새로운 종을 찾아 전지구를 항해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울러 그 새로운 종들이 자연에숨겨진 청사진에 관해 더 많은 걸 알려주는 실마리가 되어주기를바랐다. - P16

조던은 수년, 수십 년에 걸쳐 지치지 않고 일했고, 그 결과 당대 인류에게 알려진 어류 중 5분의 1이 모두 그와 그의 동료들이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새로운 종들을 수천 종 낚아 올렸고, 각각의 종마다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그 이름을 반짝이는 주석 꼬리표에 펀치로 새기고, 에탄올이 담긴 유리단지에 표본과 함께 이름표 - P16

를 넣었다. 그렇게 자신이 발견한 어류 표본들을 높이 더 높이 쌓아갔다. 1906년 어느 봄날 아침, 난데없이 닥친 지진으로 그가 수집한 반짝이는 표본들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 전까지는.
수백 개의 유리단지가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고, 그의 어류 표본들이 깨진 유리와 넘어진 선반들에 의해 절단되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최악의 피해를 입은 건 이름들이었다. 조심스럽게 유리단지에 넣어둔 주석 이름표들이 온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창세기가 거꾸로 펼쳐진 끔찍한 지진 속에서, 그가꼼꼼하게 이름 붙인 물고기 수천 마리가 다시 수북이 쌓인 미지의존재들로 되돌아갔다.
- P17

그런데 이 콧수염을 기른 과학자는 평생의 노고가 자기 발치에서 내장을 쏟아내는 파괴의 잔해 한가운데서 이상한 짓을 했다.
그는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그 지진이 전하는 명백한 메시지, 즉 혼돈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질서를 세우려는 모든 시도는결국 실패할 운명이라는 메시지에 그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소매를 걷어붙이고 허둥지둥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세상의 하고많은 무기 중에서 바늘 하나를 찾아 들었다.
그는 엄지와 검지로 바늘을 잡고는 바늘귀에 실 한 올을 꿰더니 그 파괴의 잔해에서 그나마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물고기 하나를 겨냥했다. 그러고는 한 번의 유연한 동작으로 바늘을 물고기의목살에 찔러 넣어 이름표를 꿰매 붙였다. 폐허에서 구해낼 수 있는모든 물고기에 이 작은 동작을 반복했다. - P17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혼돈에 반격한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당시 나는 20대 초반으로, 이제 막 과학 기자로 발돋움하던 참이었다. 이 얘길 듣자마자 나는 그가 바보라고 생각했다. 바늘은분명 지진에 맞서서는 효과가 있겠지만, 화재나 홍수, 녹, 그 밖에그가 고려하지 못한 수천 가지 파괴 방식에 대해서는 어쩐단 말인가? 그가 바늘로 이뤄낸 혁신은 너무 허술하고 너무 근시안적이며, 자신을 지배하는 힘에 대한 어마어마한 무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내게 오만에 대한 교훈으로, 어류 수집계의 이카로스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게 찾아온 혼돈에 뒤흔들리고,
내 손으로 직접 내 인생을 난파시킨 뒤 그 잔해를 다시 이어 붙여보려 시도하고 있을 때, 문득 나는 이 분류학자가 궁금해졌다. 어쩌면 그는 무언가를, 끈질김에 관한 것이든, 목적에 관한 것이든,
계속 나아가는 방법에 관한 것이든 내가 알아야 할 뭔가를 찾아낸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가당치 않게 커다란 믿음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 P18

도착한 배송 꾸러미는 따뜻하고 뭔가 마법에 걸린 물건 같은느낌이었다. 마치 그 안에 보물지도라도 담겨 있는 것처럼. 스테이크 나이프로 포장 테이프를 자르니, 금박으로 새겨진 글씨가 희미한 빛을 내는 올리브색 책 두권이 나왔다. 나는 큰 주전자 가득 커피를 만들어 1권을 무릎에 올리고 소파에 앉았다. 이로써 혼돈에항복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파헤칠모든 채비가 끝났다. - P20

데이비드 조던은 뉴욕주 북부의 한 사과과수원에서, 1851년한 해 중 가장 어두운 시간에 태어났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별에그토록 몰두하게 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신의 소년기에관해 이렇게 썼다. "가을 저녁 옥수수 껍질을 벗기던 중 천체의 이름과 의미에 관해 호기심이 생겼다"1하지만 그는 반짝거리는 별들을 마냥 즐길 수만은 없었다. 별들이 혼란스럽게 흩어져 있는 밤하늘은 그에게 질서를 부여하고알아내야 할 대상처럼 느껴졌다. 여덟 살쯤 됐을 때 조던은 천문도가 있는 지도책을 손에 넣었고, 그 페이지에서 본 것과 머리 위에보이는 것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밤이면 밤마다 그는 집에서 몰래빠져나가 하늘에 있는 모든 별들의 이름을 익히려 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르면, 밤하늘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데는 5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에 대한 상으로 그는 자신의 가운데 이름(미들네임)으로 ‘스타Star‘를 골랐고, 남은 평생 자랑스럽게 그 이름을달고 다녔다.
- P23

이유가 무엇이든 훌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데이비드의 구겨진 지도를 주먹 가득 움켜쥔 채 훌다는 아들에게 시간을 쓸 "더
"중요한 일을 찾아보라고 말했다." 착한 소년답게 데이비드는 어머니의 말을 들었다. 지도 만들기를 그만둔 것이다. 하지만 진짜소년답게 데이비드는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다. 진정한 의미에서는 말이다.
자신의 죄를 지구 탓으로 돌리려는 건지 데이비드는 이렇게썼다. "우리 시골집 주변에는 다양한 들꽃이 아주 많았다."12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이따금 풀밭에서 벨벳처럼 부드러운 파란 꽃잎이 동그란 공처럼 모여 핀 꽃과, 실크처럼 부드러운 주황색 별모양 꽃들을 꺾어 집으로 가져갔다. 어떤 꽃은 냄새만맡아보고 바닥에 던져버렸지만, 때때로 어떤 꽃은 손가락 사이에계속 남아 있다가 데이비드의 침실까지 따라 들어오곤 했고, 그런다음 침대 위에 놓인 채 꽃잎의 신비로운 배열 방식으로 데이비드를 자극했다. 그는 그 꽃을, 그 꽃의 이름과 생명의 나무에서 차지하는 정확한 위치를 알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려 애썼다. 그리고 꽤잘 억눌렀다. 사춘기가 닥치기 전까지는. - P26

조슈아를 만난 뒤 데이비드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무미건조하고 못생긴 꽃들-민들레 (타락사람오피시날레Taraxacum officinale)나 미나리아재비(라눙쿨루스 아크리스Ranunculus acris) 같은-이 자연의 청사진에 대한 더 좋은 실마리를담고 있다고 확신했다. "작은 것들은 아름답지는 않아도, 단 한 종류의 큰 꽃 백 송이보다 내게는 더 큰 의미가 있다. 미적 관심과 구별되는 과학적 관심을 보여주는 특별한 증거는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에게 마음을 쓰는 일이다."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
여기서 데이비드가 자신에 관한 뭔가를 드러내려고 했던 것일까? 회고록에는 이런 측면을 많이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에게인간 세상은 야박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 P28

루퍼스가 죽은 이후 데이비드의 일기장은 색채들로 폭발하기시작했다. 들꽃, 고사리, 아이비, 나무딸기 등 이 세계에서 뜯어올 수 있는 자연의 모든 파편을 꼼꼼하게 스케치하려 했던 것 같다. 그림의 기교는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그 그림들은 문질러 번진 연필 얼룩, 잉크 자국, 지우개 자국, 지나치게 열심히 그리려다흘린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그 미숙함 속에는 그의 집착과 필사적인 마음, 자신도 모르는 것들의 형상을 붙잡아두기 위해근육의 온 힘을 동원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다.
각각의 그림 밑에는 마침내 학명이 하나씩 적혀 있었다.  - P30

데이비드는 마침내 그 이름들을, 라틴어로 된 승리의 선언이자 통달의 선언을 큰 소리로 발음하게 되었을 때의 감각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 이름들은 내 입술에 얹힌 꿀과 같았다" 2심리학자들은 이처럼 괴로운 시기에 수집이 줄 수 있는 달콤한 위안에 관해 연구해왔다. 수십 년간 강박적인 수집가들과 상담해온 심리학자 워너 뮌스터버거Werner Muensterberger는 《수집: 다루기 어려운 열정 Collecting: An Unruly Passion》에서 수집 습관이 모종의
"박탈 혹은 상실 혹은 취약성이 발생한 후 급격히 심각해지는 경우가 많으며, 새롭게 하나를 수집할 때마다 수집가에게는 폭발적인 도취감을 주는 "무한한 힘의 환상"이 흘러넘친다고 말했다."
그라나다대학에서 수년간 수집가들을 연구한 프란시스카 로페스-토레시야스Francisca López-Torrecillas는 스트레스나 불안을 겪는 사람들이 수집에 의지해 고통을 달랜다며 비슷한 현상을 지적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무력함을 느낄 때는 강박적인 수집이 기분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28 뮌스터버거가 지적하듯, 유일한 위험은 여느 강박과 마찬가지로 수집 습관이 "신나는 일에서 "파멸적인 일로 바뀌는 어떤 지점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 P31

