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일, 나는 황토고원으로 갔다. 고원의 허공 위에 꽃이 피었다고 했다. 꽃이 공중에 피다니, 그것은 비유입니까. 물었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 짐을 꾸린 것은 꽃을 따기 위해 열기구를 띄운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황토고원은 서쪽에 있었다. 나는 편서풍을 거슬러서 갔다.
----[너무 아름다운 꿈] - P83
황하 하구에서 한참을 거슬러올라 해발 천육백 미터의 황토고원에자리잡은 곳. 대륙 서쪽의 란저우는 전염병으로 술렁이는 베이징이나서울과는 다르게 노란 미세먼지막 속에서 따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의외로 공항에서의 검역도 철저하지 않았다. 21세기 전염체는 비행기바이러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이번 전염병은 지역성이 강했다. 발병지역은 황사 피해지역과 일치했다. 중국 동부와 한국의 발병자가 많았고 그다음이 일본, 북아메리카 서부 순이었다. 이상한 것은, 중국 서북부와 내몽고 등 황사 발원지역에서는 오히려 발병자가 적다는 것이었다. 모래에 익숙한 지역에서 항체가 형성된 것이 아니냐는얘기가 있었지만 어느 단계에서 유전자변이를 일으켜 어느 단계에서변종 바이러스가 되었는지 사람들은 맥을 잡지 못했다. 발병자 분포도가 지역성을 띤다고 해도 접촉 전염인 결막염과 호흡기 전염인 폐렴이 주 증상이었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무역풍을 탄 사하라 더스트가 도달하는 아프리카 대륙 서해안에는 큰 도시가 없었지만 편서풍을 탄 아시아 더스트가 도달하는 아시아 대륙 연안에는 인구 천만이 밀집한 대도시가 여럿이었다. 때문에 세계보건기구는 판데믹 선언을 고려중이었고, 사람들은 2013년에 출현한 신종 바이러스를 ‘아시아 더스트 바이러스‘라고 불렀다. - P91
허시회랑은 란저우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둔황까지 이어지는 긴 길이었다. 한국 발음으로는 하서회랑. 하서는 황하 서쪽을, 회랑回廊은긴 복도형 구조를 뜻했다. 북쪽의 고비사막과 남쪽의 치롄산맥에 막혀 자연스럽게 좁고 긴 지형이 형성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하서회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사막과 산맥 사이를 빠져나가는 길고 구불구불한 생물이 떠올랐다. 낮에는 태양빛을 흡수하고 어스름이 되면검붉게 변하면서 조금씩 서쪽으로 기어가는 생물, 해가 지거나 폭풍이 일면 그 통로엔 어둠이 들어찰 것이다. 끝없이 이어진 흙벽과 칠흑같은 통로, 리라면 그런 곳을 찾았을 것이다. - P94
모두가 사막색 군복을 입고 있어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공식적인행사가 끝나자 가족들과 점심을 먹는 시간이었다. 다들 야산 공원 여기저기에 둘러앉아 마련해온 음식을 펼쳤다. 돗자리에 앉은 동생은다른 것은 안 먹고 계속 참외만 먹었다. 한 달 동안 상무대에서 생존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사막에서 길을 잃었을 때 살아남는 법, 동티모르 파병 사고 사례와 총기 사고에 대한 교육, 그리고 전염병 예방 수칙, 서희부대의 주둔지는 이라크 나시리아였다. 한 제대의 파병기간은 육 개월, 그들은 2003년 10월에는 만 달러와 함께 돌아오게 되어있었다. 밥을 다 먹고 나자 동생은 내 휴대폰을 빌려 한두 군데 전화를 했다. 둘러보니 사막색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짙푸른 나무 밑에 쪼그려앉아서 다들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나는 삼 년이 지나고칠 년이 지난 뒤에도 계속 그 풍경을 생각했다. 그날 매산리 나무 그늘 밑에서 참외를 먹고 전화를 하던 수많은 군인들 중에 모래폭풍과함께 사라져버린 열다섯 명은 누구누구였을까. 십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열다섯 명은 그날 어디어디쯤에서 사열대를 향해 서 있었을까. - P99
‘뜨거워, 아빠‘ 불이 난 지하철에 갇힌 사람들한테는 휴대폰이 있었다. 그들의 몸은 밖으로 나올 수 없었지만 그들의 마지막 말은 밖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좁고 긴 지하통로에 갇힌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한 말은 숨이 막힌다는 말과 뜨겁다는 말이었다. 어머니한테 아이둘을 맡기고 볼일을 보러 가던 여자는 마지막 문자를 어머니한테 보냈다. ‘어머니, 애들 좀 잘 봐주세요. 지하철에 불이 났는데 아무래도죽지 싶어요.‘ 불이 난 시간은 오전 아홉시 오십삼분, 갇힌 사람들한테서 가장 많은 전화가 걸려온 건 열시 삼십분에서 사십분 사이였다. 열시 오십구분 사십삼초 이후로는 더는 어떠한 전화도 밖으로 걸려오지 않았다. - P100