페니키스 섬은 매사추세츠 해안에서 22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다. 길이는 1.5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고, 내리쬐는 태양으로부터 보호해줄 나무도 거의 없는‘ 이 섬은 사슬처럼 이어지는 여러 섬 중에서도 "땅꼬마"라 불려온, "슬프고 외로운 작은 바위섬",
"지옥의 전초기지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벌거숭이 해안은 늘 급진적 희망이 찾아드는 장소였다. 1900년대 초에는 자신이 환자들의 치료법을 찾을 수 있다고 믿은 한 의사가 이끄는 나환자촌이었다.
1950년대에는 급감하는 제비갈매기 개체군의 운명을 뒤집겠다는희망을 품은 동물연구가들이 새들의 피난처로 바꿔놓았고, 1970년대에는 비행 청소년 혹은 불량 청소년 혹은 문제아(명칭은 시기에 따라 달라졌다)들을 모아 교육하는 학교가 되었다. 어느 해병대출신 뱃사람이 격리와 육체노동, 축산, 배 건조, 공동체 생활, 학교공부가 "다수의 잠재적 살인자들을 자동차 도둑으로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학교를 세운 것이다. - P35

당시는 사람들이 ‘군대 열병‘ 같은 알 수 없는 병으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방법이 전혀 없는 바로 그런 시절이었고, 아직박테리아가 그 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이었다. 아가시는 사람들이 당대의 믿음들에 만족한다면 계속해서 발전이 가로막히고 좌절되고 병든 상태로 남을 거라고 걱정했다. 그건 안 될일이었다. 거기서 벗어날 방법, 계몽으로 나아갈 방법은 이 세계의털가죽과 꽃잎과 조약돌들을 계속해서 더 세밀하게, 더 오랫동안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아가시는 그러한 병폐를 바로잡을 수 있는 안전한 성역을, 요컨대 자연에서 젊은 박물학자들을 모아놓고 직접 관찰의 기술을가르칠 수 있는 일종의 여름 캠프를 꿈꿨다. 그리하여 1873년에어떤 부유한 토지 소유자가 그러한 대의를 위해 페니키스 섬을 기부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아가시는 냉큼 그 기회를 붙잡았다. - P37

몇 달 뒤인 1873년 7월 8일,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매사추세츠주 뉴베드퍼드의 한 항구에 발을 딛고, 생애 처음으로 대양을 바라보았다.13 그의 나이 22세 때의 일이다.
서서히, 점점 더 많은 수의 남자들과 여자들로 뒤섞인 젊은 박물학자 무리가 부두 위에 있는 그의 곁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바다는 잔잔했고 하늘은 찬란한 푸른빛이었다.
수평선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섬으로 그들을 실어다줄 예인선이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배에서 널판자를 내리자 젊은 박물학자 50명이 그 위를 걸어 배에 올랐다. 배가 파도 사이로 넘실거리며 나아가는 동안 캠프를 향해 가는 그 젊은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세월 속에 묻혀버렸다.  - P39

 "물고기들은 뭐가 뭔지 당황스러울 정도로 다양하게 낚여 올라왔다." 그는 그날 갑판 위에서 파닥거리던 물고기들의 이름은 단 하나도 기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그에게 물고기들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이자, 남은 평생맞춰야 할 퍼즐로 그를 손짓해 부르는, 반짝이는 비늘로 된 실마리들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P49

어쩌면 케이프코드는 실존적 변화를 일으키기에 아주 비옥한땅인지도 모르겠다. 혹시 모래가 많은 케이프코드 만의 토양에 형이상학적 변화의 촉매가 되는 어떤 금속들이 함유되어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다. 내가 아는 것은, 나 역시 그곳에 갔을 때 세계관 전체가 재배열되는 느낌을 받았다는 사실뿐이다. 그 일은 내가 일곱살 때쯤 일어났고,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 순간은 내가 데이비드스타 조던에게 집착하게 될 길을 닦아놓은 순간, 후에 내 인생이파탄 나고 있을 때 그가 나를 구원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만든 순간이기도 했다. - P53

그런 다음 아버지는 내 머리를 톡톡 토닥여주었다.
그때 내 얼굴이 어떻게 보였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잿빛이었을까? 그건 마치 이 세상을 덮고 있던, 깃털을 넣어 만든 커다란이불을 빼앗긴 느낌이었다.
‘혼돈‘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배자라고 아버지는 내게 알려주었다. 혼돈이라는 막무가내인 힘의 거대한 소용돌이, 그것이야말로 우연히 우리를 만든 것이자 언제라도 우리를 파괴할 힘이라고말이다. "혼돈은 우리의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 우리의 꿈, 우리의 의도, 우리의 가장 고결한 행동도. 절대 잊지 마라." 데크 아래솔잎들이 쌓인 땅을 가리키며 아버지가 말했다. "너한테는 네가 아무리 특별하게 느껴지더라도 너는 한 마리 개미와 전혀 다를 게 없다는 걸 좀 더 클 수는 있겠지만 더 중요하지는 않아." 당신 머릿속에 존재하는 위계의 지도를 들여다보느라 아버지는 여기서 잠시말을 멈췄다. "과연 네가 토양 속에서 환기를 시킬 수 있을까? 목재를 갉아 먹어 분해의 속도를 높이는 일은?" - P55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네가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런 면에서 지구에게넌 개미 한 마리보다 덜 중요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지" 그런 다음아버지는 요점을 더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나는 이게 포옹하자는 신호일지 모른다고, 아버지가 "농담이야, 넌중요해!"라고 말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좋아. 이제 이게.… 전체 시간의 길이라고 생각해보자." 아버지는 자기 가슴 앞에 펼쳐진 눈에 보이지 않는 광대한 시간의 선을 손으로 더듬었다. "여기서 인간이 존재한 기간은 - P55

요만큼이야!" ‘요만큼‘이라는 말을 할 때 아버지는 연극적인 동작으로 꼬집듯이 손가락들을 모았다. "게다가 우리는 아마 곧 사라지게 될 거야. 그러니까 만약 지구 저 멀리서 떨어져서 본다면…" 여기서 아버지는 혀를 차서 끽끽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 우리는정말 아무것도 아닌 거지. 거기엔 행성들이 있고, 그 너머엔 더 많은 태양계가 있어...."
아버지가 정확히 저 단어들을 사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거의 20년 뒤 천문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이 "우리는 점 위의점 위의 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을 때 나는 아버지의 단언과똑같은 말을 들었다고 느꼈다. - P56

일곱 살의 내게 그날 폐부에서 회오리치던 차가운 느낌을 말로 옮길 수 있는 언어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건 뭐 하러 해?
학교엔 왜 가? 뭐 하러 종이에 풀로 마카로니를 붙이는 건데?" 어쨌든 유년기 동안 나는 그 답을 알아내기 위해 조용히 아버지의 행동을 관찰했다.
아버지는 활기 넘치는 사람이다. 수전증이 있는 생화학자로,
모든 생명에, 심장박동과 번개에, 심지어 생각 자체에도 동력을 공급하는, 전기를 나르는 입자인 이온을 연구한다. 아버지는 안전띠도 매지 않고, 발신인 주소도 쓰지 않고, 수영이 금지된 곳에서 수영을 한다. 하루는 퇴근하고 집에 와서는 이제 소매와는 끝이라고선언했다. 소매 때문에 시험관을 넘어뜨린 일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곧바로 가위를 들고 옷장으로 달려갔고, 이후 몇 년 동안 ‘학계의 해적‘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옷차림으로 출근했다. - P56

상대방의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봐주는 사람들에 목말라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넌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은 아버지의 모든 걸음, 베어 무는모든 것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
아버지는 수년 동안 오토바이를 몰고, 엄청난 양의 맥주를 마시고,
물에 들어가는 게 가능할 때마다 큰 배로 풍덩 수면을 치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게걸스러운 자신의 쾌락주의에 한계를 설정하는 자기만의 도덕률을 세우고 또 지키고자 자신에게 단 하나의 거짓말만을 허용했다. 그 도덕률은 "다른 사람들도중요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이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라"는 것이었다. - P57

만약 당신이 분류학자라면 이게 얼마나 심란한 생각일지 상상해보라. 당신이 손에 들고 있는 대상이 알고 보니 퍼즐 조각도 실마리도 아닌 무작위성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들은 신성한 텍스트의 페이지도, 성스러운 암호를 이루는 상징도,
신성한 사다리의 가름대도 아니었다. 움직이고 있는 혼돈의 모습을 담은 스냅사진에 불과했다.  - P67