눈병에 걸린 사람들은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고 했다. 어렸을때 돋보기로 들여다보던 눈 결정체 같기도 하고 햇빛을 머금은 먼지입자 같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것을 꽃 같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붉게 충혈된 눈을 계속해서 비볐다. 가려움증은 실제로는 바이러스가 각막에 안착해 생기는 증상이었지만 사람들은 마치 믿지 못할 광경을 목격했다는 듯이 눈을 비비고 또 비볐다. 처음에는 가려움증과이물감을 호소하다가 눈곱과 눈물을 흘렸고 나중에는 결막에 종창이생기면서 출혈을 일으켰다. 감염자들이 꽃 얘기를 하는 것은 이번 바이러스가 형태학적으로 꽃 모양이어서라는 얘기가 있었지만 감염자들이 정말로 바이러스의 실체를 목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결막염 출혈을 일으킨 환자들은 뒤이어 고열과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다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사망자들의 호흡기 하부인 폐에서도 바이러스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사인은 바이러스성 폐렴 합병증으로 발표되었다. 2013년에 출현한 바이러스는 코나 목 등 사람의 호흡기 상기도에서 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플루엔자바이러스와 달랐고, 결막에서 증식하는 바이러스가 폐에서도 증식한다는 점에서 아폴로눈병을 일으킨 엔테로바이러스와도 달랐다. 백신은 없었다. - P101
전염병과 황사의 관계에 대해 쥔은 오래 생각해온 듯했다. 내 짐작이 맞다면 쥔은 아시아 더스트 바이러스가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기전, 즉 순수한 조류인플루엔자였을 때 황사 입자와 어떻게 결합했는지를 밝히기 위해 몇 가지 가설을 세워놓았을 것이다. 그 가설이 내 짐작과 다르기를 바라면서 나는 다시 탁상달력을 집어들었다. 2013년 4월달력에 있는 사진은 리가 2000년 홍콩컨벤션센터에서 공연을 할 때의 사진이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였지만 리는 여전히 강건한 몸에 소년 같은 얼굴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2000년은 리가 은퇴를 했다가 복귀한 해였다. 삼 년 뒤에 죽었으므로 마지막 재기인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때의 사진은 어딘지 아슬아슬했다. 리의 자살 소식을 듣고서야 아름답던 리가 어디선가 조금씩 나이를 먹어간 걸 깨달았다는 미안함, 그 미안함을 떠올리게 하는 사진이기도 했다. 리는 자주 무너졌다. 일을 할 때는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것처럼 완벽했지만 무너질 때는 모든 것을 놓았다. 리는 어떤 배우보다도 황색 언론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그때마다 사생활과 스캔들이부풀려졌다. 리는 은둔과 은퇴를 반복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올 때면리는 늘 최고였고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리에 열광했다. 리를 수식하는 대표어였던 슬프고 몽환적인 눈빛은 리가 무너지고 일어서기를 반 - P104
복할 때마다 철저하게 리의 것이 되는 것 같았다. 안착하지 못하는 결된 영혼, 잡히지 않는 생의 허무를 표현하려는 감독들은 누구나 리를 주인공으로 정하고 시나리오를 썼다. 사람들은 리한테 깊게 배어있는 특유의 분위기를 유년 시절 때문이라고 했다. 리는 유복하게 자랐지만 어머니와 단둘이 있었던 시간이 생애 며칠도 안 될 만큼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가족얘기가 나오자 리는 말했다. ‘어려서는 딱 십 분만이라도 어머니와 마주 앉아서,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나에게 어머니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 그 사실뿐입니다.‘ 리가 연기한 인물들은 그런 리의 삶을 닮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채워지지 않는 커다란 공동空洞 하나씩을 안고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파괴하다가 비눗방울처럼 터져버렸다. - P105
리는 이미 협곡의 절벽 위에 서 있었다. 좁고 긴 통로를 빠져나와절벽 위에 선 것인지, 절벽에서 내려와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래폭풍의 전조인지 대기는 탁했다. 누군가 골짜기에 혼자 앉아 우는 것처럼 바람 소리가 점점 휘어졌다. 리는 고대의 조각상처럼 몸에 얇은 대의 하나만을 걸친 채 바람을 맞고 서있었다. 얇은 천이 신체에 흡착돼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났다. 리가 강박적으로 가꾸어온 몸이었다. 한 발만 방심해도 그대로 무너질것 같은 아슬아슬한 몸. 스스로에게 혹독하지 않고는 더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마지막 단계에 리가 서 있었다. 몸의 양감과 흡착된 옷이길항을 일으켜 리의 신체는 숨막힐 듯한 긴장감을 뿜었다. 카메라는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그렇게 리를 비추었다. 우리도 전혀 움직이지않고 리를 마주 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절벽 위에 선 리한테서그동안 리를 통과해간 모든 인물들을 보고 있었다. 리는 길 위에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리는 사막 너머를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빙글빙글돌다가 주저앉는 리, 짙은 화장을 한 리, 사랑에 답하지 않는 리, 이글거리는 화염 저편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리, 환호 속에 갇힌 리, 몸부림치듯이 키스하는 리, 오도 가도 못 하는 리, 자신이 파괴한 것을 두눈으로 보아버린 리, 두려움에 떠는 리,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는 리엄마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는 리, 긴 야자수 길을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리, 뒤돌아보지 않는 리. - P112
실제 상황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몇 초 뒤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은 무엇인가가 붙어 있는 거대한 절벽이었다. 절벽에 따개비처럼 드문드문 붙어 있는 것은 검은 목관이었다. 사람 몸 하나 크기의 검은나무관이 선반처럼 절벽에 박혀 있었다. 우리는 숨을 멈추고 리가 남긴 세계를 바라보았다. 절벽을 내리달리던 화면은 이어서 홍콩 컨벤션센터로 넘어갔다. 열기 속에서 리의 노래가 끝나가고 있었다. 긴장 속에서 바람 소리만 듣다가 익숙한 곡이 흘러나오자 좌석 여기저기서울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리는 환한 조명 아래에 서 있었다. 환호속에 둘러싸인 리가 땀에 젖은 채 웃고 있었다. 리는 팬들에게 인사말을 하는 중이었다. 사막 너머를 바라보던 눈빛으로 관중 너머를 바라보던 리가 인사말 끝에 낮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메이멍, 나는 침을 삼켰다. 美인지 인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리가 환호 속에서 마무리짓는 것은 꿈 얘기였다. 우리는 다 같이 리의 마지막 말을들었다. 꿈속에서는 무엇을 해도 진실이 아니야. 그 꿈을 깨야지. 꿈을 깰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뭔지 알아? 바로 뛰어내리는 거야.‘ 영화의 제목은 ‘공중화‘였다. - P114
눈에 병이 생기면 허공에서 꽃이 보인다. 그것은 아시아 더스트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의 증상이었다. 쥔과 나는 동시에 숨을 뱉었다. 경전에서는 분명히 비유라고 말하고 있었다. 비유로 그쳐야 할 일이 2013년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비유라고요? 뭐에 대한 비유라는 거죠?" "어디 봅시다. 이건・・・・・・ 무명에 대한 설명 다음에 오는 구절이네요. 무명에 대한 비유인 거죠." 모니터로 몸을 숙였던 남자가 다시 상체를 일으켰다. "무명은 고통이 시작되는 첫번째 조건입니다. 모든 고통은 무명 때문에 일어나죠. 허공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명 때문에 보이는 것이죠." - P115