 자연을 더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다윈이 관찰한 대로 종들 사이의 영역은 불확실한 회색 지대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었고, 내키지 않았지만 그 자신도 회색지대를 알아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는 이렇게 썼다. "나는 아이에게 꼬리를 붙들려 카펫 위로 ‘끌려가는 고양이처럼 우아하게 진화론자들의 진영으로 넘어갔다!"
아, 이 문장 때문에 내가 그를 얼마나 흠모하게 되었던가. 이문장을 본 나는 두 팔로 그를 안고 볼에 입을 맞춰주고 싶었다. 정신을 아득하게 하는 진화의 진실을 받아들이고 계속 전진할 길을찾은 그가 참 용감하다고, 아주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물론 이는 그를 계속 나의 안내자로 삼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또한 바늘을 칼처럼 휘두르는 그가 뻔뻔스럽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성의 자리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또한 부인이 반드시 굴욕으로 이어지는 길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어쩌면, 혹시 어쩌면,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언젠가희미한 빛을 발하는 삶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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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는 2003년 2월 18일, 지하철 화재사고로 시작되었다. 불이 난시각은 오전 아홉시 오십삼분, 한 시간 동안 열두 량의 객차가 불타고백구십이 명이 사망했다.
2003년 3월 12일, 세계보건기구는 비정형 폐렴 경계조치를 내리고같은 달 17일, 이 병을 사스(SARS)라 명명했다.
2003년 3월 20일, 미·영 연합군이 이라크 공격을 개시했다.
2003년 3월 22일, 세계보건기구는 중국 일부와 홍콩, 베트남을 위험지역으로 지정했다.
2003년 3월 25일, 중국 간쑤성 허시회랑을 타고 거대한 모래폭풍이 일었다.
2003년 4월 1일, 홍콩 배우 리가 투신자살했다.
2003년 4월 2일, 한국 국회에서 이라크 파병 동의안이 가결되었다.
2003년 5월 8일, 전 세계 사스 감염자가 칠천여 명 사망자가 오백명을 넘어섰다.
2003년 5월 14일, 서희부대 제1진 2제대 오백 명이 대한항공 전세기를 타고 이라크로 출국했다.
2003년 6월 2일, 아시아 여덟 개 사찰에서 리의 천도재가 열렸다.
2003년 6월 13일, 이라크 나시리아에서 97km/h의 모래폭풍이 일었다.
2003년 6월 13일, 나시리아 알바라디병원 보수 공사를 나갔던 서희부대 제1진 2제대 야공중대원 열두 명과 그들의 경계 임무를 맡았던 특전사 세 명이 주둔지로 돌아오지 않았다. p84 ----[너무 아름다운 꿈]


2013년 4월 1일, 나는 황토고원으로 갔다.
고원의 허공 위에 꽃이 피었다고 했다.
꽃이 공중에 피다니, 그것은 비유입니까. 물었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 짐을 꾸린 것은 꽃을 따기 위해 열기구를 띄운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황토고원은 서쪽에 있었다. 나는 편서풍을 거슬러서 갔다.

----[너무 아름다운 꿈] - P83

황하 하구에서 한참을 거슬러올라 해발 천육백 미터의 황토고원에자리잡은 곳. 대륙 서쪽의 란저우는 전염병으로 술렁이는 베이징이나서울과는 다르게 노란 미세먼지막 속에서 따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의외로 공항에서의 검역도 철저하지 않았다. 21세기 전염체는 비행기바이러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이번 전염병은 지역성이 강했다. 발병지역은 황사 피해지역과 일치했다. 중국 동부와 한국의 발병자가 많았고 그다음이 일본, 북아메리카 서부 순이었다. 이상한 것은,
중국 서북부와 내몽고 등 황사 발원지역에서는 오히려 발병자가 적다는 것이었다. 모래에 익숙한 지역에서 항체가 형성된 것이 아니냐는얘기가 있었지만 어느 단계에서 유전자변이를 일으켜 어느 단계에서변종 바이러스가 되었는지 사람들은 맥을 잡지 못했다. 발병자 분포도가 지역성을 띤다고 해도 접촉 전염인 결막염과 호흡기 전염인 폐렴이 주 증상이었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무역풍을 탄 사하라 더스트가 도달하는 아프리카 대륙 서해안에는 큰 도시가 없었지만 편서풍을 탄 아시아 더스트가 도달하는 아시아 대륙 연안에는 인구 천만이 밀집한 대도시가 여럿이었다. 때문에 세계보건기구는 판데믹 선언을 고려중이었고, 사람들은 2013년에 출현한 신종 바이러스를 ‘아시아 더스트 바이러스‘라고 불렀다. - P91

허시회랑은 란저우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둔황까지 이어지는 긴 길이었다. 한국 발음으로는 하서회랑. 하서는 황하 서쪽을, 회랑回廊은긴 복도형 구조를 뜻했다. 북쪽의 고비사막과 남쪽의 치롄산맥에 막혀 자연스럽게 좁고 긴 지형이 형성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하서회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사막과 산맥 사이를 빠져나가는 길고 구불구불한 생물이 떠올랐다. 낮에는 태양빛을 흡수하고 어스름이 되면검붉게 변하면서 조금씩 서쪽으로 기어가는 생물, 해가 지거나 폭풍이 일면 그 통로엔 어둠이 들어찰 것이다. 끝없이 이어진 흙벽과 칠흑같은 통로, 리라면 그런 곳을 찾았을 것이다.
- P94

모두가 사막색 군복을 입고 있어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공식적인행사가 끝나자 가족들과 점심을 먹는 시간이었다. 다들 야산 공원 여기저기에 둘러앉아 마련해온 음식을 펼쳤다. 돗자리에 앉은 동생은다른 것은 안 먹고 계속 참외만 먹었다. 한 달 동안 상무대에서 생존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사막에서 길을 잃었을 때 살아남는 법, 동티모르 파병 사고 사례와 총기 사고에 대한 교육, 그리고 전염병 예방 수칙, 서희부대의 주둔지는 이라크 나시리아였다. 한 제대의 파병기간은 육 개월, 그들은 2003년 10월에는 만 달러와 함께 돌아오게 되어있었다. 밥을 다 먹고 나자 동생은 내 휴대폰을 빌려 한두 군데 전화를 했다. 둘러보니 사막색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짙푸른 나무 밑에 쪼그려앉아서 다들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나는 삼 년이 지나고칠 년이 지난 뒤에도 계속 그 풍경을 생각했다. 그날 매산리 나무 그늘 밑에서 참외를 먹고 전화를 하던 수많은 군인들 중에 모래폭풍과함께 사라져버린 열다섯 명은 누구누구였을까. 십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열다섯 명은 그날 어디어디쯤에서 사열대를 향해 서 있었을까. - P99

‘뜨거워, 아빠‘ 불이 난 지하철에 갇힌 사람들한테는 휴대폰이 있었다. 그들의 몸은 밖으로 나올 수 없었지만 그들의 마지막 말은 밖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좁고 긴 지하통로에 갇힌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한 말은 숨이 막힌다는 말과 뜨겁다는 말이었다. 어머니한테 아이둘을 맡기고 볼일을 보러 가던 여자는 마지막 문자를 어머니한테 보냈다. ‘어머니, 애들 좀 잘 봐주세요. 지하철에 불이 났는데 아무래도죽지 싶어요.‘ 불이 난 시간은 오전 아홉시 오십삼분, 갇힌 사람들한테서 가장 많은 전화가 걸려온 건 열시 삼십분에서 사십분 사이였다.
열시 오십구분 사십삼초 이후로는 더는 어떠한 전화도 밖으로 걸려오지 않았다. - P100

눈병에 걸린 사람들은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고 했다. 어렸을때 돋보기로 들여다보던 눈 결정체 같기도 하고 햇빛을 머금은 먼지입자 같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것을 꽃 같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붉게 충혈된 눈을 계속해서 비볐다. 가려움증은 실제로는 바이러스가 각막에 안착해 생기는 증상이었지만 사람들은 마치 믿지 못할 광경을 목격했다는 듯이 눈을 비비고 또 비볐다. 처음에는 가려움증과이물감을 호소하다가 눈곱과 눈물을 흘렸고 나중에는 결막에 종창이생기면서 출혈을 일으켰다. 감염자들이 꽃 얘기를 하는 것은 이번 바이러스가 형태학적으로 꽃 모양이어서라는 얘기가 있었지만 감염자들이 정말로 바이러스의 실체를 목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결막염 출혈을 일으킨 환자들은 뒤이어 고열과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다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사망자들의 호흡기 하부인 폐에서도 바이러스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사인은 바이러스성 폐렴 합병증으로 발표되었다. 2013년에 출현한 바이러스는 코나 목 등 사람의 호흡기 상기도에서 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플루엔자바이러스와 달랐고, 결막에서 증식하는 바이러스가 폐에서도 증식한다는 점에서 아폴로눈병을 일으킨 엔테로바이러스와도 달랐다. 백신은 없었다.  - P101

전염병과 황사의 관계에 대해 쥔은 오래 생각해온 듯했다. 내 짐작이 맞다면 쥔은 아시아 더스트 바이러스가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기전, 즉 순수한 조류인플루엔자였을 때 황사 입자와 어떻게 결합했는지를 밝히기 위해 몇 가지 가설을 세워놓았을 것이다. 그 가설이 내 짐작과 다르기를 바라면서 나는 다시 탁상달력을 집어들었다. 2013년 4월달력에 있는 사진은 리가 2000년 홍콩컨벤션센터에서 공연을 할 때의 사진이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였지만 리는 여전히 강건한 몸에 소년 같은 얼굴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2000년은 리가 은퇴를 했다가 복귀한 해였다. 삼 년 뒤에 죽었으므로 마지막 재기인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때의 사진은 어딘지 아슬아슬했다. 리의 자살 소식을 듣고서야 아름답던 리가 어디선가 조금씩 나이를 먹어간 걸 깨달았다는 미안함, 그 미안함을 떠올리게 하는 사진이기도 했다.
리는 자주 무너졌다. 일을 할 때는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것처럼 완벽했지만 무너질 때는 모든 것을 놓았다. 리는 어떤 배우보다도 황색 언론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그때마다 사생활과 스캔들이부풀려졌다. 리는 은둔과 은퇴를 반복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올 때면리는 늘 최고였고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리에 열광했다. 리를 수식하는 대표어였던 슬프고 몽환적인 눈빛은 리가 무너지고 일어서기를 반 - P104