"열기구야." 쥔이 낮게 탄성을 뱉었다. 열기구는 점점 높이 떠오르며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이동해왔다. 바람을 탄 열기구는 비닐봉지처럼 가뿐하게날아오르고 있었다. 쥔과 나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열기구는 모래구름 속에 숨는가 싶더니 다시 나타나고, 다시 나타났다 숨으면서 바람에 실려 올라갔다. 그때마다 쉼 없이 반짝거렸다. 우리는 넋을 잃은 채로 열기구를 좇아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열기구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대로 계속 바람을 타면 열기구는 곧 좁고 긴 통로로 들어설 것이다. 그곳은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 회랑, 기약도 없이 긴 길이었다. 부딪쳤다 다시 솟구치며 흙벽을빠져나가면 마침내는 깎아지른 절벽일 것이다. 절벽은 발 없는 주검들을 위한 곳이었다. 한때는 굴곡이 선명했던 존재들에게 자기 몸만큼의 공간이 주어진 곳, 어둠도 폭풍도 태양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곳. 절벽 앞에 펼쳐진 것은 망망대해 같은 끝없는 사막이었다. 우리는 풍선을 놓친 어린아이처럼 발을 구르며 허공을 향해 하염없이 손을 흔들었다. - P119
형제자매들은 모두 떠났다. 동요의 내용대로라면 목요일의 아이는 길 위에 있을 것이고 일요일의 아이는 친구와 있을 것이고 토요일의 아이는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소녀는 햇빛이 원을 그린 소파에 혼자 앉아 떠나간 형제자매들을걱정한다. 얼굴이 예쁜 월요일의 아이가 나쁜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걱정하고 토요일의 아이가 생활비를 버느라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걱정한다. 사랑스러운 금요일의 아이가 마음을 다치는 건 아닌지, 빛이나는 화요일의 아이가 시기를 받는 건 아닌지, 혹 그들이 모두 돌아오지 않는 건 아닌지 소녀가 그들을 걱정하는 건 수요일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수요일의 아이는 근심이 많다.
---- [수요일의 아이] - P123
지금은 사무소의 임시 경리직이지만 소녀는 언젠가는 시설관리공단에 정규직으로 들어가 가로등관리팀에서 일하는 것이 꿈이다. 소녀는 얼마 전에 공단에서 가로등원격관리제어시스템을 들여놓은 것도알고 있다. 마을의 가로등을 관리한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열심히 일을 해 가로등관리팀의 팀장이 되면 소녀는 가로등의 조도를 대폭 개선해 밤거리를 좀더 어둡게 만들고 가로등 옆에는 취객을 위한오바이트 통도 만들 생각이다. 한밤이나 새벽 거리에 홀로 서서 속에있는 것을 끌어올리는 건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행위다. 그러려면 가로등이든 가로수든 전봇대는, 뭔가 지탱할 게 필요하다.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명언을 코팅해 붙이듯이 소녀는 가로등마다 문구를 붙일 것이다. 저를 잡고 토하세요. - P129
며칠 전부터 골목에 다른 공기가 떠돈다. 한 시간에 5. 4회꼴로 일어나는 지진의 진동도 아니고 천둥을 예고하는 양이온도 아니다. 뭔가 엄청난 일의 전조를 품고 있는,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지만 저절로 알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공기다. 불행하게도 소녀는 동네를 떠도는그 공기를 모두 느낄 수 있다. 마을은 가시거리가 이 킬로미터 이하인 무거운 연무가 한 달 이상걷히지 않고 있다. 공기 중엔 미세먼지와 스모그가 가득했고 바람은전혀 불지 않았다. 구청에서는 대기오염도와 그에 따른 행동요령을하루에 두 번 일괄문자로 전송했다. 뉴스에서는 오존중대경보가 내려진 지역과 호흡기 질환 사망자 수를 시간별로 내보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진 지 오래였다. 이런 날 호흡기 환자가 외출을 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 P132
뛰어가다가 바닥에 거꾸로 세워져 있던 못을 정통으로 밟았다. 못이발바닥 중앙을 뚫고 들어오는 순간 소녀는 코가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소녀는 태어나서 한 번도 코가 시원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순간꿈을 꾸는 거라고 생각했다. 소녀의 몸은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번에 뚫리는 느낌. 온 존재가 비틀리며 하늘과 땅의비밀을 알아버린 느낌. 비명과 함께 나동그라지며 착지한 세상은 이미 다른 세상이었다. 못은 콧물이 막고 있던 통로 대신 새로운 통로를 열었다. 그러나 그건 못을 밟고 나서 갑자기 열린 게 아니었다.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것이 못을 계기로 터져나왔다고 보는 것이 정확했다. - P134
둘은 입을 벌리고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셨다. 하나, 둘,셋. 둘은 동시에 발판을 향해 뛰어내렸다. 소녀는 눈을 감았다. 소녀는 벽과 벽 사이의 좁은 골목을 달리고 있었다. 혈관 같은 골목을 따라 올라가자 콧물은 없고 뇌수만 있는 뇌가 펼쳐졌다. 사람의 가장 순수한 기억이 저장된다는 대뇌 깊은 곳. 그곳은 코가 뚫린 채로 살 수도 있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소녀는 탄성을 질렀다. 착지와 동시에, 혈관에 가득 찬 콧물들이 소녀와 소년의 살을 뚫고 뿜어져나왔다. - P153
장마철이었으니 그날 저녁도 비가 내렸을 것이다. 스물세 살의 임신부는 우산을 받쳐들고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다가 반값으로 정리중인 생선차로 달려가 뱃고등어 한 손을 샀다. 어쩌면 비는 멎고 해가 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시간, 비린 봉지를 들고돌아서던 임신부는 허공에서 반짝하고 사라지는 빛 하나를 목격했다. 광활한 하늘에 시선을 빼앗긴 임신부의 발목으로 또르륵, 물방울 하나가 흘러내렸다. 눈 풀린 생선과 하늘을 뒤덮은 물비린내. 떠나버린생선차와 고요한 담벼락. 내 짐작 속 정황들이다. 그날의 바깥 풍경은 이랬을 것이라고 나는오랫동안 뱃고등어와 비 내리는 골목과 흙탕물이 튄 엄마의 흰 양말을 상상해왔다. 이 속에서 분명한 것은 없다.
----[눈을 감고 기다리렴] - P157
졸음은 눈썹과 눈썹 사이로 왔다. 할머니는 내 이마에 굴이 있기때문이라고 했다. 굴이 있어서 그 안으로 햇빛도 들어오고 잠도 들어오는 거란다. 아침에 신발을 신다가 끄덕끄덕 졸고 있으면 할머니는손으로 내 이마부터 쓸어내리며 잠이야 가라, 어여 나가라, 주문을읊었다. 퇴근길에 청주를 샀다. 할머니 기일이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이마트 장바구니를 든 중년 여자가다가왔다. 상단전이 열리셨군요. - P158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외로울 때와 몸이 아플 때를 조심하라고. 세상의 모든 사기는 마음의 병과 몸의 병이 만든 틈새로 꿀처럼 스며든다고 했다. 할머니는 첫 월급을 받으면 성형외과에 가서 미간의 자국부터 없애라고 했다. 우리 은영인 이마가 움푹해서 허황된 무리들이늘 탐을 낼지 모른다. 이 자국을 없애야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평범하게 잘 살지. - P171
해가 날 듯하다가 오후부터 잔비가 내렸다. 엄마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절을 시작했다. 지장전 불단에는 딸랑이와 요구르트와 아기덧신이 놓였다. 부모 인연 지중하여 업연 따라 태에 드나 세상 인연 부족하여 빛을보지 못한 영가, 아미타불 법력으로 태안지장 원력으로 법당 열어 부릅니다 마음 다해 부릅니다. 법당 바닥에서 한여름의 습한 냉기가 올라왔다. 천도문이 이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넓은 어미 가슴 활짝 열고 지극참회 발원하면 못 이룰 일 무엇일까. 다시 한번 돌아보아 참회발원 하옵소서 아이들아 미안하다 정말정말 미안하다. 엄마는 좌복 위에 엎드려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나는고개를 돌려 뜰에 앉은 동자상을 내다봤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삼도의 강이 있어 빛을 보지 못하고 죽어간 핏덩이들이 모래밭에서 고사리손을 모아 탑을 쌓는다고 했다. 돌 하나를 들고 어미를 생각하고,또 돌 하나를 들어 아비를 생각하며 탑을 쌓는다. - P184