복할 때마다 철저하게 리의 것이 되는 것 같았다. 안착하지 못하는 결된 영혼, 잡히지 않는 생의 허무를 표현하려는 감독들은 누구나 리를 주인공으로 정하고 시나리오를 썼다. 사람들은 리한테 깊게 배어있는 특유의 분위기를 유년 시절 때문이라고 했다. 리는 유복하게 자랐지만 어머니와 단둘이 있었던 시간이 생애 며칠도 안 될 만큼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가족얘기가 나오자 리는 말했다. ‘어려서는 딱 십 분만이라도 어머니와 마주 앉아서,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나에게 어머니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 그 사실뿐입니다.‘ 리가 연기한 인물들은 그런 리의 삶을 닮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채워지지 않는 커다란 공동空洞 하나씩을 안고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파괴하다가 비눗방울처럼 터져버렸다. - P105

리는 이미 협곡의 절벽 위에 서 있었다. 좁고 긴 통로를 빠져나와절벽 위에 선 것인지, 절벽에서 내려와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래폭풍의 전조인지 대기는 탁했다. 누군가 골짜기에 혼자 앉아 우는 것처럼 바람 소리가 점점 휘어졌다. 리는 고대의 조각상처럼 몸에 얇은 대의 하나만을 걸친 채 바람을 맞고 서있었다. 얇은 천이 신체에 흡착돼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났다. 리가 강박적으로 가꾸어온 몸이었다. 한 발만 방심해도 그대로 무너질것 같은 아슬아슬한 몸. 스스로에게 혹독하지 않고는 더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마지막 단계에 리가 서 있었다. 몸의 양감과 흡착된 옷이길항을 일으켜 리의 신체는 숨막힐 듯한 긴장감을 뿜었다. 카메라는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그렇게 리를 비추었다. 우리도 전혀 움직이지않고 리를 마주 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절벽 위에 선 리한테서그동안 리를 통과해간 모든 인물들을 보고 있었다. 리는 길 위에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리는 사막 너머를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빙글빙글돌다가 주저앉는 리, 짙은 화장을 한 리, 사랑에 답하지 않는 리, 이글거리는 화염 저편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리, 환호 속에 갇힌 리, 몸부림치듯이 키스하는 리, 오도 가도 못 하는 리, 자신이 파괴한 것을 두눈으로 보아버린 리, 두려움에 떠는 리,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는 리엄마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는 리, 긴 야자수 길을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리, 뒤돌아보지 않는 리. - P112

실제 상황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몇 초 뒤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은 무엇인가가 붙어 있는 거대한 절벽이었다. 절벽에 따개비처럼 드문드문 붙어 있는 것은 검은 목관이었다. 사람 몸 하나 크기의 검은나무관이 선반처럼 절벽에 박혀 있었다. 우리는 숨을 멈추고 리가 남긴 세계를 바라보았다. 절벽을 내리달리던 화면은 이어서 홍콩 컨벤션센터로 넘어갔다. 열기 속에서 리의 노래가 끝나가고 있었다. 긴장 속에서 바람 소리만 듣다가 익숙한 곡이 흘러나오자 좌석 여기저기서울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리는 환한 조명 아래에 서 있었다. 환호속에 둘러싸인 리가 땀에 젖은 채 웃고 있었다. 리는 팬들에게 인사말을 하는 중이었다. 사막 너머를 바라보던 눈빛으로 관중 너머를 바라보던 리가 인사말 끝에 낮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메이멍, 나는 침을 삼켰다. 美인지 인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리가 환호 속에서 마무리짓는 것은 꿈 얘기였다. 우리는 다 같이 리의 마지막 말을들었다.
꿈속에서는 무엇을 해도 진실이 아니야. 그 꿈을 깨야지. 꿈을 깰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뭔지 알아? 바로 뛰어내리는 거야.‘
영화의 제목은 ‘공중화‘였다. - P114

눈에 병이 생기면 허공에서 꽃이 보인다. 그것은 아시아 더스트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의 증상이었다. 쥔과 나는 동시에 숨을 뱉었다. 경전에서는 분명히 비유라고 말하고 있었다. 비유로 그쳐야 할 일이 2013년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비유라고요? 뭐에 대한 비유라는 거죠?"
"어디 봅시다. 이건・・・・・・ 무명에 대한 설명 다음에 오는 구절이네요. 무명에 대한 비유인 거죠."
모니터로 몸을 숙였던 남자가 다시 상체를 일으켰다.
"무명은 고통이 시작되는 첫번째 조건입니다. 모든 고통은 무명 때문에 일어나죠. 허공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명 때문에 보이는 것이죠." - P115

"열기구야."
쥔이 낮게 탄성을 뱉었다. 열기구는 점점 높이 떠오르며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이동해왔다. 바람을 탄 열기구는 비닐봉지처럼 가뿐하게날아오르고 있었다. 쥔과 나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열기구는 모래구름 속에 숨는가 싶더니 다시 나타나고, 다시 나타났다 숨으면서 바람에 실려 올라갔다. 그때마다 쉼 없이 반짝거렸다.
우리는 넋을 잃은 채로 열기구를 좇아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열기구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대로 계속 바람을 타면 열기구는 곧 좁고 긴 통로로 들어설 것이다. 그곳은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 회랑, 기약도 없이 긴 길이었다. 부딪쳤다 다시 솟구치며 흙벽을빠져나가면 마침내는 깎아지른 절벽일 것이다. 절벽은 발 없는 주검들을 위한 곳이었다. 한때는 굴곡이 선명했던 존재들에게 자기 몸만큼의 공간이 주어진 곳, 어둠도 폭풍도 태양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곳. 절벽 앞에 펼쳐진 것은 망망대해 같은 끝없는 사막이었다.
우리는 풍선을 놓친 어린아이처럼 발을 구르며 허공을 향해 하염없이 손을 흔들었다. - P119

형제자매들은 모두 떠났다.
동요의 내용대로라면 목요일의 아이는 길 위에 있을 것이고 일요일의 아이는 친구와 있을 것이고 토요일의 아이는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소녀는 햇빛이 원을 그린 소파에 혼자 앉아 떠나간 형제자매들을걱정한다. 얼굴이 예쁜 월요일의 아이가 나쁜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걱정하고 토요일의 아이가 생활비를 버느라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걱정한다. 사랑스러운 금요일의 아이가 마음을 다치는 건 아닌지, 빛이나는 화요일의 아이가 시기를 받는 건 아닌지, 혹 그들이 모두 돌아오지 않는 건 아닌지 소녀가 그들을 걱정하는 건 수요일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수요일의 아이는 근심이 많다.

---- [수요일의 아이] - P123

지금은 사무소의 임시 경리직이지만 소녀는 언젠가는 시설관리공단에 정규직으로 들어가 가로등관리팀에서 일하는 것이 꿈이다. 소녀는 얼마 전에 공단에서 가로등원격관리제어시스템을 들여놓은 것도알고 있다. 마을의 가로등을 관리한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열심히 일을 해 가로등관리팀의 팀장이 되면 소녀는 가로등의 조도를 대폭 개선해 밤거리를 좀더 어둡게 만들고 가로등 옆에는 취객을 위한오바이트 통도 만들 생각이다. 한밤이나 새벽 거리에 홀로 서서 속에있는 것을 끌어올리는 건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행위다. 그러려면 가로등이든 가로수든 전봇대는, 뭔가 지탱할 게 필요하다.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명언을 코팅해 붙이듯이 소녀는 가로등마다 문구를 붙일 것이다. 저를 잡고 토하세요.
- P129

며칠 전부터 골목에 다른 공기가 떠돈다. 한 시간에 5. 4회꼴로 일어나는 지진의 진동도 아니고 천둥을 예고하는 양이온도 아니다. 뭔가 엄청난 일의 전조를 품고 있는,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지만 저절로 알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공기다. 불행하게도 소녀는 동네를 떠도는그 공기를 모두 느낄 수 있다.
마을은 가시거리가 이 킬로미터 이하인 무거운 연무가 한 달 이상걷히지 않고 있다. 공기 중엔 미세먼지와 스모그가 가득했고 바람은전혀 불지 않았다. 구청에서는 대기오염도와 그에 따른 행동요령을하루에 두 번 일괄문자로 전송했다. 뉴스에서는 오존중대경보가 내려진 지역과 호흡기 질환 사망자 수를 시간별로 내보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진 지 오래였다. 이런 날 호흡기 환자가 외출을 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 P132

뛰어가다가 바닥에 거꾸로 세워져 있던 못을 정통으로 밟았다. 못이발바닥 중앙을 뚫고 들어오는 순간 소녀는 코가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소녀는 태어나서 한 번도 코가 시원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순간꿈을 꾸는 거라고 생각했다. 소녀의 몸은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번에 뚫리는 느낌. 온 존재가 비틀리며 하늘과 땅의비밀을 알아버린 느낌. 비명과 함께 나동그라지며 착지한 세상은 이미 다른 세상이었다.
못은 콧물이 막고 있던 통로 대신 새로운 통로를 열었다. 그러나 그건 못을 밟고 나서 갑자기 열린 게 아니었다.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것이 못을 계기로 터져나왔다고 보는 것이 정확했다.  - P134