어쩌면 영이는 지영이나 희영이 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애로 자라서나와 같은 시기에 초경을 하고 취직을 하고 사랑을 하면서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놓았던 시간대와는 또다른 해가 지고 노을이 붉은 수많은 저녁을 가졌을 것이다. 영이가 삼도의 강을 건넜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모든 것을 기억해낸 열다섯 살이후로 나는 한순간도 영이와 떨어진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교실 사물함에 넣어놓은 체육복 속에도, 수능 보러 가던 날의 필통 속에도,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오다 올려다본 이십대의 숱한 골목 끝에도 항상영이가 있었다. 그것은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영이는 그냥 드리워져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이 영이가 떠도는 구만리장천의 어느 한지점이라면, 광활한 공간에서 파동으로 존재할 영이에게 나는 모든채널을 열어 말할 것이다. 중력이 지배하는 어떤 행성에도 내려앉지말고 가라고. - P186
눈썹과 눈썹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려는 찰나 버스가 길을 돌아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엄마한테 물어야 할 게 하나 있었다. 버스가 앞에 도착해 문이 열리기 전에 물을 수 있을까. 버스 쪽으로 걸어가는엄마의 등 위로 햇빛이 자글거렸다. 빛 때문인지 엄마 등이 신기루처럼 멀어져갔다. 나는 그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엄마는 나 가졌을 때 뭘 제일 먹고 싶었어? 엄마 나 낳을 때 많이아팠어? 엄마 혹시나 가졌을 때・・・・・・ 밤나무골에서 자장가 부른 적있지 않았어? 이마 위로 햇빛이 쏟아지자마자 나는 개망초 꽃더미에 발이 걸려그 자리에 푹 엎어지고 말았다. 푸른 망초 대 사이로 알록달록한 실뱀한 마리가 빠르게 지나갔다. 그 빛깔이 너무 고와서 나는 엄마 몰래가슴을 쳤다. - P187
협곡의 여름은 찌는 듯했다. 벌레들이 찌르듯이 울었다. 나는 누나를 불렀다. 물가의 돌에 쪼그려앉은 누나의 치마 끝이 계곡물에 조금씩 젖어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누나, 치마가 젖어, 일어나 아니면 누나, 치마가 젖어, 끝을 당겨서 종아리 뒤로 넣어. 나는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숲은 수천 종의생물이 들끓는 소리로 꽉 차 있었다. 내 목소리는 금세 묻혀버렸다. 늘어진 이끼들이 발목을 감았다.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것 같은 계곡물소리, 풀 비빈 손으로 누군가 입을 틀어막는 것처럼 습한 냄새가 차올랐다. 숨이 막히고 귀가 따가웠다. 나는 숲에 갇혔다는 걸 깨달았다. 갇힌 걸 안 순간 누나가 일어났다. 치마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누나가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강한 여름볕이 누나의 정수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숲이 모든 작동을 멈췄다. 정적. 다시 여름벌레들이 일제히 끓어올랐을 때 누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전곡숲] - P191
실종자 가족들은 간혹 우리에게 무언가를 묻기도 했지만 우리가 썩어가는 사람들을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사체 하나가 던져지면 숲은 노골적으로 신호를 보냈다. 냄새, 한번 맡은 뒤로는 절대 잊을 수 없고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냄새. 풀냄새같은 것. 살냄새 같은 것. 똥냄새 같은 것. 그런 냄새들이 한데 뒤섞여숲냄새라고밖에는 말할 방법이 없는 어떤 향에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냄새를 신호탄으로 숲은 다른 리듬으로 움직였다. 땅 밑에서부터 하늘을 가린 우듬지까지, 숲은 하나의 아가리가 되어 사체를 귀신같이 해치웠다. 숲이 우적거릴 때마다 절벽의 절리들이 관자놀이처럼움직였다. 일 년의 반이 한여름인 숲은 배가 부른 곤충들로 잉잉거렸다. 곤충들은 어디에서나 교미했고 숲의 모든 틈을 비집고 들어가 끈질기게 알을 깠다. - P195
"토막을 내버릴 거야." 담임한테 뺨을 맞고 온 날 누나가 샌드위치패널 벽에 손톱을 짓이기며 말했다. 누나가 그 말을 한 몇 주 뒤에 실제로 숲에서는 토막 사체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숲에 제 발로죽으러 들어가는 사람들 외에 누군가를 죽인 뒤에 숨기러 오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마을에 미세한 동요를 던져주었다. 사라지고 찾는 일 외에 숲에서 다른 것도 할 수 있다는 걸 그전에는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육상부 하계합숙을 마치고 왔을 때 숲은 여름의 정중앙을 통과하고 있었다. 검푸르게 독이 오른 잎사귀들로 숲은 무겁고 습했다. 응달의 나무를 타고 오른 이끼들이 가지 끝까지 발아했다. 누나는 계곡가에 앉아 하릴없이 리코더를 불다 멈추다 했다. 분무기를 뿌린 것처럼숲은 증기로 빽빽했다. - P198