둘은 입을 벌리고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셨다. 하나, 둘,셋. 둘은 동시에 발판을 향해 뛰어내렸다. 소녀는 눈을 감았다. 소녀는 벽과 벽 사이의 좁은 골목을 달리고 있었다. 혈관 같은 골목을 따라 올라가자 콧물은 없고 뇌수만 있는 뇌가 펼쳐졌다. 사람의 가장 순수한 기억이 저장된다는 대뇌 깊은 곳. 그곳은 코가 뚫린 채로 살 수도 있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소녀는 탄성을 질렀다. 착지와 동시에, 혈관에 가득 찬 콧물들이 소녀와 소년의 살을 뚫고 뿜어져나왔다. - P153

장마철이었으니 그날 저녁도 비가 내렸을 것이다.
스물세 살의 임신부는 우산을 받쳐들고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다가 반값으로 정리중인 생선차로 달려가 뱃고등어 한 손을 샀다. 어쩌면 비는 멎고 해가 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시간, 비린 봉지를 들고돌아서던 임신부는 허공에서 반짝하고 사라지는 빛 하나를 목격했다.
광활한 하늘에 시선을 빼앗긴 임신부의 발목으로 또르륵, 물방울 하나가 흘러내렸다. 눈 풀린 생선과 하늘을 뒤덮은 물비린내. 떠나버린생선차와 고요한 담벼락.
내 짐작 속 정황들이다. 그날의 바깥 풍경은 이랬을 것이라고 나는오랫동안 뱃고등어와 비 내리는 골목과 흙탕물이 튄 엄마의 흰 양말을 상상해왔다. 이 속에서 분명한 것은 없다. 

----[눈을 감고 기다리렴]  - P157

졸음은 눈썹과 눈썹 사이로 왔다. 할머니는 내 이마에 굴이 있기때문이라고 했다. 굴이 있어서 그 안으로 햇빛도 들어오고 잠도 들어오는 거란다. 아침에 신발을 신다가 끄덕끄덕 졸고 있으면 할머니는손으로 내 이마부터 쓸어내리며 잠이야 가라, 어여 나가라, 주문을읊었다.
퇴근길에 청주를 샀다. 할머니 기일이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이마트 장바구니를 든 중년 여자가다가왔다. 상단전이 열리셨군요.  - P158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외로울 때와 몸이 아플 때를 조심하라고. 세상의 모든 사기는 마음의 병과 몸의 병이 만든 틈새로 꿀처럼 스며든다고 했다. 할머니는 첫 월급을 받으면 성형외과에 가서 미간의 자국부터 없애라고 했다. 우리 은영인 이마가 움푹해서 허황된 무리들이늘 탐을 낼지 모른다. 이 자국을 없애야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평범하게 잘 살지. - P171

해가 날 듯하다가 오후부터 잔비가 내렸다. 엄마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절을 시작했다. 지장전 불단에는 딸랑이와 요구르트와 아기덧신이 놓였다.
부모 인연 지중하여 업연 따라 태에 드나 세상 인연 부족하여 빛을보지 못한 영가, 아미타불 법력으로 태안지장 원력으로 법당 열어 부릅니다 마음 다해 부릅니다.
법당 바닥에서 한여름의 습한 냉기가 올라왔다. 천도문이 이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넓은 어미 가슴 활짝 열고 지극참회 발원하면 못 이룰 일 무엇일까. 다시 한번 돌아보아 참회발원 하옵소서 아이들아 미안하다 정말정말 미안하다.
엄마는 좌복 위에 엎드려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나는고개를 돌려 뜰에 앉은 동자상을 내다봤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삼도의 강이 있어 빛을 보지 못하고 죽어간 핏덩이들이 모래밭에서 고사리손을 모아 탑을 쌓는다고 했다. 돌 하나를 들고 어미를 생각하고,또 돌 하나를 들어 아비를 생각하며 탑을 쌓는다.  - P184

어쩌면 영이는 지영이나 희영이 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애로 자라서나와 같은 시기에 초경을 하고 취직을 하고 사랑을 하면서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놓았던 시간대와는 또다른 해가 지고 노을이 붉은 수많은 저녁을 가졌을 것이다. 영이가 삼도의 강을 건넜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모든 것을 기억해낸 열다섯 살이후로 나는 한순간도 영이와 떨어진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교실 사물함에 넣어놓은 체육복 속에도, 수능 보러 가던 날의 필통 속에도,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오다 올려다본 이십대의 숱한 골목 끝에도 항상영이가 있었다. 그것은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영이는 그냥 드리워져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이 영이가 떠도는 구만리장천의 어느 한지점이라면, 광활한 공간에서 파동으로 존재할 영이에게 나는 모든채널을 열어 말할 것이다. 중력이 지배하는 어떤 행성에도 내려앉지말고 가라고. - P186

눈썹과 눈썹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려는 찰나 버스가 길을 돌아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엄마한테 물어야 할 게 하나 있었다. 버스가 앞에 도착해 문이 열리기 전에 물을 수 있을까. 버스 쪽으로 걸어가는엄마의 등 위로 햇빛이 자글거렸다. 빛 때문인지 엄마 등이 신기루처럼 멀어져갔다. 나는 그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엄마는 나 가졌을 때 뭘 제일 먹고 싶었어? 엄마 나 낳을 때 많이아팠어? 엄마 혹시나 가졌을 때・・・・・・ 밤나무골에서 자장가 부른 적있지 않았어?
이마 위로 햇빛이 쏟아지자마자 나는 개망초 꽃더미에 발이 걸려그 자리에 푹 엎어지고 말았다. 푸른 망초 대 사이로 알록달록한 실뱀한 마리가 빠르게 지나갔다. 그 빛깔이 너무 고와서 나는 엄마 몰래가슴을 쳤다. - P187

협곡의 여름은 찌는 듯했다.
벌레들이 찌르듯이 울었다. 나는 누나를 불렀다. 물가의 돌에 쪼그려앉은 누나의 치마 끝이 계곡물에 조금씩 젖어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누나, 치마가 젖어, 일어나 아니면 누나, 치마가 젖어, 끝을 당겨서 종아리 뒤로 넣어. 나는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숲은 수천 종의생물이 들끓는 소리로 꽉 차 있었다. 내 목소리는 금세 묻혀버렸다. 늘어진 이끼들이 발목을 감았다.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것 같은 계곡물소리, 풀 비빈 손으로 누군가 입을 틀어막는 것처럼 습한 냄새가 차올랐다. 숨이 막히고 귀가 따가웠다. 나는 숲에 갇혔다는 걸 깨달았다.
갇힌 걸 안 순간 누나가 일어났다. 치마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누나가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강한 여름볕이 누나의 정수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숲이 모든 작동을 멈췄다. 정적. 다시 여름벌레들이 일제히 끓어올랐을 때 누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전곡숲] - P191

실종자 가족들은 간혹 우리에게 무언가를 묻기도 했지만 우리가 썩어가는 사람들을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사체 하나가 던져지면 숲은 노골적으로 신호를 보냈다. 냄새, 한번 맡은 뒤로는 절대 잊을 수 없고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냄새. 풀냄새같은 것. 살냄새 같은 것. 똥냄새 같은 것. 그런 냄새들이 한데 뒤섞여숲냄새라고밖에는 말할 방법이 없는 어떤 향에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냄새를 신호탄으로 숲은 다른 리듬으로 움직였다. 땅 밑에서부터 하늘을 가린 우듬지까지, 숲은 하나의 아가리가 되어 사체를 귀신같이 해치웠다. 숲이 우적거릴 때마다 절벽의 절리들이 관자놀이처럼움직였다. 일 년의 반이 한여름인 숲은 배가 부른 곤충들로 잉잉거렸다. 곤충들은 어디에서나 교미했고 숲의 모든 틈을 비집고 들어가 끈질기게 알을 깠다. - P195

"토막을 내버릴 거야." 담임한테 뺨을 맞고 온 날 누나가 샌드위치패널 벽에 손톱을 짓이기며 말했다. 누나가 그 말을 한 몇 주 뒤에 실제로 숲에서는 토막 사체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숲에 제 발로죽으러 들어가는 사람들 외에 누군가를 죽인 뒤에 숨기러 오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마을에 미세한 동요를 던져주었다. 사라지고 찾는 일 외에 숲에서 다른 것도 할 수 있다는 걸 그전에는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육상부 하계합숙을 마치고 왔을 때 숲은 여름의 정중앙을 통과하고 있었다. 검푸르게 독이 오른 잎사귀들로 숲은 무겁고 습했다. 응달의 나무를 타고 오른 이끼들이 가지 끝까지 발아했다. 누나는 계곡가에 앉아 하릴없이 리코더를 불다 멈추다 했다. 분무기를 뿌린 것처럼숲은 증기로 빽빽했다.  - P198

그들은 이십만 년 전인 중부 홍적세 후기에 있었다.
한 손에는 불을 한 손에는 돌을 들었다. 어깨는 구부정하고 턱은앞으로 튀어나왔다. 낮은 이마에 광대뼈가 도드라졌고 몸에는 짐승가죽을 둘렀다. 몸집은 지금보다 훨씬 작았지만 주먹도끼로 멧돼지의급소를 단숨에 찌를 수 있는 다부진 근육이 있었다. 눈빛은 예리한 생기로 번뜩였다.
덥수룩한 머리는 가발로, 짐승 가죽은 호피무늬섬유로 대체할 수있었다. 어깨는 구부정하게 들어올리고 턱은 내밀고 걸어다니면 되었다. 다만 작은 몸집과 눈빛만은 재현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축제였으므로 야생동물과의 대치나 굶주림으로 날이 선 모습보다는 밝게 웃는편이 좋았다. 구석기축제에 투입될 구석기인의 모습이었다. 전역을하고 돌아오자 마을은 축제 준비로 들썩이고 있었다. - P209

눈을 뜬 것은 빛 때문이었다. 숲의 우듬지층이 조용히 일렁이면서빛무리가 흩어져내렸다. 숲이 반짝이는 것은 바람 때문이었다. 숲 위로 바람이 불어왔다. 후텁지근하면서도 졸린 바람. 나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콧등에 걸려 있다. 선풍기 바람은 누나의 콧등을 지나 나를 향해 불어오는 중이었다. 바람은 마늘 절구와 돌조각을 지났다. 누나가 손질해놓은 간이탁자를 지나고, 매미가 울던 계곡가의 누나, 리코더를 털어서 침을 빼던 누나,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곳과 내가 가질 수 없는 것 들을 훑으면서 바람은 천천히, 너무도 느리게 돌아오고 있었다.
이윽고 바람이 나에게 당도하고 숲이 모든 작동을 멈추었을 때, 나는 퇴적 알갱이들이 골짜기 위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현무암 파편과 잘고 흰 모래 들이, 적갈색 점토 입자들이 협곡을 채우며 꽃씨처럼 날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언제까지고 숲에 누워서 반짝이며 명멸하는 그것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 P220

미숙이가 집을 나가던 날은 아침부터 강에서 습한 바람이 올라왔다. 창문만 열어도 콧속과 겨드랑이가 금세 축축해지는 날이 며칠째이어졌다. 그날 별다른 징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대륙고기압의 영향으로 중부 내륙지방에 안개가 짙게 끼겠다는 예보가 있었고 점심즈음 미숙이가 자두씨를 삼켜 소금물을 타주고 토하도록 도왔을 뿐이었다. 한여름의 안개도 장폐색을 일으킬 수 있는 과일씨도, 위험하지만 살다보면 만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오후가 지나면서 눅눅한 구름이 대기를 눌러왔다. 미숙이가 일 년중 제일 못 견뎌하는 장마 뒤끝의 후텁지근한 날씨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만 되면 미숙이는 생기를 잃고 비루먹은 것처럼 힘들어했다.

----[간밤 강가] - P223

수컷들을 보내고 난 밤, 미숙이는 하늘을 향해 오래 울었다. 발정기가 되면 미숙이의 하울링은 더 잦아졌다. 서늘한 강가에서 땅을 파듯우는 나이든 암캐의 목소리는 감당하기에 쉬운 소리가 아니었다. 좀체 짖는 법이 없는 미숙이지만 한번 울음을 시작하면 그 소리는 사람마음을 후벼놓는 데가 있었다. 그런 밤이면 나도 같이 앓았다. 우우-우우 땅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듯한 굵고 짙은 울부짖음. 나는 미숙이의 소리를 들으면서 짖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울부짖는다는 말이어떤 것인지 비로소 알았다.
설원을 달리지 못해서 답답한 것일까, 새끼를 가질 수 없어서 저렇게 허허로운 것일까, 이리저리 짐작해보기만 할 뿐 미숙이가 울부짖는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사람이고 미숙이는 개였다. 나보다생의 선을 더 달린, 다른 종이고 다른 성인 미숙이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 P235

문에는 아직 상품코드와 용량과 소비전력이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다. 내외부 재질은 고급 엠보싱이라고 했다. 미려하고 잡기 편한손잡이, 편리한 이동바퀴, 신개발 자동닫힘 도어. 지금은 유명 보일러 회사와 합병된 한 중소기업에서 한때는 유력상품으로 생산했던 그것.
화분에 물을 주듯, 때맞춰 환기를 시키듯, 영희는 일주일에 한 번 그안에 냉기를 불어넣는다. 신발과 노트와 뼛가루가 함께 살아 있는 곳,
영희는 아직 그 안에 살고 있다.

----[울고 간다] - P255

그렇지, 병원 문을 밀고 나오면서 영희는 왼쪽 주먹을 말아쥐고 손목을 안쪽으로 구십 도 가까이 꺾는다. 어깨를 구부정하게 말고는 손등뼈로 가슴팍을 세 번 정도 두드린다. 정확히 십이 개월 하고도이 일 전부터 생긴 버릇이다.
병원 아래층의 보습학원에서 몰려나온 아이들이 옆 문구점으로 우르르 들어간다. 영희는 건물 입구에 서서 제자리뛰기를 두 번 정도 한다. 가슴에서 콩 굴러가는 소리가 난다. 두번째 착지를 하고 나자 그소리는 귓바퀴에 와서 멈춘다. 이 또한 일 년 하고도 이 일 전부터 들어온 소리다. - P256

"이거 ‘장‘에다 좀 넣어라."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장‘이라는 단 한 음절, 이용 받침의 울림과동시에 임모씨의 퀭한 동공이 영희의 눈에 멈추었다 거두어졌다. 순간 영희는 쇳덩어리에 깔린 것처럼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냉장의 진동음이 어마어마한 망치가 되어 영희의 뒤통수를치고 있었다. 임모씨가 떠나도 냉장고를 결코 버릴 수 없음을 알아버린 순간이었다. 명령이든 애원이든 냉장고를 버리지 말라는 말을 직접 했으면 그렇게 아찔하진 않을 것이었다. 영희는 진심으로 임모씨가 얄미웠다. 그날 이후로 영희도 임모씨도 냉장고에 관한 한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결국 임모씨는 자신처럼 생겨먹은 사람은 어떻게살아야 하는지, 자신처럼 생겨먹은 영희에게 어떤 기타정보도 남기지않고 죽었다. 영희는 국산 금잔디를 입히는 대신 임모씨의 발가락뼈하나까지 모두 불태웠다. 마트에서 은나노 밀폐용기를 산 것은 화장
‘터에서 돌아온 다음날이었다. 그곳에 임모씨의 유골을 쏟아붓는 동안영희는 천식 환자처럼 기침을 했다. 통 위에는 임모씨가 평소 아끼던자색 보자기를 씌웠다. 영희는 그 통을 냉장고에 넣은 채 냉장고 하나만을 가지고 방을 옮겼다. - P270

며칠 더 골똘히 생각하면 냉장고를 어떻게 할지 결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외출은 못 할 것이다. 열쇠집늙은이가 정말 귀신이 되어 쏘아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면 남자한테 냉장고를 맡겨놓고 정말 먼 데로 가버릴까. 영희는 머리를 형클었다. 이런 일생일대의 결정을 해야 하는 때가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이제는 더 미룰 기한도 없었다. 이대로 한두 시간 지나가면 남자는 서서히 곤란한 표정으로 바뀔 것이다.
남자가 공구를 들고 욕실로 들어간다. 영희는 살금살금 걸어가 냉장고 전원을 연결한다. 820W/H의 소비전력이 갑자기 큰 진동음을몰고 온다. 임모씨도 철수도 진동음과 함께 영원한 시간을 얻는 순간이다. 영희는 왼쪽 주먹을 말아쥐고 손목을 구십 도로 꺾는다. 손등뼈로 냉장고 문을 두드려본 뒤 영희는 냉장고 문을 연다. 그리고 착한이불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접어 그 안으로 구깃구깃 들어간다. 대낮인데도 냉장롱 불빛은 진한 주홍빛이다.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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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엔 사건 사고가 많았다.
인천발 멜버른행 여객기가 남태평양 상공에서 실종되었고 무기를들고 탈영한 병사들이 곳곳으로 숨어들었다. 해안에서는 난류를 타고온 밍크고래가 연이어 그물에 걸려나왔다. 아침에 지하계단을 내려가사무실 문을 열면 날개 달린 개미 수천 마리가 바닥에 엎드려 퍼덕거리고 있었다. 하루 업무는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인 개미 더미를 쓰레기봉투에 털어넣는 일로 시작되었다.
전임자의 책상은 그대로였다. 보던 문서는 서너 쪽이 넘어간 채로펼쳐져 있었고 다이어리의 페이지를 가른 플러스펜 뚜껑이 열려 있었다. 그만두었다기보다 잠깐 화장실에 간 사람의 책상에 가까웠다.
전임자의 것일 휴대폰 배터리는 충전이 완료된 채 여전히 꽂혀 있었고 반쯤 남은 핸드크림, 전임자가 마지막으로 뽑은 형태 그대로 멈추었을 티슈의 선까지 고스란했다.
---- [전임자의 즐겨찾기] - P41