그들은 이십만 년 전인 중부 홍적세 후기에 있었다. 한 손에는 불을 한 손에는 돌을 들었다. 어깨는 구부정하고 턱은앞으로 튀어나왔다. 낮은 이마에 광대뼈가 도드라졌고 몸에는 짐승가죽을 둘렀다. 몸집은 지금보다 훨씬 작았지만 주먹도끼로 멧돼지의급소를 단숨에 찌를 수 있는 다부진 근육이 있었다. 눈빛은 예리한 생기로 번뜩였다. 덥수룩한 머리는 가발로, 짐승 가죽은 호피무늬섬유로 대체할 수있었다. 어깨는 구부정하게 들어올리고 턱은 내밀고 걸어다니면 되었다. 다만 작은 몸집과 눈빛만은 재현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축제였으므로 야생동물과의 대치나 굶주림으로 날이 선 모습보다는 밝게 웃는편이 좋았다. 구석기축제에 투입될 구석기인의 모습이었다. 전역을하고 돌아오자 마을은 축제 준비로 들썩이고 있었다. - P209
눈을 뜬 것은 빛 때문이었다. 숲의 우듬지층이 조용히 일렁이면서빛무리가 흩어져내렸다. 숲이 반짝이는 것은 바람 때문이었다. 숲 위로 바람이 불어왔다. 후텁지근하면서도 졸린 바람. 나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콧등에 걸려 있다. 선풍기 바람은 누나의 콧등을 지나 나를 향해 불어오는 중이었다. 바람은 마늘 절구와 돌조각을 지났다. 누나가 손질해놓은 간이탁자를 지나고, 매미가 울던 계곡가의 누나, 리코더를 털어서 침을 빼던 누나,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곳과 내가 가질 수 없는 것 들을 훑으면서 바람은 천천히, 너무도 느리게 돌아오고 있었다. 이윽고 바람이 나에게 당도하고 숲이 모든 작동을 멈추었을 때, 나는 퇴적 알갱이들이 골짜기 위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현무암 파편과 잘고 흰 모래 들이, 적갈색 점토 입자들이 협곡을 채우며 꽃씨처럼 날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언제까지고 숲에 누워서 반짝이며 명멸하는 그것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 P220
미숙이가 집을 나가던 날은 아침부터 강에서 습한 바람이 올라왔다. 창문만 열어도 콧속과 겨드랑이가 금세 축축해지는 날이 며칠째이어졌다. 그날 별다른 징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대륙고기압의 영향으로 중부 내륙지방에 안개가 짙게 끼겠다는 예보가 있었고 점심즈음 미숙이가 자두씨를 삼켜 소금물을 타주고 토하도록 도왔을 뿐이었다. 한여름의 안개도 장폐색을 일으킬 수 있는 과일씨도, 위험하지만 살다보면 만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오후가 지나면서 눅눅한 구름이 대기를 눌러왔다. 미숙이가 일 년중 제일 못 견뎌하는 장마 뒤끝의 후텁지근한 날씨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만 되면 미숙이는 생기를 잃고 비루먹은 것처럼 힘들어했다.
----[간밤 강가] - P223
수컷들을 보내고 난 밤, 미숙이는 하늘을 향해 오래 울었다. 발정기가 되면 미숙이의 하울링은 더 잦아졌다. 서늘한 강가에서 땅을 파듯우는 나이든 암캐의 목소리는 감당하기에 쉬운 소리가 아니었다. 좀체 짖는 법이 없는 미숙이지만 한번 울음을 시작하면 그 소리는 사람마음을 후벼놓는 데가 있었다. 그런 밤이면 나도 같이 앓았다. 우우-우우 땅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듯한 굵고 짙은 울부짖음. 나는 미숙이의 소리를 들으면서 짖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울부짖는다는 말이어떤 것인지 비로소 알았다. 설원을 달리지 못해서 답답한 것일까, 새끼를 가질 수 없어서 저렇게 허허로운 것일까, 이리저리 짐작해보기만 할 뿐 미숙이가 울부짖는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사람이고 미숙이는 개였다. 나보다생의 선을 더 달린, 다른 종이고 다른 성인 미숙이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 P235
문에는 아직 상품코드와 용량과 소비전력이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다. 내외부 재질은 고급 엠보싱이라고 했다. 미려하고 잡기 편한손잡이, 편리한 이동바퀴, 신개발 자동닫힘 도어. 지금은 유명 보일러 회사와 합병된 한 중소기업에서 한때는 유력상품으로 생산했던 그것. 화분에 물을 주듯, 때맞춰 환기를 시키듯, 영희는 일주일에 한 번 그안에 냉기를 불어넣는다. 신발과 노트와 뼛가루가 함께 살아 있는 곳, 영희는 아직 그 안에 살고 있다.