나는 양쪽 전화를 동시에 끊어버렸다. 끊자마자 다리에서 힘이 풀려나갔다. 생명이란 것이 얼마나 어이없이 생기고 어이없이 죽는지,
생물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다. 그 생물들은 자신을 쫓아다니는 연구자를 골탕 먹이기라도 하듯 늘 마음대로 몰려다니고 마음대로 죽어버렸다. 거기에 가설을 세우는 일은 피로했고 많은 에너지를 요구했다. - P49

장마는 끝을 보였지만 하늘은 어두웠다. 날이 저무는 속도에 맞추어 몸이 점점 가라앉았다. 정은 나를 낳지만 않았으면 천하를 얻었을거라고 했다. 어려서 들은 말이었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도 그 말은 정기적으로 나를 찾아왔다. 몸과 마음이 침잠하는 날은 더 그랬다.
나는 내수면연구소가 있는 흑천으로도 정이 있는 해안으로도 가지 않았다. 식사 때를 두 번 지나치면서 잠을 잤고, 일어나보니 다시 날이저물고 있었다. 세번째 전화가 온 건 밖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였다.
흑천도 해안도 아닌 송의 번호였다. - P52

몇천 미터 깊이의 심해에는 마그마가 굳어지면서 생긴 뜨거운 물이 바닷물과 반응해 검은 연기처럼 솟아오르는 블랙스모커가 있다.
블랙스모커 근처에 사는 생물들은 태양에너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지구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기체만을 먹고 산다. 지구에서 햇빛이없이 생명체가 살아가는 곳은 단 두 곳, 심해의 블랙스모커와 도청 밑지하연구소뿐이었다. - P62

정은 한번 다녀가라고 하루에 열두 번 정도 전화를 했다. 턱뼈가 부서져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도 했고 코가 주저앉았다고도 했다. 나는정이 이제 좀 적당히 살기를 바랐다. 정은 만나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들은 것도 많고, 들은 것이 많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정은 몇몇 친구들이 미니홈피에 손녀 사진을 올리는 것까지 부러워했다. 그것은 수천만원짜리 밍크고래를 손에 넣고 싶은것보다 더한 욕심이었다. 노년에 손녀 사진을 쓰다듬으며 살기 위해선 젊은 날 많은 걸 억제해야 된다는 걸 정은 몰랐다. 남편을 잡아먹고 싶어도 참고, 한탕 크게 하고 싶어도 참고, 자식이 발목을 잡으면잡힌 채 산 자만이 나중에 그런 소소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 P63

"소초에 있으면서 한 번도 숙면을 취해본 적이 없어요. 이상하게밤 근무가 없을 때 잠을 더 못 잤던 것 같아요. 잠을 못 자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에요."
"그래? 고래도 그래. 니네 수영이 누나 자료가 그러더라. 고래는 폐로 호흡을 하기 때문에 깊은 잠에 빠지면 물속에서 질식할 수가 있다.
그래서 고래는 절대 깊은 잠을 자지 않는다."
안쓰럽기도 하고 화제도 돌리고 싶어 한 말이었지만 탈영병의 표정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초소에 서서 수평선만 보고 있으면 눈보다 귀가 예민해져요. 햇빛은 수면 위에서 자글자글 끓고 바다는 조용한데 그 밑은 말할 수 없이소란스러워요. 몇천 미터 심해에서 찰랑거리는 수면까지 밑에서 온갖 일들이 일어나는 게 들려요. 그러다 태풍이 오고 바다가 정말로 뒤집어지면 바다 밑은 말할 수 없이 고요해져요. 심해에서부터 수면까지, 모두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게 들려요. 그런 게 들리기 시작하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나는 무언가에 넋이 나간 듯한 탈영병의 옆모습을 잠깐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이 얼마나 예쁜지 만져보고, 몸의 모든 접힌 부분을 들추어 냄새를 맡아보고, 배도 한번 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어쩌면 탈영병을 처음 본 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P65

"고래 숨소리가 들려요. 습기 찬 공기가 공중으로 흩어지는 소리, 고래가 분기를 뿜어요. 따뜻하고 축축한 공기 입자들이 해변까지 날아와요. 물 위로 솟구칠 때요, 바다 한가운데서 섬 하나가 솟아오르는 것같았어요. 머리를 내밀고 사과만한 눈으로, 아니, 거의 수박만했던 것도 같아요, 고래가 저를 봐요. 눈이 얼마나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지몰라요. 저는 고래한테 단박에 빠져버렸어요. 왜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래 얘기를 해왔는지 저절로 알았어요. 이마엔 미열이 돌고, 심장은 시끄럽고, 다른 사람 말은 하나도 안 들려서 자꾸 문제 일으키고."
그건 열병과 비슷한 증상이었다. 스스로 의식하는지 모르겠지만 탈영병은 전임자 얘기가 빠진 순수한 고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전임자얘기를 할 때와는 다르게 표정에 흔들림이 없었다. 비커에 떨어뜨린잉크 한 방울이 아무런 번짐 없이 또르륵, 바닥에 닿는 것을 나는 지켜보았다.
- P66

정에게 와사비는 자존심의 정점 같은 것이었다. 해안 변두리에서자잘한 회나 뜨며 살지라도 그 회만은 최고로 정성스럽게 갠 와사비로 마무리되어야 했다. 정은 늘 청하를 팔팔 끓인 물에 와사비를 개었다. 그것을 손목이 시큰해질 때까지 개고 개어야 톡 쏘는 맛이 제대로 살아난다고 했다. 녹색 광택이 빛나던 솔표 와사비분말은 내 유년을 장악하는 거대한 징표 같은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 아무리 정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코끝을 치고 올라오는 와사비향은 어쩔 수 없었다.
주말에 연구소 관사에 남아 부화동 수온을 점검하던 수많은 여름마다나는 컵라면에 와사비를 풀어 먹었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눈에 먼저들어온 것도 솔표 분말이었다. 정은 앞니 하나가 나간 상태였다. 전화로 듣던 것처럼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 P68

고래의 젖엔 다디단 지방이 많아서 한 모금만 먹어도 하루에 이 센티씩 큰다고 했다. 고래는 지느러미를 젖히고 가슴근육을 움직여 아기에게 젖을 뿜어줄 것이다. 아기는 고래의 아기가 먹는 반의 반의 반만 먹어도 배꼽이 볼록 튀어나와 금세 쌔근거릴 것이다. 고래는 아기를 등에 태우고 가슴지느러미로 노를 저어 따뜻한 바다로 데려다줄것이다. 고1은 고래에게 ‘내 아기에게 젖을 줘‘라고 말했다.
그날 밤 작은 어진에서 일어난 일을 본 것은 고1과 고래, 검은 바다와 아기, 해변의 모래들과 해안 초소 위의 경계병이었다. 경계병은 해안에서 움직이는 물체가 낚시꾼도 취객도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경계병은 해변으로 뛰어내려갔다. 여학생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해안에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좌초한 고래의 지느러미를 젖히고 신생아를 유기한 고등학생 얘기도 나오지 않았다. 혹등고래도 오랫동안 그 앞바다에 나타나지 않았다. - P72

주마등의 끝엔 탈영병이 있었다. 박제철을 들여다보던 탈영병이 큭큭 웃는다. 나는 탈영병과 마주 앉아 와사비에 밥을 비벼 먹는다. 담요를 덮어주자 탈영병은 몸을 웅크린다. 탈영병은 미열이 있고, 탈영병은 고래 얘기를 한다. 탈영병의 얘기를 듣는 나는 그 시간들이 조금고통스럽다. 쓰레기봉투 옆에 앉아 있는 나는 그 시간들이 탈영병과함께 보낸 짧은 여름이 어떤 선물 같은 거였다고 생각한다. 그 며칠의시간 때문에, 물속이지만 이제 정말로 눈을 감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앉은 채로 나는 꿈을 꾸었다. 블랙스모커가 피어오르는 심해, 지구상에서 햇빛 없이도 생명체가 살아가는 유일한 곳, 고래의 젖을 먹고세상에서 제일 큰 아기가 된 사람의 아기가 기분이 좋은 날이면 블랙스모커까지 헤엄쳐 내려오는 꿈. 크릴새우를 훑어먹고 대왕오징어와싸우며 심해를 떠돌던 아기가 잠깐씩 와서 쉬어가는 곳. 나는 그곳에앉아 잠이 들었다. - P76

여객기와 별도로 고래 연구자들에게 그날은 중요했다. 혹등고래는홀로 이동하는 고래였기에 백여 마리가 집단으로 좌초한 건 이례적인일이었다. 호주의 고래연구소는 이 이례적인 현상을 밝히는 데 필요한 시간과 예산과 인력을 연말까지는 산정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혼획을 가장한 불법포획이 만연하면서 해안의 밍크고래 개체수는크게 줄었다. 일부는 좌초한 고래를 위해 전국적인 구조체계를 갖추자고 주장했고 일부는 민족의 오랜 식단인 고래고기의 대중화를 위해포경을 재개하자고 주장했다. 시간이 가면서 문어통발에는 문어와 밍크고래 외에도 다양한 것이 걸려나왔다. 모 항공사의 로고가 찍힌 기내 의자를 봤다는 어부도 있고 메밀베개 껍데기를 봤다는 어부도 있었지만 원래 바다는 쓰레기장이라고도 불릴 만큼 안 떠다니는 게 없었다. - P78

해변에 우두커니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더라는 얘기를 듣고 정은 딸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무한대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최보살은 정의딸이 어디에 있든 물에 흠뻑 젖어 떨고 있으니 양지바른 곳으로 인도하는 굿을 해야 된다고 말했다.
정은 작은 어진에 줄을 만들었다. 그 위에 딸의 배냇저고리와 원피스와 교복치마를 내다 걸었다. 따갑게 내리쬐는 태양빛이 그것들을오래 소독하고 말렸다. 해안에 사는 물고기들이 가끔씩 튀어올라 그것들을 구경했다.
하천을 헤엄치는 동자개는 여전히 가슴지느러미 가시를 뒤로 젖히며 빠가빠가 울었고 가슴지느러미를 가진 모든 어미들이 그 소리를들으며 같이 운다는 얘기도 그해 여름에 퍼져나간 소식들 중 하나가되었다. 깊은 산 계류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여울이 되고 시내가 되어바다로 흘러갔지만 민물고기는 바다의 염분을 견디지 못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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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에서 높새바람이 불어오던 늦봄에 누나는 왔습니다. 엄마는말했습니다. 동생이 잘못되면 니 책임이야. 그래서 누나는 동생의 손을 꼭 잡고, 다른 곳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버스에 얌전히 앉아 곧장왔습니다.
마을로 들어오다 누나는 군인을 보았습니다. 학교도 보았습니다.
탑도 보았고, 산과 강도 보았습니다. 얼굴에 파리가 앉은 노인이 느티나무 아래에서 누나를 째려보았습니다. 누나는 무서워서 동생의 손을꼭 잡고, 마구 뛰어서 왔습니다.
저녁에 할머니가 고깃국을 끓여줍니다. 국물 위에 뜬 비계에 털이송송 박혔습니다. 비계를 집어먹은 동생은 밤새 토합니다. 동생이 게워내는 걸쭉한 덩어리를 누나는 한 손으로 받아냅니다. 다른 손으로는 동생의 머리를 누릅니다. 더 토해봐, 빙섀야. 사람 잠도 못 자게다음날부터 누나는 학교에 다닙니다. 

----[비밀동화] - P9

높새바람이 마을을 통과합니다. 갈참나무 사이로 고온건조한 바람이 불어갑니다. 백엽상의 온도계 눈금이 올라가고 지붕들 위로 뜨겁고 가벼운 불씨들이 떠다닙니다. 머리에 풀잎을 꽂은 군인들이 피터팬처럼 불씨 사이를 날아다닙니다. 누나아앙아아. 동생이 누나를 부릅니다. 누나아아앙아아아아. 누나를 부르는 소리는 탑과 운동장과느티나무를 돌아 마을 곳곳으로 퍼져갑니다.
누나는 알지 못하지만 학교는 몇 년 뒤에 폐교가 됩니다. 누나가 덧셈뺄셈을 하던 칠판에는 군인들이 WXY를 그려넣고 동생이 맴을 돌던 이순신 장군 옆에서는 키 큰 풀들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보다 훨씬오랜 후에 누나는 폐교를 찾아와 울게 됩니다. 돌을 껴안고 울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 P10

어쩌면 누나는 잠깐 잠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공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빠가 엎드린 채로 상체를 일으켰다 몸을 돌려 자리에 눕는 게 보입니다. 누나는 천장을 보고 누워 있기 때문에 그것은곁눈 시야로, 검은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곧이어 엄마가 팬티를 올립니다. 누나는 자리에 누워 골목의 발소리까지 다 듣고 있었지만 엄마 아빠한테선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걸 압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누나는 종종 그날을 회상하게 됩니다. 단칸방에서 어린 남매를 키우던 젊은 부부의 너무 고요한 교합을, 상체를일으키고 속옷을 올리던 단 두 동작, 그 숨죽인 움직임이 주던 기이한슬픔을 생각하게 됩니다. 누나는 어린아이였고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날 밤 천장을 보고 누운 누나의 얼굴에선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습니다. - P16

단칸방에 찾아온 무수한 밤들 중 한 날에 회수는 생겨났습니다. 일을 시작하려던 때에 회수를 가진 엄마는 살기 싫은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엄마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누워만 있습니다. 조금 기운이 나면 엎드려서 웁니다. 조금 더 기운이 나면 누나한테 시비를 겁니다. 누나가대답을 늦게 하거나 방문을 열어놓거나 비누에 머리카락을 묻히면 냄비들을 모두 꺼내 납작하게 밟아버립니다. 누나를 사등분으로 접은뒤 싱크대 속에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러다 정상으로 돌아오면 엄마는누나 볼에 미친 듯이 입술을 비빕니다. 미안해, 미안해. 누나가 흙을묻혀오고 머리카락을 떨어뜨려도 마구 따라다니며 칭찬을 합니다. 누나는 같은 행동을 하면서도 엄마 눈치를 보는 아이가 됩니다. 자신을칭찬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선 금세 기가 죽는 아이로 자라게 됩니다.
그래서 남의 칭찬을 끌어내기 위해 기를 쓰며 살게 됩니다.
- P17

희수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엄마가 열무단을 들어 누나 등을 때리기 시작합니다. 열무는 단단합니다. 열무의 흙들이 누나의 머리카락을 파고듭니다. 열무가 다 흩어지자 엄마는 자리에 주저앉아 웁니다. 누나와 희수는 가만히 앉아 엄마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립니다. 엄마는 꺼이꺼이 웁니다. 누나는 희수가 휘젓다만 허공에 말풍선을 띄우고 ‘꺼이꺼이‘라고 씁니다. 엄마가 우는 건자기 때문이라고 누나는 생각합니다.
한 번씩 꺼이꺼이 울고 나면 엄마는 며칠 동안 웅크리고 누워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빠는 밥상을 펴놓고 앉아 일을 하다가 희수를 업어달래고, 희수가 잠들면 누나에게 줄 밥을 볶습니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노려보다 베개를 던지며 소리를 지릅니다. - P18

토요일입니다. 백엽상에서 맴을 돌다 정글짐으로 건너갔던 희수가긴 돌 위에 엎드려 있습니다. 누나는 친구들과 곤충채집 숙제를 해야합니다. 누나는 죠리퐁 한 봉지를 뜯어 희수에게 쥐여줍니다. 천천히먹어.
그래도 희수는 자꾸 누나를 따라오려고 합니다. 누나야, 나도 갈래.
나도 고기 잡을래. 우리 고기 잡으러 가는 거 아니야, 빙섀야. 누나는긴 돌 위에 희수를 밀쳐 앉힙니다. 야, 빨리 가야 돼, 친구가 누나를재촉합니다. 누나앙, 나도 갈래. 희수가 징징거리며 다시 일어섭니다.
아! 누나의 책가방을 잡던 희수가 나동그라집니다. 흙바닥 위로 죠리퐁이 쏟아집니다. 누나아앙아 누나는 친구들과 서둘러 다리를 건닙니다. 누나아앙아아 돌아보니 희수가 등을 구부리고 울고 있습니다. 울면서 죠리퐁을 한 알 한 알 봉지에 주워담습니다. 주워담다가다시 누나 쪽을 보며 웁니다. 울다가 다시 쪼그리고 앉아 죠리퐁을 주워담습니다. 그러다 다시 엉덩이를 들고 누나를 부르며 웁니다.
여름 해는 깁니다. 긴 돌 위에는 희수가 없습니다.  - P23

절터 위로 낙엽이 지고 눈이 오고 또 봄이 옵니다. 금줄을 두른 사람들이 드디어 무릎을 펴고 절터에서 캐낸 것들을 정리합니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금줄을 두른 사람들이 카메라에 대고얘기합니다. 출토된 기와편이나 석탑의 양식으로 미루어 절이 10세기경에 세워졌다고 얘기합니다. 발굴된 유물이 모두 13세기 중반의 것이고 그 이후의 유물은 단 한 점도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절은그즈음에 폐사된 뒤 한 번도 복원된 적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금당지와 강당지의 흙이 모두 불에 탔고 퇴적물에 목탄의 흔적이 있으며 마을이 몽고군과의 접전지역이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들은 절이 몽고 침입시 몽고군에 의해 전소되었다고 정리합니다. - P33

높새바람이 전언을 실어옵니다. 누나는 돌축대에 혼자 앉아 귀를기울입니다. 바람이 산을 넘어 불어와 절이 불에 타던 날, 큰스님들은담담하게 열반에 들어 사리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개‘자에도 못 간 젊은 승려들은 새까맣게 탄 몸 그대로 절에 남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절에 살면서 예불을 드리고 향을 피우고 마을을 돌며 탁발을 합니다. 돌축대에 나란히 서서 마을을 바라보고 느티나무 아래에서 물을 마십니다.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소리없이 걸어가며 저물 무렵이면 줄을 지어 지붕 없는 절터로 돌아옵니다. 한데에서 오래 살아 머리 위에선 풀이 자랍니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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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정전
최은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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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미와함께 한주간을 보냈다. ‘눈으로 만든 사람‘,‘목련정전‘을 또 읽었고, 장편‘아홉번째 파도‘를 읽었고 첫 소설집‘너무 아름다운 꿈‘을 읽고있는 중이다. 거꾸로 만나는 작가의 그간의 글들이 서늘하고 뭉클하면서 단단하다. 모든 편들의 글에서 화자가 되었다가 독자가 되기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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