----[울고 간다] - P255
그렇지, 병원 문을 밀고 나오면서 영희는 왼쪽 주먹을 말아쥐고 손목을 안쪽으로 구십 도 가까이 꺾는다. 어깨를 구부정하게 말고는 손등뼈로 가슴팍을 세 번 정도 두드린다. 정확히 십이 개월 하고도이 일 전부터 생긴 버릇이다. 병원 아래층의 보습학원에서 몰려나온 아이들이 옆 문구점으로 우르르 들어간다. 영희는 건물 입구에 서서 제자리뛰기를 두 번 정도 한다. 가슴에서 콩 굴러가는 소리가 난다. 두번째 착지를 하고 나자 그소리는 귓바퀴에 와서 멈춘다. 이 또한 일 년 하고도 이 일 전부터 들어온 소리다. - P256
"이거 ‘장‘에다 좀 넣어라."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장‘이라는 단 한 음절, 이용 받침의 울림과동시에 임모씨의 퀭한 동공이 영희의 눈에 멈추었다 거두어졌다. 순간 영희는 쇳덩어리에 깔린 것처럼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냉장의 진동음이 어마어마한 망치가 되어 영희의 뒤통수를치고 있었다. 임모씨가 떠나도 냉장고를 결코 버릴 수 없음을 알아버린 순간이었다. 명령이든 애원이든 냉장고를 버리지 말라는 말을 직접 했으면 그렇게 아찔하진 않을 것이었다. 영희는 진심으로 임모씨가 얄미웠다. 그날 이후로 영희도 임모씨도 냉장고에 관한 한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결국 임모씨는 자신처럼 생겨먹은 사람은 어떻게살아야 하는지, 자신처럼 생겨먹은 영희에게 어떤 기타정보도 남기지않고 죽었다. 영희는 국산 금잔디를 입히는 대신 임모씨의 발가락뼈하나까지 모두 불태웠다. 마트에서 은나노 밀폐용기를 산 것은 화장 ‘터에서 돌아온 다음날이었다. 그곳에 임모씨의 유골을 쏟아붓는 동안영희는 천식 환자처럼 기침을 했다. 통 위에는 임모씨가 평소 아끼던자색 보자기를 씌웠다. 영희는 그 통을 냉장고에 넣은 채 냉장고 하나만을 가지고 방을 옮겼다. - P270
며칠 더 골똘히 생각하면 냉장고를 어떻게 할지 결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외출은 못 할 것이다. 열쇠집늙은이가 정말 귀신이 되어 쏘아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면 남자한테 냉장고를 맡겨놓고 정말 먼 데로 가버릴까. 영희는 머리를 형클었다. 이런 일생일대의 결정을 해야 하는 때가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이제는 더 미룰 기한도 없었다. 이대로 한두 시간 지나가면 남자는 서서히 곤란한 표정으로 바뀔 것이다. 남자가 공구를 들고 욕실로 들어간다. 영희는 살금살금 걸어가 냉장고 전원을 연결한다. 820W/H의 소비전력이 갑자기 큰 진동음을몰고 온다. 임모씨도 철수도 진동음과 함께 영원한 시간을 얻는 순간이다. 영희는 왼쪽 주먹을 말아쥐고 손목을 구십 도로 꺾는다. 손등뼈로 냉장고 문을 두드려본 뒤 영희는 냉장고 문을 연다. 그리고 착한이불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접어 그 안으로 구깃구깃 들어간다. 대낮인데도 냉장롱 불빛은 진한 주홍빛이다.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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